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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초판이 나온 책으로 그 무렵의 영화에 대한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다. 이 분의 다른 책, 예를 들면 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인생의 역사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등을 읽어보았는데 읽을 때마다 매번 고개를 끄덕끄덕, 입이 쩍 벌어지다 읽고 나서는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뭐랄까, 표현의 정확성, 사색의 깊이, 세밀한 관찰, 섬세한 감수성등이 나를 압도해 버린달까. 그래서 책은 인덱스로 너덜너덜한데 나의 독후감은 빈약해진다.

 

 

p. 9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명칭 안에 전령사 헤르메스(Hermes)의 이름이 섞여 있는 것은 해석이라는 행위의 본질이 전달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p. 9 해석은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다. 작품을 까는것이 아니라 낳는일이다.

 

p. 20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p. 25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p. 34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을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p. 46 성장이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p. 48 소시오패스는 절대적인진단명이지만 괴물은 상대적인규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소시오패스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누군가에나 언제든지 괴물이 될 수는 있다.

 

p. 64 ‘사랑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며(나 역시 그 어리석은 사람들 중 하나다) 다만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어떤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그 내부에 있을 때가 많다.

 

p. 96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뒤에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다시 몇 겹의 막을 걷어내고 나면 애초의 물음은 사실 나는 타인이 욕망할 만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p. 107 “우울한 인물은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우울증 환자다. 세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울한 인간의 관찰에 스스로를 내맡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에 생명이 없으면 없을수록 그것을 숙고하는 정신은 더욱 강력하고 영민해진다.”(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p. 113 텍스트를 읽는 다는 것은 세 단계를 차례로 밟아가는 일이다. 그 세단계를 각각 주석’ ‘해석’ ‘배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의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하고(주석), 확인된 사실에 근거해서 텍스트의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며(해석), 이렇게 추론된 의미가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평가하면서 그 텍스트가 놓일 가장 적절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배치)

 

p. 132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유죄추정의 원칙에 몸을 싣는다.

 

p. 140 반전을 두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반전과 모든 해결을 다시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반전.

 

p. 146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을 유독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작 중요하고 본질적인 어떤 기억을 가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

 

p. 161 진정으로 윤리적인 태도는, 선의 기반이 사실상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악의 본질이 보기보다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선의 악악의 선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태도일 것이다.

 

p. 201 여기서 신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유구한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다. 존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p. 202 파이는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가 더 아름답기 때문에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체험에 대한 그와 같은  허구적 해석이 그로 하여금 남은 생을 살아가는 데 더 낫기 때문에선택한 것이다.

 

p. 218 (아무것에도 중독돼 있진 않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분명히 한 가지에는 중독돼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대체로 자기 자신에 중독돼 있기 때문이다. 살아온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에 중독돼 있는 것이니, 그는 곧 자기-중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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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의 작가와 신영복 선생님과의 인연 부분이 제일 좋았다. 신영복 선생님과 작가의 학교가 집 근처이다 보니, 그리고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근처 행사에서 뵈었던 모습이 무척 인상 깊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서 더 그런지 모르겠다. 선생님의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언제쯤 우리 정치 환경은 정권이 바뀐 후 전정권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배제하는 식의 암암리의 정치 보복이 사라지는 것으로 바뀌게 될까. K-컬쳐니 선진국이니 하지만 여전히 우리 정치는 후지다.

 

몇 년간 혼신을 다해 일을 하고 상당한 업적도 이루었지만 한순간에 쓰이지 못하고 버려지게 된 작가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절망감과 허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작가도 우리도 잘 견뎌보자. 그리고 제발 투표 좀 잘하자.

 

p. 36 친구가 되지 못하는 스승은 좋은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되지 못하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p. 41 고통이 견디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을 혼자서 짐 져야 한다는 외로움 때문입니다.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일인칭의 고독이 고통의 본질입니다. 여럿이 겪는 고통은 훨씬 가볍고, 여럿이 맞는 벌은 놀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견디는 방법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신영복, <고독한 고통>

 

p. 51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 글씨가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p. 58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다면, 조금은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자신보다 어린 사람, 예의 없고 삐딱한 사람과 함께 일하기 권한다

 

p. 67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 그냥 알게 된다

 

p. 77 내가 생각하는 순수한 분노란 일단 득실을 따지지 않는 분노여야 한다. 손해를 볼 줄 알면서도, 때로는 이익을 포기하면서도, 끓어오르는 분노가 순수한 분노다. 사람 자체에 대한 분노여서는 안 된다. 사람의 행위와 행위 뒤편에 있는 의도에 분노할 수는 있어도, 사람에 대한 연민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순수한 분노다. 분노가 증오로 확장되어서는 안 된다. 분노가 오직 분노로만 존재하고 있어 마침내 분노가 해소되었을 때, 뒤끝이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순수한 분노다.

 

 

p. 84 ‘자유란 자기만의 이유

 

p. 144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 대개의 여행자는 자연스럽게 현지인 모드로 전환된다.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이 줄고, 그다음엔 사고 싶은 것이 줄고, 마지막엔 먹고 싶은 것이 준다.

 

p. 169 여행이 좀 비일상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기를 바란다면, 뭔가 미지에 대한 기대로 시간이 채워지길 바란다면, 좀 덜 꼼꼼해질 필요가 있으며 열려있는 여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p. 178 “이렇게 건져낸 고민은 서쪽 바위에 잘 펴서 말리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민을 던져버리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고민이란 깊이 젖을수록 더 무거워집니다. 오히려 맑은 날 꺼내 잘 펴서 말려야 가벼워집니다. 던져버린 고민을 이렇게 건져내지 않으면 언젠가 큰 파도가 칠 때 고스란히 몰려들게 됩니다.”

 

p. 178 “당신은 지식과 지혜를 구분할 줄 모르는군요. 지식은 구하는 것이지만, 지혜는 발견하는 것입니다.”

 

p. 208 일상은 기록됨으로써 역사가 되고 역사는 읽힘으로써 미래가 되는 법

 

p. 240 긴 여름 내내 외롭고 그리운 날들을 보내면서 이 세상 모든 외로움의 이유가 그리움 때문이란 걸 알았다. 동시에 그리움이 외로움의 이유라는 것이 이 모든 외로움을 견디게 해준다는 것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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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뮤지컬, 오페라등의 공연예술평론가라는 나에게는 생소한 글쓰기를 하는 목정원 작가의 산문집이다. 공연을 자주 접해 보지 않아서 혹은 관심이 없어서 거의 문외한에 가까운 나는 이 책이 나와 맞을지 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연극이나 오페라를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상상 가능하게 서술하는 작가의 능력에 연신 감탄했다. 공연 평론이 아니라도 작가의 유학 시절 공부나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을 나와는 아주 다른 감성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신선하고 자극적(?)이었다.

 

시대착오적인 여성 혐오적 고전 작품(?)에 대한 생각, 장 끌로드 아저씨 에피소드, 깔끔한 조카의 사려깊은 모습에 나 자신을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이 책 자체의 독특함은 각주가 페이지 아래가 아닌 옆에 있다는 점인데, 이게 은근 보기가 편했다. 디자인적인 면에서도 더 예쁘게 느껴진다.

 

나의 관심 밖 분야의 책을 재밌게 읽어 보았다는데 뿌듯함을 느낀 독서였다.

 

 

 

p. 47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p. 54 서구에서 극장이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의 테아트론 theatron에서 찾을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테아트론은 무대가 아니라 객석을 칭하는 용어였다. 극장이란 무엇보다 보는 곳이었고, 그곳의 제1주체는 관객이었던 것이다.

 

p. 80 프랑스어로 유령은 revenant이며, 이를 직역하면 다시 돌아오는 자라는 뜻이다. 떠나간 이가 미처 영영 떠나지 못하고 또다시 돌아오는 일. 아마도 할 말이 남아 있어서.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어서. 그 죽음이 개운한 안녕일 수 없어서. 납득하고 단념할 수가 없어서. 아파서. 아픔이 말이 되지 않아서. 산 자만이 그 말을 해줄 수 있어서.

 

p. 87 이 시대에 여전히 <돈 지오반니>를 공연하기 위해서는, 더불어 수많은 여성 혐오적 고전들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거리가, 시선이 필요하다. 남성 인물이 누리는 자유에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 자신조차 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하다. 관객에게 사유와 비판을 가능케 하는, 여러 겹의 진실이 필요하다. 그 틈새 속에 누구든 은신하여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 섬세한 깊이가 필요하다.


p. 102 신기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래, 비극이란 관객보다 고귀한 인물의 고통을, 희극이란 그보다 저급한 인물의 고통을 다루는 것으로 규정된다. 모두 고통인 것은 매한가지이나 인물에 대한 나의 거리가 다른 것이다.

 

p. 139 상징이란 말은 본디 둘로 쪼개어져 제 짝을 찾아야 하는 도자기 조각을 의미한다. 상징주의에 따르면 세계는 해독해야 할 신비로 가득 차 있다. 한 조각을 보면 그 배후에 또 다른 조각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리하여 영영 짝을 찾지 못할 거울을 들고 떠도는 것이 인간의 삶.

 

p. 181 모든 것을 알아도 생을 사는 이유는 살아야지만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야지만 당신을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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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에 출간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이 책을 받아 든 생각은 볼 가치가 있을까,였다. 그러나 기우였다. 책에 대한 얘기지만 책 내용 소개 보다는 책에서 촉발된 인상이나 생각들을 풀어 놓는 것이 주가 되는 책이어서 정희진이라는 작가를 처음 대한 나에게는 그 작가의 솔직한 모습과 생각들을 알게 해준 귀한 책이었다. 바로 그의 신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주문했다.

 

여기에 소개된 책들은 대부분이 안 읽어본 책들이었지만 책에 대한 생각이 주가 아니라 젠더, 권력, 정치등에 대해 나에게는 독특한 관점을 보여주는 내용이 많아 눈을 반짝거리며 읽게 되었다. 특히, 군 징병제와 지원병제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한 측면을 짚어주었다. 지원병제를 찬성하던 나는 지원병제가 군대 관련 문제를 특수한 집단만의 문제로 축소, 은폐되기 쉬우며 계급화를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도 군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가 조직 특유의 폐쇄성으로 은폐되기 쉬운데 지원병제로 바뀌면 대다수 국민의 관심을 받기에는 더욱 힘들어질 터이다.

 

정희진씨는 여성의 군 복무 의무에 대한 논의는 거론하길 피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이 문제도 남녀 사이의 꽤 첨예한 문제라 그의 입장을 듣고 싶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질문을 많이 해 보려고 노력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많은 질문이 눈에 들어왔다. 답 비슷한 것보다는 너무나 많은 질문이 쏟아지다 보니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생각도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질문은 좋은 것이다. 아니, 좋은 질문이 좋은 것이다. 좋은 질문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고민과 성찰과 관찰등 많은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책을 읽으면서까지 그래야 하느냐라는 반문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독서 이유 중 가장 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정희진씨는 잘 맞는 것 같다. 그의 다른 책을 열심히 읽어보련다.


p. 12 위로는 깨달음에서 온다. 이 위로가 몸에 습관이 되어 독서의 즐거움에 중독되면 다른 일에는 흥미가 떨어진다.

 

p. 19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의 내가 있고, 통과한 후의 내가 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해 독후의 감이다.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전이다.

 

p. 25 인간관계에서 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은 분명하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

 

p. 64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한수산의 평 그를 읽는다는 것은 젊은 날의 상처다. 그러므로 상처가 나을 때 독자는 그를 떠난다. 다자이는 홀로 거기 있다. 어린이가 자라서 또 다른 젊은이가 다자이를 만나고 .다만, 나는 안다. 그는 자신의 초기 작품에서 더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나아가지 못한 작가라는 것을.”

 

p. 70 누구의 인생도 피해 경험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동시에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나 지칭이 될 수 없다. 타자화는 나를 기준으로 타인을 정의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이다.

 

p. 82 안락사를 생명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생명을 무시하는 태도다. 문제의 본질은 생명이 아니라 고통이다.

 

p. 101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 ?” 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 됨의 진정한 의미, 불행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당하는 것을 넘어 사로잡히는 것이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싸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p. 113 인간이 평생 동안 가장 많이 생각하는 주제는 자기 합리화라고 한다. 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지나치면 문제겠지만 인간의 중요한 생존 기제다. 동시에 인생고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p. 119 말을 섞는 것은 살을 섞는 것보다 훨씬 육체적인 행위다. 대화는 상대의 몸에 삼투압을 일으키고 화학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몸의 변용이 인생이고, 삶이 고해인 이유다.

 

p. 122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 개념은 근대화 시각에서 발전주의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 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북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가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p. 126 싸우지 않고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로 당연하게 설정하고 있던 전선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기존의 사고방식, 싸움 주체를 생소한 것으로 만들어 적을 인식 분열 상태로 만든다.

 

p. 151 박정희 체제의 공과를 논할 때 공은 경제 성장, 과는 인권 탄압이라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고문은 정권의 흠이 아니다. 통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p. 157 글자들의 관계, 즉 문장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뜻이 있는 글자가 아니라 뜻이 없는 글자, 조사다. 무의미는 모든 의미다. 뜻의 무게를 진 자()는 사용이 한정되지만, 조사는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문자를 배치하고 지배한다. 의미(권력) 없음이 의미를 통제하는 것이다.

 

p. 160 사람들이 폭력을 선택하는 이유는 저항과 자유를 포함한 무질서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비인간적 규정, 억압적 관료주의, 무신경, 군기, 일벌백계는 무질서에 대한 매력적인 대응책들이다.

 

p. 176 한 사회의 문명화 여부는 무조건적인 발전이 아니라 그 사회의 필요를 얼마나 만족시켰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 177 민족이 성찰과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피해의 기억으로만 한정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누가 이득을 볼까. 나는 한국이 일본에게 좀 무관심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가해자는 뻔뻔한데 한쪽의 지나친 피해의식은 좌절, 절망, 원한을 순환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추락하기 쉽다.

 

p. 185 지원병 제도는 전쟁과 군대로 인한 제반 논의가 특정 소수 집단의 문제로 축소되는 체제다. 이에 반해 보편적 의무로 운영되는 징병제는 어쩔 수 없이 전 사회적인 관심사가 된다. ...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일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 좋다는 역설이다.

 

p. 188 평화에 대한 욕망은 반()평화적이다. 평화를 둘러싼 경합이 평화다. ‘모든 이()가 사이좋은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불가능한 상태를 약자가 인내함으로써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평화다. 강자의 양보로 평화가 실현된 경우는 없다. 양보했더라도 그것은 정의이지, 관용이나 배려가 아니다.

 

p. 199 자신을 지배하는 정열이 사라질 때, 스스로에게 질문이 없을 때, ‘나는 정상이라고 믿을 때, ‘지당하신 말씀’, ‘쉽게 읽히는’, ‘대중성있는 글이 생산된다.

 

p. 210 사상은 과학이든 이데올로기든 조류(潮流)가 아니라 현실의 필요와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사상의 발생은 연대기일 수 있지만 어떤 사유도 그 자체로는 시대착오거나 시기상조일 수 없다. 어떤 지역에서 한물간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겐 절실할 수 있고 가장 올바른 길일 수 있다. 사상은 보편성이 아니라 공간적(local) 맥락에서 논해져야 한다.

 

p. 215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p. 217 ()을 구획하는 것은 자연도 신도 아닌, 사소하고 우연한 권력들이다. 이 권력을 가시화해야 한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포함되길 거부하라

 

p. 220 “혁명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p.229 은유는 상상력과 새로움의 원천이다. 은유하는 능력은 이미 재현된 현실과 다른 차원의 시각과 감수성을 요구한다. 인간의 매력은 말과 글을 따른다.

 

p. 239 포스트는 실제 이후가 아니라 인식 이후를 말한다. 포스트모던은 기존 역사를 혼란시키기 위한 것으로 모던과 갈등을 일으키는 모든 개념을 말한다.

 

p. 260 생로병사가 사실이고 무병장수는 희망, 아니 탐욕이다. 꿰맨 자리는 아물기도 하고 터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생명은 미봉의 점철. 그러므로 미봉책은 임시방편이 아니라 영원한 방도다.

 

p. 265 가진 자의 분노는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배려받지만 약자의 분노는 폭력 취급하는, 약자는 우아하고 세련된 시민일 수 없게 만드는 이 시스템!

 

p. 270 질병으니 삶의 부작용이 아니라 본질이다. 의료는 복지 이슈가 아니다. 쌀 수급을 복지 정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질병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용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다.

 

p. 289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 무엇인가를 추구했다는 것, 나만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 등오로 다양할 것이다.

 

p. 296 경제적 합리성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자 빈부, 실력, 기회의 양극화보다 더 근본적인 의지의 양극화가 생겨났다. 근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하면 된다는 의지적 인간의 탄생이었다. 작금의 자본주의는 의지의 소유조차 극소수로 제한된다. ‘나머지들은 자기 계발의 늪에 빠지고 좀 더 지혜로운 이들은 포기를 선택한다.

 

p. 306 어느 출판사의 사훈은 책 때문에 망가지는 나무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독자는 지구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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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리 삶에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게 영향을 미치며 밀착되어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막상 실생활에서 정치는 저기 용산과 여의도 그리고 화면 너머의 그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허구의 막장 드라마 같다. 적어도 나 한테는...

 

정치에 드리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보면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너무 속상하다. 언제쯤, 얼마나 우리의 민주주의가 성숙해지면 정치에 대한 이미지가 좋고 나쁨이 아닌 그냥 정치=삶이라는 공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쉽고도 재밌게 정치에 대한 나를 포함한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오해를 교정하는데 꽤 도움이 된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깊이를 유지하는 능력은 작가의 내공 덕분일터이다. 현실 정치에 실망하고 한숨 나올 때,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용론이 슬슬 올라올 때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를 정치화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p. 10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쳐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p. 13 어떤 사람은 정치의 세계가 협잡과 음모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거의 유혹을 떨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들의 인생이나 정치는 그러한 자각이 없는 인생이나 정치와는 다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사는 인생이나 마냥 권력을 쥐려는 정치가 아니라 반성된 삶과 숙고된 정치다.

 

p. 18 사람들이 착하니까 어떻게든 될 거라고? 그렇다면 거기에 정치는 없다. 가짜를 좋아할 수는 있어도 가짜를 진짜로 속이지 않는 게 상도덕이다. 추남을 좋아할 수는 있어도 추남을 미남이라고 우기지 않는 것이 연애의 도덕이다. 인간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다 착하다고 우기지 않는 것이 정치의 도덕이다. 인간이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정치가 있다.

 

p. 20 리더가 청렴하기만 하면 된다고? 유능한 사람은 위험하니 청렴한 무능력자를 리더로 뽑겠다고? 그렇다면 거기에 정치는 없다. 위기가 닥치면 부패만큼 무능도 싫어하는 것이 인간이다. 위기를 상상하고 대처하는 데 정치가 있다.

 

p. 35 정치학 용어로서 자연 상태는 시골이나 전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질서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원초적 상태를 말한다.

 

p. 50 미성숙한 인간들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성숙과 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어느덧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버리고 현자의 인자한 독재에 기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권력의 전횡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p. 52 모든 권력을 싫어한다는 말은 모든 욕망을 무시한다는 말이며, 모든 욕망을 무시한다는 것은 삶을 혐오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권력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여러 일을 가능하게 한다.

 

p. 57 권력을 권력의 칼집에 넣어둘 수 있는 역량이 권위를 낳는다. 권력자가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권위를 선물로 받는다. 권위는 권력의 가장 말랑말랑한 형태다. 권위는 권력자가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순간 발생한다.

 

p. 59 하드 파워는 강제적인 수단을 통해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치는 역량이고, 소프트 파워는 비강제적인 수단을 통해 상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역량이다.

 

p. 77 현대의 대의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주권이라는 허구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허구가 필요하다. 성욕을 매개로 번식을 거듭하던 존재가 기어이 사랑이라는 픽션을 만들어냈듯이, 비루함으로 가득 찬 세속에서 기어이 신성(神性)을 발명해냈듯이, 허구는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하다.

 

p. 96 유르착은 일체의 권력화를 거부하면서 희망 없이 지속하는 태도를 내부로부터 탈영토화시키는정치적 전략이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거리의 정치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미시적인 탈권력화가 이루어져야 근본적인 변화가 비로소 시작된다.

 

p. 116 사람들이 재현을 통해 원하는 것이 진실보다는 자기 욕망의 실현이라면 이미지를 볼 때 상상해야 할 것은 재현 대상이 된 원본이 아니라 그 재현물에 묻은 욕망이다. 원본은 여기 없다.

 

p. 123 몰입하지 않는 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그는 상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소외된다. 모두 기뻐 날뛸 때 뒤로 물러나 그 장면을 찍어야 하는 촬영기사처럼, 그는 상황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p. 155 일상적으로 무엇을 마주하게 되느냐가 그 사람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겁니다.

 

p. 175 갱스터 영화는, 왜 사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열심히 사는 게 인생 아니냐며 미친 듯이 살다가 병든 육신을 갖게 된 이들이 보기에 좋은 영화다.

 

p. 206 인간은 평소에 충분히 깨어 있는 상태로 살지 않는다. 예술의 힘을 빌려 비로소 깨어난다. 예술을 인지할 때 비로소 활성화된다. 예술이라는 형식을 입고 사물은 자아에 영향을 미치고 침범한다. 바로 그 순간 인간은 물건 이상의 것, 즉 활성화되고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가 된다.

 

p. 270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소극적으로 사귀었고 말없이 헤어졌지만, 나는 이것이 우정이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p. 278 아름다운 정치가 무엇인지 아무도 확고하게 말할 수 없을 때 정치인들이 일단 의지해볼 수 있는 것은 심미적인 과정이다. 품위를 갖춘 스타일과 행동과 발화의 누적을 통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것이 더럽지 않은 정치라고 보는 것이다.

 

p. 298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서 이 아름다운 행성에 살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특권이며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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