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에게 유년은 어쩌면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는 것 같다. 너무나 미약하여 세상의 전부이자 의지처인 유년시절의 가정은 한 사람의 인생 전반에 너무나 커다란 흔적을 남기지만 그 중요성을 인지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실제로는 이상적인 유년시절을 제공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유년이 마냥 행복한 순간이었던 사람이 있을까? 인생 자체가 고난의 연속인데, 자신의 의지가 아닌 100% 타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유년시절은 인생 전체에서 가장 불완전하고 깨지기 쉬운 시기일 것이다.
유년의 행복감, 트라우마, 슬픔등을 잘 다독여 한 생을 살아 나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여름이의 유년은 엄마의 부재와 있으나 마나 한 어린 아빠, 엄마를 대신했던 할머니와 고모, 아빠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인 어린 새엄마, 친구이지만 친구임을 알릴 수 없었던 루비, 그리고 무한한 사랑의 대상 학자로 이루어진다.
시인이 풀어내는 소설은 문장이 모두 시이다. 시인 특유의 깊은 감수성으로 풀어내는 서사와 서정은 독자를 몇십년 전의 각자의 유년으로 돌려놓는다. 그 속에서 여름이와 같이 울고, 화내고, 삐치고, 웃는다. 저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이 표면으로 올라와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내 유년시절의 상처가 치료되는 듯하다.
작가의 말대로 유년은 ‘시절’이 아니다. 유년시절의 나를 극복했다고 생각했다가도 문득문득 그때가 생각나면 아득해진다. 죽을 때까지 잘 보듬고 다독이며 살아야 하는 내 안의 어린아이이다. 이런 좋은 소설들을 또다시 만나면 그 어린아이는 행복하리다.
p. 12 나는 누군가에 의해 자주 들어올려지고, 불려다녔다. 얼굴이 다 닳은 이파리처럼, 일찍이 시들어 있었다.
p. 29 나는 시든 화초처럼 의기소침해져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책을 들고, 공책을 들고, 연필 한 자루를 들고 응달로 들어간다. 쪼그려 앉아 부업을 하는 사람처럼, 그 짓을 해야 한다.
p. 37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땐 눕는다. 누우면 눈물이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눈물은 기어코 흘러나와 귓속으로 들어간다. 눈과 귀는 이어져 있다. 눈이 내미는 것을 귀가 받고, 귀가 받아들이는 것을 눈이 밀어낸다.
p. 39 기도의 본질은 약한 척이다. 약함을 인정하는 일, 당신이 나를 돌본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서약도 포함된다.
p. 63 방 한가운데 불시착한 분홍 뗏목처럼 침대가 놓여 있었다.
p. 69 우리에겐 아빠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더하거나 빼기가 쉬웠다. 통분이 필요 없는 관계랄까. 더하기 빼기를 결정하는 건 언제나 아빠였는데, 내 생각에 아빠의 몸은 새엄마에게 더해지고 마음은 주로 내게 더해졌던 것 같다.
p. 80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時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건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p. 93 할머니는 변하지 않는 사람, 정확히 말하면 거칠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거칠어지지 않는 사람을 이길 자는 없다.
p. 94 무언가를 들키는 순간 어른들은 쉽게 무너진다. 화를 내거나 고개를 파묻고 싶어 하고, 어느 때는 울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어른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들을 돌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르는 척하기뿐이었다.
p. 111 새엄마는 무감했고, 무감하다는 건 곧 무력하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p. 127 세면대에서 피 묻은 속옷을 빨고 있으니 실패한 살인자가 된 기분이었다. 일부러 생리와 살인을 연상해본 건 아니었다. 찬물로 피를 빼내는 동안 세면대 위로 피가 튀고, 피 특유의 쇠 냄새가 나고, 두 손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기어이 피를 없애는 데 성공하는, 이 일련의 과정으로 한 생각이었다. 소량의 죄의식, 수치심, 흥분, 두려움, 살기, 지겨움, 피 묻은 속옷을 빨 때마다 이 복잡한 감정들이 ‘동일하게’ 도착했다. 초경 이후로 내내, 빠짐없이 그랬다. 세면대 앞에서 실패를 지우는 실패의 기록.
p.138 겁이 많은 사람이 대부분 나쁜 건 아니지만 나쁜 사람들은 대부분 겁이 많다. 그들의 나쁨을 파헤쳐보면, 그러니까 그 끝의 끝까지 추적해보면 결국 겁이 나타난다. 돈 때문에 나빠진 사람은 가난을 겁내고, 사랑 때문에 나빠진 사람은 가난을 겁내고, 권력을 손에 쥐고 나빠진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걸 겁낸다.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다 나빠진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신도 미움을 당할까봐 겁낸다.
p. 149 책은 이 집에서 가면이었다. 들고 있으면 본질을 숨기고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다.
p. 160 허영의 뒷모습은 외로움이다.
p. 165 누가 행복을 말할 땐, 알아달라는 거니까요. 그 밖에 다른 게 뭐가 있겠어요? 누가 행복을 말할 때 제일 바보 같은 짓은 나도 행복하다며, 제 행복을 들이미는 겁니다. 그러면 행복을 논하는 걸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겠어요?
p. 208 죽음은 억울하게 들이닥친다. 그게 금붕어일지라도 쉬운 죽음은 없다. 쉬운 건 언제나 모르는 자, 모르고 싶은 자, 몰라도 상관없는 자들이다.
p. 261 어릴 때는 세상이 한 장의 돗자리같이 보였다. 작은 바람에도 내가 앉은 자리가 날아갈 것 같았다. 신발을 고쳐 신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세상이 묵직한 돌로 눌러놓은 마음 한 장 같다. 겨우 돌이지만, 돌에게 의지해 살아가야 할지 않을까.
p. 262 ‘유년’이라는, 벗을 수 없는 옷을 입은 채 커버린 사람곁에 서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