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구로 책축제에 참가한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추천한 이주하는 인류트러스트중 이 책을 11월 삼목회 토론 도서로 정해 읽었다. ‘채권파트의 첫 부분이 주식을 포함한 금융과 한 가문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여서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스타일이 익숙해지다보니 의외로 재미있고 빠르게 읽혔다. 아마 강릉 방문 3일간 다 읽은 것 같다

 

라쇼몽식으로 서술된 책이라는 소개를 봐서 참신한 구성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는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소설, 회고록 초안, 회고록 집필과정, 일기라는 네 가지 형식으로 앤드루 베벨과 밀드레드 베벨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다르게 그리고 있는지가 이 책의 재미 포인트라고 하는데 글쎄 잘 모르겠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자본과 투기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본과 투기의 규모가 커질수록 자본가는 자본이 영향을 미치는 관계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자본 스스로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확대, 재생산해 간다는 것이다. 자본의 확대, 재생산에 대한 것은 들어봤지만 자본가가 그가(혹은 그가 가진 자본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물과 인간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이야기는 섬뜩했다.

 

또한 앤드루 베벨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의 송중기와 그 가족들이 대표하는 재벌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그들이 투자를 하고 돈을 버는 이유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무엇을 사고 싶다거나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동기에서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미 부족한 것이 없으므로) 그냥 돈을 벌 수가 있으니까, 자신이 얼마나 벌 수 있는지 궁금하니까, 혹은 그냥 게임 같은 것의 다름 아닌 듯 했다. 재벌이 아닌 나는 그들이 참 신기했다.

 

p. 23 벤저민은 돈의 뒤틀림에 매료됐다 돈을 뒤틀면, 돈이 자기 꼬리를 억지로 먹도록 만들 수 있었다. 투기의 고립되고도 자족적인 성질은 그의 성격과 잘 맞았고, 경이감의 원천이자 그 자체로 목표였다. 벌어들인 돈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또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사치란 천박한 부담이었다.

 

p. 24 투기의 규모가 커질수록 벤저민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과 멀어졌다. 그는 단 한 장의 지폐도 만질 필요가 없었으며, 자신의 거래로 영향을 받는 사물이나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생각하고 말하는 것, 그리고 어쩌면 글을 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자본이라는 살아 있는 생물이 움직이기 시작해 아름다운 패턴을 그리며 점점 더 추상적인 영역으로 들어갔다.

 

p. 23 알기 쉬운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거기에 맞는 적절한 말을 골라야 한다. 시간도 들고 품도 든다. 얼마간의 재능도 필요하다. 적당한 곳에서 그만 됐어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다.

 

p. 201 모든 인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삐걱거리다 멈추게 하는 소수의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된다. 다음번의 강력한 순간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런 사건들의 결과로 혜택을 보거나 괴로워하며 그 사건들 사이의 세월을 보낸다. 한 사람의 가치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처럼 결정적인 상황의 수에 따라 정해진다. 늘 성공을 거둘 필요는 없다. 패배에도 위대한 영광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서사시든 비극이든 결정적인 장면의 주연이어야 한다.

 

p. 267 권력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주위가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권위와 돈은 침묵으로 스스로를 둘러싸고, 사람은 누군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그들을 둘러싼 침묵의 두께로 측정할 수 있다.

 

 

p. 305 “내 일은 정답을 맞히는 거야. 언제나. 조금이라도 틀리면, 나는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해서 내 실수가 더이상 실수가 아니게 되도록 하네. 현실을 조정해서 내 실수에 맞도록 구부리지.“

 

p. 386 너무도 호화롭게 느껴진 것은 공적인 장소에서 이토록 사적으로 존재한다는 기이한 역설이었다 이런 느낌은 갑자기 손댈 수 없고 약점도 없는 존재가 된 듯한 환상, 혹은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이 도시 전체를 완전히 통제한다는 공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p. 432 키치. 이 단어의 적절한 영어 번역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원본과 가깝다는 걸 너무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나머지 그런 유사성에 창의성 자체보다 큰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본.

 

p. 483 대단히 유창한 언변과 시끄러운 확성기를 가진 사람이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나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의 상상력에 맡겨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삶의 어느 한 부분은 확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중략).. 인간은 죽으면서 공동체의 소유물이 된다. 그렇기에 그 사람의 삶에 관한 텍스트는 그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그 텍스트를 만들고 향유한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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