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그리다, 빠지다, 담다 - 마음 가는 대로 눈길 가는 대로 뉴욕아트에세이
박아람 글.사진 / 무한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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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다채로운 이미지들...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뉴욕에 있는 29곳의 미술관에 대해 발랄하게 소개해주고 있다. 현대미술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뉴욕이니만큼 MoMA, 구겐하임, 휘트니, 메트로 폴리탄 등 몇몇 개의 미술관은 낯익은 이름이지만, 중국 미술관, 엘드릿지 스트릿 미술관, 티베트 하우스, 추빈 미술관 등 생소한 미술관들도 많아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미술관들에 대한 소개글과 함께 나오는 틀에 갖히지 않은 자유로운 사진들이다. 미술관과 사랑에 빠져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한 저자답게, 미술관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다양한 구도의 사진들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미술관 외관 풍경, 미술관 내부의 이모저모,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모습, 미술관 스토어와 미술관 카페, 거리 풍경까지... 틀에 박힌 느낌의 사진이 아니라 정말 뉴욕 미술관 여행을 즐기는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미술을 향유하는 것이 특별한 행사가 아닌 살아숨쉬는 일상이 되게 해주는 도심 곳곳의 미술관들. 각자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품고 있는 다채로운 미술관들의 향연... 이 엄청난 문화적 풍요로움이 뉴요커들을 전 세계에서 자신들의 거주지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이들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부러워라, 크흑).

몇 년 전 뉴욕을 갈 기회가 있었지만, 빡빡한 일정에 나 혼자 간 것도 아니라 미술관들을 제대로 둘러보기는커녕 수박 겉 핥기로 후루룩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 책을 보고나니 더 아쉽기만 하다. 다음에 뉴욕을 만나게 될 날을 행복하게 꿈꾸어 본다. 혼자서 자유롭게, 미술작품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면서 여유롭게 스물 아홉 곳의 미술관들을 거닐고 싶다.

 

참, 부록 '뉴욕미술관 입문하기'가 부록으로만 취급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알차다. 미술관에 대한 책은 여러 권 접했지만, 이런 정보는 역시 뉴욕현대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인턴을 하고 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한 현장 경험이 녹아있어서 신선하고 실용적으로 느껴진다. 영문 레쥬메와 에세이 쓰기, 추천서 받기와 영어 인터뷰까지,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루브르에서 전기 충격(?)을 받고 시작한 미술과의 인연과 새로운 분야에서의 열정어린 공부, 그리고 인턴으로 시작한 미술관과의 새로운 인연... 저자가 숫기가 별로 없는 보통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공감을 느끼며 읽었다. 그러나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인턴시절 일이 많아서 퇴근시간을 넘겨 업무를 하고 있을 때, 'I get paid'라며 미안해하는 매니저에게 'I get experienced'라고 말해 줄 수 있는 빛나는 내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뭔가 대가를 받지 않고도 내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며, '나는 경험을 받고 있잖아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을 나는 갖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 열정에 감염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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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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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석 자만으로 덮어놓고 그 저자의 책을 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내게는 석영중 교수의 러시아 시리즈(?)들도 그러하다.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와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를 읽고 빠져들고 난 이후부터 그가 번역한 책들도 야금야금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지금도 러시아문학 탐험은 행복하게 진행 중이다. 10대 때 겁없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를 읽다가 절망한 이후, 러시아 문학과는 별로 가까이 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내가 지금 이렇게 마야꼬프스끼, 푸슈킨, 도스토예프스키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분 덕이니... 이래저래 퍽 고마운 일이다.

 

이번 책에서는 흥미롭게도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이 음식을 어떤 의미와 상징으로 그들의 작품 속에 담아 냈는가를 세세하게 분석한다. 러시아 문학과 음식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성찬같았던 시간이었다. 배부르게 잘 먹었는데, 뭐랄까 뒤죽박죽 정리가 안 되어서...^^;; 그냥 생각나는 메뉴들과 감상들을 읊어보련다.

 

1.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 : 곤차로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덜 알려진 인물이지만 러시아 문학사에서는 위대한 리얼리즘 작가로 존경받고 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인 <오블로모프>는 러시아 요리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온갖 요리들로 가득 차 있어 외국인 독자가 그것을 제대로 읽으려면 별도의 요리 사전이 필요할 정도다'(88~89쪽), '페이지마다 언급되는 온갖 맛있는 러시아와 서구의 요리들은 꾸준히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91쪽)라니 오옷! 도대체 어떤 작품일까(배고플 때 읽어서는 안 될 책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세기 중엽 농노제도하의 러시아에 살았던 한 선량하고 무기력한 지식인'이라고만 정의 내리기에는 주인공 오블로모프는 무척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인물인 것 같다. 석영중 교수는 섬세하게 <오블로모프>의 이야기 구조와 등장 인물들의 면면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여러 문학평론가들이 나름대로 내린 해석들까지 덧붙여 읽고나니 두둑하다.

 

2. 이 책 덕분에 풀린 의문 하나 :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왜 그렇게 음식에 대해 부정적인 코드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어려서부터 먹는 것을 좋아했던 불가코프가 혁명 후의 가혹한 러시아 현실 때문에 거의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린 배를 움쳐쥔 생활을 해야 했던 점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3.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 대한 이야기에는 '시인을 위한 가정식 백반'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는데 무척 공감되는 분석이었다. 지바고가 벽난로에 장작을 때고 무거운 가구를 옮기고, 라라가 소박한 식사를 마련하는 대목을 풀이(?)해주는 이야기들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책을 읽다가, 지바고가 시 쓰기에 몰두하게 만들어 준 그 식탁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죽음의 사자와 늑대의 울음소리도 그의 지복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는 현실도 잊고 자아도 잊고 시간도 잊어버린다(306쪽)'를 가능하게 해 주었던 평범한 러시아 가정의 식탁을 상상하면서, 나도 덩달아 잠시 시간을 잊었다.

 

4. 이 책 덕분에 다시 읽어본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원래 좋아하던 작품이었는데 이 책의 해설 덕분에 더욱 좋아지게 되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위대한 식사를 통해 솔제니친은 그 어떤 제도도, 그 어떤 이념도, 그 어떤 상황도 인간을 완전한 짐승으로 전락시킬 수 없다는'(365쪽) 믿음을 전달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산다는 것, 인간이기에 끝내 지켜야 할 무언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본다.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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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쇼핑이 세상을 바꾼다 - 사람을 살리는 협동조합기업의 힘 이슈북 7
신성식.차형석 지음 / 알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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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참 좋다>는 책을 재미있게 꼭꼭 소화시키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어, 같은 저자의 책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펴 들었다. 협동조합이란 개념이 생소했던 나에게 '이런 것이 협동조합이야'하고, 현장을 직접 취재하고 인터뷰한 사진과 대화를 통해 조곤조곤 친절하게 알려주었던 책이 <협동조합, 참 좋다>였다.

이 책 <당신의 쇼핑이 세상을 바꾼다>도 인터뷰집의 형식인데,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생협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생협 1세대'인 아이쿱 생협 신성식 대표와의 집중 탐구시간이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는 아이쿱생협의 출발부터 지금까지를 들여다보면서, 현장의 이야기와 현장에서 건져올린 배움을 얻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단 시집 두께만한 얇은 책이라 꽤 호흡이 빠르다. 협동조합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부터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간다. 협동조합의 가치와 장점에 대해 감을 좀 잡아놓은 상태에서(이를테면<협동조합, 참 좋다>같은 친절한 기본서를 먼저 읽고나서^^) 이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

 

책에 나오는, '윤리적 소비가 윤리적 생산을 좌우한다'는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매일 먹는 음식과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물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에게 왔는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야지, 하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리저리 바쁜 일상에 치이다보면 또 어느순간 해이해져 버리기도 한다. 그냥 마음 가는대로, 내키는 대로 지갑을 열고 만족하는 순간들이 (부끄럽게도) 적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런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을 버리고 '나 하나부터'하는 생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런 귀한 생각과 행동들이 모여서 '다른 선택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사회를 좀더 따뜻하게 바꾸려면 결국 소비자들이 올바른 소비를 하고 행동에 나서는 게 필요해요. 소비가 생산을 결정합니다. 소비자의 선택이 어떤 생산을 하게 하는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치적 선택만큼이나 쇼핑이 중요한 시대가 됐습니다.(117쪽)' 그래서 '쇼핑이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소비도 윤리적으로, 생산도 윤리적으로... 승자독식이 아니라 함께 협력하며 상생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인터뷰이 신성식 대표는 생협의 불모지와 다름없는 이 사회에서 그동안 적지않은 성과를 내 왔으면서도, 현실적인 시선을 놓지 않는다. 분명 '사회적 필요는 커졌지만 그럼에도 협동조합 생태계가 단기간에 발전할 가능성은 아직 높지 않다'(110쪽)고 말하며,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때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거대한 자본을 거느린 기업들의 독과점, 날이 갈수록 더욱 치열해지는 그들과의 경쟁 속에서 건강한 협동조합 생태계를 일구어간다는 것은 처음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마치 거대한 거인에게 돌팔매질로 맞서기로 한 작은 소년처럼 말이다. 한국은 너무나 빠르게 대기업 중심의 자본주의라는 구조를 만들어냈고, '느리게 가도라도 함께 나아가는' 시스템이 자리잡기에 모든 토양은 너무나 척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현실에 발을 굳게 디디면서도 함께 나아가는 것을 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협동조합 생태계가 우리 사회에 건강하고 튼튼한 뿌리를 내릴 미래를 벅찬 마음으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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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 - 골동품이 내게로 와 명품이 되었다
이정란 지음, 김연수 사진 / 에르디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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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앞에 놓인 임무는 그 문을 통해 보이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 가능성을 일상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 레베카 솔닛

 

 책을 읽다보니 외가에서 보냈던 어린시절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올라 나도 모르게 울컥해졌다. 낡은 친정집을 허물면서 사라져가는 옛날 물건들이 내심 안타까웠던 이 책의 저자는 하나 둘씩 그 물건들을 집으로 가져와서 그네들과 '속닥속닥'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었건만, 내 기억속의 그 사랑스럽던 물건들은 자기들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이 없이 이미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지가 오래다. 마음이 아프다. 외할머니가 애지중지 하셨던 받닫이, 그 굽이굽이 충실했던 쇠장식이 기억나고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모시 적삼을 짓고 계셨던 모습도 눈에 이렇게 어른어른한데...

 

 세상은 너무나 새로운 것, 신기한 것들로 넘쳐나고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된 물건들로 우리 주변을 채우라는 유혹이 도처에 가득하다. 조금만 유행에 뒤떨어져도 남의 눈치를 보고 금방 버리고, 그 자리를 새 물건으로 대체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사는 것이 아닐까. 정성을 다해 만들어지고 귀하게 오래오래 쓰이면서 시간을 품었던 옛 물건들과 그 속에 담긴 주렁주렁 이야기 보따리들... 그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참 풍성하고 따뜻했다.

 

 처음에는 그저 아까움과 안타까움에 옛 물건들을 집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는 저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옛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고 나 역시 천연덕스럽게 그 물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7쪽)을 깨달았다고 한다. 뒤이어 이어지는 소박한 고백이 정겹다. '나는 점점 낡은 것에서 오는 익숙함과 편안함에 매료되고 있었다'(같은 쪽).

 그렇다. 옛 물건들이 우리의 일상과 저만치 동떨어진 채 지나간 시절의 유물로만 자리잡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낡고 오래된 물건들 속에 담긴 조상의 지혜와 친환경적인 삶의 자세를 배우고, 그 물건들과 울고 웃었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오늘날의 생활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고 또 때론 새로운 용도를 발견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 물건들은 생명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리라.

 이 책에서 돋보이는 부분도 그런 실용성을 강조하는 점이다. 골동품이라고 집 한 구석에 먼지만 쌓이게 두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두루두루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고 쓰임새와 관리 요령 등을 친절히 알려준다. 소반, 바가지, 약탕기, 수세미, 번철, 옻칠목기와 보자기 등... 오히려 화학성분이 들어간 현대적인 제품들보다 더 안전하고 믿음직하고 쓰임새가 다양해서 새삼스럽게 조상들의 지혜에 놀라게 된다. 옹기에 숯을 담아 전자파 차단용으로 사용하는 법, 아쿠아 슈즈 대신 고무신을 신어보니 좋은 점, 무쇠로 된 번철을 길들이는 법 등 저자가 생활에서 건져올린 팁도 쏠쏠하다.

 

 책을 덮고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장롱을 오래오래 뒤지다가 외할머니가 어렸을 적 자투리 천을 누벼 만들어주셨던 조각보를 찾아냈다. 보물을 건져낸 기분에 얼른 차 마시는 탁자에 걸쳐두니, 오래되어 색은 바랬지만 은은한 맛이 봄과 어울려서 멋스럽다. 외할머니께서 재봉틀 앞에 앉아 뭔가를 늘 만들고 계셨던 모습을 떠올린다. 시골 외가가 허물어지고 그 곳을 채웠던 추억의 물건들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 옛 물건들의 가치를 헤아리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키워가고 싶다. 이 따뜻한 책 덕분에 어린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어 행복했고, 옛 물건들을 대하는 내 눈이 열린 것 같아 고맙다. 그리고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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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인생충전기
안은영 지음 / 해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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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치적인 내 위치, 내가 일궈온 관계의 텃밭에서 정작 나의 존재감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 타인이 인식하고 있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든 생각은 역시 '무얼 할 것인가(To do)'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To be)'다(43쪽).

 

어떻게 살 것인가. 녹록치 않은 삶에 치이고 지칠 때, 우리는 책장을 펼치며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읽고 위안이 되었다는 책이 나에게도 의미가 있는 책이라면, 반가움과 공감이 차오른다. 그 누군가와는 어쩐지 마음을 터놓고 한참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 책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서른 다섯 권의 책들이 내게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따뜻하고 든든하다.

 

그녀가 소중하게 읽었던 책에 그녀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겹쳐진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의 구절들을 읽어주며 마음의 근력을 키우고 내공을 기르라고 이야기하고, 백석의 시를 읊어주면서 감사와 기쁨은 헤플수록 좋다는 것과 내 울음을 들어줄 사람과 함께 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때로는 깊은 산속으로 떠나는 시마무라처럼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자기 속의 아우성에도 귀를 기울여 보라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슬며시 내밀어 주기도 한다. 살면서 최대한의 '첫'을 경험하라는, 듣기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조언을 해 주는 매개체가 되는 책은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서글퍼질 때는 그녀가 일독을 권해준 데즈언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를 펴들어봐야겠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행하는 많은 것들이 엄청난 진통과 진화를 거친 결과임을 안다는 것 자체가 우주를 이해하는 일(243쪽)'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 내 몸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까.

 

또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지은이가 너무 '멘토'티를 팍팍 내지 않는 점이랄까. 꼭 이렇게 저렇게 해야만 해, 실시! 하고 단정지어버리는 말투가 아니라 이럴 수도 있지 않겠니, 그러니까 힘 내는 거야, 하고 보듬어주는 듯한 느낌이 좋다. '~해라'하는 명령형 어투에는 바로 '왜?'하고 즉각적인 반발심이 생겨버리는 내 못된 기질 탓이겠지만^^;. 인생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정답이다'라는 책이 세상에 너무 많아서 피곤한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섣부른 언니 노릇을 하기보다는 같이 고민해보자고 당겨 앉아 쫑긋 귀 기울여주는 듯한 느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은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을 향해 성장해 가고 있다(187쪽)'는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힘을 내 본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책과의 기적적인 순간들', 그 순간들을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참 따뜻한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그동안 나를 보듬어 주었고 힘이 되어 주었던 책들의 목록을 다시 정리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내가 성장해가면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해가면서 그 목록들은 더 풍성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그 목록이 또 늘어났다는 것도 기쁘다. 당장 티에리 종케의 <독거미>를 구해서 먹으려고(!) 만지작거리고 있다. 새삼스럽게 책이란 존재가 참 경이롭게 느껴진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서로 연결해주고 읽은 책의 온기를 나누면서 전파(?)되어 가고 또 새로 생명력을 얻고... 아, 진심으로, 문맹이 아니라는 것다는 것에,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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