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물건과 속닥속닥 - 골동품이 내게로 와 명품이 되었다
이정란 지음, 김연수 사진 / 에르디아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 앞에 놓인 임무는 그 문을 통해 보이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 가능성을 일상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 레베카 솔닛

 

 책을 읽다보니 외가에서 보냈던 어린시절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올라 나도 모르게 울컥해졌다. 낡은 친정집을 허물면서 사라져가는 옛날 물건들이 내심 안타까웠던 이 책의 저자는 하나 둘씩 그 물건들을 집으로 가져와서 그네들과 '속닥속닥'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었건만, 내 기억속의 그 사랑스럽던 물건들은 자기들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이 없이 이미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지가 오래다. 마음이 아프다. 외할머니가 애지중지 하셨던 받닫이, 그 굽이굽이 충실했던 쇠장식이 기억나고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모시 적삼을 짓고 계셨던 모습도 눈에 이렇게 어른어른한데...

 

 세상은 너무나 새로운 것, 신기한 것들로 넘쳐나고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된 물건들로 우리 주변을 채우라는 유혹이 도처에 가득하다. 조금만 유행에 뒤떨어져도 남의 눈치를 보고 금방 버리고, 그 자리를 새 물건으로 대체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사는 것이 아닐까. 정성을 다해 만들어지고 귀하게 오래오래 쓰이면서 시간을 품었던 옛 물건들과 그 속에 담긴 주렁주렁 이야기 보따리들... 그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참 풍성하고 따뜻했다.

 

 처음에는 그저 아까움과 안타까움에 옛 물건들을 집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는 저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옛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고 나 역시 천연덕스럽게 그 물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7쪽)을 깨달았다고 한다. 뒤이어 이어지는 소박한 고백이 정겹다. '나는 점점 낡은 것에서 오는 익숙함과 편안함에 매료되고 있었다'(같은 쪽).

 그렇다. 옛 물건들이 우리의 일상과 저만치 동떨어진 채 지나간 시절의 유물로만 자리잡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낡고 오래된 물건들 속에 담긴 조상의 지혜와 친환경적인 삶의 자세를 배우고, 그 물건들과 울고 웃었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오늘날의 생활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고 또 때론 새로운 용도를 발견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 물건들은 생명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리라.

 이 책에서 돋보이는 부분도 그런 실용성을 강조하는 점이다. 골동품이라고 집 한 구석에 먼지만 쌓이게 두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두루두루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고 쓰임새와 관리 요령 등을 친절히 알려준다. 소반, 바가지, 약탕기, 수세미, 번철, 옻칠목기와 보자기 등... 오히려 화학성분이 들어간 현대적인 제품들보다 더 안전하고 믿음직하고 쓰임새가 다양해서 새삼스럽게 조상들의 지혜에 놀라게 된다. 옹기에 숯을 담아 전자파 차단용으로 사용하는 법, 아쿠아 슈즈 대신 고무신을 신어보니 좋은 점, 무쇠로 된 번철을 길들이는 법 등 저자가 생활에서 건져올린 팁도 쏠쏠하다.

 

 책을 덮고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장롱을 오래오래 뒤지다가 외할머니가 어렸을 적 자투리 천을 누벼 만들어주셨던 조각보를 찾아냈다. 보물을 건져낸 기분에 얼른 차 마시는 탁자에 걸쳐두니, 오래되어 색은 바랬지만 은은한 맛이 봄과 어울려서 멋스럽다. 외할머니께서 재봉틀 앞에 앉아 뭔가를 늘 만들고 계셨던 모습을 떠올린다. 시골 외가가 허물어지고 그 곳을 채웠던 추억의 물건들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 옛 물건들의 가치를 헤아리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키워가고 싶다. 이 따뜻한 책 덕분에 어린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어 행복했고, 옛 물건들을 대하는 내 눈이 열린 것 같아 고맙다. 그리고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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