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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책 읽기
앨런 제이콥스 지음, 고기탁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어른들이 하라고 하는 수많은 것들에 '왜 그래야 하지?'라는 생각이 끝없이 꼬리를 물던 10대 시절, 내가 싫어하던 것(혹은 이해가 되지 않던 것) 중의 하나가 '권장도서목록'이라는 것이었다. 이 목록은 보통 새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나 방학을 앞두고 우리에게 전달되었는데, 이 목록에 있는 책들 중 'O권 이상 읽고 독서감상문 쓰기' 같은 것이 숙제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책에 빠져 살았지만 '권장도서목록'이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정말 싫었다. 온통 갑갑하기만 하던 시절, 책은 내가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계였다. 그런데 그것조차 어른들이 이것 읽어라 저런 것은 피해라, 수능과 논술에 도움되는 책을 읽어라 하면서 통제하려 들다니! 그래서 일부러 그 '권장'의 딱지가 붙은 책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읽는, 나름의 묘기를 부리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뭐 선정된 책들의 잘못은 아니긴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 서슬 퍼렇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 '왜 권장도서가 아닌 책들만 읽느냐'는 꾸중 대신 '독서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이 책의 저자처럼 이야기해주는 어른이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거다. 책장을 넘기면서 따뜻하게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자는 권장도서란 독서에 의무를 부과할 뿐이며,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책을 읽을 것을 권한다. 평생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나 자기 향상이라는 강박 관념 속에서 책을 읽다가, 순수한 열정으로 책을 선택한 에피소드들이 인상적이었다.
캐슬린 샤인은 10대에 문학 작품을 읽는 데 흥미를 잃어버렸다. 좋아하는 책을 찾아내지도 못하고 책에 몰입하지도 못하며 자신에게 좌절을 느꼈던 그녀는, 예전 남자 친구가 놓고 간 물건들이 담긴 가방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던 소설을 찾아내 읽는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제 그녀는 '경이로운 책들로 이뤄진 세상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 책들이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책은 어느 날, 당신의 마음이 내켜할 그날까지 당신을 기다려 줄 것이다'(38쪽)라고, 저자는 책은 때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무척 공감이 가는 말이다. 도대체 청소년기에 꼭 읽어야 할 책, 20대에 꼭 읽어야 할 책 같은 것은 누가 정해놓을 수 있다는 것인가.
'독서의 즐거움, 지혜, 기쁨 등을 느껴본 독자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책 머리말에서 예감했던대로, 책장을 넘기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공감할 수 있는 많은 공통점을 느낄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특히 영문학자이며 비평가, 교수다운 묵직한(?) 이야기 대신, 독서의 순수한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는 점이 좋았다.
저자가 <안나 카레리나>를 세 번째 통독하던 중에 느꼈던 새로운 경험을 이야기하는 대목도 무척 기억에 남는다. 저자가 처음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십 수년이 흐른 후였다. 레빈과 키티에게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레빈의 감정을 묘사하는 구절을 읽으며, 저자는 이례적인 설득력에 놀랐다고 한다. 더구나 이전까지 그 구절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충격을 받았으며,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그 구절을 이전에도 읽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그 책을 세 번째 통독하는 중에 그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불과 몇 달 전에 내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레빈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독자로서 이 같은 경험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변화였다. 나는 한때 눈이 멀었지만 그제야 눈을 떴다.'(178쪽)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예전에 읽었던 책이 시간이 흐르고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이전에 느꼈던 감정과 다른 폭으로 와 닿을 때의 그 느낌이 생생히 기억났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애초에 책이 단 한 번의 횡단으로 수확할 수 있도록 의도되지 않았기 때문'(187쪽)이라고 한다. 그렇다. 그렇기에 기꺼이 우리는 한 권의 책이라는 세계를 여러 차례 거듭해서 횡단할 것이다. 시간은 무정하게 흐르고, 많은 것들이 변화한다. 그렇지만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사랑하는 책을 통해 우리 자신의 성장을 확인하는 것, 그것은 얼마나 즐거운 경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