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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인생충전기
안은영 지음 / 해냄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치적인 내 위치, 내가 일궈온 관계의 텃밭에서 정작 나의 존재감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 타인이 인식하고 있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든 생각은 역시 '무얼 할 것인가(To do)'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To be)'다(43쪽).
어떻게 살 것인가. 녹록치 않은 삶에 치이고 지칠 때, 우리는 책장을 펼치며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읽고 위안이 되었다는 책이 나에게도 의미가 있는 책이라면, 반가움과 공감이 차오른다. 그 누군가와는 어쩐지 마음을 터놓고 한참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 책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서른 다섯 권의 책들이 내게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따뜻하고 든든하다.
그녀가 소중하게 읽었던 책에 그녀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겹쳐진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의 구절들을 읽어주며 마음의 근력을 키우고 내공을 기르라고 이야기하고, 백석의 시를 읊어주면서 감사와 기쁨은 헤플수록 좋다는 것과 내 울음을 들어줄 사람과 함께 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때로는 깊은 산속으로 떠나는 시마무라처럼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자기 속의 아우성에도 귀를 기울여 보라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슬며시 내밀어 주기도 한다. 살면서 최대한의 '첫'을 경험하라는, 듣기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조언을 해 주는 매개체가 되는 책은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서글퍼질 때는 그녀가 일독을 권해준 데즈언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를 펴들어봐야겠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행하는 많은 것들이 엄청난 진통과 진화를 거친 결과임을 안다는 것 자체가 우주를 이해하는 일(243쪽)'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 내 몸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까.
또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지은이가 너무 '멘토'티를 팍팍 내지 않는 점이랄까. 꼭 이렇게 저렇게 해야만 해, 실시! 하고 단정지어버리는 말투가 아니라 이럴 수도 있지 않겠니, 그러니까 힘 내는 거야, 하고 보듬어주는 듯한 느낌이 좋다. '~해라'하는 명령형 어투에는 바로 '왜?'하고 즉각적인 반발심이 생겨버리는 내 못된 기질 탓이겠지만^^;. 인생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내가 정답이다'라는 책이 세상에 너무 많아서 피곤한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섣부른 언니 노릇을 하기보다는 같이 고민해보자고 당겨 앉아 쫑긋 귀 기울여주는 듯한 느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은 없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을 향해 성장해 가고 있다(187쪽)'는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 힘을 내 본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책과의 기적적인 순간들', 그 순간들을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참 따뜻한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그동안 나를 보듬어 주었고 힘이 되어 주었던 책들의 목록을 다시 정리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내가 성장해가면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해가면서 그 목록들은 더 풍성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그 목록이 또 늘어났다는 것도 기쁘다. 당장 티에리 종케의 <독거미>를 구해서 먹으려고(!) 만지작거리고 있다. 새삼스럽게 책이란 존재가 참 경이롭게 느껴진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서로 연결해주고 읽은 책의 온기를 나누면서 전파(?)되어 가고 또 새로 생명력을 얻고... 아, 진심으로, 문맹이 아니라는 것다는 것에,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