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 (30주년 특별판) - 소설로 읽는 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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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철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처음 읽은 철학책을 기억하시나요? 처음으로 좌절케한 개념은? 또, 처음으로 이해의 빛을 마주하고 전율했던 때의 그 기쁨을 기억하시는지. 수많은 이들의 처음과 최고를 차지하고 있는 그 이름, 『소피의 세계』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불친절의 구덩이에 상냥하게 내던져지는 느낌이라니. 나도 모르게 '그렇지, 이거지!'를 외쳤다고 하면, 알 사람은 알겠지요.

유사 이래 철학과 철학자는 사회의 주류 관심사, 쉽게 말해 메이저였던 적이 없었다. 대체로 골치 아프고 포도청 저리가라 하는 목구멍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소리로 여겨져왔다는 뜻이자, 일상 바깥의 문제로 치부된 탓에 남는 게 시간이거나 아예 존재의 고통을 선명히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이나 사색에 잠긴다는 게 거지반 통설이었다는 뜻이다.

p.151 소피는 플라톤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영혼이 육체에 자리 잡기 전 이데아의 세계에서 영원한 '다람쥐'를 소피가 보았을지도 모른다. 소피가 이미 한 번 산 적이 있다는 생각이 맞을까? 지금의 육체 를 얻기 이전에 정말 소피의 영혼이 실재했을까? 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는 작은 금괴, 바로 소피의 육체가 늙어 죽어도 계속 살아 있는 보석과도 같은 영혼이 소피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걸까?

p.626 우리는 살아 있는 행성이야. 소피야! 우주 안에서 불타는 태양 주위를 항해하는 커다란 배지. 하지만 우리 각자는 유전자라는 짐을 싣고 인생을 항해하는 배이기도 해. 우리가 이 짐을 다음 항구로 실어 나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헛된 것은 아니겠지…


느닷없이 시작된 소피와 크눅스 선생의 철학 여정은 서양철학사의 기원에서 지금 여기의 인간 정신과 물질성까지 총망라하며 종잡을 수 없이 이어지는 중에 때때로 갈등에, 벽과 '낯섦'에 맞부딪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야말로 '순식간에' 박차를 가하며 독자에게 달려들다 급기야 종국에는 아주, 낯설고 고난스러운 시작을 예고하며 독자에게 다음을 넘긴다.

실존과 현실, 존재와 관념이 마주치는, 힐데와 소피 그리고 크눅스 선생과 이 이야기의 '동인'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반전하고 합의 길로 솟구치게 되는 걸까? 읽는 내내 '천천히'를 되뇌어야 했던 이야기의 끝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철학적 사고에 발을 들여놓는 책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각을 다시 맛보는 기쁨과 동시에 충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p.408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이성을 통해 논증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어. 책임 있는 행동은 이성을 예민하게 갈고닦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고통과 행복을 같이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을 예민하게 갈고닦아야 가능해지는 거야. (…) 전쟁이 끝난 뒤에 많은 나치가 처벌을 받았지만 그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잔인했기 때문이야."

p.451 "소령은 우리의 작은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게 그가 전능하다는 뜻은 아니야. 어떤 경우든 우리는 그가 전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해. (…) 문제는 우리가 존재 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며 누구냐는 거야. 우리가 단지 소령의 분열된 의식 속의 자극, 그의 의식 속의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쩌지는 못할거야."


이 길고 사뭇 공격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에는 이성의 어떤 면에 초월적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이전의 '당연한' 도식에 꼭 들어맞지 않는, 그 안에 구겨넣을 수 없는 어떤 신비한 체험과 같은 사건들이 드러내는 철학의 속성이 있다. 세계를 묻는 일은 나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 근원을 뒤흔들 수밖에 없다는 것. 철학의 개념과 명제들은 안도와 순종을 위해 밝혀지고 선언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영혼을 지져놓는(전기가오리!) 충격에 가깝다.

철학의, 사유의 죽음이 공언되는 이 시대에 누군가 내게 철학이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바로 이렇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학문이라 하겠다. 깊이 생각하는 것, 발견하는 것, 나의 자리를 기꺼이 떠나고 뒤집어 엎는 용기. 지혜를 사랑하고, 깊이 사유하여 밝히는(哲) 것은 그렇게 세계와 존재를 잇는다고,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도 또다시 물을 수 있게 한다고. 그러니 함께 철학-함으로 나아가자고, 기꺼이 묻고 또 사유함으로 나아가자고.

p.10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은,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 우리에게는 서로를 이어주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함께 책을 읽는 경험은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p.679 "문제는 역사가 종말로 향해 가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인가 하는 거야. 우린 더 이상 한 도시나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니야. 우리는 전 지구적인 문명 속에 살고 있는 거란다. (...) 어쩌면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은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일지도 몰라…"


*서평도서제공: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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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사람을 죽일 때 - 미시마 유키오 미스터리 단편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심지애 옮김 / 북로드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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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렸습니다. 아름다움이 사람을 잡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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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
지지와 야스아키 지음, 길윤형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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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동맹이라는거울 #지지와야스아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시작하기에 앞서, '국경'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이른바 '자국과 타국'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고 간주된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고 저기까지는 그들, 이라는 식으로. 책임과 권리, 방어와 침입의 구분선으로 기능하는 '국경'은 어떻게 정해져야 할까? 내륙 국가라면 차라리 해결이 쉽다. 문제는 남한과 같은 '실질적 섬'이나 일본처럼 아예 전국이 섬으로 구성된 경우이다. 그것도 인접국이 명목상으로나마 전쟁태세를 늦추지 않는 경우 말이다.

수백년간의 침략과 분쟁으로 단단히 얽힌 나라, 한국과 일본. 이 두 극동국가가 얼치기 펴와라는 현상유지에 도달한 것은 아무리 좋게 쳐줘도 양국 간 합의의 결과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주축에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진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물음이 발생한다. 이 다글다글 붙어 있는 체제적, 정치적 '접경과밀지'에서 미국의 군사력이라는 '퍽 이질적인 세력'의 주둔이 발휘하는 힘은 어떻게 해석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극동의 군사안보적 미래는 어떻게 그려지고 또 받아들여지는가?

p.7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1945년 일본 제국이 붕괴한 뒤에도 '극동 1905년 체제'는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이 체제를 힘으로 뒷받침하게 된 것은 '한미·미일 양 동맹'이라는 안전보장 시스템이었다.

p.70 미일동맹은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허브 앤 스포크형 동맹망의 일부이다. 또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통해 한미동맹과 특히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 '일본적 시점'에서 파악한다면, 미일 두 나라 사이의 '양자' 동맹일 뿐이고 미국의 다른 동맹망과 독립된 존재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3자적 시점'에 서면, 실제로 이 동맹은 '극동 1905년 체제'를 떠받치는 '한미·미일 양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안전보장 체제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능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본의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미군 주둔과 핵무기를 이용한 위력-전략을 어떻게 이해하고 유지 혹은 개선하려 하는가?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극동의 3국, 아니 실질적으로는 6개국(남한, 북한, 읿본, 대만, 중국, 러시아)이 일종의 최전선인 동시에 잠재적 위협으로 여겨지는 형국에서 각국의 정치군사적 태도는 즉각 다른 국가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핵'의 소지 여부나, 사실상 군대인 일본 자위대 조직의 타당성에 대한 갈등이 거듭 터져나오는 것 또한 좌시할 수만은 없는 문제이다. 본문에서 거듭 거론되는 일국평화주의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에 대한 안일한 태도에 연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각종 밀약과 협정은 대중시민사회와 유리되어 맺어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독자 또한 정치적 주체로서 거듭 물어야 한다.

p.150 한 발 더 나아가 말하면, 미국과 적대하는 국가는 극동유사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일이 사전협의에서 어떤 결과를 내놓든, 즉 일본이 '사용 불허'를 결정한다 해도 주일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활용한] 직접전투작전행동에 나설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기시 총리에게 말한 "일본의 의사에 반해 행동할 의도가 없다"는 약속은 당연히 미국의 적대국의 인식을 바꿀 만한 요인이 되지 못한다.

p.160 중요영향사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자위대가 "현재 전투행위를 행하고 있는 지역이 아닌 장소"에서 미군을 후방지원 하고 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이 활동은 미군의 무력행사와 '일체화'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자위대는 상대방의 공격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이런 주장은 극동유사사태와 사전협의 사이의 관계처럼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국내법적 논리이자, 자국의 의회·국민을 향해 내놓는 헌법 해석이나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과연 그 '나쁜 짓에 연루되지 않기'로 충분한 것인가? 나에게 어떤 '공격적 의도'가 없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어떤 분쟁에도 휘말리지 않는다'며 물러서는 태도가 과연, 윤리적 책무를 떠나, 얼마나 실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실질적으로 한 패로 묶이는 와중에 '결정권 없음'을 주장한대도 상대가 '결정권자끼리만 공격하겠습니다' 따위의 '친절한' 선택을 하리라 기대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저자는 일본의 입장에서 미일동맹과 '극동유사사태'에서 일본의 안전을 중심으로 논하나, 다시금, 한국의 입장, 나아가 우리 사회의 정치적 태도와 별개로 생각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격변하는 정세와 날로 더해가는 분쟁의 위협에서 우리는 진정 '안전하기' 위해, '자주국방'을 주장하기 위해 어떻게 중심을 잡을 것인가. 어떻게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평화라는 아슬아슬한 희망의 균형을 지켜낼 수 있을까. 제국주의와 국제패권이라는 암울한 그림자 앞에서 오직 그를 물을 뿐이다.

p.215 성단을 통해 종전을 결정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이] 천황의 판단 없이는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일본 정부 내에] 거버넌스(통치 기능)가 결여돼 있었음을 드러내 보여 주는 예가 아닐까 한다. 만약 [일본이] '다음' 위기를 겪게 된다면, 전쟁 종결이라는 어려운 결단을 내리는 주체는 민의를 체현한 정부여야 한다. (…) 출구전략을 염두에 둔 일본의 시각을 평소에 동맹국이나 관계국·지역과 공유해 두는 것도 필요하다.

p.288 안보 정책은 국가 간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이상 일국평화주의나 필요최소한론에 기초한 '일본적 시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결국 '나만 옳다는 독선'으로 이어져 현실과 괴리가 생겨난다. 그로 인해 미일동맹이 기능할 수 없게 돼 거꾸로 일본의 안전에 위험을 불러오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본말전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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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이브들 - 인류의 진화를 이끈 첫 번째 여성들을 찾아서
캣 보해넌 지음, 안은미 옮김 / 시공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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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이브들

태초에 낙원이 있었으매 나약한 여자가 간악한 꼬임에 남자를 꾀어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났더라. 여자란 본래 남자의 몸에서 난 탓에 열등하고, 약하며, 감정적이고 불안정하다… 정말로? 고래로부터 여성의 존재는 몸으로 한없이 수렴되고, 모성의 신화와 열등한 짐승이라는 비난에 쉴 새 없이 시달려왔다. 과학기술로 무장한 지금, 학계는 달라졌을까?

퍽이나. '비과학'의 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저자는 남성을 인간의 기본형으로 삼아온 '통념'에 맞서 여성의 몸을 중심으로 우리 몸 곳곳의 조상, 저 구석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동굴의 현모양처가 아닌 생존을 위해 분투하던 곳곳의 시원들을 불러낸다. 젖을 먹이고 새끼를 낳고 무리를 이루며 나무에서 내려와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한, 말하고 생각하고 오래, 때때로 너무 오래 살기 시작한 최초의 이브들.

p.13 암컷의 몸은 그저 수컷의 몸에 지방, 유방, 자궁 같은 '여분의 부위'가 달린 몸이 아니다. 고환과 난소는 바꿔 끼울 수 있는 부위가 아니다. 성별 구분은 포유류 몸에 온갖 주요 특징과 그 안에서 사는 우리 삶에 배어 있으며, 이는 생쥐에게도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이 수컷을 기준으로만 연구하면 우리는 복잡한 그림을 절반도 이해할 수 업다. 우리는 성별에 따른 차이에 대해 질문하지 않기에, 이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무엇을 놓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다.

p.233 여성은 근본적으로 운동 직후 근육 강도가 더 떨어지는 듯했지만 훨씬 더 빨리 회복했다. 이것은 강한지 약한지의 문제가 아니라 대사와 조직 복구의 문제다. 단기적으로 남성은 근육을 가지고 '힘 쓰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손상도 더 입는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일찍 쉬어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한숨 돌리고 나면 비슷한 상황의 남성보다 일찍 그 일을 다시 할 수 있다. 태초에 낙원이 있었으매 나약한 여자가 간악한 꼬임에 남자를 꾀어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났더라. 여자란 본래 남자의 몸에서 난 탓에 열등하고, 약하며, 감정적이고 불안정하다… 정말로? 고래로부터 여성의 존재는 몸으로 한없이 수렴되고, 모성의 신화와 열등한 짐승이라는 비난에 쉴 새 없이 시달려왔다. 과학기술로 무장한 지금, 학계는 달라졌을까?


진화가 일방향적, 선형적이라는 착각과 이분법이라는 문화적 관념 모두에 도전하며 '몸 바깥의 문제들'이 어떻게 몸-존재들에게, 몸의 유무형적 차이가 어떻게 지배 담론에 이용되어 왔는지를 보인다. 그의 예시들에서 알아볼 수 있듯 생물학은 사회학과 별개가 아니다. 우리는 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압력이 어떻게 생물적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지, 생물적 다양성이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영향을 미치는지 샅샅이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청력의 성차에 대해서도, 예를 들면, 구형 전자기기에 쓰이던 부품에서는 특정 주파수 소음이 방출되었다. 그러나 이 소리는 남성보다 여성이 예민하게 감지하기 때문에,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을 개발하는 남성들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였기 때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기기를 이용할 때마다 불쾌한 느낌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를 토로하는 이들이 여자라서 예민하다는 식의 반응에 맞닥뜨렸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성을 포함한 '비남성'들은 '규격'에 들어맞지 않는 일상과 '항상적이지 않은' 불편에 순응하도록 요구받는다. 마치 '인간'과 별도의 종인 것처럼.

p.158 남성은 고음을 듣는 능력이 먼저 사라지는 유형의 난청을 여성보다 훨씬 많이 겪는다. (…) 남성이 나이 들면 고음인 여성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없지만, 남성의 목소리나 그 외 덜컹거리는 낮은 소리는 여전히 들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성은 전형적으로 나이가 들며서 사회적 권력을 얻으므로, 권력을 가진 남성은 말 그대로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p.354 트랜스 여성이 여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뇌는 자신의 방식대로 연결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발달 변화를 겪으면서 성 정체성을 만든다. 대부분의 인간 뇌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성별이 있는 존재라고 이해하는 듯이 보인다. (...) 뇌에 기반한 성 정체성이 그 신체가 속한 사회가 기대하는 바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것보다 덜 실제적인 정체성이 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진화는 우열과 의도의 문제가 아니다. '균일해보이는 정상 시스젠더 남성'은 인간종의 다양성을 대표할 수 없다. 성차별의 과학적 근거는 결국 전체적 손실로 이어진다. 성차는 결국 우열의 문제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에 부득불 반대하고 싶다면, 축하한다. 그야말로 인간 가능성의 실패작이다. 책머리로 돌아가시오. 우리 인간 모두는 이브의 몸으로부터 태어난 다양한 실험실이자 가능성이다.

저자가 강조하듯 인간의 가능성은 확장된 무리짓기와 돌봄의 연장에 있다. 혹자는 이 다양과 공존의 가능성을 '사회적 발명품' 따위로 취급하고 싶을지 모르나, 저자 말마따나, "우리가 바로 이런 몸이다. 고통스럽든 행복하든, 장애가 있든 없든, 병에 걸렸든 죽어 사라질 때까지 건강하든, 우리 몸과 그 안에 든 뇌가 그냥 우리다". 글쎄, 우리는 그저 이런 존재일 뿐이다. 그뿐이다. 부딪히고 고민하고 끊임없이 가능성을 탐색하며 함께 살 방도를 찾아나가는 이브의 아이들이다. 생긴대로 살자. 그래, 역시 좋은 말이다.

p.510 역설적이게도, 현대의 성차별은 산부인과학의 발전을 직접적으로 저해한다. 성차별적 문화는 여성에게 더 잦은 임신을 기대하는 것 같지만, 임신한 여성에게 제공되는 건강관리 기회도 줄인다. (…) 모성 사망률이 높아지도록 놔둔다? 진화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 이런 결과는 건강한 아기를 최대한 많이 낳을 수 있도록 최적화하는 것과 반대되는 일이다. 생물학적으로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다.

p.534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의 고유한 인간적 형질들을 총동원해야 하는, 다시 말해 확장된 친족 행동, 내러티브 구축, 문제 해결이 모두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하는 최고의 일은 이토록 깨지기 쉬운 확장된 유대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좋든 싫든, 이런 제도들은 영역성, 성차별, 우위 경쟁과 같은 우리의 덜 바람직한 행동을 극복하게 해 준다. 이 제도들은 우리 몸의 진화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이다.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 수단이다.


*서평도서제공: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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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
이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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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에 앞서, 국립국어원에 대한 개인적인 심정으로 시작해야겠다. 아니, 원한 내지는 앙금 비슷한 것이라 해도 좋겠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 일로 서비스는 이용하되 그 기관의 '태도'는 곱게 보지 않으리라 다짐한 세월이 꼭 그만큼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흥! 정도라 할 수 있을 마음으로 펼쳤고, 그제야 볼 수 있었다. 기관이라는 이름과 채팅창 너머의 사람을, '요즘 누가 그걸 신경쓰냐'는 핀잔의 '누구'들의 치열한 일상을.

초중고 도합 장장 12년의 교육도 해낼 수 없는 문제, 맞춤법. 오죽하면 온갖 '맞춤법 검사기'가 등장하는 판 아닌가. 그 근간에 국립국어원이, 그 안에서도 이용자와 가장 가까운 곳인 상담실이 있다. 이 책은 가장 가깝고, 그 이유로 당황과 황당 사이를 끊임없이 ('끝없이'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 잠시 고민했다) 오가는 상담실 연구원의 나날을 살짝 내보인다. 이걸 다 사람이 답하나? 네, 사람이 합니다.

p.4(추천사) 가시처럼 알쏭달쏭한 한 글자 한 칸 앞에서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답을 구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마지막으로 국립국어원의 온라인가나다 게시판을 찾는 수밖에 없다. (…) 오늘날은 인터넷을 통해 거의 누구나 뭔가를 쓸 수 있는 시대이고, 뭔가를 써서 보이기 전에 누군가의 검사를 맡아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런 때에 스스로 서로 정확해지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선생이고 해방이다. 물론 그것은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p.182 인공지능이 빛의 속도로 많은 데이터를 길어 올리면, 우리 상담 연구원들은 그 답변이 '규범' 이라는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맥락' 이라는 결과 맞닿아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언어의 온기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주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절차는 조금 달라지더라도 국어 연구원은 인공지능이 내놓은 문장들이 국어 생활자의 삶에 올바르게 닿을 수 있도록 책임지는 '최종 검토자'로서 품을 들일 것이다.


이쯤(이 쯤인가?)해서 물을 테다. 맞춤법 검사기 돌리면 금방인데 굳이 사람이 답해야 하느냐고. 단언할 수 있다. 해야 한다고. 문제는 옳고 그름의 정답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말은 소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동시에 매 순간 갈라지고 다듬어지며 새로 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말이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에, 동시에 사회의 인식적 틀에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 떄문이다. 예를 들어, 잊을 만하면 한번씩 불려나오는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를 향한 조롱이라든지.

그 이면에는 '감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있다. 억지 땜질로 바짝 기어주지 않으면 손쉽게 갈아치워질 처지들이 있는 것이다. 말은 사람 간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누군가를 깔아뭉개고 핍박하는 구실이 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조롱이 아니라 새로운 약속의 장을 열고 다양한 가능성을 들고 오는 일이다. 언어규정은 사람을 단죄하고 옳고 그름의 선으로 찍어누르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p.192 문장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어떤 길로 뜻을 전하느냐에 따라 그 움직임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진다. '더 잘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더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작은 원리를 익혀 글을 쓰는 데에 사소한 도움을 얻기를 바란다.

p.200 왜 우리에게 '높임' 표현이 이렇게나 중요하게 되었을까? 언어는 그 사회의 정신을 반영한다는데, 이 기형적인 과잉 존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어쩌면 우리는 일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존중과 인정의 욕구를 모르는 타인에게서, 특히 서비스업 종사자에게서 채우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진한 대접을 받아야만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사회적 결핍이 '사물 존칭' 이나 '높임 어미의 과도한 중첩 사용'이라는 촌극을 빚어낸 것은 아닐까.


앞서 말한 10여 년 전의 '사랑' 논쟁 또한 그러하다. 저자가 거듭해 말하듯 규정은 사용자를 재단하고 혼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편협한 정의가 어떤 사랑을 '사랑' 바깥으로 밀어낸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벽을 세우고 엄격한 경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범주를 넓히는 일이다. 슬프게도, 우리 사회의 모두는 말이 채찍이 되고 편가름의 도구가 되는 경우를 잘 알고 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질문 너머의 일상을 읽으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철학자의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을 멋대로 읽자. 누군가는 벽을 세우고, 누군가는 먼 곳의 낯선 이를 환영하고, 또 누군가는 갈라지고 좁아진 틈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공동체의 집으로. 더 큰 집을 짓자. 넓고 다정한, 모두가 오가는 집을 짓자. 누군가를 내몰지 않는, 자유로이 열린 집을. 그 집에 함께 거할, 잘 있기 위해 매 순간 이해하고 안내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며.

p.110 언어는 쓰임에서 의미를 얻고, 규범은 언어가 그 쓰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돕는다. (…) 그 안에는 언어가 변화하는 속도와 방향을 수용하는 우리의 자세가 담겨 있다. 변하는 언어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일은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재미있다. 상담으로 만나는 질문 하나에도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말을 바꾸고 있는지, 어떤 마음 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p.133 표기법이란 사람들을 가르치고 통제하는 교단 위의 회초리가 아니다. 우리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맺은 약속이다. (…) 낡은 규범에 갇혀 말의 맛을 포기하기보다, 가끔은 대중의 말맛을 믿어 보는 것. 상담실에서 배운 규범 언어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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