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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30주년 특별판) - 소설로 읽는 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25년 12월
평점 :
철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처음 읽은 철학책을 기억하시나요? 처음으로 좌절케한 개념은? 또, 처음으로 이해의 빛을 마주하고 전율했던 때의 그 기쁨을 기억하시는지. 수많은 이들의 처음과 최고를 차지하고 있는 그 이름, 『소피의 세계』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불친절의 구덩이에 상냥하게 내던져지는 느낌이라니. 나도 모르게 '그렇지, 이거지!'를 외쳤다고 하면, 알 사람은 알겠지요.
유사 이래 철학과 철학자는 사회의 주류 관심사, 쉽게 말해 메이저였던 적이 없었다. 대체로 골치 아프고 포도청 저리가라 하는 목구멍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소리로 여겨져왔다는 뜻이자, 일상 바깥의 문제로 치부된 탓에 남는 게 시간이거나 아예 존재의 고통을 선명히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이나 사색에 잠긴다는 게 거지반 통설이었다는 뜻이다.
p.151 소피는 플라톤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영혼이 육체에 자리 잡기 전 이데아의 세계에서 영원한 '다람쥐'를 소피가 보았을지도 모른다. 소피가 이미 한 번 산 적이 있다는 생각이 맞을까? 지금의 육체 를 얻기 이전에 정말 소피의 영혼이 실재했을까? 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는 작은 금괴, 바로 소피의 육체가 늙어 죽어도 계속 살아 있는 보석과도 같은 영혼이 소피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걸까?
p.626 우리는 살아 있는 행성이야. 소피야! 우주 안에서 불타는 태양 주위를 항해하는 커다란 배지. 하지만 우리 각자는 유전자라는 짐을 싣고 인생을 항해하는 배이기도 해. 우리가 이 짐을 다음 항구로 실어 나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헛된 것은 아니겠지…
느닷없이 시작된 소피와 크눅스 선생의 철학 여정은 서양철학사의 기원에서 지금 여기의 인간 정신과 물질성까지 총망라하며 종잡을 수 없이 이어지는 중에 때때로 갈등에, 벽과 '낯섦'에 맞부딪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야말로 '순식간에' 박차를 가하며 독자에게 달려들다 급기야 종국에는 아주, 낯설고 고난스러운 시작을 예고하며 독자에게 다음을 넘긴다.
실존과 현실, 존재와 관념이 마주치는, 힐데와 소피 그리고 크눅스 선생과 이 이야기의 '동인'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반전하고 합의 길로 솟구치게 되는 걸까? 읽는 내내 '천천히'를 되뇌어야 했던 이야기의 끝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철학적 사고에 발을 들여놓는 책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각을 다시 맛보는 기쁨과 동시에 충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p.408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이성을 통해 논증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어. 책임 있는 행동은 이성을 예민하게 갈고닦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고통과 행복을 같이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을 예민하게 갈고닦아야 가능해지는 거야. (…) 전쟁이 끝난 뒤에 많은 나치가 처벌을 받았지만 그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잔인했기 때문이야."
p.451 "소령은 우리의 작은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게 그가 전능하다는 뜻은 아니야. 어떤 경우든 우리는 그가 전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해. (…) 문제는 우리가 존재 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며 누구냐는 거야. 우리가 단지 소령의 분열된 의식 속의 자극, 그의 의식 속의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쩌지는 못할거야."
이 길고 사뭇 공격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에는 이성의 어떤 면에 초월적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이전의 '당연한' 도식에 꼭 들어맞지 않는, 그 안에 구겨넣을 수 없는 어떤 신비한 체험과 같은 사건들이 드러내는 철학의 속성이 있다. 세계를 묻는 일은 나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 근원을 뒤흔들 수밖에 없다는 것. 철학의 개념과 명제들은 안도와 순종을 위해 밝혀지고 선언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영혼을 지져놓는(전기가오리!) 충격에 가깝다.
철학의, 사유의 죽음이 공언되는 이 시대에 누군가 내게 철학이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바로 이렇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학문이라 하겠다. 깊이 생각하는 것, 발견하는 것, 나의 자리를 기꺼이 떠나고 뒤집어 엎는 용기. 지혜를 사랑하고, 깊이 사유하여 밝히는(哲) 것은 그렇게 세계와 존재를 잇는다고,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도 또다시 물을 수 있게 한다고. 그러니 함께 철학-함으로 나아가자고, 기꺼이 묻고 또 사유함으로 나아가자고.
p.10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은,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 우리에게는 서로를 이어주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함께 책을 읽는 경험은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p.679 "문제는 역사가 종말로 향해 가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인가 하는 거야. 우린 더 이상 한 도시나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니야. 우리는 전 지구적인 문명 속에 살고 있는 거란다. (...) 어쩌면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은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일지도 몰라…"
*서평도서제공: 현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