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하는 사피엔스 - 이기적 유전자와 함께 찾는 행복의 미로
권행백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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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도서 제공
인간이란 대단한 짐승 아닌가. 본능에의 향수와 사회화라는 의식적 구성물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니. 현대인의 결핍과 불안을 생물로서의 유전자와 저자의 독창적 해석으로 접근하는 책. 모쪼록 존재론적 고민에서 쓰고 읽음의 의미까지 고민하며 폭넓게 읽을 이에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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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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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이과냐 문과냐, 요즘은 이런 말 안 쓴다면서요? 진짜로? 아무튼, 문이과를 묻는다면 의학은 분명히 이과, 좁은 의미로서의 과학의 영역에 속해있다. 그럼에도 의학은 과학의 한 분과 이상으로 여겨져왔다. 기존 의학사가 위업과 발견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 어떤 독보적인 지위 비슷한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하기 어렵다.

오래전부터 의학과 의학자, 의료 현장 관계자는 사회 필수 '자원'으로 여겨져왔다. 의학의 발전은 인류 전체의 진보와 동일시되기 마련이다. 현대에 이르러 지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의 첨단이자 일종의 증명으로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도제식 전승이라는 닫힌 관계를 넘어 탐구함에 있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의문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p.71 측정 도구는 늘어났지만, 그것이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객관성은 높아졌지만, 환자가 경험하는 질병의 의미는 숫자 너머에 있었다. (…) 맥박계는 박동의 리듬을 숫자로 환원하지만, 환자가 견디는 밤의 길이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의학은 그 이후로도 이 침상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숫자로 읽는 몸과 돌봄으로 이해되는 인간 사이를 오가고 있다.

p.244 외과의 역사는 기술의 진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환경이 어떻게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감염이 개념화되고, 통증이 통제되었을 때, 외과의 실력은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었다. 칼이 더 날카로워진 것이 아니라, 칼을 쓸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 외과는 결코 혼자 발전하지 않았다. 언제나 축적된 지식들, 그리고 조건을 만들어낸 사람들과 함께 성장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외과는 의학 가운데 가장 대담하면서도 가장 절제된 학문이 되었다.


머리나 머리털이나 자르기는 매한가지였던, 의술과 주술이 뒤섞여 있던 먼 옛날부터 현대의 도전들에 이르기까지, 의학의 역사는 혁명과 전환, 이념 다툼과 집념이 뒤섞인 난장이었다. 체액설부터 이종간 세포배양까지 모든 순간에 당연하게 한발씩 나아간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 역사의 성원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분투하고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애써왔는지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다.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생명은 어느날 덜렁, 등장한 신비가 아닌 복잡한 구조와 체계로 맞물린 유기체이자 가능성의 덩어리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색색의 도판과 바짝 붙어야 겨우 알아볼 복잡한 구조의 그림들, 이어지고 전도되기를 반복하는 이름들에서 발견한 것은 대단한 지식의 자랑이 아닌 열의와 경의의 기록이었다.

p.67 체액설이 여전히 의학의 중심에 있던 시대에, 몸무게의 미세한 변화와 보이지 않는 증발을 논하는 그의 연구는 기이하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집착처럼 보였을 것이다. (…) 환자를 치료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 앞에서, 숫자는 아직 설득력이 부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연구는 시대를 앞서 있었다. 측정은 곧 치료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측정 없이는 이후의 의학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p.354 비타민은 단순히 새로운 약의 발견이 아니었다. 19세기에는 질병을 세균이나 독 같은 나쁜 것의 침입으로 이해했다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질병은 무언가 필요한 것이 부족할 때도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진작 이렇게 물었어야 했는지 모른다. 의학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를 묻기에 앞서, 의학의 역사는 누구의 이름과 시선으로, 무엇에 도전하고 응전하며 이어져 왔는지 그것을 말하고, 가르쳐야 했던 게 아니냐고. 동시에, 여전히 물어져야 하듯, 의사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의학은 무엇을 위해 발전하고 존속되어야 하는지 또한.

사회가 갈라져 반목한 시간이 길다. 서로를 몽매한 대중과 이기적인 이익집단 따위로 묶어 이해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의 독자일 '일반 대중'과 미래의 의학-집단이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어디쯤을 써내리고 있는가, 이 길은 대체 무엇을 위함인가. 그 끝에서 여전히 서로를 사람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p.280 초음파가 청진기를 완전히 밀어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둘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공존하게 될 것이다. 환자 곁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는 도구, 판단과 행위가 시작되는 지점, 그 자리는 언제나 의학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기술의 발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만드느냐, 그것이 더 본질적인 질문일지도 모른다.

p.432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옳다고 믿었던 것을 끝까지 밀어붙인 사람,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 한 사람,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본 사람. (…)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현미경 앞에 앉아 있고, 누군가는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는 오랫동안 붙들어 온 질문의 답에 막 손이 닿으려 하고 있다. 의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그 역사의 중간 어딘가일 뿐이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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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끝
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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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종말론이 미지의 미래가 아닌 세계, 종말이 말 그대로 살갗으로 느껴지는 세계에서 사람다울 수 있다는 것은, 정해진 파멸을 사람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과연 누가 무엇을 인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스승의 제자들은 말했다. 여시아문! 종말로 떠밀려가는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와 어중이와 떠중이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아, 아무것도!

읽는 동안,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내도록 반야심경 독송을 들었고, 잠시 생각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다. 새삼 우리 존재는 선형으로 지각되는 시간과 단일한 우주에 얼마나 단단히 붙들려 있는지 생각한다.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이곳과 저곳이 같은 동시에 같아질 수 없으며,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으나 이것이 저것을 불러올 것이며…

p.8 "수영아, 세상이 너무 이상해졌어." (...) 정보의 보도 지침에서는 엄금하는 내용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 끝나고 말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한다. 그 압박감 때문에 삶을 바꾸면 사교도, 무시하고 살던 대로 살아가면 보통 사람, 오직 그 차이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p.94 "누가 달을 파괴했는지 형사님은 아나?"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달은 파괴되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제 맑은 날 밤하늘에, 달은 떨어뜨린 과자처럼 부스러져 떠 있다. 당장 오늘 밤에도 보일 것이다. 그런데 왜 수영은 달이 수억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온전하게 하늘에 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가?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기는 한가?"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이것이고 저것이며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무너져 질서도 혼돈도 매끄러운 수식의 일부로 자리하는 완벽한 세계, 그러므로 끝없이 균열하고 붕괴되는 세계. 그 안의 작고 작은 존재들, 이해를 얻지 못한 미물들, 시간에 휩쓸려 미래도 과거도 끄집어내지 못하는 채로 그저 휘둘리기만 하는 초라한 순간적 존재들. 그리고, 그들과 다르다 자부하는 '힘'을 지닌 자들.

그 모두가 세계와 '법칙'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고, 더불어 누구도 그 의미를 진정히 이해하지 못하므로, 무한하고 광대한 매혹은 기실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허망한가. 자유의지! 인간의 본성이자 본령이라 할 그것은 진정 존재하는가? 거대한 시공의 차원 어딘가에 붙들려 주어진 배역에 충실히 놀아나고 있을 뿐이 아닌가?

p.134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뚫고 내려갈 수도 있다. 피바다가 되겠지. 하지만 그것은 통쾌한 피바다일 것이다. 제자들을 타이를 때 스스로 한 말을 떠올린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손을 더럽힐 수 없다는 말을. (...) 하지만 제자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제물로 바쳐 제 잇속을 챙기는 데 조금의 주저도 없는 말종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그렇다면 나 하나쯤 죄를 뒤집어써도 괜찮지 않을까?

p.147 "시간이 두 개건 세 개건 백 개건, 태양이 지구를 돌건 지구가 태양을 돌건 둘이 엉켜서 탱고를 추건 간에, 우리는 사람이야. 거기에는 변함이 없어.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인 한 지켜야 할 게 있단 말이야." (...) "우주 그 자체를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고요.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기존의 미력하고 시시한 사람하고 같다고 할 수 있어요?"


혹자는 이 이야기에서 시작점과 끝점을, 희미한 마디마디, 불변하는 무언가를 찾으려 눈을 질끈 감고 안간힘을 쓰겠으나, 그저, 조금 울고 싶어지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는 모두가 단단한 믿음과 매끄러운 환희 대신 설움과 공포, 절망과 혼돈 속에 주저앉기를 바란다. 아아, 초라하고도 미력하구나.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구나. 끝없이 다시, 또 다시를 꿈꾸는구나. 부질없이 버둥대는구나. 달은 산산조각 나고 시간은 끝날 것이므로. 동시에, 영원히 유예될 것이므로.

각자의 신을 찾아대기를, 소리 높여 부르짖기를 바란다. 꿈 속의 꿈, 영영 깨지 못한 채 중얼거리기를 바란다. 아, 드디어 끝인가봐. 와야만 할 끝. 모든 이야기가 소멸할 곳. 네가 태어나고 죽어 사라지고 세계가 부서지고 피어나는 그 곳으로 허덕이며 달려가기를. 도래할 종말을 있는 힘껏 붙든 채 길을 잃기를. 무너지는 세계에, 그렇게 홀로 남겨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몇 번이고, 언제까지나. 영원히.

p.166 이 길을 걷기로 했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났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많은 것을 잊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옛집으로 가고 있다. '옛집'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하나니까. 그것을 아직도 머리로만 알기 때문에, 나는 여기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p.353 나는 시간이 끝나면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이제야 깨닫는다. 나의 시공간에서 시간은 결코 앞으로 나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는다. 되돌아가고 끼어들고 겹친다. 스노글로브를 흔들 때마다 눈송이들의 궤적은 다르다. 하지만 홍콩에 눈이 내리다가 끝내 그친다는 사실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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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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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같은 가정에서 함께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한쪽은 매사에 안달복달하고 '관리자' 역할에 노상 진이 쭉 빠진 것처럼 느낄까? '가사'라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영역을 담당하는 사람은 왜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사는 걸까? 왜 양육자 모두가 육아에 참여한대도 한쪽이 더 큰 부담을 지는 형국이 될까. 가정경제와 가족관계의 전반적 관리를 포함하는 가사 부담의 불평등에 으레 따라 나오는 반응은 '엄마/아내가 가장 큰 결정권자'거나 '각자 잘하는 일을 한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관계는 평등하고 공평하다고. 과연 그럴까? 가정 경제 규모 관리, 가족 성원의 일상 전반, 하다못해 빨래와 식사에 필요한 순서와 준비물, 가족 행사 챙기기는 누가 맡는가? '같이' 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실패'는 누구의 탓으로 돌려지는가? 자녀에게, 연로한 부모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연락을 받고 누가 부양하며, 매일 입고 쓰는 물건과 각종 공과금 등은 누가 책임지는가?

p.8 (추천사) 이 책은 가사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을 기존의 기계적 분담 논리에서, '가사와 육아가 누구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시킨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대개 가사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들 남성들은 가사노동을 평생 '머리에 이고' 살지는 않는다. (...) 남성들은 자신이 가사노동에 서투른 모습을 반복적으로 증명함으로써, 가사 책임을 회피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보통 자기 남편의 '무능력'을 남편의 비겁함보다는 그의 천성 탓으로 돌리곤 한다.

p.86 한번의 인지노동은 약간 성가신 소소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작은' 행동 혹은 찰나의 생각들이 쌓이면 그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왜 누구는 혼자서도 잘 살고 멀쩡히 사회생활을 하다가도 가사 문제엔 얼이 빠져서 '상세한 지시와 칭찬'을 요구하고, 누구는 장단기 계획을 도맡고도 '큰 일'엔 서투르다 여겨지는가? 왜 동등한 주체가 만나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서도 한쪽은 퇴근 없는 직장을 오가고, 누군가는 휴식과 출근을 분리할 수 있는가? 물어야 한다. 이것은 정말 진정 그가 그 일에 적합한 성격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의도된 나태함일까? '적성에 맞는 일'의 결과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설령 '잘 하는 일'을 맡아 나눈다 하더라도, 부담은 편중되어 있다. 누군가 준비부터 뒷처리에 실행을 맡고, 누군가는 결정만 내리면 된다면, 또한 그 결과의 책임이 한쪽에 편중되고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를 평등이라 할 수 없다. 수직-업무적 위계 관계가 아니고서야 더더욱. 저자가 말하는 인지노동의 단계적 분담이 진실로 '분담'이 아닌 이유다. 개인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편만 급작스레 무능력자가 될 일이 없으니.

p.117 커플들의 합동 결정은, 결정 단계에 이르는 데 필요한 동이한 수준의 준비 작업에 남성이 참여하지도 않고, 혹은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동일한 중압감을 남성이 경험하지도 않으면서 가정생활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점수'를 따는 경우가 많았다. (…) 결정하기는 상대적으로 이득이 높은 인지노동이다. 예상하기나 지켜보기보다 눈에 잘 띄고, 많은 경우에 커플이 제한된 자원을 사용하거나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p.280 인지노동은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도 여성에게 크게 편중된 가사노동의 한 차원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는 우리가 통상 가사노동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시간 기반 지표로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 이성 커플 다수에서 여성들은 더 무거운 인지적 부하를 떠안고 있었고, 그것도 상대적으로 부담은 크지만 보상은 적은 활동들에 불균형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다만 그것이 과연 개인만의 전략이고 의도겠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사회가 어떻게 오래된 방기를 조장하고, 어떤 면에선 누군가를 집 안으로 '묶어 치워버릴' 수밖에 없게 하는지. 어떻게 이 차별이 성격과 현실의 이름으로 '합리적 선택'으로 탈바꿈되는지. 모든 노동이 얼마나 젠더-수행에 밀착되어 있는지, '정상 사회'가 얼마나 많은 비가시노동을 전제하는지를 생각해보라.

저자의 말처럼 "문화적인 힘들이 어떻게 여성을 몰아가서 가정이란 맥락에서 그러한 기술을 습득하고 활용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하는지(19)"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보라, 그것은 정말 무능과 재능의 문제였는지. 가정이 관리자와 이용자로 나누어진 공간은 아니었는지. 질문에 답할 때쯤엔 이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 믿는다. '같이 살아가는' 일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

p.282 이러한 서사가 호소력이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지나 반세기 동안의 '젠더 혁명'이 불균형적으로 행위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복해서 여성들에게 그들 또한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해왔으면, 여기서 '무엇이든'은 주로 직업적 성취의 맥락에서 이야기되어왔다. 이는 중요한 진전인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젠더를 '한다'는 것에는 행동뿐 아니라 사고방식과 정신적 습관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p.293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과 커플에게 변화의 주체로서의 힘을 되돌려주는 것과, 인지노동 문제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자기계발서에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커플을 향한 권고로 가득하다. (…) 즉, 문제의 핵심을 남성과 여성 개인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혹은 무엇을 하고 있지 않은지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진정으로 문제적인 것은 개인들의 선택지를 제한하고 그들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힘들을 간과하는 데 있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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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대연쇄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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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이 작가를 진심으로 우려했더랜다. 굳이 따지자면 우려 반, 경악 반, 해방감 반으로 이루어진 도합 150%쯤의 침묵이었는데, 정말이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언제고 '모 소설가, 신흥종교 교주가 되었다고 선언해… 누리꾼들, 그럴 줄 알았다' 따위의 속보가 뜨더라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어떤 거대한 구조, 어쩌면 세계 자체가 나의 의지나 능력과는 무관히 돌아가는 감각을 아는가? 무엇이 인간인지 물은 적이 있는가? 진종일 얼굴 흉내를 내다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인 적이 있는가? 신의 의지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또 존재의 바닥까지 싹 뜯어 관찰하고 싶었던 적이 없는가? 당연한 '안돼'는 왜 안 되어야 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결국 포기해버린 적이 있는가?

p.15 〈사랑하는 신의 생일〉 이토록 복잡다단한 고통 바깥에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 힘든 것도 싫어하는 것도 소중한 것도 많지 않아서, 가끔은 몸이 가볍게 한 발짝 떠오른 느낌이 드는 사람. 이대로 허공을 한 계단씩 밟아나가면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질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땅으로 짓눌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 몸이 계속 하늘로 향하려는 게 문제인 사람이고, 그게 유일한 고민이다.

p.91 〈사랑하는 신의 생일〉 그러나 믿음은 실체가 없으므로 공허했고,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믿음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무한히 소급되어 불어나지만 결코 완전해지지 않는 갈망들. 가이우스는 그 공백이 기적처럼 채워지기를, 자신을 굽어살피는 신이 있기를 바랐다.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다…


언젠가의 물음을 되새겨보자. "만약 네가 세상을 끝장낼 수 있으면, 그러고 싶으냐?(『피와 기름』, 래빗홀)" '평범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안정과 순응에 대한 믿음 위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물론 여기서의 '평범'이란 내 평생 쟁취하지 못한 어떤 보편성 내지는 요구되는 인간-꼴 같은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위장과 학습이라는 양대산맥 작전, 가히 용을 썼다고 해도 좋을 만큼의 버둥버둥 끝에 장렬히 실패한 그것.

이제 와서는 '이레귤러' 정도로 둘러댈 수 있게 된, 언젠가는 실패, 또 언젠가는 덜-됨이었던 기억을 이 작가가 주야장천 질리지도 않고 까발려대고 있으니 수치스럽지 않을리가, 또, 정확히 같은 이유로 부적격자이자 부적응자로서의 삶을 마주하는 쾌감을 느끼지 않을리가. 다시 말해보자. 나는 반쯤 실패했다. 빛이 있으라, 하면 예, 하고 눈 뜨고 밥 먹고 살아가는 '자연스러움'을 획득하지 못하고 사방팔방 짜깁기로 흉내나 내는 선에 그쳤다는 말이다.

p.114 〈세상의 이름은 기린〉 그 만남의 결론이란 최선의 배려는 충분할 수 없으며 여분의 고통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라서,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당연해서 나는 괴로워졌다. 다행히도 그런 괴로움의 끝에는 홀가분함이 있는 것 같다. 있어야만 한다. 홀가분하지 않으면 미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가분함은 용서가 아니며 용서일 수도 없는 것이다.

p.172 〈빛 속에〉 노트복과 월패드의 희미한 표시등이, 창 밖으로 겹겹이 쌓인 건물의 조명들이, 거기에 웅크려 있을 누군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은주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어떤 것도 놓치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밝고 환한 빛줄기가, 소름 끼치도록 선득한 빛이 묵시록의 첫 장면처럼 그녀의 안에 펼쳐졌다. 은주는 잠시 빛으로 충만했다.


그래서일까. 여섯 편의 이야기들에서 전작들에 비해 어떤 '인간성'에 한발짝 가까워진 면모가 언뜻 내비칠 때마다 말 못할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이 구덩이에서 영원히 아늑하기로 했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만년고시반에서 혼자만 합격한 N수생을 보는 게 이런 느낌일까. 동시에 찬란하고 신기해 눈을 뗄 수 없었다. 낯선 빛에 오글오글 모여드는 생물들처럼. 너무 좋아 첫 수록작부터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쯤해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이 작가가 불현듯 인간 너머의 차원을 깨우쳤다고 벌떡 외쳐버릴까 진심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듯 세계를 창조하고 법칙을 틀어쥔 신이 있다면, 그 신의 변덕과 권태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영영 이해 불가능한 전능에 순종한다는 마음이 대체 무엇일지 두려워졌고, 이내 황홀경이 이런 걸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있다면, 말도 못하게 변덕스럽고 또 파탄난 자이기를.

p.147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 기적은 이 시대에 너무나도 흔하고, 우리는 너무 많은 빛을 알고 있으며, 열화상 카메라조차 특별하지 않다. 따라서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 사실에 새삼스러운 지겨움을 느꼈다.

p.249 〈존재의 대연쇄〉 내 문제의식은 이거였다: (…)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전적으로 도맡는 것과 하느님께서 의도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중에서 어떤 쪽의 죄가 더 큰가? 우리의 권한은 아닐지라도 하느님 께서 의도한 바를 온전히 행하는 게 나은가, 아니면 기존의 의도를 어겨서라도 월권의 영역을 축소하는 게 나은가? 또한 적극적인 월권으로 인해 발생한 고통과 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우리는 무엇인가. 세계는 어떻게 부스러지고 무너질 것인가. 어느 시인이 말했듯 쿵 소리가 아닌 조용한 흐느낌일 것인가, 아비규환의 적응형일 것인가, 천천히 삶기는 개구리마냥 어리둥절한 물음표와 말줄임표의 연속일 것인가. 그 세계에 아주 잠시나마 찬란한 순간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 작가 또한 여전히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의미로든 답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싶은 무언가에 슬쩍 발을 들여놓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또한. 한계 없이 확장하는 절망에서 따끔한 아픔, 처절한 고통을 본다. 존재의 감각, 최초에 한없이 가까운 증거를. 그렇게 여섯 절망 앞에 선 채 나름의 균열을 더듬는다. 뼈와 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묻어나는 희미한 징조를 붙든다. 무지 있으라. 시원이자 종말이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모든 엇-나감이 현실에 있으라. 물음, 있으라.

p.73 〈사랑하는 신의 생일〉 그 아픔이란, 윤리도 원칙도 없이 의무가 되는 것. 어쩌지 못할 상황을 어떻게든 현실로 이끄는 것. 역할과 상황과 거리를 뛰어넘어 누군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 그 누군가가 나의 삶을 뒤집어놓도록 허락하는 것. 그럼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산산이 잃어버리고 다시 만드는 것. 그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므로 철저히 저렴하고 이기적인 것.

p.170 〈빛 속에〉 하지만 3에서 1을 빼면 2가 되고, 거기에서 또다시 1을 빼면 남는 건 다시 1뿐이라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서 되풀이하는 것부터가 낭비처럼 느껴졌다. "아니야, 그건 낭비가 아니야. 그건 해야 하는 이야기인 거야. 당연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이야기인 거야." (…) 은주는 답할 말을 끝내 찾을 수 없었고, 경욱이 계단의 어둠 속에서 흔들리다가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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