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대연쇄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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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이 작가를 진심으로 우려했더랜다. 굳이 따지자면 우려 반, 경악 반, 해방감 반으로 이루어진 도합 150%쯤의 침묵이었는데, 정말이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언제고 '모 소설가, 신흥종교 교주가 되었다고 선언해… 누리꾼들, 그럴 줄 알았다' 따위의 속보가 뜨더라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어떤 거대한 구조, 어쩌면 세계 자체가 나의 의지나 능력과는 무관히 돌아가는 감각을 아는가? 무엇이 인간인지 물은 적이 있는가? 진종일 얼굴 흉내를 내다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인 적이 있는가? 신의 의지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또 존재의 바닥까지 싹 뜯어 관찰하고 싶었던 적이 없는가? 당연한 '안돼'는 왜 안 되어야 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결국 포기해버린 적이 있는가?

p.15 〈사랑하는 신의 생일〉 이토록 복잡다단한 고통 바깥에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 힘든 것도 싫어하는 것도 소중한 것도 많지 않아서, 가끔은 몸이 가볍게 한 발짝 떠오른 느낌이 드는 사람. 이대로 허공을 한 계단씩 밟아나가면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질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땅으로 짓눌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 몸이 계속 하늘로 향하려는 게 문제인 사람이고, 그게 유일한 고민이다.

p.91 〈사랑하는 신의 생일〉 그러나 믿음은 실체가 없으므로 공허했고,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믿음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무한히 소급되어 불어나지만 결코 완전해지지 않는 갈망들. 가이우스는 그 공백이 기적처럼 채워지기를, 자신을 굽어살피는 신이 있기를 바랐다.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다…


언젠가의 물음을 되새겨보자. "만약 네가 세상을 끝장낼 수 있으면, 그러고 싶으냐?(『피와 기름』, 래빗홀)" '평범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안정과 순응에 대한 믿음 위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물론 여기서의 '평범'이란 내 평생 쟁취하지 못한 어떤 보편성 내지는 요구되는 인간-꼴 같은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위장과 학습이라는 양대산맥 작전, 가히 용을 썼다고 해도 좋을 만큼의 버둥버둥 끝에 장렬히 실패한 그것.

이제 와서는 '이레귤러' 정도로 둘러댈 수 있게 된, 언젠가는 실패, 또 언젠가는 덜-됨이었던 기억을 이 작가가 주야장천 질리지도 않고 까발려대고 있으니 수치스럽지 않을리가, 또, 정확히 같은 이유로 부적격자이자 부적응자로서의 삶을 마주하는 쾌감을 느끼지 않을리가. 다시 말해보자. 나는 반쯤 실패했다. 빛이 있으라, 하면 예, 하고 눈 뜨고 밥 먹고 살아가는 '자연스러움'을 획득하지 못하고 사방팔방 짜깁기로 흉내나 내는 선에 그쳤다는 말이다.

p.114 〈세상의 이름은 기린〉 그 만남의 결론이란 최선의 배려는 충분할 수 없으며 여분의 고통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라서,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당연해서 나는 괴로워졌다. 다행히도 그런 괴로움의 끝에는 홀가분함이 있는 것 같다. 있어야만 한다. 홀가분하지 않으면 미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가분함은 용서가 아니며 용서일 수도 없는 것이다.

p.172 〈빛 속에〉 노트복과 월패드의 희미한 표시등이, 창 밖으로 겹겹이 쌓인 건물의 조명들이, 거기에 웅크려 있을 누군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은주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어떤 것도 놓치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밝고 환한 빛줄기가, 소름 끼치도록 선득한 빛이 묵시록의 첫 장면처럼 그녀의 안에 펼쳐졌다. 은주는 잠시 빛으로 충만했다.


그래서일까. 여섯 편의 이야기들에서 전작들에 비해 어떤 '인간성'에 한발짝 가까워진 면모가 언뜻 내비칠 때마다 말 못할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이 구덩이에서 영원히 아늑하기로 했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만년고시반에서 혼자만 합격한 N수생을 보는 게 이런 느낌일까. 동시에 찬란하고 신기해 눈을 뗄 수 없었다. 낯선 빛에 오글오글 모여드는 생물들처럼. 너무 좋아 첫 수록작부터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쯤해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이 작가가 불현듯 인간 너머의 차원을 깨우쳤다고 벌떡 외쳐버릴까 진심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듯 세계를 창조하고 법칙을 틀어쥔 신이 있다면, 그 신의 변덕과 권태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영영 이해 불가능한 전능에 순종한다는 마음이 대체 무엇일지 두려워졌고, 이내 황홀경이 이런 걸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있다면, 말도 못하게 변덕스럽고 또 파탄난 자이기를.

p.147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 기적은 이 시대에 너무나도 흔하고, 우리는 너무 많은 빛을 알고 있으며, 열화상 카메라조차 특별하지 않다. 따라서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 사실에 새삼스러운 지겨움을 느꼈다.

p.249 〈존재의 대연쇄〉 내 문제의식은 이거였다: (…)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전적으로 도맡는 것과 하느님께서 의도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중에서 어떤 쪽의 죄가 더 큰가? 우리의 권한은 아닐지라도 하느님 께서 의도한 바를 온전히 행하는 게 나은가, 아니면 기존의 의도를 어겨서라도 월권의 영역을 축소하는 게 나은가? 또한 적극적인 월권으로 인해 발생한 고통과 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우리는 무엇인가. 세계는 어떻게 부스러지고 무너질 것인가. 어느 시인이 말했듯 쿵 소리가 아닌 조용한 흐느낌일 것인가, 아비규환의 적응형일 것인가, 천천히 삶기는 개구리마냥 어리둥절한 물음표와 말줄임표의 연속일 것인가. 그 세계에 아주 잠시나마 찬란한 순간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 작가 또한 여전히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의미로든 답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싶은 무언가에 슬쩍 발을 들여놓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또한. 한계 없이 확장하는 절망에서 따끔한 아픔, 처절한 고통을 본다. 존재의 감각, 최초에 한없이 가까운 증거를. 그렇게 여섯 절망 앞에 선 채 나름의 균열을 더듬는다. 뼈와 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묻어나는 희미한 징조를 붙든다. 무지 있으라. 시원이자 종말이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모든 엇-나감이 현실에 있으라. 물음, 있으라.

p.73 〈사랑하는 신의 생일〉 그 아픔이란, 윤리도 원칙도 없이 의무가 되는 것. 어쩌지 못할 상황을 어떻게든 현실로 이끄는 것. 역할과 상황과 거리를 뛰어넘어 누군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 그 누군가가 나의 삶을 뒤집어놓도록 허락하는 것. 그럼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산산이 잃어버리고 다시 만드는 것. 그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므로 철저히 저렴하고 이기적인 것.

p.170 〈빛 속에〉 하지만 3에서 1을 빼면 2가 되고, 거기에서 또다시 1을 빼면 남는 건 다시 1뿐이라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서 되풀이하는 것부터가 낭비처럼 느껴졌다. "아니야, 그건 낭비가 아니야. 그건 해야 하는 이야기인 거야. 당연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이야기인 거야." (…) 은주는 답할 말을 끝내 찾을 수 없었고, 경욱이 계단의 어둠 속에서 흔들리다가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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