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
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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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어김없이 돌아온 선거철, 곳곳에 익숙한 수사와 깊숙이 숙이는 미소들이 지겹게도 보인다. 이 구태의 정점이자 꽃이라 할만한 것은 이번에도 벽보와 현수막에 큼지막한 글씨로 박힌 각종 선언과 치적행사일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시민의 발이 되겠습니다. 시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공약 이행이 어떻고, 저떻고… 이에 시민들은 말한다. 뻥 치시네!

진작 물었어야 했다. 숱하게 물어온 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왜 정치인들의 것이 되었는가?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째서 만년 탁상공론에 허울대잔치가 되는가? 선거는 정말 주권행사의 장이 되고 있는가? 청장님, 시장님, 의원님, 각종 '님'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의탁하거나 넘겨주는가? 철마다 내세우는 각종 정책은 시민의 삶과 어떻게 유리되고, 그 결과 정책은 어떻게, 언제, 왜 실패하는가?

p.54 정책 의제는 단순히 '선택된 사회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주체, 곧 결정자가 우월적 힘을 바탕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들이 특정 사안을 공식 의제로 설정하고 해결 과제로 선언할 때, 사회 문제는 비로소 정책 의제로서의 생명력을 얻는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리 뜨거운 여론과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어도 정책 주체가 이를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현상'으로 남을 뿐이다.

p.79 오늘날 국민은 정책의 결과만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고 싶어 하며,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정책의 시대는 저물었다. 국민과 함께 설계하고 검증하는 정책만이 살아남는 시대, '열린 정책 생태계'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전략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되는 자리에 국민이 주권자이자 권력의 원천임을 명시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상 양당제로 이분된 국가, 실제 삶과의 괴리가 커져만 가는 각종 정책들, 허울뿐인 성과발표와 바닥을 치는 정치 신뢰도까지. 저자가 말하듯 정책은 선택된 아젠다인 동시에 결정권자가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정책의 대상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동시에 '결정권자'의 주의와 실천 의지가 개입된 결과라는 뜻이다.

위기상황마다 발등에 불 떨어진듯 잠시 모였다 이내 심드렁한 냉소주의자로 흩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데에는 정당, 정치구조, 의사결정체와 시민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뿌리깊은 문제가 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말할 수 없다. 설령 누군가 진짜 국민, 진짜 성원이라는 교묘한 호도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전용한들 반박조차 쉽지 않을 뿐이다.

p.155 정당이 정책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배경에 대해 장훈 중앙대 교수는 세 가지 구조적 원인을 짚는다. (…) 정당이 시민의 일상적인 요구와 삶의 현장에서 유리된 채 엘리트 중심의 정치 게임에 함몰되면서, 정책을 매개로 한 시민과의 접점을 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대통령과 관료 중심의 폐쇄적 정책 결정 구조'가 정당의 입지를 좁혔다.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이 청와대와 경제 관료의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구조 속에서, 정당은 정책의 주도자가 아닌 사후 추인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p.201 과연 우리 사회의 싱크탱크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권력의 입맛에 맞춘 '답정너' 식 보고서를 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는가? 싱크탱크는 모름지기 당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이념의 벽을 넘어 대안과 해법을 치열하게 논쟁하는 '사상의 용광로'이자 '정책의 산실'이어야 한다.


긴 겨울을 지난 이후, '권력의 추가 기운' 것이 확실해지자 거대양당과 선출직 출마자들 모두가 저마다 '빛의 혁명'을 찬사하고 포섭하려 안간힘이다. 정치권력이 인기몰이로 결정된 지 오래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가 반복해 말하듯 오늘날 정책이 현실성도, 정의도 잃은 채 이권놀음이 된 것은 결국 제도권의 정치와 정치의 언어, 그리고 그 필요성과 실질적 권력이 시민과 유리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정책결정권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권력을 독점코자 하는 자들이 시민에게서 거세하고 싶어하는 것 또한 시민의 정치참여와 정책관심도라는 뜻이기도 하다. 선거철이다. 우리는 지지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진정으로 정치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제야말로 정치를 주권자의 것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그 지난한 과정은 여전히 시급한 일로 우리 앞에 남아있다. 선거가 시작되었다. 정치는 끝나지 않는다. 서둘러야 할 때다.

p.24 정책 오작동의 핵심은 시민과의 '단절'에 있다. 투표를 마친 시민은 정작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그 빈자리를 특정 이익 집단의 논리나 관성적인 행정이 채우면서 정책은 생명력을 잃는다. 이러한 제도적 결함과 불통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투표함 너머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시민의 일상이 정책에 끊임없이 반영될 수 있는 열린 공론장을 마련하고, 단순한 다수결을 넘어 깊은 토론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숙의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이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357 시민이 스스로 학습하고 의견을 나누며 공동체의 미래를 직접 설계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넥스트 민주주의' 의 모습이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결정해주는 시혜적 정치는 이제 끝났다. 이제 정치는 시민이 이끌고, 권력은 그 길을 닦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는 비로소 수사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의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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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
복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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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아이돌 좋아하세요? 케이팝 좋아하세요? 소녀문화, 빠순이, 오빠부대… 내 가히 여자됨의 구렁텅이를 지나온 평생토록 시도했으나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케이팝, 개중에서도 아이돌 팬 흉내다. 왜 팬-되기가 아닌가, 하면, 말 그대로 흉내, 정상성 위장을 기도한 가장마저도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케이팝(과 그 요소들)에 대한 사랑은 내 마음 한구석에서 내도록 이해 불가한 열정과 한데 뭉뚱그려진 선망 반 실패 반의 흔적으로 남아왔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지 않은가? 이러게나 소비자와 그 대상을 주권과 착취의 어드메로 뒤섞어놓는 산업이 없다. 개인의 존재 자체를 이미지화해 모든 요소를 상품으로 내거는 일 또한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이 아니던가. 전제왕권기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놀라운 일이다. 분석과 조롱, 상징화와 납작 눌린 일반화의 양면을 오가는 케이팝, 그리고 그 팬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p.54 케이팝 팬들은 아이돌을 향해 사랑과 영원을 맹세하고 그 충만함을 즐기며 커뮤니티를 이룬다. 동시에 그들은 그 맹세 속에 애정, 질투, 집착, 광기에 이르는 갖가지 감정을 쏟아부은 뒤 그것을 멋대로 배합해 오직 자신만 이해하는 사랑의 법칙을 만든다. 최애가 혐오 발언을 일삼을 땐 적당히 타일러서 훈방 조치를 했다가도 연애 정황이 포착되는 순간 즉시 사형선고를 내려 버리는 독재자의 율법이다. 욕망을 억압하며 만든 환상이 가장 기괴한 형태의 사랑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p.57 케이팝은 사랑과 집착, 믿음과 맹신 사이를 줄타기하는 음악이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허공이니 우리는 늘 날카롭고 예민하다 (…) 상대를 소유하거나 파괴하는 탐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환상 뒤에 숨긴 내 질척이는 갈망과 웅크린 결핍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인간을 욕망한다면 그것을 더욱 세심히 돌봐야 한다. 거창한 말들로 관계를 정의하지 말고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는 걸 자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치심과 죄책감, 그럼에도 일상 전반에 뿌리내리는 사랑, 내 입장에서는 생판 모르는 남에 대한 그 피같고 살같은 사랑은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앞서 말한 그 여자됨의 구렁텅이를 지나오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나의 일면을 지배하는 물음이다. 어느 정도냐면, 마음 같아선 붙잡아 가둬놓고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을 때까지 쥐어짜가며 물어보고 싶을 만큼.

이 물음은 필연히 케이팝 산업이 무엇을 셀링하는지, 무엇에 기반하는지, 같은 이유로 어떤 이유로 사랑받고 확산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여자아이 집단'에 온전히 소속된 적 없던 나의 두려움은 세계적 인기를 끄는 가사와 퀴어니스의 차용을 교묘히 파고드는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지지 기반으로 역전되지 않았는가? 그때의, 지금의 사람들은 누구를, 무엇을, 왜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 가히 사랑의 불나방.

p.110 여자임에도 여자를 흉내 내야 했던 순간들, 여자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틀린 여자'가 되었던 순간들이 자신이 '여자'임을 설명해야 하는 여자를 통해 해방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수치심과 나의 수치심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여장 여자'로서 그와 같은 수치심을 공유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통해 정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계책을 세운다. 세상 모든 걸 저 좋은 대로 끌어다 쓰는 '진짜 여자'만의 얄밉고 오만한 특성대로.

p.166 자두의 무대에서 엽기적인 것은 오직 하나. 그 거추장스러운 콘셉트를 두르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그의 엄청난 성량뿐이었다. (…) 맙소사. 자두는 엽기가 맞았다. 세상이 그를 엽기라 부른 것은 형광색 천 쪼가리를 두른 외형이 아닌 이 기운 때문이었겠구나. '상식적이지 않고' '거부감이 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그 모든 요건을 충족한 엽기, 아니 여자로서의 기운.


오해를 무릅쓰고 단언하자면, 케이팝 팬들은 어떤 식으로든 미친 자들이다. 광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걸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다… 견고하게 합의된 비-정상에서 안착한 자들만이 그를 향유할 자격을 갖는다. 개중 경계가 흐려지는 자와 '일코' 얼굴을 완벽히 갈아끼우는 자로 나뉠 뿐… 이라고 하면 이제 나는 전방위 공격에 두들겨맞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 치고 광적이지 않은 게 어디 있단 말인지.

게다가 그 '판'이 온전히 관심과 열정에 뿌리에 둔 자본(혹은 그 역)이라면 더더욱. 사랑해서 미치고, 미친 사랑을 한다. 모욕과 수치를 열광과 자기이해로 역전하는 희한한 세계야말로 케이팝과 그 팬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백하자면, 첫 페이지부터 기가 쫙 빨려서 전심전력으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만일 내가 좋아하는 것, 예를 들면 책을 주제로 하는 이런 책이 나오면 절대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공감성 수치와 고통을 직면할 재간이 없으므로.

p.78 혹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 다시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 사랑이 만든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곧 사랑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철저히 설계된 사랑의 볼모가 되어 자책과 회피를 반복하다 몇 번이고 무너지는 사람들. 그러나 광적이고, 자멸적이며, 폭력적일지라도 결코 가짜이지 않은 그들의 사랑.

p.217 수치심을 알고 품위를 지키는 건 반론의 여지 없이 그냥 좋은 일이다. 부끄러움을 알고 행동을 제어하는 건 인간다운 일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기에 수치심을 알고도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머물게 된다. 많은 사람이 '길티 플레저'라 이름 붙인 그 불쾌한 낮잠 같은 상황 말이다. 케이팝을 듣고, 케이팝을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제 발로 갇히는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을 덮으며 깨달은 두 가지가 있다. 책으로는 이만한 도파민을 뽑아내기가 책 팔아 부자되기만큼 어려울 것이며 만약 나온다면 안 읽을 재간 또한 없어 필연히 '길티'에 몸부림치며 슬픔의 OO파티를 벌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뒤죽박죽 감상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이 시대의 사랑과 수치, 폭력은 분리되지 않는 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나 또한 어느 면에선가는 이 해괴망측하고 질척질척한 사랑에 허우적대고 있다는 말이다. 평생을 궁금해했던 어떤 '사랑'은 이런 형태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언젠가 보았던 말처럼, 사랑을 쪽팔리게 하는 OO들을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는가. 사랑하는 자여, 두려워 말고 힘차게 전진하시라. 티켓값은 비싸고 영통은 짧습니다. 우는 건 끝나고 트위터에 움짤주접까지 다 올리고 하세요...

p.26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좌절을 살피는 그의 태도는 얼마나 성숙한가? 대상이 남기고 간 분노를 어루만지는 것까지가 사랑이라니. 케이팝이 무엇인지 묻는 말에 좆같지만 사랑한다는 말로 얼버무리곤 했던 나는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수치심, 죄책감, 두려움과 마주한 한 사람의 용기 앞에서 눈부신 모멸감을 느꼈다.

p.257 실제로 케이팝은 흑독한 아카데미 시스템을 제외하면 지금 한국 사회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으며, 이미 해외 시장이 조성된 산업이 한국을 닮아야 할 이유도 없다. (…) 지금 우리에게 케이팝은 '자원'이 아니라 우리가 묵인한 사회의 병폐와 우리도 몰랐던 사회의 매력을 다양한 각도로 투영해 볼 수 있는 프리즘이다. 이 프리즘 앞에 서서 다같이 머쓱하게 웃어보자. 그것은 '가짜'가 '진짜'가 되어버린 웃지 못할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스처일 것이다.



#펑펑 #복길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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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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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듣고 말해본 적이 있을 말들이 있다. 싸가지 없는 놈, 나이도 어린 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노친네… 너무 쉽게 말해져 혐오라고 불리지도 않는 이 말들에는 나이라는 공통점이 도사리고 있다. '애새끼'도 모자라 '유충'에서부터 잼민이, 급식충, MZ, 아줌마, 영포티, 틀딱, 노친네까지, 우리 사회에서 멸시 어린 연령 집단으로 묶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툭하면, 주로 저 마음 불편한 소리에 '갈라치기 하지 말라'며 예의 '준엄한 꾸짖음'이 횡행하는 시대에 누구보다도 서로를 촘촘하게 규정짓고 혐오한다. 나이보다는 개인적 속성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청년세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고하게 사회 전반을 구성하는 연령주의적 제도 및 인식은 필연히 개인과 사회 수준 모두에서 충돌하고 갈등한다.

p.9 연령차별주의는 가장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차별이면서 가장 잔혹한 거부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는 달리 연령차별주의 피해 당사자들은 차별에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이는 누구나 다 평등한 속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연령차별주의가 너무나 우리 의식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제도화된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p.65 기존의 나이 멸칭이 지겨워지면 새로운 나이 멸칭을 만들어 특정 세대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행태, 계속해서 낙인찍을 나이대를 찾는 행태, 이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나이대는 다 제각각의 멸칭을 갖게 되었다. 멸칭이 없는 나이대가 없을 지경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이 멸칭으로 조롱하는 사회, 지독한 연령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언젠가 SNS 댓글에서 본 적이 있다. 임산부 우선석에 노인이 앉아 비켜주지 않았다는 토로에 달린 내용 중 "10년만 지나면 그런 노인네들이 다 없어져서 깨끗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나름의 '위로'가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황당하고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혐오에 있어 개인의 문제와 사회구조의 문제가 이렇게나 뒤섞여 있구나, 하는 생각에 댓글창을 떠나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초상은 배제와 구분에 다름아니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한국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조롱과 혐오일 것이다. 이 둘은 극단적인 타자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져있듯 구분짓기는 혐오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혐오할 수 없다. 혐오 대상으로서의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은 타집단, 그것도,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서는 절대 내가 아닌 이들에게 전가되어야 하므로.

p.88 나이에 따른 혐오스러운 멸칭들이 각종 언론과 일상 대화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이는 '일상성'을 넘어서 '사회성'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 이제는 우리 사회가 언어를 통한 탈인간화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인식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대안적 표현을 학습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p.144 늘어난 평균수명으로 인해 현대사회에서 노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삶을 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전의 어떤 세대도 지금의 노년 세대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오랫동안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고령층은 문화적 전위 의 역할을 떠맡아 새로운 노년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 전위의 역할을 하거나 새로운 노년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 우리 사회의 연령주의는 너무 막강하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단순히 살아온 햇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대되는 역할과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금지하는 강력한 규범이자 위계로 기능한다. 이것은 탈-규범적 전위를 요구하는 동시에 '감히' 전형을 벗어나는 이레귤러를 가혹하게 조롱하고 탄압하는 모순적 사회에서 이중구속으로 기능한다. 연령주의의 폐단은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는다. 아젠다 선정에서 실질적 참정권까지, 정치-제도의 곳곳에 연령주의의 뿌리는 깊고도 촘촘하다.

예의 청년정치를 표방하는 모 정치인을 떠올려보자. 무능과 도덕성은 차치하고라도, 청년유권자에 '우리'로 묶이려 시도하며 그 자신이 마치 아이콘인 것처럼 행세하는 전략이 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가 청년이라고 불릴 만큼, 사회초년생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정치기득권이 고령화 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64 나이 멸칭은 특정한 개인들의 행태를 전체 나이대의 공통적인 특성처럼 확대 재생산한다. 우리 사회는 특정 나이대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와 이들에게 기대하는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자꾸 특정 나이대 사람들에게 뭘 해야 한다고 규정을 내린다. 그 규정에 어긋나면 멸칭이 만들어지고, (...) 유행이 되어 빠르게 번지고 오프라인까지 선을 넘어 퍼져 나간다.

p.321 연령대마다 따라붙는 편견과 차별은 언제나 부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맞이하게 될 인생의 여러 단계를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 꼽히는 것도 이런 나이에 대한 차별이 한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전제가 해소될 때 우리는 생애주기별로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유권자의 목소리'는 평등하게 대표되지 않는다. 소구와 '표밭'이 따로 노니 아젠다는 자연히 과시행정에 급급해진다. 고령화와 동시에 경제-기득권화 된 정치권이 호소하는 부양 부담의 증가는 과연 누구의 '억울함'인가. 그놈의 '갈라치기', 과대표와 청년 호도 정치인의 부상은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끊임없이 나 아닌 집단을 배격하는 인식은 과거와 미래, 사회와 개인 모두를 옭아맨다.

삶은 분절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어리게 태어나 늙어 죽는다. 어느 순간도 삶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어려서, 젊어서, '적당한 나이'를 지났기 때문에 '임시'로 밀려나기를 요구받는 사회에서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불안하다. 결국 나이는 수로 계산될 수 없는 삶을 욱여넣지 않는, 그저 '중요한 숫자'일 뿐이어야 할 것이다. 생의 모든 시기가 그 때만의 가치를 갖는, 제각기 어떤 사람의 바로 그 순간이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라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p.204 대통령이 될 나이를 높게 잡은 것은 2030 청년세대의 정치적 역량 약화와 기회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고령화로 인해 선거에서 노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게 되고, 정치인들은 고령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공약 경쟁을 함으로써 청년을 위한 정책은 감소할 가능성이 있는데 피선거권 제한까지 더해지니 문제는 한층 심각하다.

p.243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치인이나 재벌 등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민'에게만 노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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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
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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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 생계를 위해 하는 일. 먹고 사는 일. 밥벌이. 그 징하고 찡한 이야기들. 비단 먹고 숨쉬며 살아가듯이 자연스러운,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기꺼이 나서는 일, 이렇게 해야만 살 수 있기에 떨쳐일어나는 일. 그 모든 일들이 생업,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다. 생업이란 사람을 살리고, 살게 하는,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다.

이 책은 저자가 말 그대로 밥을 짓고 먹이는 사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 함께 사는 삶으로 나아가자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 듣고, 묻고, 나눈 시간의 기록이다. 그래서일까, 곳곳에 먹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매일같이 상 차려 먹이는 사람, 그 사람 밥 먹이던 이야기, 낯 모르는 사람들 끼니를 따라다니며 챙기는 사람…

p.12 밥과 일에 대한 가치 정립. 우리는 이 절대적인 삶의 필수 조건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투자로 얻은 금융 소득이 근로 소득을 앞서는 사회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은 갈수록 초라해진다. 좋은 직업의 '좋음'은 연봉만 우선시 된다. 그러나 돈이 없어도 살기 어렵지만 또 돈만으로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다.

p.32 "밥 하는 엄마보다는 혁명가 엄마가 좋아요." 하지만 매일 1700인 분의 밥을 짓는 사람이 혁명가다. 밥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실행이며, 밥은 흩어진 존재들을 모으는 점성 강한 연결의 수단이다. 인간은 밥 주위로 모여든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덤덤하게, 그러나 뿌듯하게 말한다. 뼈빠지게 일하고, 때로는 일신의 안락함마저 내던지고 달려들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일은 하지 않았다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노동의 고귀함을, 스스로와 세계를 떠받치는 자의 자부심이란 것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눈물은 아래로 떨어져도 밥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고 했던가,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작가는 먹는 일에는 구차한 데가 있다, 고 말했다. 그 말은 그 밥 한 술 떠넣지 못하는 입을 아는 자의 치욕이다. 먹을 때가 아닌데, 들어갈 속이 아닌데도 꾸역꾸역 밀어넣어야 하는 자의 수치심이다. 정의에 가장 가까운 감정은 수치심이다. 긍지에 가장 가까운 말이 슬픔이듯이.

p.92 "환대란 내가 뭘 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있던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가 주가 될 때, 주객이 뒤집어질 때 가능하죠. 그래서 내 자리를 뺏길 각오가 돼 있어야 해요. 저는 그게 나쁘지 않았어요. 한 번이라도 관계가 전복되는 건 달라요."

p.278 화살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화살이 제대로 사람을 찌르지 못할까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갑옷이 사람을 보호하지 못할까를 걱정한다. 국어 교사 박민영은 갑옷을 만드는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입힐 언어의 씨줄과 경험의 날줄로 짠,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갑옷을 짜는 예술가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노동절이다.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본다. 도처에 일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채널 자막에는 일하다 죽고 다친 사람들이 줄지어 흘러갔다. 하루도 빠지는 날 없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으로 밀려갔다. 앞서 생업은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라 했다. 그러니 일하다 죽는 사람, 일 때문에 죽는 사람, 그 일이 아니었다면 견디지 않았어도 될 일에 죽어버린 사람이, 그 죽음이 얼마나 처참하고 참담한 일이란 말인가.

누구도 일하는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람이 사는 모든 일에 노동이 있다. 그러므로 노동을 말하는 것은 곧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과도 같다. 노동이 천함과 그악스러움의 대명사로 읽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수고와 감사를 자주 잊는다. 무심히 지나치는 얼굴들, 말끔한 공간의 곳곳을 보며 묻는다. 나의 오늘에는 어떤 노동이, 몇 명의 일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p.100 한국 사회에서 유가족이 된다는 건 바다 같은 슬픔에 잠기고 하늘 같은 분노에 휩싸이는 일이다. 사망 원인을 죽은 사람의 과실로 돌아가는 사용자 측과 질긴 싸움이 시작되고 사람이 일하다가 죽었는데도 기업은 벌금만 내면 그만인 잔인한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니 가슴에 불길이 잦아들 날이 없다.

p.227 그가 싸우는 건 과격해서가 아니라 절실해서다. 자식을 낳은 엄마이자 자식이 죽는 걸 본 사람이라서다. 사랑을 줄 때조차 사랑을 받은 한 존재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커서다. 모르는 이들을 향한 이타심,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사명감 같은 인간 보편의 감정에 따르는 것이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은유 #생업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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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30주년 특별판) - 소설로 읽는 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25년 12월
평점 :
절판


철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처음 읽은 철학책을 기억하시나요? 처음으로 좌절케한 개념은? 또, 처음으로 이해의 빛을 마주하고 전율했던 때의 그 기쁨을 기억하시는지. 수많은 이들의 처음과 최고를 차지하고 있는 그 이름, 『소피의 세계』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불친절의 구덩이에 상냥하게 내던져지는 느낌이라니. 나도 모르게 '그렇지, 이거지!'를 외쳤다고 하면, 알 사람은 알겠지요.

유사 이래 철학과 철학자는 사회의 주류 관심사, 쉽게 말해 메이저였던 적이 없었다. 대체로 골치 아프고 포도청 저리가라 하는 목구멍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소리로 여겨져왔다는 뜻이자, 일상 바깥의 문제로 치부된 탓에 남는 게 시간이거나 아예 존재의 고통을 선명히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이나 사색에 잠긴다는 게 거지반 통설이었다는 뜻이다.

p.151 소피는 플라톤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영혼이 육체에 자리 잡기 전 이데아의 세계에서 영원한 '다람쥐'를 소피가 보았을지도 모른다. 소피가 이미 한 번 산 적이 있다는 생각이 맞을까? 지금의 육체 를 얻기 이전에 정말 소피의 영혼이 실재했을까? 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는 작은 금괴, 바로 소피의 육체가 늙어 죽어도 계속 살아 있는 보석과도 같은 영혼이 소피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걸까?

p.626 우리는 살아 있는 행성이야. 소피야! 우주 안에서 불타는 태양 주위를 항해하는 커다란 배지. 하지만 우리 각자는 유전자라는 짐을 싣고 인생을 항해하는 배이기도 해. 우리가 이 짐을 다음 항구로 실어 나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헛된 것은 아니겠지…


느닷없이 시작된 소피와 크눅스 선생의 철학 여정은 서양철학사의 기원에서 지금 여기의 인간 정신과 물질성까지 총망라하며 종잡을 수 없이 이어지는 중에 때때로 갈등에, 벽과 '낯섦'에 맞부딪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야말로 '순식간에' 박차를 가하며 독자에게 달려들다 급기야 종국에는 아주, 낯설고 고난스러운 시작을 예고하며 독자에게 다음을 넘긴다.

실존과 현실, 존재와 관념이 마주치는, 힐데와 소피 그리고 크눅스 선생과 이 이야기의 '동인'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반전하고 합의 길로 솟구치게 되는 걸까? 읽는 내내 '천천히'를 되뇌어야 했던 이야기의 끝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철학적 사고에 발을 들여놓는 책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각을 다시 맛보는 기쁨과 동시에 충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p.408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이성을 통해 논증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어. 책임 있는 행동은 이성을 예민하게 갈고닦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고통과 행복을 같이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을 예민하게 갈고닦아야 가능해지는 거야. (…) 전쟁이 끝난 뒤에 많은 나치가 처벌을 받았지만 그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잔인했기 때문이야."

p.451 "소령은 우리의 작은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게 그가 전능하다는 뜻은 아니야. 어떤 경우든 우리는 그가 전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해. (…) 문제는 우리가 존재 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며 누구냐는 거야. 우리가 단지 소령의 분열된 의식 속의 자극, 그의 의식 속의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쩌지는 못할거야."


이 길고 사뭇 공격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에는 이성의 어떤 면에 초월적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이전의 '당연한' 도식에 꼭 들어맞지 않는, 그 안에 구겨넣을 수 없는 어떤 신비한 체험과 같은 사건들이 드러내는 철학의 속성이 있다. 세계를 묻는 일은 나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 근원을 뒤흔들 수밖에 없다는 것. 철학의 개념과 명제들은 안도와 순종을 위해 밝혀지고 선언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영혼을 지져놓는(전기가오리!) 충격에 가깝다.

철학의, 사유의 죽음이 공언되는 이 시대에 누군가 내게 철학이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바로 이렇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학문이라 하겠다. 깊이 생각하는 것, 발견하는 것, 나의 자리를 기꺼이 떠나고 뒤집어 엎는 용기. 지혜를 사랑하고, 깊이 사유하여 밝히는(哲) 것은 그렇게 세계와 존재를 잇는다고,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도 또다시 물을 수 있게 한다고. 그러니 함께 철학-함으로 나아가자고, 기꺼이 묻고 또 사유함으로 나아가자고.

p.10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은,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 우리에게는 서로를 이어주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함께 책을 읽는 경험은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p.679 "문제는 역사가 종말로 향해 가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인가 하는 거야. 우린 더 이상 한 도시나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니야. 우리는 전 지구적인 문명 속에 살고 있는 거란다. (...) 어쩌면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은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일지도 몰라…"


*서평도서제공: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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