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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
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어김없이 돌아온 선거철, 곳곳에 익숙한 수사와 깊숙이 숙이는 미소들이 지겹게도 보인다. 이 구태의 정점이자 꽃이라 할만한 것은 이번에도 벽보와 현수막에 큼지막한 글씨로 박힌 각종 선언과 치적행사일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시민의 발이 되겠습니다. 시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공약 이행이 어떻고, 저떻고… 이에 시민들은 말한다. 뻥 치시네!
진작 물었어야 했다. 숱하게 물어온 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왜 정치인들의 것이 되었는가?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째서 만년 탁상공론에 허울대잔치가 되는가? 선거는 정말 주권행사의 장이 되고 있는가? 청장님, 시장님, 의원님, 각종 '님'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의탁하거나 넘겨주는가? 철마다 내세우는 각종 정책은 시민의 삶과 어떻게 유리되고, 그 결과 정책은 어떻게, 언제, 왜 실패하는가?
p.54 정책 의제는 단순히 '선택된 사회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주체, 곧 결정자가 우월적 힘을 바탕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들이 특정 사안을 공식 의제로 설정하고 해결 과제로 선언할 때, 사회 문제는 비로소 정책 의제로서의 생명력을 얻는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리 뜨거운 여론과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어도 정책 주체가 이를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현상'으로 남을 뿐이다.
p.79 오늘날 국민은 정책의 결과만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고 싶어 하며,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정책의 시대는 저물었다. 국민과 함께 설계하고 검증하는 정책만이 살아남는 시대, '열린 정책 생태계'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전략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되는 자리에 국민이 주권자이자 권력의 원천임을 명시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상 양당제로 이분된 국가, 실제 삶과의 괴리가 커져만 가는 각종 정책들, 허울뿐인 성과발표와 바닥을 치는 정치 신뢰도까지. 저자가 말하듯 정책은 선택된 아젠다인 동시에 결정권자가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정책의 대상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동시에 '결정권자'의 주의와 실천 의지가 개입된 결과라는 뜻이다.
위기상황마다 발등에 불 떨어진듯 잠시 모였다 이내 심드렁한 냉소주의자로 흩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데에는 정당, 정치구조, 의사결정체와 시민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뿌리깊은 문제가 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말할 수 없다. 설령 누군가 진짜 국민, 진짜 성원이라는 교묘한 호도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전용한들 반박조차 쉽지 않을 뿐이다.
p.155 정당이 정책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배경에 대해 장훈 중앙대 교수는 세 가지 구조적 원인을 짚는다. (…) 정당이 시민의 일상적인 요구와 삶의 현장에서 유리된 채 엘리트 중심의 정치 게임에 함몰되면서, 정책을 매개로 한 시민과의 접점을 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대통령과 관료 중심의 폐쇄적 정책 결정 구조'가 정당의 입지를 좁혔다.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이 청와대와 경제 관료의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구조 속에서, 정당은 정책의 주도자가 아닌 사후 추인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p.201 과연 우리 사회의 싱크탱크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권력의 입맛에 맞춘 '답정너' 식 보고서를 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는가? 싱크탱크는 모름지기 당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이념의 벽을 넘어 대안과 해법을 치열하게 논쟁하는 '사상의 용광로'이자 '정책의 산실'이어야 한다.
긴 겨울을 지난 이후, '권력의 추가 기운' 것이 확실해지자 거대양당과 선출직 출마자들 모두가 저마다 '빛의 혁명'을 찬사하고 포섭하려 안간힘이다. 정치권력이 인기몰이로 결정된 지 오래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가 반복해 말하듯 오늘날 정책이 현실성도, 정의도 잃은 채 이권놀음이 된 것은 결국 제도권의 정치와 정치의 언어, 그리고 그 필요성과 실질적 권력이 시민과 유리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정책결정권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권력을 독점코자 하는 자들이 시민에게서 거세하고 싶어하는 것 또한 시민의 정치참여와 정책관심도라는 뜻이기도 하다. 선거철이다. 우리는 지지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진정으로 정치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제야말로 정치를 주권자의 것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그 지난한 과정은 여전히 시급한 일로 우리 앞에 남아있다. 선거가 시작되었다. 정치는 끝나지 않는다. 서둘러야 할 때다.
p.24 정책 오작동의 핵심은 시민과의 '단절'에 있다. 투표를 마친 시민은 정작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그 빈자리를 특정 이익 집단의 논리나 관성적인 행정이 채우면서 정책은 생명력을 잃는다. 이러한 제도적 결함과 불통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투표함 너머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시민의 일상이 정책에 끊임없이 반영될 수 있는 열린 공론장을 마련하고, 단순한 다수결을 넘어 깊은 토론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숙의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이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357 시민이 스스로 학습하고 의견을 나누며 공동체의 미래를 직접 설계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넥스트 민주주의' 의 모습이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결정해주는 시혜적 정치는 이제 끝났다. 이제 정치는 시민이 이끌고, 권력은 그 길을 닦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는 비로소 수사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의 것'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