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의 나라 - 문화의 경계에 놓인 한 아이에 관한 기록
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반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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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반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상상해보자. 당신에게는 가족이 있다. 집도, 땅도, 마을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온 나라가 전쟁통이 되어 살기 위해서는 세간도 추억도 하다못해 자식까지도 버려가며 낯선 땅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도, 문화도, 생활도 그 어느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땅의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당신의 언어, 가치관,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도움을 청할 길이 없다. 능력있던 가장도 모든 일을 해치웠던 지혜로운 어른도 한순간에 온종일 집에만 처박혀 멍하니 앉아있다. 때때로 도움이나 제도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손짓발짓을 해가며 온갖 눈총과 한숨 끝에 맞는 건지 아닌건지 모를 뭔가를 구해와야 한다.
어찌저찌 먼저 정착한 먼 친척과 같은 민족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집 한칸을 구해 살아가던 나날, 아이가 아프다. 사랑을 다해 키우던 아이가 눈을 뒤집고 숨을 못 쉬며 온몸을 경련한다. 병원에 갔더니 나의 믿음과 지식은 전부 무용한 것이 되고 말도 생김도 다른 이들이 떼로 몰려와 아이를 이리 뒤집고 저리 헤집어가며 온갖 장치를 매달아놓는다. 듣기로는 저 백인들이 사람 장기를 먹는다고 한다. 혹자는 우리 민족의 수를 줄이기 위해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수를 쓴다고도 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윽박지르는데 서로가 서로의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 서명을 하라니 한다. 그 알 수 없는 문자의 나열, 이 땅에 오기까지 수십수백번도 더 했다. 했다. 내가 알기로 가장 필요한 방법이 있는데 그건 안 된다고 한다. 저들이 주는 약과 주사와 처치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 내가, 온 우주만큼 사랑하는 내 아이를 학대하고 있다고 한다.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남의 집에 훔쳐다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댄다.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단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믿음과 언어, 정체성을 모두 버려야 한다. 거부는 없다. 저항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모두가 이 땅의 이방인이다.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보편적이며 누구에게나 쉽게 납득 가능한,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내가 정당한 성원으로 여겨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세계는 누구에게나 그러한 곳일까? 그렇지 않다. 당장 낯선 장소에만 가도 사람은 적응에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나마 조금 긴장하는 정도로 해결되는 것은 그 장소, 그 상황이 그나마 이해 가능한 시스템에 속하기 때문이다. 범위를 넓혀보자. 해외에 가기 전 우리는 도착지의 문화나 언어를 미리 학습한다. '덜' 당황하기 위함이다. 만일 그럴 시간이 없다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가치관이나 절차를 요구한다면? 뭔가를 설명하려고 애쓰다 결국 찌푸려지는 미간을 하루, 이틀, 일주일, 반년... 수도없이 마주해야 한다면? 평생을 당연한 것으로 믿고 살아온 삶의 방식을 보고 충격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비명을 지르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면? 그러고도 나의 세계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 책의 주인공처럼 서구사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몽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언제든 갑작스레 낯선 상황에 놓인다면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다.

사람은 그가 속하고 오랜 시간을 살아온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사람의 일 또한 그러한 까닭에 질병 또한 문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적어도 환자 개인 또는 그 보호자가 질병을 이해하는 관점은 그가 속한 문화, 그의 위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4장에서 볼 수 있듯 의료현장에서 발생하는 문화 충돌에 대해 다수 혹은 강자의 입장에 있는 이들은 어떻게 우열을 배제하고 의료대상자와 보호자를 존중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치료적 협력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현대 서구 의료 체계, 그 중에서도 대형병원은 환자보다는 의료진 및 기관을 중심으로 한다. 환자 또는 보호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맥락 안에 있든 간에 의료현장에서 주도권을 갖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분명 효율성을 높이고 각종 변수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에 적합하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스템 앞에서 단순한 몸 또는 부위, 질병으로 존재하는 환자에게는 그 자신의 배경이 있다. 그는 사람이다. 6장과 7장에서 볼 수 있듯 문화적 배경과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다중압박상태에 놓이는 의료대상자 및 보호자에 대해 공공의료시스템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들의 장기적인 건강을 위해 사회복지시스템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하는가? 만일 문화적 신념이 효과적인 치료방침과 충돌할 때 의료진은 어떤 태도로 대상자들을 대해야 하는가?

이 책은 비극인가. 그러하다. 그것도 아주 큰 비극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감히' 고마워할 줄 모르는, '미개하고 비문명적인' 몽족 이주민의 탓인가? 과연 그럴까? 애초에 그들은 왜 자급자족하던 땅에서 벗어나 이곳까지 떠밀려왔는가? 왜 알지도 못하는 언어의 나라로 도망치고 쫓겨와야 했는가?
민족으로서의 몽족의 역사는 가히 피란과 자구의 삶이라고 할 만하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면서도 굴복과 동화를 거부했던 이들은 미국에 '비밀군사'로 이용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이 난민이 되어 미국으로 몰려왔다. 살기 위해서, 또 마땅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그렇게약속했기 때문에, 우리의 목숨을 걸고 당신들의 전투를 대신 치렀으니 응당 신의를 지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문제는, 달리고 떠내려가며 당도한 나라가 입을 싹 닦은 정부와 그런 일이 있었던 줄도 모르는 대다수의 국민, 알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 오지는 말라는 파렴치한으로 구성된 곳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기가 울면 아편을 물에 타서 먹었어요. 이기가 잠잠해져서 군인들한테 들키지 않게요. 아기 소리 매문에 알려지면 다 죽을 수 있으니까요. 아편을 타 먹이면 아기는 대개 곯아떨어져요. 하지만 잘못해서 너무 많이 먹이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 일이 아주 많았어요.” (…) 몽족의 경우 아편 과다 복용으로 아기가 죽는 일은 워낙 자주 일어나서 신문 머리기사를 장식하거나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한 나라에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기는커녕 살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로 무덤덤하게 가족과 친지에게 알려지는 정도였다.(p.270)

어쩌면, 아니 분명히 이것은 받아들인 나라의 시스템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마땅히 환대해야 할 이웃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렀다 가는, 돈만 축내는,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대상'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과 생각이 다른 사람간의 소통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조율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과 비용과 기회가 충분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될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이 책에서 리아, 한 아동과 그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모든 비극들이다.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다. 억울한가. 과연 그럴까?
이제 우리는, 적어도 한국은 다민족국가임을 부정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그저 모르쇠하며 단일민족의 순수성으로 대중을 동원하기에는 개개인이 마주하는 사회의 모습이 이미 그렇지 않게 되어버렸다. 몽족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 그들의 혐오범죄가 남 일처럼 느껴지는가? 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한다고 치자. 어느 누가 선뜻 환영하겠는가? 적어도 목소리 큰, 다수라고 여겨지는 권력집단은 아닐 터이다. 당장 온 나라를 시뻘겋게 뒤덮는 십자가는 그러려니 하면서도 모스크 하나 들어선다는 데 온 나라가 뒤집어져가며 악을 쓰지 않는가? 이주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난민을 환대하는 것에도 하늘이 무너질세라 반대하지 않는가? 자치권을 줄 수 없다면, 우리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이 다르게 살아가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사회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이전에, 그들이 나와 같은 권리를 보장받는 것에 크나큰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책을 단순히 의사소통과 협력에 실패해 가능성을 놓친 비극적 케이스로만 기억할 수도 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전보다 더, 앞으로는 더욱 다채로워질 사회는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을 읽을 모두가 곱씹어보기를 바란다. 잠을 설치고 막막함에 몸부림치며. 내가 아닌 그들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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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사윌 때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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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이를테면, 죽은 이를 살려내거나 무너지는 집을 떠받치는 것과 같은 것들. 내 나라, 기껏해야 이웃 나라 내지는 높으신 분들이나 오간다는 저 먼 나라가 세상의 전부이던 시대가 있었다. 나라가 없어진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아 상상도 할 수 없는 재앙과도 같던 시대가 있었다. 나라 없는 설움, 그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고 보호받을 길 없는, 이름을 잃은 사람들. 그 막막함의 한복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가 제목으로 말하고자 했던, 별빛이 사위는 때는 언제일까. 사지임을 뻔히 알면서도 부러진 다리를 동여매고 바라보는 하늘이 아닐까. 오래된 밤하늘이 신새벽에 밀려 바래지는 때가 바로 별빛이 사위는 때이다. 오래된 나라가 새로운 이름과 힘에 밀려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 이름과 터와 사람을 남기듯이. 또한 작가의 말처럼 어둠이 머물고 먼동이 트이는 때가 별빛이 사위는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금 살아남아 이어질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하는 것은 아마도 독자의 몫이리라.

읽는 내내 몇번이고 등장하는 망국의 옛땅을 그리워했더랜다. 기억 속에 교과서며 시험에나 나오던 먼 옛날 지도로만 남아 희미해진 그 땅과 지워진 물길을 손끝으로 더듬어보고 싶었다. "애달파서 더 망설이지 못"한다는 마음이 대체 무엇일까, 헤아려보며(p.250). 아마도 누군가에겐 존재했을 그 이름과 사연이 쓰리고 서러워 알지도 못하는 이의 절망에 덩달아 주저앉고 싶어졌다.
망국이란 단어는 참으로 묘하다. 사람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그것에 실체없는 이름을 붙여 살을 붙이고 테를 쌓는데, 기이하게도 그 이름에서 힘이 나온다. 여러사람이 같은 이름으로 뭉치고 공유하는 믿음이 있을 뿐인데, 그 허상이 사라지고 먹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이, 때로는 아주 많은 사람이 살고 죽어나가며 때로는 죽느니만 못하다고 외치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망국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망한 나라의 이름을 떠안아야 했던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누구 하나 편치 못한 이 이야기는 외로워졌다 끝내 혼자가 되고 다시금 전장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덧붙여진 후기에서 말하는 평화는 과연 누구의 평화인가. 명분이 무엇이고 세상이 어떻든 전쟁은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죽어야, 부딪는 힘이 사그러들어야 끝을 본다. 평화를 얻은 땅은 그곳이 어디든간에 기실 온 땅이 무덤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전쟁은 영웅의 것이 될 수 있을까. 전쟁은 웅장하고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 장관이 될 수 있을까. 남의 전쟁은 그렇다. 한치도 나의 일이라 여기지 않는 남의 전쟁이 그러하고 상처 없이 살아남은 자에게 그러하다. 남의 전쟁이 나의 것이 될 때, 전쟁에 휩쓸린 자의 심정을 이해할 때 그것은 더이상 장관도 무훈도 아닌 그저 상처요 참극이 되고 만다. 그 안에서 없는 자는, 약한 자는, 아래에 있는 자는 더더욱 무덤 가까이, 어쩌면 무덤이 될 진창에서 허부적대는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살아남기 위해 강도질을 하는 무리가 내일이면 살려달라고 목숨을 애걸하는 쪽이 된다. 이것이 참극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모두가 불행해진다. 전쟁을 무용담으로 말할 수 없는 이 모두가.
”아암, 우리가 가엾고 불쌍허다마다...... 다들 지발, 싸움질 좀 그만해야 쓰는디...“ (p.226)
“(…) 오랫동안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려온 백제 사람은 당의 황제와 신라의 왕 중에서 누가 나은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걸 모르시진 않겠지요?" (p.278)

작중 예스럽고 드문 말 뿐만 아니라 구어체가 문어체가 섞여 다양한 어투가 자주 등장한다. 시대를 구현해내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까? 말맛이 사는 것도 있지만 도리어 약간 낯설게 느껴져 이것이 과연 누구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어쩌면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승리와 혈기의 기록이 아닌 위와 아래를 가리지 않는 설움과 처참함이었을 것이다. 찰나와도 같았던 일부의, 겉으로나마 평화로운 시대가 가고 다시 전세계가 전쟁과 대립으로 휘말려들어가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별빛사윌때 #역사소설 #별빛사윌때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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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궁궐 기담
현찬양 지음 / 엘릭시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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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로부터 금기는 여러 종류의 진실-때로는 고발에 가까운 내용-을 함축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나는 이것을 불가해한 것 혹은 차마 입밖으로 내기도 두려운 것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전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창귀에 얽힌 금기 같은 것들. 국토의 많은 부분이 산지인 한반도는 오래도록 호랑이의 영역권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호랑이가 수영까지 잘 하는 짐승인 탓에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조차도 안전지대가 될 수 없었다. 오죽하면 호랑이표 단골 밥집 쯤 되는 진도의 전통 가옥에는 개구멍이 따로 있겠는가. 이런 땅에서 호환은 한 집 건너 한 집, 해마다 일어나는 일이었고 그 누구도 안전할 수 없었다. 그 덩치며 힘이 인간이 대항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강대한 탓에 일행 내지는 일가의 몰살을 피하기 위해서는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가족, 친척, 이웃의 처절한 비명을 무시하고라도 도망치거나 숨어야했고,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창귀가 사람을 홀린다는, 절대로 돌아보지도 가까이 가지도 말라는 금기가 생겨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혹은 잊힐만하면 등장하는 어린아이, 여인, 한을 품고 죽은 짐승의 이야기는 금기가 지닌 죄책감과 그것을 면피해보려는 발버둥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한다. 박해가 없었다는 강력한 부정은 도리어 그 박해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밤 늦게 나다니지 마라, 특정한 어느 날에는 어디에 가지 말라, 누군가가 흔적없이 사라지더라도 그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존재의 소행이니 이유를 묻지 말며 그 부재는 존재를 지워버림으로써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것이 되게 하라. 그런 말들이 금기를 품은 괴담, 기담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궁궐에는 왜 이리 금기가 많습니까?"
그야, 궁궐만큼 억눌리고 숨죽인 사람이 모인 곳이 없기 때문이다. 구중심처 권력을 틀어쥐고 군림하는 이만큼 죄가 많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신분과 성별, 계급으로 짜여진 철저한 수직사회 속에 자유로운 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정보를 나른다. 설령 그것이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지어낸 것일지라도. 입에서 입으로, 귓속말과 그믐달 아래 은밀한 속삭임으로 전해지는 밤의 이야기에는 양기, 남성, 양반, 떳떳한, 높으신 분들, 그런 단어로 묶인 낮의 말로는 차마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를 전한다. 군자불어 괴력난신이라. 두려워하되 인정하지 않으니 말할 길이 없다. 누구보다 죄, 보복, 분노로 웅크린 존재를 확신하되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꺼리니 피하고 도망칠 길이 없다. 실로, 군자불어 괴력난신이라.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도 직접 읽는 경험에 미치지 못하리라. 엎드린 자의, 공동체의 밑바닥 그 어디에 눈을 빛내며 웅크린 '것'에, 속삭이고 인내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쉿, 우리 중에 우리가 아닌 것이 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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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할 여자들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과학기술사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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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부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인류 최초의 도구는 창과 칼이었을까? 뒤집개나 그릇이 아니라? 왜 온갖 것에 바퀴를 달면서 가방에는 그럴 생각을 못 했을까? 전쟁이 기술 발전의 동력이었을까? 만일 휘발유차가 아니라 전기차가 먼저 시장을 점유했다면 지금의 교통 환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해가는 세계에서 "단순하고 고급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저임금으로 유지되는 노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컴퓨터 공학은 남성에게 알맞은 분야이기 때문에 여학생과 여성 노동자가 드문 시장이 형성된걸까? 정말로 여자아이들에게 코딩을 가르치지 않거나 "여성의 기질이 과학적이거나 기술적인 직종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는 설 자리를 잃거나 저임금 노동으로 밀려나는 걸까? 이 모든 것에 정말 그럴까? 를 물은 적이 있다면, 최소한 이 세계 또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 구조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면 이 책은 당신을 위한 책이다. 바로 당신을.

모 사업가가 최근 전기차를 혁명적이고 친환경적인 것으로 마케팅하기 이전에는 당연히 차는 휘발유나 가스로 움직이고, 자동차의 발명 이래로 쭉 그래왔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과연 그럴까? 최초의 장거리 운전자는 운송노동자나 고가의 연료비를 댈 수 있는, 모험심 넘치고 부유한 남성이라고 여겨지기 쉽다. 과연 그럴까? 최초의 전기차는 20세기 초에 등장해 판매까지 이루어졌고 최초의 장거리 운전자는 여성이었다. 그것도 자녀가 둘이나 있는.
시동을 걸기 위해 크랭크를 조작하고 기름이 튈 위험과 엔진의 소음을 감수해야하는 휘발유차 대신 소음이 적고 비교적 안전한, 심지어 조작 레버도 옷자락에 걸리적거리지 않는 곳에 위치한 전기차가 주류로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것은 "여성을 위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숙녀를 위한 물건"이기에 부드러운 디자인과 장거리 기동을 시도하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숙녀를 위한 크리스털 꽃병"까지 구비된 그것은 값비싼 유아차 내지는 이동형 티파티 장소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에게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속도와 거친 운전을 즐길 수 있는 차가 알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억측이라고 생각하는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삽화나 영화에서 흔히 그려지는 구식 여행가방, 각지고 큼직한 상자에 손잡이가 달린 그것은 왜 진작 바퀴를 달지 못했을까? 수레며 대포에는 애진작에 바퀴를 달아 그 편리함을 알고 있었을텐데. 이유는 짜증날 정도로 단순하다. "남성이라면 그깟 가방쯤 힘으로 가뿐하게" 들어 옮길 수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숙녀"를 위해 얼굴이 벌개지도록 용을 쓰면서까지도. 바퀴달린 가방이라니! 그런 물건은 "연약한 여성들"이나 쓸 물건 아닌가! 게다가 "품위있는 숙녀"의 옷가지와 장신구로 가득할 가방은 대개 "신사"나 짐꾼이 들어주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 꼴사나운 물건 따위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얼굴이 벌개지고 손바닥에 통증을 남기면서까지도.
물론 누군가는 (온가족 내지는 생면부지의 타인의 짐가방을 이고지고나르면서) 진작에 그 필요성을 절감했고 상품화를 시도했으나 당시에는 실컷 비웃음만 당하고 잊혀져버렸다. 수차례나. 어느 버스운전사가 승객에게 요구했듯 "바퀴달린 물건은 유아차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렇게 "남성성을 훼손하는" 것은 차라리 수치에 가까운 물건이었기 때문에.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전문직 여성과 여성 개인의 이동이 대두되기 까지, 항공기 승무원들이 바퀴달린 가방을 끌고 매끄러운 공항 바닥을 가로지르기 전까지 말도 안 되는 모두의 사서고생이 이어졌다. 믿어지는가.

이처럼 허무하기까지한 남성 중심, 아니 여성배제적 발명사를 포함해 시대마다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이어져온 산업구조와 경제논리의 여성 차별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다시금 불거진 여성, 유색인종의 저임금노동과 돌봄노동, 기계화시대의 일자리 대체와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성차별을 기반으로 이어져온 그 촘촘하고 집요한 "당연한 것"의 실상을 파헤친다.
솔직히 말해 모든 챕터와 문장에 플래그를 붙이고 밑줄을 긋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읽을수록 "기업과 산업은 합리적"이라는 말만 되뇌는 사람들을 쫓아가 그 입을 꼬집어주고 싶어졌다. 여전히 여성들이 "편하고 쉬운" 일만 찾기 때문에, 돌봄이나 공예는 경제 발전에 불필요하거나 비숙련 노동자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혹은 더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현실을 외면하고 아웅다웅 자기들만의 세계를 그리는 이들을 찾아가 대체 떼를 쓰고 있는 건 누구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과 통렬한 비판에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다. "퇴근하고 돌아온 따뜻한 집에서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놓고 웃는 얼굴로 맞이해줄 아내"가 필요하다 못해 맡겨놓기라도 했는지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일단의 무리들에게 차가운 경멸과 매서운 지적으로 일갈한다. 그렇게나 좋아라하는 "팩트"를 가지고 이야기해보라. 아 원래 그랬다고!를 제하고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세계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너의 세상도 그렇게 당연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아닐거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자아이들은 자라고 그 아이들이 자라 너의 한심하고 얄팍한 아집을 부술거라고, 그 때도 "합리와 이익"을 말할 수 있는지 보자고. 이 책은 밀려났고 밀려나고 있으며 시작조차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힌 여성들에게 전하는 진실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벽은 사실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시작부터 주저앉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 여성은 그래왔고, 그럴거라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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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조형근 지음 / 창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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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말했다.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옆으로 비켜서있으며 그것이 비겁함을 알고 있다고. 모래에게 바람에게 먼지와 풀에게 이런 나는 얼마나 적으냐고.(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다면, 필경 부끄러웠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분노에, 올바름에 말과 행동에 부끄러웠던 사람만이 정의를 묻는다. 나는 정의로운가, 나의 말과 행동이, 생각이 정의롭다는 착각은 아니었을까. 나는 얼만큼 적고 또 옹졸한 그릇이냐, 라고.

사회학자 조형근은 제목으로 말한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고. 동시에 각 부의 소제목을 통해 독자에게 묻는다. 대학은, 지식인은, 과거와 현재의 청년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부하는 우리 시민들은 정의롭느냐고.
이제는 허울뿐인 말로 여겨지는 "대학은 지식의 상아탑"은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걸까. 본디 대학이라고 하면 학문적 진리를 추구하는 교육과 지식의 장이 아니었던가. 언제부터 학위며 전공이 취업을 위한 수식어로 전락했던가. 혹자는 대학 서열화 이후를, 또다른 이는 이사진 및 커리큘럼이 기업 맞춤화가 되기 시작했을 때, 또는 산학협력 모델이 확산되었을 때를 꼽는다. 요는, 제법 오래된 현상이라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사실상 대학 졸업장이 필수품처럼 여겨지고 출신 대학이 곧 "라ㅇ "문송합니다(문과+죄송합니다)"라느니, 인문/사회 분야 전공해봤자 치킨집 차린다느니 하는 농 아닌 농이 자리잡은 사회에서 마음놓고 연구해라, 공부해라, 지식인의 의무를 다해라 하는 것도 다 배부른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학자는 죽었다, 지식인은 없다고 일갈하기에는 지금 이순간에도 등을 밝히는 학자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이래도 성에 안 차고 저래도 성에 안 차는 어정쩡한 형국이 우리네(라고 하기엔 지구촌이 되게 생겼지만) 현실이라 할 수 있겠다.
분명 이제는 대학 교수는 대물림되는 특권층의 지표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도 없다. 교수 집안 교수 부모의 고학력 자녀 경향이 뚜렷해진 지 오래임을, 용이 날 개천은 씨가 말랐다는 게 정설 아닌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되지 않았나.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민중의 삶과 유리되었고, 세계 최고 수준의 등록금과 서열 구조로 민중의 고통의 원천 중 하나가 되었다. 비판적 교수지식인은 대개 중상류 계급이 되어 있고, 계층 재생산을 위해 애쓰는 중이다(p.47)." 이런 사회에서 구 청년지식인들이 현재의 청년지식인을 어르고 달래봐야 "나 때는 말이야"꼴을 면하기도 어려우니.
이에 대해 저자는 구 청년세대, 즉 86세대 또한 기득권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좀 덜 힘들게 사는 세상을 만들려면 상위 1%만이 아니라 20%가 지금보다 꽤 많이 돈을 내야"한다고, "알고 보면 나도 서민이고 어렵다며 쏙 빠지고 재벌, 수구보수 세력만 기득권이라고 탓해서는 세상과 화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p.103). 현재와 과거의 청년이었던 이들, 결국 모두가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절박하게 외치는 것이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세월호 사고, 사고라고 하기에는 사건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2014년의 참사가 벌어진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실시간 뉴스를 보고 듣고 읽으며 과정을 지켜본 사람 중 여태껏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인부터 결과까지 다 떼고 보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죽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일테다. 이것만 해도 큰일이다. 더군다나 여러 분야의 책임자가 제대로 대처하지 않거나 못했고, 그 결과 살릴 수 있었던 사람까지 죽었다. 이 상황에서 대체 피해자를 욕할 부분이 어디 있는가? 그것도 모자라 현재까지 집요한 조롱과 모욕이 이어지고 있다. 유가족 또는 생존자의 증언은 정치공작으로 몰리고 숨은 의도가 있음을 추궁당한다. 이런 유형의 참사가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언론, 정치권, 특정 집단의 공격은 유례없는 형국이다. 그 사이에 우리 사회가 반쯤 뒤집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없던 사람과 말이 생겨난 것인가? 아니면 반쯤 긍정적인 태도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정보망의 발달로 확산이 빨라진 것이라고 치부해야 하는 것인가?
사회를 하나로 모으고 발전 또는 안정의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정치권의 메세지는 기실 유구한 것이나 속칭 비국민과 국민을 나누어 성원 일부에 대한 증오와 배제를 지지기반으로 삼는 것은 적어도 겉으로나마 지양되는 태도가 아니었던가. 입에 발린 말이라도 우리는 하나라고 외쳐야 하는 세상이 아니었나. 못살겠다 갈아엎자로 시작해 현대시민운동의 주요 사례로 남은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정부 인사, 정치권의 메세지와 의식주를 넘어 방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가 된 세상을 살고 있는가?
더이상 우리 사회의 갈등 주체는 갑과 을이 아니다. 갑은, 원인은, 크게 뜯어고쳐야 할 것은 아득한 구름 너머에 있고 을과 병과 정이 서로를 물어뜯는다. 그렇게 된 원인은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생각할 겨를이 없고 그럴 엄두도 나지 않는다. 비국민, 비정규직, 비중산층, 비한국인... '아님'이 붙은 대부분의 것들이 증오의 대상이 된다. 저것을 몰아내고 욕하고 뿌리뽑아야 우리가 산다고 말한다. 누가? 미디어가, 언론이, 부채질하고 확성기를 쥔 이에 '감화'된 우리가. 아파트에도 대문과 담을 세우고 집과 차와 학력과 직장으로 나뉘어 틀어박히는 우리가. 모두가. 정의와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고작 푼돈을 받으러 오는 야경꾼만 이를 갈며 증오하는 우리가. 모든 것에 시험과 자격을 들이대며 '공정'과 '편'과 '척결'을 목놓아 부르짖는 우리가.

이 난리도 아닌 꼬라지에도 탈출구가 있을까? 해결은 요원한 것인가? 현대인은 유구한 유토피아의 꿈을 꾸는가? 저자는 말한다.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고, 희망이 실망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희망이라는 원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직 희망만이 실망할 수 있기" 때문에(p.217).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각자도생, 악착같이 모으고 '부국강병', '이익선점과 끝없는 성장', '복지 축소로 능력주의와 공정 실현'을 말하는 작은 정부를 정의로 철석같이 믿었던 기득권과 그에 동조했던 수많은 우리가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퇴보와 사회 붕괴를 목도했던 시대를 지나 다시금 정치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이 되고 시민으로 자리잡아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민중의 정의라는 것이 실존하는가? 지배계급의 아이러니를 답습할 뿐이 아닌가? 저자의 말처럼 쉽고 낙관적인 전망을 노래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그러나 여전히 "신발에 흙이 묻고 몸이 더러워지는 것, 실망하고 실패하는 것, 그것들 없이 우리는 구체적 현실로 나아갈 수 없다(p.243)." 앞서 말했듯 희망만이 실망할 수 있기에, 그 과정에서 무너지고 사라질 사람들이 무너지고 사라진 이름이 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붙잡는 수 밖에, 희망하기를 잃지 않는 수 밖에.

앞서 말했듯 부끄러웠던 자만이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는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고로, 사는 동안 스스로의 언행과 사고에 단 한치 부끄러움도 없었으며 스스로는 늘 옳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이 책을 권하지 않겠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런 이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가닿지 않는다. 그러나, 더 나은 세상을, 함께 사는 세상을, 편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자리와 관점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이것 또한 지고의 진리가 아님을 명심하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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