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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조형근 지음 / 창비 / 2022년 8월
평점 :
서평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말했다.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옆으로 비켜서있으며 그것이 비겁함을 알고 있다고. 모래에게 바람에게 먼지와 풀에게 이런 나는 얼마나 적으냐고.(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다면, 필경 부끄러웠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분노에, 올바름에 말과 행동에 부끄러웠던 사람만이 정의를 묻는다. 나는 정의로운가, 나의 말과 행동이, 생각이 정의롭다는 착각은 아니었을까. 나는 얼만큼 적고 또 옹졸한 그릇이냐, 라고.
사회학자 조형근은 제목으로 말한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고. 동시에 각 부의 소제목을 통해 독자에게 묻는다. 대학은, 지식인은, 과거와 현재의 청년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부하는 우리 시민들은 정의롭느냐고.
이제는 허울뿐인 말로 여겨지는 "대학은 지식의 상아탑"은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걸까. 본디 대학이라고 하면 학문적 진리를 추구하는 교육과 지식의 장이 아니었던가. 언제부터 학위며 전공이 취업을 위한 수식어로 전락했던가. 혹자는 대학 서열화 이후를, 또다른 이는 이사진 및 커리큘럼이 기업 맞춤화가 되기 시작했을 때, 또는 산학협력 모델이 확산되었을 때를 꼽는다. 요는, 제법 오래된 현상이라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사실상 대학 졸업장이 필수품처럼 여겨지고 출신 대학이 곧 "라ㅇ "문송합니다(문과+죄송합니다)"라느니, 인문/사회 분야 전공해봤자 치킨집 차린다느니 하는 농 아닌 농이 자리잡은 사회에서 마음놓고 연구해라, 공부해라, 지식인의 의무를 다해라 하는 것도 다 배부른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학자는 죽었다, 지식인은 없다고 일갈하기에는 지금 이순간에도 등을 밝히는 학자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이래도 성에 안 차고 저래도 성에 안 차는 어정쩡한 형국이 우리네(라고 하기엔 지구촌이 되게 생겼지만) 현실이라 할 수 있겠다.
분명 이제는 대학 교수는 대물림되는 특권층의 지표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도 없다. 교수 집안 교수 부모의 고학력 자녀 경향이 뚜렷해진 지 오래임을, 용이 날 개천은 씨가 말랐다는 게 정설 아닌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되지 않았나.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민중의 삶과 유리되었고, 세계 최고 수준의 등록금과 서열 구조로 민중의 고통의 원천 중 하나가 되었다. 비판적 교수지식인은 대개 중상류 계급이 되어 있고, 계층 재생산을 위해 애쓰는 중이다(p.47)." 이런 사회에서 구 청년지식인들이 현재의 청년지식인을 어르고 달래봐야 "나 때는 말이야"꼴을 면하기도 어려우니.
이에 대해 저자는 구 청년세대, 즉 86세대 또한 기득권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좀 덜 힘들게 사는 세상을 만들려면 상위 1%만이 아니라 20%가 지금보다 꽤 많이 돈을 내야"한다고, "알고 보면 나도 서민이고 어렵다며 쏙 빠지고 재벌, 수구보수 세력만 기득권이라고 탓해서는 세상과 화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p.103). 현재와 과거의 청년이었던 이들, 결국 모두가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절박하게 외치는 것이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세월호 사고, 사고라고 하기에는 사건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2014년의 참사가 벌어진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실시간 뉴스를 보고 듣고 읽으며 과정을 지켜본 사람 중 여태껏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인부터 결과까지 다 떼고 보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죽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일테다. 이것만 해도 큰일이다. 더군다나 여러 분야의 책임자가 제대로 대처하지 않거나 못했고, 그 결과 살릴 수 있었던 사람까지 죽었다. 이 상황에서 대체 피해자를 욕할 부분이 어디 있는가? 그것도 모자라 현재까지 집요한 조롱과 모욕이 이어지고 있다. 유가족 또는 생존자의 증언은 정치공작으로 몰리고 숨은 의도가 있음을 추궁당한다. 이런 유형의 참사가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언론, 정치권, 특정 집단의 공격은 유례없는 형국이다. 그 사이에 우리 사회가 반쯤 뒤집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없던 사람과 말이 생겨난 것인가? 아니면 반쯤 긍정적인 태도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정보망의 발달로 확산이 빨라진 것이라고 치부해야 하는 것인가?
사회를 하나로 모으고 발전 또는 안정의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정치권의 메세지는 기실 유구한 것이나 속칭 비국민과 국민을 나누어 성원 일부에 대한 증오와 배제를 지지기반으로 삼는 것은 적어도 겉으로나마 지양되는 태도가 아니었던가. 입에 발린 말이라도 우리는 하나라고 외쳐야 하는 세상이 아니었나. 못살겠다 갈아엎자로 시작해 현대시민운동의 주요 사례로 남은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정부 인사, 정치권의 메세지와 의식주를 넘어 방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가 된 세상을 살고 있는가?
더이상 우리 사회의 갈등 주체는 갑과 을이 아니다. 갑은, 원인은, 크게 뜯어고쳐야 할 것은 아득한 구름 너머에 있고 을과 병과 정이 서로를 물어뜯는다. 그렇게 된 원인은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생각할 겨를이 없고 그럴 엄두도 나지 않는다. 비국민, 비정규직, 비중산층, 비한국인... '아님'이 붙은 대부분의 것들이 증오의 대상이 된다. 저것을 몰아내고 욕하고 뿌리뽑아야 우리가 산다고 말한다. 누가? 미디어가, 언론이, 부채질하고 확성기를 쥔 이에 '감화'된 우리가. 아파트에도 대문과 담을 세우고 집과 차와 학력과 직장으로 나뉘어 틀어박히는 우리가. 모두가. 정의와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고작 푼돈을 받으러 오는 야경꾼만 이를 갈며 증오하는 우리가. 모든 것에 시험과 자격을 들이대며 '공정'과 '편'과 '척결'을 목놓아 부르짖는 우리가.
이 난리도 아닌 꼬라지에도 탈출구가 있을까? 해결은 요원한 것인가? 현대인은 유구한 유토피아의 꿈을 꾸는가? 저자는 말한다.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고, 희망이 실망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희망이라는 원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직 희망만이 실망할 수 있기" 때문에(p.217).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각자도생, 악착같이 모으고 '부국강병', '이익선점과 끝없는 성장', '복지 축소로 능력주의와 공정 실현'을 말하는 작은 정부를 정의로 철석같이 믿었던 기득권과 그에 동조했던 수많은 우리가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퇴보와 사회 붕괴를 목도했던 시대를 지나 다시금 정치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이 되고 시민으로 자리잡아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민중의 정의라는 것이 실존하는가? 지배계급의 아이러니를 답습할 뿐이 아닌가? 저자의 말처럼 쉽고 낙관적인 전망을 노래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그러나 여전히 "신발에 흙이 묻고 몸이 더러워지는 것, 실망하고 실패하는 것, 그것들 없이 우리는 구체적 현실로 나아갈 수 없다(p.243)." 앞서 말했듯 희망만이 실망할 수 있기에, 그 과정에서 무너지고 사라질 사람들이 무너지고 사라진 이름이 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붙잡는 수 밖에, 희망하기를 잃지 않는 수 밖에.
앞서 말했듯 부끄러웠던 자만이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는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고로, 사는 동안 스스로의 언행과 사고에 단 한치 부끄러움도 없었으며 스스로는 늘 옳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이 책을 권하지 않겠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런 이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가닿지 않는다. 그러나, 더 나은 세상을, 함께 사는 세상을, 편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자리와 관점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이것 또한 지고의 진리가 아님을 명심하라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