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이 돋는다 - 사랑스러운 겁쟁이들을 위한 호러 예찬
배예람 지음 / 참새책방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출판 들녘(참새책방)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좋게 말해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높은 사람, 솔직하게 말해 겁이 많은 사람, 시체말로 쫄보인 사람을 하나만 대시오, 하면 모두가 손을 들고 정답! 하며 내 이름을 외칠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만 더 말하자면, 표지만 보고도 조금 오싹한 느낌에 기어이 엎어두고 며칠을 묵혔습니다. 책날개 그림에 간이 좁쌀만해졌습니다. 누군진 몰라도 책임지세요.

와중에 겁은 겁대로 많으면서 사서 고생을 하는 타입입니다. 네, 지난 주말에도 공포영화에 호러 소설로도 모자라 인터넷 괴담까지 줄줄 찾아보고 늦게까지 불을 끄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세간에서는 이런 걸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고 한다지요. 아니 뭐, 근데,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요? 만국의 겁쟁이여, 단결하라.

들어보세요. 이런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만국의 겁쟁이라고 했잖아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김씨 쫄보 다나카 쫄보 잭슨 쫄보 다 있을거란 말이죠. 공포영화에서 겁 없는 놈과 소리지르는 놈이 제일 먼저 봉변을 당한다 뭐 그런 클리셰가 있을텐데... 거기에 내가 다시는 이 짓을 하나 봐라! 악을 쓰면서도 기어이 실눈 뜨고 기웃거리는 바람에 시작도 전에 사라지는 인물 1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저 겁보들 꼬라지 좀 보라면서 낄낄대는 이들은 영영 이해하지 못하겠죠. 식은땀을 바가지로 흘리면서도, 졸아붙는 심장을 부여잡으면서도 그 짜릿한 즐거움을 잊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을. 그치만 후자야말로 백점짜리 감상자가 아닌가요. 울어! 하면 네! 하고 펑펑 우는 관객이 좋은 관객이듯이.

원시시대에는 생존에 유리했을 (개중 반은 주체못한 호기심에 끝장났을) 것이고, 현재에는 알아서 숨넘어가는 긴장과 쾌감을 오가며 제 명을 재촉하고 있을 겁쟁이들, 호러마니아들.

p.22 창작자가 의도적으로 설치한 함정에 충실히 빠지고, 숨통을 조여오는 긴장감에 실눈만 겨우 뜬 채로 비명을 지르는 겁쟁이들이야말로, 어쩌면 호러라는 장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게임, 책, 영화, 댓글 형식의 쪽글까지 다양한 분야와, 묘한 불길함부터 대놓고 비명을 쥐어짜내는 좀비나 반쯤 경탄을 자아내는 외계인, 환상의 크리쳐들까지 차원과 경계를 넘나드는 형태의 대상들로


공포 장르를 즐기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그것이 즐거움으로 남을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는 같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냉정히 말하면 ‘내 일이 아님’에서 오는 안도감이겠죠. 남이사 죽든지 말든지, 싶은 태평한 마음은 아닙니다. 쓰러지는 좀비나 크리쳐에, 원한을 품은 존재에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사람도 있는걸요(네, 접니다).

다만 전율과 긴장이 즐거운 시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화면을 끄고, 허리를 두드리며 의자에서 일어서거나 책장을 덮는 순간 안전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숨막히는 두려움과 경계심을 내려놓고 지루하기까지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지난 시간을 즐거움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스크린, 화면, 책장 밖의 현실이 그 안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상상과 창작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때부터는 현실이 됩니다.

p.165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모든 흥미롭고 자극적이고 복잡환 사건 뒤에는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어떤 포지션을 취하든 피해자의 존재만큼은 결코 잊어선 안 된다는 것.


제법 흥행했던 몇몇 영화들을 비롯해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호러, 개중에서도 범죄 스릴러 장르를 거북해하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무서운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왜 무서워하는지, 그것을 자의와 타의 중 어떤 이유로 무서워하는가, 입니다.

그저 무섭구나, 하고 넘기기 전에 그것이 왜 공포의 대상으로 남는지, 왜 그 대상과 힘과 상황을 두려워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동북아 3국으로 묶이는 한중일 문화권에는 왜 그렇게 한을 품은 여성 귀신의 일화가 많은가, 그들은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나, 그들이 누구를 어떻게 해치는가, 그들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살아서는 그렇지 못했던 이들이 왜 죽어서는, 혹은 초인적 존재의 힘을 업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는가, 그것을 물어야 합니다.


혹은 경계의 저편, 버려진 장소와 사람의 형태이나 사람이 아니게 된 존재, 이를테면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 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들의 기원을 묻고 공포가 재난의 형태를 띌 때는 이미 무수한 피해자가 존재했음을, 상상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이해할 때, 영화와 게임과 소설 속 이야기를 현실로 맞닥뜨리는 이들이 존재함을 잊지 않고 등 돌리지 않을 때, 비로소 즐거움으로 남을 수 있는 공포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기사로 따지자면 문화와 사건사고 면에 실릴 내용을 가려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p.165 괴담을 읽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겁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괴담 속 일들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진 채로 덜덜 떨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밤도 꺼림칙한 불길함과 환상적인 괴생물체, 숫제 뛰어다니기까지 하는 좀비를 상상하며 뒤척거릴 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겁을 주려는 (내 기준) 고맙고 악마같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존재하는 겁쟁이들에겐 비 내리고 푹푹 찌는 여름이 한 해의 절정이겠지요.

손끝을 저릿저릿하게 하는 긴장감을 잊지 못해 괜히 머리 한 번 들이밀었다가 비명을 꽥 지르고 아 다시는 안 본다, 이걸 다시 하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하며 오늘 밤도 괜히 침대 밑을 살필 동지들에게, 우리는 영영 변하지 못할 팔자니 즐기기나 합시다.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발을 밀어넣고 목덜미를 문지르며 괴담사이트를 찾아들어가는 사서고생의 달인들아.

근데, 뒤에 있는 사람 누구예요? 이상한 소리 안 들려요? 까드득... 하는...

p.202 겁쟁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겁쟁이인 우리가 좋다. 세상의 모든 겁쟁이 공포 애호가들이 오늘 밤도 덜떨 떨며 잠들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씨의 음악 - 날마다 춤추는 한반도 날씨 이야기
이우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런 말이 있다. 기상청 체육대회 날에는 항상 비가 온다. 다 헛똑똑이라서 그런가? 생각해봐라. 그게 다 사내행사 불참을 위한 치밀한 계산의 결과다! 그런가하면 이런 말도 있다. 또 속았다. 이놈의 기상청, 이참에 구라청으로 이름 바꿔라. 내가 다시는 믿나봐라!

그러나 기상학의 세계는 자잘한 것들에 울고 웃기엔 너무도 거대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날씨는 대기와, 땅, 햇볕이 만들어내는 음악과도 같기 때문이리라.

지구촌, 연결된 세계... 이제는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아니더라도, 오늘의 빗방울이 어디서 왔는지, 때맞춰 불어오는 달콤한 공기는, 거대한 눈구름과 살을 에는 바람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도달하는지... 나와 연결된 세계를 곱씹다보면 나비의 날갯짓 한 번이 태풍을 불러오는 것이 비단 비유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은 자연을, 날씨를 그들 세계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애써왔다. 해서 수많은 걸작이 계절과 날씨와 비와 바람 눈과 흙 따위를 움키듯 생생하게 묘사하려는 노력으로 남지 않았는가. 그 말은 곧 날씨를, 자연을 예술의 언어로 그려낸 감상은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슷한 듯 다르게, 끊길 듯 이어지며 찾아오는 계절을 따라 순간의 압도, 휘몰아치고 스쳐지나가는 세계, 날씨를 악보로 옮길 수 있다면, 가늘게 들려오는 선율처럼 그 궤적을 따라갈 수 있다면, 사계는 그저 풍경의 변화가 아니라 거대한 협주곡의 한 장과도 같을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이에게 날씨는 더이상 존재-외-배경 무언가가 아닌, 춤추고 노래하고 손가락을 두드릴 것을 종용하는 음악과도 같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세계는 그저 장소가 아니라 거대한 콘서트홀과도 같을 것이다. 경이롭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는 불규칙한 리듬으로 귀를 울리는 빗방울, 벗겨진 땅에서 불어오는 황량한 바람, 지축을 뒤흔드는 태풍과 눈송이의 춤을 섬세하게 덧그린다. 퍽 낭만적인 만남이나 그러면서도 고요한 서재에 앉아 나누는 담소처럼 느긋하고 낭만적인 문장으로 우리의 세계에 가득한 날씨, 그 원인과 성질을 풀어내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이렇게만 살 수 있을까요.


노래하는 세계, 세계의 음악, 그것이 날씨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선율 하나 울림 하나를 귀기울여 느끼고 들여다볼 수 있다면 한 해는 비발디의 그것 못지 않게 아름답고 낭만적인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보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독자는 이내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이게 정말 음악이 맞는가? 끔찍한 고요와 불협화음, 절멸의 전주곡이 아닌가? 잠깐 멈춰보라고, 저 끝에 있는 이를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날씨가 사람이라 이 못돼먹은 놈! 하고 탓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세상에 나쁜 날씨는 없다. 낯설고 인간의 생존을 어렵게 하는 날씨와 기대를 배반하는 글러먹은 일기예보는 있겠지만, 날씨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 날씨는 징벌이 아니고 어떤 은유적 표현도 아니다. 되려 그것은 소름끼치게 정확한 결과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인간과 자연의 배은망덕 과실비율은 100:0인 셈이다.

앞서 말했듯 세계의 음악이 날씨라면,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이 화답하는 움직임 또한 그의 일부일진대,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오페라의 이중창처럼 주고받아야 할 대화가 중간에 뜯겨나가 긴 침묵만이 흐르는 것이다. 응답받지 못한 선율은 어그러지기 시작하고, 점점 더 이질적이고 괴로운 소음을 낸다. 현재의 이상기후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언제까지고 바라보기만 할 수 있다면 허리까지 쌓인 설경과 얼음의 땅에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꿈이지만, 이제는 다음 세대에게 만년설과 빙하의 아름다움, 때맞춰 내리는 고마운 비와 기름진 흙내, 가을날 산천을 수놓는 단풍을 말할 수 있을까, 범람하는 강으로 비옥해진 땅, 맑게 갠 하늘의 무지개가 주는 벅찬 감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러니 결국 저 앞에서 던져버린 고리타분한 수사를 다시금 내밀 수밖에 없다(먼지 후후 불었다. 괜찮다). 사랑하라고. 이 계절 이 날씨, 순식간에 밀려와 세상이라는 무대를 뒤덮는 배경을 사랑하라고, 작은 변화에 귀기울이고 손끝으로 따라가며 즐기라고.

그 끝에 찾아오는 깨달음, 이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으며 동시에 잃지 않을 수 있으니 쉼표 하나, 미끄러지고 떨리는 음표 하나에 기뻐하고 놀라워하는 동시에 소중함을 잊지 말라. 이런 마음이라면 매일의 기상예보를 다르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렇게. 내일의 박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소 빠르고 잦은 박자 변화가 예상되며, 쿵짝짝, 쿵짝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나, 마들렌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좋아하는 노래, 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좋아하는 가사는 있다. 우스꽝스럽고 조금 눅눅한,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게 하는 그런 가사. 노래의 기원은 시라고 하지 않던가. 아니, 반대였던가. 시가 먼저인가 노래가 먼저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가사는 노래되는 시, 시는 침묵을 멜로디로 하는 가사일테다. 그러니 둘 다 사는 이야기가 될 수 밖에.

뱀발이 길었다. 그래서 좋아한다던 가사가 대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에 우린 태어났으니까.” 라고 하겠다. 사는 일은 대개 멋지지 않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데. 많은 경우 고아한 미소를 자아낸다기 보다는 짠한데 웃기고, 자존심 상하고 짜증도 나는 와중에 그 꼬라지가 웃긴, 그런 희극이다.

세상의 끝은 훌쩍임과 함께 찾아온다는데, 아무리 울고 싶어져도 세상이 끝날 지경까지는 아니라 쾅 하는 소리가 아닌 컹, 하고 코먹는 소리와 함께 하루의 끝이 오나보다. 못난 것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웃기다는데, 대체로 만나기만 해도, 거울만 봐도 웃긴 건... 못난 동시에 평범하고, 울고만 있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인연과 웃기는 짬뽕(!)들의 연속이 곧 삶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뭐든 간에 웃다보면 눈물이 난다. 울다 웃으면 어디에 뭐가 난다는데, 웃다 울면 어떻게 되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허탈해서 웃음이 다 나든, 와중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든, 배를 싸쥐고 웃다 쥐가 날 지경이라 눈물이 나든 웃음 뒤엔 눈물이 있다. 울음의 끝은 웃음이고, 웃다보면 눈꼬리에 물이 맺힌다. 그 둘은 이어져 있다. 다르지 않다. 맞닿아 있다.

세상의 끝이 온다면,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 최소한의 사람됨이 의지 밖의 일로 소멸되는 틈을 타 알아서들 벗어던지는 탓에 배는 빠르게 무너져내리는 날이 온다면, 그렇다면 일상은 제법 익숙한 형태의 오래된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만약에“의 탈을 쓰고 그려내던 추잡한 폭력의 표출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 끈질기게 이어지던 한가닥 희망이나 그 둘이 뒤섞인 형태로.

그러니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이 되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는 때가 되더라도 누군가는 차마 살려달라는 이를 저버리지 못하고, 어느 순간 사람의 경계를 넘은 이를 차마 해치지 못한다. 물론 후자의 웃기는 꼬라지, 패기와는 다르게 차창 와이퍼에 머리카락이 집혀 아프다고 난리를 하는 꼴이 큰 몫을 했겠지만.


누군가는 이전과 다르지 않게, 그 와중에도 타인을 사람으로 존중하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그가 제게 주어진 물건쯤 된다는 듯, 그의 의지는 제 폭력에 설설 기며 아양을 떠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당연한 듯이.

p.36 곧 인간성이 만료된다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끝내 가야 했던 곳은 대체 어디였을까. 대체 뭘 하고 싶었을까. 누구를 만나려는 거였을까.

또 누군가는 달에 두엇이나 오면 웬일인가 싶을 작은 도서관(이라고 하기엔 창고에 가까운)을 지켜내려 발버둥을 치고, 누군가는 그 꼴에 한숨을 쉬고 진절머리를 내다가도 차마 저버리지 못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난리를 한다.

버려질 줄 알았던 것이 아주 작은 우연으로 살아남기도 하고, 묵혀둔 기억에서는 곰팡내가 나고, 달라진 위상에 주눅이 들기도 한다. 그게 다 사람의 일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자의 말은 죽지 않는다. 이따금 죽은 자는 말을 한다. 아직 죽지 않은 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를 잊지 말라고.


그리하여 소멸에의 요구는 소멸의 때를 늦추는 힘이 있다. 내가 지킨 것을 영영 해칠 수 없도록 잿더미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부재하는 이의 말은, 발화가 종료됨으로서 먼저 부재하게 된 그 말은 생생하게 남아 등을 떠민다. 부재는 빈자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없는 것은 힘이 세다.

필연적으로 도래할 존재의 소멸은 존재하는 시간을 슬프게 한다. 그래서 한 사람 분의 축적된 시간을 잃는 죽음은 도서관이 불타는 것과 같이 커다란 의미를 갖는지도 모른다. 상실은 아프고 부재는 서러우나, 남은 이의 삶은 여전히 얼렁뚱땅 이어진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지. 살아남아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웃기는 꼬라지를 이어갈, 남은 자의 시간을 살아낼 의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남은 자는 있는 힘껏 부재를 완성해낼 의무가 있다. 애도는, 충분히 기억하고 떠나보내는 일은, 그 시작일 뿐이다.

p.125 만드는 일과 지키는 일 중 전자가 더 중요하고 어렵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건 착시다. 인간을 만드는 것까지야 뭐 대충 아무나 최소한 두 사람만 모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기껏 만들어놓은 한 인간이 죽지 않게 돌보아 주는 일은 누구한테나 어려운 것처럼...

p.126 “세네갈? 그 아프리카 세네갈?” “그럼 경기도 의왕시 세네갈구 세네갈동이겠냐.”


앞서 말했듯이 사는 일은 웃기다. 정확히는, 살아가는 꼬라지가 웃기다. 사랑한다며? 믿는다며? 근데 왜 너는 과자고 나는 감자냐? 처럼. 평범한 이의 쫌(좀이 아니다) 치사하고 쪼잔하고 어이없는데, 황당하기까지 한 일도 구겨진 잔돈마냥 어찌저찌 쑤셔넣어가며 이어진다. 다시 한 번,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스꽝스럽다.

그와 동시에 살아내는 일, 처참한 수준의 발버둥이 우스운 이유는 그 버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는 일은 무엇 하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토록 필사적이고, 그를 알고 있기에 웃다 울고, 울다 웃을 수 있다.

지는(!) 과자 나는 감자라고 뻔뻔하게 선언해도, 느닷없는 봉변에 환장의 3인가구가 되어도, 안그래도 맘에 안 들던 그 애가 쉽게 죽지 않겠다고 버텨내고, 주는 것 없이 내놓기만 하라는 작태에 짜증이 치밀어올라도 같은 사람이라 차마 모를 수 없는 타인의 심정이 신경을 거스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산다.


차마, 차마 외면할 수 없음이, 오직 그 이해의 가능성과 웃기는 꼬라지가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한다. 찌질하고, 연약하고, 웃기기 짝이 없는 인간종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건 바로 그 실낱같은 가능성 덕택이라고 믿고 있다. 다시 한번, 못난 것들은 얼굴만 봐도 즐거우니 오늘도 컹, 소리와 함께 하루가 끝날 것이고 내일도 환장의 호흡일 것이다. 사는 일이 그렇다.

p.201 마들렌은 나의 과자 친구. 나는 마들렌의 감자 친구. 어느 날 마들렌은 이제부터 여자 친구 대신 과자 친구라 불러달라고 말했고, 자기도 나를 여자 친구 대신 감자 친구라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자기는 왜 귀엽게 과자 친구고 나는 왜 텁텁하게 감자 친구인가?

p.262 물론 한동희가 믿는 것처럼 내가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듯싶었다. 나를 신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언젠가 자기에게 죽으라 했던 이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신에게 저항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신은 나한테 죽으라고 했지만 그렇게 순순히 죽지는 않겠다는 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 :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김정훈 옮김 / 호두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어 번역본을 오래도록 기다려왔어요. 출판사의 첫 책이라니 기쁘고 반갑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 만성질환 혹은 이해받지 못하는 병과 함께 산다는 것
메건 오로크 지음, 진영인 옮김 / 부키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 부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는 일은 외롭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비롯해 삶의 본질적 요소 중에는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사는 일을 외롭게 한다. 그것은 존재라면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더이상 살아있지 않은 것이 되기까지의 시간 내내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이다. 삶은, 외롭다.

살아있는 것은 쉽게 병들고 자주 다친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손상도 겪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그 익숙한 경험, 질병, 통증, 일상의 곤란함, 장애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일까. 충분히 설명하고 고통을 호소한다면,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룩된 진단 체계를 통해 명명의 기회를 얻어낸다면 누구나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생래적으로 공감하는 탓에 타인의 고통, 정확히는 공감과 연민을 요구하는 호소는 쉽사리 구태연하고 지긋지긋한, 다소 피로한 일이 되기 마련이다.



또한 사람과 함께 사는 동물인 탓에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보느라 피곤해진 사람‘을 마주하고 또 그들의 감정을 읽어내지 않거나 끝없는 공감과 자리-내어주기를 강요할 방도가 없는 바, 외로움은 또다른 고통으로 이어진다. 안 그래도 외로운 삶, 사회로부터,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종내에는 자기자신으로부터 소외되기 마련이다.

고통은, 더욱이나 오래 이어지고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은 당사자로 하여금 몸과 시간을 이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선명히 지각하게 만든다. 이전의 일상을 제한당하는 불편감, 위축되는 생활의 경계, 반복될수록 예민하게 지각되는 통증은 몸이 하나의 현존하는 물체로서 지각 가능한 시간에 놓여있음을 알게 한다.

혹자는 말한다. 아픔으로 인해 얻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일상을 되찾은 행복이나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에 감사하는 태도로 살아갈 수 있다고. 으레 ‘그렇다고 하는데 왜 너는 맨날 아프다고 타령이냐’는 힐난이 따라붙지만 않는다면, 그게 일상과는 동떨어진 말이라는 걸 잠시 잊는다면 제법 멋들어진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말이다.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분명 삶의 질이 뚜렷하게 저하되고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기초적인 것들을 수행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내 몸이 아프다는데 도무지 설명할 말이 없다.

들어맞는 진단이 없으니 꾀병, 완곡하게는 ‘심인성 질환’이라고 치부된다. 부러진 뼈를 의지로 붙이라는 사람은 없는데, 피로나 발진, 구역감과 각종 통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쉽게 의지와 극복의 문제가 된다.

p.8 아픈 당사자는 질병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질병이 일으키는 두려움과도 싸워야 한다. 그래서 질병 서사는 늘 ‘극복’을 지향한다.

p.375 병은 분명 우리의 삶을 검증하고 다시 세우도록 떠민다. 병이 불러온 파괴로부터 재창조의 공간이 생겨난다. (...) 병의 아픔을 보상해 줄 만한 유용한 점을 찾는 행위와, 아픔의 본질에 관해 우리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는 행위는 한 끗 차이다.

p.384 발전하길 바랐던 자신의 어떤 측면들을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면서 생겨나는 지식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파멸과의 조우에서 입은 상처와 이어진 지식이다.


하다하다 도무지 길이 없어 대체의학이나 온갖 민간의학에 눈을 돌리면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는, 배교자와 그 어리석음을 질책하는 비난이 쏟아진다. 그러나, 몰라서 가는 사람은 없다.

생각없이, 처음부터 보다 쉽고 가까운 현대의학을 팽개치는 일은 적어도 현대화된 국가에서는 드물다는 뜻이다. 아프다니까요? 더 이상 답이 없다니까요?

p.125 인간이 자정 작용을 통해 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나 또한 이런 환상에 전적으로 빠져 있었다. 자기 관리의 행위에는 영적인 데가 있다. 나는 의식을 치르면서, 부서진 삶을 다시 맞추어 연속성을 찾고자 했다.

p.164 이미 문제가 있는데 타인에게 지독히 인정받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악화 하고, 우리는 윤리적 외로움을 느낀다. 침묵을 강요당한 집단에 속하는 특별한 고통, 단지 정체성 때문에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고통을 지적하는 개념이다. 그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저자 메건 오로크는 십여년간 시달려온 원인불명의 다발적 통증과 불편감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는 과정과 그 경험에서의 여러 통찰을 조심스러우면서도 뜨겁게 전달한다. 각자의 고통, 말할 길을 찾지 못한 각각의 아픔 무엇도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통증과 질병이 일상으로 편입되는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진단을 받고,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하고, 수차례 좌절하고 비난받으며서도 살아남기를 포기하지 않는 지난한 과정을 세세하게 풀어놓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만성질환을 대하는 사회의 문제점, 현대서구의료시스템이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내보인다.

p.346 건강이란 "질병을 앓지 않거나 허약하지 않은 상태를 넘어서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온전히 안녕한 상태"다. 의학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이 정의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특히 만성질환의 경우 그러하다. 의사들이 환자의 치유를 돕고 싶다면, 환자가 온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전세계를 휩쓴 COVID-19. 모두가 공포에 떨고 전반적인 일상이 흔들리는 때는 지났다고들 한다. 더러는 한 번 앓고 지나가면 면역이 생긴다든지, 까짓것 감기와 다를 게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회복’이나 ‘지나간 경험‘ 뒤에는 상세불명의 후유증을 겪거나, 지금까지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가 겪은 여러 자가면역질환 또한 이름 탓인지 그 원인이 환자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경향이 있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스스로에게 신경쓴다면 면역 시스템이 정상값을 찾을 것처럼.

심각해보이는 특징적인 급성기 증상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일상적이거나 가벼운 질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그들의 환자-됨, 아픔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의 호소는 과거의 히스테리나, 더러는 의료진의 권위를 의심하는 주제넘은 환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p.334 잘 알지 못하는 병을 심리적 문제로 해석하는 문화의 비극이다. 그렇게 병을 등한시하면 환자는 홀로 남겨져 안 보이게 되고, 그들의 병은 성격적 결함으로 취급된다.


이들을 대하는 ‘참 쉬운 말들’은 명시적으로든 잠재적으로든, 도덕적 훈계의 양상을 띈다는 특징이 있다. 전문 교육을 받은 학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왜 반복적으로 증상을 호소하는가? 왜 보다 건강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왜 연민과 공감, 알아주기를 원하는가? 노력과 마음먹기가 모자란 것이 아닌가?

언제는 병이 똑똑, 들어갑니다. 하고 온다던가. 아픈 몸이 개인의 부주의나 불량한 생활로 인해서만 초래되던가. 남에 비해 덜 아프니 안 아픈 셈 칠 수 있는 고통이 어디 있던가. 당장 죽지 않는다고, 보기에 괜찮다고 아프지 않은 게 되던가.

p.277 확실한 단서와 증거가 없으면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 병은 심각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현실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 냈다.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로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아프기로 말하자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 거의 매일 현기증과 소화불량, 전신 통증을 안고 산다. 이것들은 일종의 ‘기본값’이 되었기 때문에 견딜만한 날과 덜 견딜만한 날이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부상이나 증상이 아니기에 이해를 바라기도 어렵다. 통증과 제한이 없는 이들과 동일한 수행을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과 혼자 있는 시간들에 겪어내는 고통이 필요하다.

일상 얘기에서 아픈 이야기를 제하는 기술이 늘었다. 적당히 불편하지 않게,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 내가 나를 연기해내는 시간들. 아픔과 꼬리를 무는 우울, 절망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아픈 사람을 보는 일은 괴롭다.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나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히 아플 수도, 고통 줄이기에 전념하기도 어렵다. 아픈 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까다롭고 신경이 쓰이는, 불편한 존재가 된다.

p.353 "네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행위만으로도 내겐 어떤 입장을 요구하는 일이야. (...) 공감해야 하고. 힘든 일이지. (...) 병을 알아달라는 주장은 입장을 정해달라는 뜻이 되거든." (...) 인식의 행위에도 진정으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아픈 사람을 힘들게 한다.


장성한 자녀, 유쾌한 친구, 자기 분야에서 재능을 펼치는 한 사람의 시인, 작가, 저널리스트, 편집자, 강사... 사회에서 ‘1인분 몫’을 다한다고 생각했던 일상은 온몸을 덮치는 병에 시달리는 시간들에 밀려났다.

그것을 어느정도 되찾기까지 너무나도 긴 시간을 자기부정과 가까운 이들의 비난과 피로, 사람이 아닌 그저 하나의 몸으로 여겨지는 치료 경험과 대체의학에 기대고 전방위로 붕괴되는 삶을 수습하려 애써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이 책은 ‘완치’로 나아가는 희망과 극복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넘어지고 무너지고, 구르고 부서지다 끝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보기를,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강인하고 눈물겨운 이야기다. 그러나 성공담 내지는 동정심을 짜내려는 글이 아니다.

p.22 이 책은 병을 없애거나 무찌르는대신 병과 함께 사는 이야기다. 병을 극복하는 미국적 정신을 놓아 주고, 상호 의존성을 찾는 이야기다. (...) 신체는 언제나 다른 신체와 소통한다. 면역계는 보건 정책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과 정서에도 반응한다. 그래서 면역 기능에 이상이 생긴 신체란, 우리가 서로 영향을 잘 주고받는 존재임을 구현한 몸이다.


그렇기에 나의 긴 시간, 아프지 않았던 때가 거의 없는 나의 과거, 안팎으로 의심과 훈계, 죄책감에 시달렸던 나와 내 몸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내 울며 읽었다. 울 수밖에 없었다. 모를 수가 없으니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결국 이것은 아픈 사람, 오래, 자주 아프면서도 병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도 아프다는 사실, 나으려고 애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리석거나 부도덕하다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이 책은, 늘어나고 다양해진 삶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사람을 위한 위로이자 그들이 존재함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그와 동시에 용기와 사랑의 기록이다. 이 책을 읽을 아픈 사람들이 살아보기를 포기하지 말 것을, 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병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삶이 있음을, 당신 자신을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말기를 바란다.


p.136 만성질환에 시달리면 건강을 향한 길로 무작정 밀고 나아갈 수 없다. 오히려 전신에 나타나는 모호한 병을 받아들이려면, 우리가 아픈 존재이고 증상은 나타났다 사라지며 우리의 병은 환자가 정복할 수 있는 그런 질환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p.327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야 했다. 정체성과 건강과 희망이 우연히 만나는 이야기. 어떤 종류의 생존이든 그 안에 힘이 있다고 보는 이야기. 내 경험은 삶 그 자체였다. 불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몸 그 자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