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 마들렌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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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좋아하는 노래, 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좋아하는 가사는 있다. 우스꽝스럽고 조금 눅눅한,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게 하는 그런 가사. 노래의 기원은 시라고 하지 않던가. 아니, 반대였던가. 시가 먼저인가 노래가 먼저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가사는 노래되는 시, 시는 침묵을 멜로디로 하는 가사일테다. 그러니 둘 다 사는 이야기가 될 수 밖에.

뱀발이 길었다. 그래서 좋아한다던 가사가 대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에 우린 태어났으니까.” 라고 하겠다. 사는 일은 대개 멋지지 않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데. 많은 경우 고아한 미소를 자아낸다기 보다는 짠한데 웃기고, 자존심 상하고 짜증도 나는 와중에 그 꼬라지가 웃긴, 그런 희극이다.

세상의 끝은 훌쩍임과 함께 찾아온다는데, 아무리 울고 싶어져도 세상이 끝날 지경까지는 아니라 쾅 하는 소리가 아닌 컹, 하고 코먹는 소리와 함께 하루의 끝이 오나보다. 못난 것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웃기다는데, 대체로 만나기만 해도, 거울만 봐도 웃긴 건... 못난 동시에 평범하고, 울고만 있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인연과 웃기는 짬뽕(!)들의 연속이 곧 삶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뭐든 간에 웃다보면 눈물이 난다. 울다 웃으면 어디에 뭐가 난다는데, 웃다 울면 어떻게 되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허탈해서 웃음이 다 나든, 와중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든, 배를 싸쥐고 웃다 쥐가 날 지경이라 눈물이 나든 웃음 뒤엔 눈물이 있다. 울음의 끝은 웃음이고, 웃다보면 눈꼬리에 물이 맺힌다. 그 둘은 이어져 있다. 다르지 않다. 맞닿아 있다.

세상의 끝이 온다면,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 최소한의 사람됨이 의지 밖의 일로 소멸되는 틈을 타 알아서들 벗어던지는 탓에 배는 빠르게 무너져내리는 날이 온다면, 그렇다면 일상은 제법 익숙한 형태의 오래된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만약에“의 탈을 쓰고 그려내던 추잡한 폭력의 표출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 끈질기게 이어지던 한가닥 희망이나 그 둘이 뒤섞인 형태로.

그러니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이 되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는 때가 되더라도 누군가는 차마 살려달라는 이를 저버리지 못하고, 어느 순간 사람의 경계를 넘은 이를 차마 해치지 못한다. 물론 후자의 웃기는 꼬라지, 패기와는 다르게 차창 와이퍼에 머리카락이 집혀 아프다고 난리를 하는 꼴이 큰 몫을 했겠지만.


누군가는 이전과 다르지 않게, 그 와중에도 타인을 사람으로 존중하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그가 제게 주어진 물건쯤 된다는 듯, 그의 의지는 제 폭력에 설설 기며 아양을 떠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당연한 듯이.

p.36 곧 인간성이 만료된다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끝내 가야 했던 곳은 대체 어디였을까. 대체 뭘 하고 싶었을까. 누구를 만나려는 거였을까.

또 누군가는 달에 두엇이나 오면 웬일인가 싶을 작은 도서관(이라고 하기엔 창고에 가까운)을 지켜내려 발버둥을 치고, 누군가는 그 꼴에 한숨을 쉬고 진절머리를 내다가도 차마 저버리지 못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난리를 한다.

버려질 줄 알았던 것이 아주 작은 우연으로 살아남기도 하고, 묵혀둔 기억에서는 곰팡내가 나고, 달라진 위상에 주눅이 들기도 한다. 그게 다 사람의 일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자의 말은 죽지 않는다. 이따금 죽은 자는 말을 한다. 아직 죽지 않은 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를 잊지 말라고.


그리하여 소멸에의 요구는 소멸의 때를 늦추는 힘이 있다. 내가 지킨 것을 영영 해칠 수 없도록 잿더미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부재하는 이의 말은, 발화가 종료됨으로서 먼저 부재하게 된 그 말은 생생하게 남아 등을 떠민다. 부재는 빈자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없는 것은 힘이 세다.

필연적으로 도래할 존재의 소멸은 존재하는 시간을 슬프게 한다. 그래서 한 사람 분의 축적된 시간을 잃는 죽음은 도서관이 불타는 것과 같이 커다란 의미를 갖는지도 모른다. 상실은 아프고 부재는 서러우나, 남은 이의 삶은 여전히 얼렁뚱땅 이어진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지. 살아남아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웃기는 꼬라지를 이어갈, 남은 자의 시간을 살아낼 의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남은 자는 있는 힘껏 부재를 완성해낼 의무가 있다. 애도는, 충분히 기억하고 떠나보내는 일은, 그 시작일 뿐이다.

p.125 만드는 일과 지키는 일 중 전자가 더 중요하고 어렵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건 착시다. 인간을 만드는 것까지야 뭐 대충 아무나 최소한 두 사람만 모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기껏 만들어놓은 한 인간이 죽지 않게 돌보아 주는 일은 누구한테나 어려운 것처럼...

p.126 “세네갈? 그 아프리카 세네갈?” “그럼 경기도 의왕시 세네갈구 세네갈동이겠냐.”


앞서 말했듯이 사는 일은 웃기다. 정확히는, 살아가는 꼬라지가 웃기다. 사랑한다며? 믿는다며? 근데 왜 너는 과자고 나는 감자냐? 처럼. 평범한 이의 쫌(좀이 아니다) 치사하고 쪼잔하고 어이없는데, 황당하기까지 한 일도 구겨진 잔돈마냥 어찌저찌 쑤셔넣어가며 이어진다. 다시 한 번,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스꽝스럽다.

그와 동시에 살아내는 일, 처참한 수준의 발버둥이 우스운 이유는 그 버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는 일은 무엇 하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토록 필사적이고, 그를 알고 있기에 웃다 울고, 울다 웃을 수 있다.

지는(!) 과자 나는 감자라고 뻔뻔하게 선언해도, 느닷없는 봉변에 환장의 3인가구가 되어도, 안그래도 맘에 안 들던 그 애가 쉽게 죽지 않겠다고 버텨내고, 주는 것 없이 내놓기만 하라는 작태에 짜증이 치밀어올라도 같은 사람이라 차마 모를 수 없는 타인의 심정이 신경을 거스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산다.


차마, 차마 외면할 수 없음이, 오직 그 이해의 가능성과 웃기는 꼬라지가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한다. 찌질하고, 연약하고, 웃기기 짝이 없는 인간종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건 바로 그 실낱같은 가능성 덕택이라고 믿고 있다. 다시 한번, 못난 것들은 얼굴만 봐도 즐거우니 오늘도 컹, 소리와 함께 하루가 끝날 것이고 내일도 환장의 호흡일 것이다. 사는 일이 그렇다.

p.201 마들렌은 나의 과자 친구. 나는 마들렌의 감자 친구. 어느 날 마들렌은 이제부터 여자 친구 대신 과자 친구라 불러달라고 말했고, 자기도 나를 여자 친구 대신 감자 친구라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자기는 왜 귀엽게 과자 친구고 나는 왜 텁텁하게 감자 친구인가?

p.262 물론 한동희가 믿는 것처럼 내가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듯싶었다. 나를 신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언젠가 자기에게 죽으라 했던 이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신에게 저항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신은 나한테 죽으라고 했지만 그렇게 순순히 죽지는 않겠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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