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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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통은 외롭다. 객관적인 자극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이 한 개체의 내부에서 해석된 결과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주체가 타자의 유무형적 경계를 넘을 수 없기에, 단지 그렇기에 고통은 있는 그대로 공유될 수 없다. 기껏해야 설명, 그마저도 개인 내적으로 해석된 고통을 그의 언어로 재해석한 것, 지극히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내용만이 간신히 내보여질 뿐이다.

그것은 곧 존재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외로움으로 연결된다. 고통의 언어는 비명이다. 호소다. 타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필사적인 의문이다. 왜 이렇게 괴로워야 하느냐고, 대체 이것의 끝은 어디며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고통스러운 사람은 묻는다.

답을, 그것도 만족스러운 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애써도 답을 얻지 못한 자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그저 수동적으로 내맡겨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자는 절망한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미완의 질문을 답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뿐이다. 답이 없다면 만들어내면 된다. 이해할 수 없다면 외워버리면 된다. 주문처럼.

p.21 그는 절망했다. 그의 삶은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달린 전력 질주와 같았다. 무기징역 선고와 함께 그 목표가 사라졌다. 죽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의 삶은 의미를 잃었다.


괴로운 자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2차적 고립이다. 나의 의미가 오직 나만의 믿음일 때, 그것은 쉽사리 무의미한 광신으로 취급된다. 무시된다. 다시금 궁지에 내몰린 자는 동지를 찾는다. 나의 믿음이 우리의 것, 공동의 것이 될 때 그것은 힘을 얻는다. ‘나만 믿고 따르라’ 이끄는 자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무의미에서 오는 절망을 믿음 너머로 던져버린다. 모든 것은 초월 너머로 감춰진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순종과 헌신 뿐이다. 더는 갈등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다. 신의 뜻이 이끌 것이다. 들어주는 존재가 있다.

가자. 나의 믿음이 너의 것이 되도록. 이는 구원을 위한 시련이니, 불신하는 자에게 영원한 ‘그것’ 있으라.

p.128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선의가 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 선의의 표현이다. 문제는 상대가 원하리라 생각하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좋은 것을 떠안기는 일을 선의로 착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작가는 선의와 무심, 이기심과 가학의 난장판이 한 데 뒤섞인 것을 보여준다. 상냥하게 풀어헤치지 않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 보세요. 무용의 지옥에서 구했어. 괴롭게 하는 것을 전부 없애버렸어. 구원으로 이끌었어. 분열시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치워버렸어. 받아먹지 못하기에 쑤셔넣었어. 어때, 고마운가요.

p.245 그들은 너무 늦게 알았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알게 된 뒤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고통과 죽음은, 그것이 타인에게 강요되는 경우, 그들의 의도에 대체로 부합했다.

p.290 물리적으로 감각하는 모든 정보를 신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마음은 그것을 고통이라 정의했다. 그러므로 기쁨도, 환희도, 초월도, 아마 구원조차도, 인간이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 때는 모두 고통이었다.


알 수 없다. 영원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느낄 수는 없지만 함께할 수 있는, 고통이 연대와 공생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타인의 세계를 비집고 들어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경험마저 빼앗을 수 없다면, 그것을 약탈-대리해 정의할 수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타인의 경계를 부수거나 심지어 그 자체를 파괴해버린대도 그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이것은 절망인가. 그렇지 않다. 그 한계가 시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p.301 흉터는 상처와 고통과 회복의 과정과 회복에 동반하는 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 뒤에 남는 감정과 기억을 대표했다. (…) 신체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을 간직한 채, 상처 입은 흉터투성이 존재를 떠안고 죽는 순간까지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다.


고통이 고독의 고통으로 자라나지 않으려면 함께 어깨를 들먹이고 온 품으로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인 이를 완전한 고독으로 몰아넣지 않으려면 그의 떨림과 울음에 함께해야 한다. 그 자신의 언어에게 자리가 있어야 한다.

자기 것이 아닌 세계를 자기로 끌어넣어 부서뜨리려는 이에게 맞서 살아남은 흉터가 지나간 기억이 되려면, 부술지언정 부서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알 수 있다. ‘큰 뜻으로 내리신 은총’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더라도. 고통이 없기에 타인의 세계도, 자기자신의 안팎도 알 수 없는 무능한 전능자가 부여하는 시련이 아니더라도.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게조차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함께할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삶에서 의미를 찾아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당신과 나는.

p.320 "너는 내 삶의 어떤 부분을 아주 크게 부숴놨어. 물론 이미 망가져 있어서 차라리 부숴버리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너한테 부탁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너는 내 인생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마음대로 부술 권리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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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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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은행나무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인생사 본질적으로 구질구질하고 못나기 마련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예, 제가 했습니다.

사람 사는 일이 환희와 완벽의 순간으로 가득할 수는 없다고, 결국 사는 일에는 근원적으로 구차한 면이 있다고 말해왔으나 사실 또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는 일에는 고통이 수반되나 고통스러워야만 삶인 것은 아니다.

고통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어쩔 수 없는 고통, 겪지 않아도 되거나 마땅히 처해도 될 이는 없는 고통. 전자가 삶의 본질적 요소로 불리는 고통에 속한다면 후자는 사회의 일면이다. 떠넘겨지는 고통이다.

구조의 틈새에 끼인 존재들, 시스템의 부산물, 제거보다 월등히 저렴한 방임에 의해 유지되고 당연시되는 고통.


우리의 주인공, 전혀 easy하지 않은 인생, 안이지씨의 여정은 그야말로 딱, 궁상맞음이다. 구질구질하고 짜증스럽다. 그의 취급 또한 그렇다. 그는 예술가인 동시에 노동자다. Mass, 대중이다.

그는 많은 경우에 존중받는 사람이 아니다. 지도 위의 파란 점, ‘담당자’의 사정에 따라 미뤄지고 잊혀지는 짐,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동시에 파격적으로 타오를 것을 요구받는 생산자.

가난한 예술가와 그의 열정이 사회의 냉대와 가난에 좌절되는 이야기야 속된 말로 ‘쌔고 쌨으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딱히 달라진 점은 없다. 오히려 예술과 자본의 촘촘한 결탁으로 더 많은 것, 더 높은 강도의 노동, 더 파격적일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모를까.

p.170 내가 거쳐온 동네들이 모두 값이 뛴 것은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값이 뛰었기 때문에 더 싼 곳으로 밀려났던 거니까.


‘굶어죽어도 예술이 좋은’ 이가 아닌, 평범하게 살아온 이상 ‘굶어죽을 각오’를 해야만 시작이라도 해보는 것이 작금의 젊은 예술인 아닌가. 우리의 안이지씨처럼.

그저, 점. 그의 가치는 사회의 하층, 우매한 대중이며 그의 고통은 어깨 한 번 으쓱이는 사이에 말끔히 무시된다. 제자리로, 마땅히 있어야 할... 그의 자리로. 어쩌겠어요. 안그래요?

p.38 그가 내민 휴대폰 화면 속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두 발… 어떤 이동 수단을 사용하든 나는 그저 동그랗고 파란 점으로 요약되었다.

p.112 이렇게 모든 것의 제자리가 있는데 정작 내 자리는 아주 희미해 보였다. 방이 나를 뱉어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진 건 곳곳에서 사소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그러나 사소한 게 아닌) 무신경의 흔적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처량하고 궁상맞은 데다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으며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어긋난다. 엇갈리고 뒤처진다. 숭고한 이상과는 영 거리가 멀다. 형식의 미와 정신은 커녕 선택된 자만이 초대되는 자리에서도 고상한 냉소와 경멸에 시달리고는 야밤에 즉석밥 돌릴 전자레인지를 찾아 헤맨다.

속 시원한 부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도 전무하다. 끝까지 그는 무시된다. 마지막까지 그는 그 자체로서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한다. 딱 한 순간, ‘그것’의 공모자가 되는 것만 빼면.

끝끝내 기만적이고 냉소적이다. 작품 내내 독자는 초대받은 불청객, 미덥지 않은 ‘하층민’, 경박한 소비자와 무력한 방관자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그와 우리의 잘못인가? 이건 아마 우리의 잘못이 아닐거야. 맞아. 다 니 잘못이야...

p.273 금기 혹은 생략, 그 둘에 대해 헤아리다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들어왔고 이 전시회의 주인공이 내가 아님이 자명해졌다. (…) 전시 기간 동안 고용된 경호 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보호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그린 작품들보다도 한참 뒤에 있었다.


시작부터 결말까지 단 한 순간이라도 통쾌한 부분이 있었다면,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무시되지 않았다면, 상여가 현대 슈퍼카로 와전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멸과 경멸까지도 닿지 못한, 인간의 바운더리에서 밀려나 잊혀지는 인간들. 매캐한 연기와 진짜를 모방한 가짜-진짜, 여전히 지지리 궁상인 몸과 알 수 없는 영혼에 박수를 보낸다. 타오르는 불길에서 감히 살아남아 더이상 진짜가 아니게 된 가짜-진짜에 눈부신 조소를 보낸다.

별 것 아닌 인생, 그 이상의 예술을 위하여. 라이더님, 당신을 위한 스페셜!

p.186 "의미 없어요." "네?"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을 로버트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작가가 사랑하게 되는 구조겠죠. 어떤 경우에든 작가는 사랑하는 걸 불태울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당신은 결국 그것과 사랑에 빠질 겁니다."

p.341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 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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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드는 세계 위대한 도시들 2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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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끔찍한 일이다. 현실 너머의 것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현실 그 자체를 마주한다는 것은. 은유가 아닌 사건 그 자체의 투영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 자신도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겠지만...

하기사 지옥을 그려내는 이는 있어도 지옥 그 자체에 살기를 바라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도시가 된다』 국내 출간으로부터 제법 시간이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 년 반 남짓, 그동안 정말이지...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세계는 점점 나빠지기만 할 뿐, 이전의 평범한 삶은 다음 세대에게는 헛꿈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동안 세계는 팬데믹으로 몸부림을 쳤고, 다시금 멀어졌으며, 환상은 무너졌고 적대와 혐오는 일상의 곳곳에 침투해 또다른 대안현실을 형성했다.


그 결과 지금의 우리는 이전의 우리가 남긴 똥(이보다 더 고상한 표현이 가능할 리가?)을 주워담거나, 슬쩍 떠넘겨버리고 모른 척 고개를 돌리거나, 급기야 나만 당할 수 없다며(그나마 태평한 축인데도 엄살은!) 온 사방에 흩뿌리는 중이다.

작중 도시의 화신들, 도시의 생동하는 힘을 끌어모아 파괴에 대항하는 능력을 갖게 된 불완전 초인들은 모두 사회의 주류에서 조금씩 비껴난 존재들이다. 비-백인, 여성, 이민노동자, 비정규직, 탈가정청소년.

어째서 그들은 그들 자신이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어느 부분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누군가는 당연히 도시가 자신들의 것이며, “이물질”을 추방함으로써 “순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가?

어쩌다 혐오는 놀이가 되고 군중의 유희가 되었는가? 무엇이 비합리의 끝을 달리는 헛소리들을 단단한 현실로 만들어내는가?


작중 세계는 끔찍하기 짝이 없다. 절망과 공멸로 성큼성큼 나아간다. 성원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은 폭력에 가담한다. 선거유세는 혐오발언의 나열과 다를 것이 없으며, 숫제 콘서트를 방불케 한다.

일상이 재난이 될 때, 사회의 성원이 동등한 인간의 자격을 박탈당할 때, 폭력이 권력과 한 몸이 될 때, 증오가 쾌락과 유희의 광란이 될 때 우리 사회는 꼭 그런 꼴일 것이다.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다. 현실이 끔찍한 상상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셈이다.

p.92 외부인이 주민들을 공격했는데, 그들을 지키고 수호해야 할 경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 아직도 부글거리고 있다. (…) 흑인 여성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권리인 정당한 분노를 똑같은 방식으로 표출할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p.174 "하지만 넌 타협하고 싶지 않지? 평등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인데 넌 우리를 평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으니까. (...) 너희의 우월성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때나 할 수 있는 짓이지. 그래서 우리가 공존하지 못하는 거야. 너희의 그 빌어먹을 오만함 때문에!"


작가는 말한다. 정신차리라고. 당신의, 너의, 나의, 그들의 살갗에서 살랑이는 “안내선”을 보라고. 그 촉수를 보라고. 누군가의 삶을 감히 가치없는 것으로 여기고 지워버리는 일에 초우주적 존재가 가담한대도, 너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대도 이대로 살겠느냐고.

이 세계의 증오가, 혐오가, 폭력이, 되도않는 “순수로의 회귀”가 초현실적 존재를 동원해야만 겨우 설명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짓인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고. 이 미물들아. 하찮은 것들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너희 인간들아.

우리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도시는 더럽고 무질서한 곳이다. 바로 그 다채로움이 도시와 인간들이 숱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게 한 힘이다. 일상의 피로가 있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는 곳. 공생의 장.

p.364 그들 각자의 소소한 뉴욕다움은 생명을 구하고 도시의 장점을 강화해 그에 맞서는 압력을 구축한다. 일종의 예방주사인 셈이다.


과연 이 우리-우주적 위기가 수습될 수 있기는 할까. 전편에서 통 크게 깔아둔 판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자세한 말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작가가 마블 시리즈 스핀오프 스토리 작가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더니 과연, 꽤나 유쾌한 방식으로 막을 내린다. 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독자 있어요! 여기 아직 있다니까요? 여보세요? 야 나만 빼고 너네들끼리 사랑하지마!!! 그럴거면 나도 끼워줘!!!

예 이상입니다. 이쪽의 스펙타클은 한 숨 돌렸으니 이제 그만 가주시죠. 당신의 현실로, 당신이 만드는 도시로. 저 아래에서 깨어나 약동하는, 무질서한 세계로.

p.438 "통제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에요." (…) 그게 원래의 야생 상태라고요. 생태계는 원래 카오스 수학이에요. 다양하고, 예측하기도 어렵고, 당연히 위험하기도 하죠. 하지만 공격을 받으면 거기 대응하기 마련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무작정 다 때려 부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이 머저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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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자의 세상 - 스즈키 이즈미 프리미엄 컬렉션
스즈키 이즈미 지음, 최혜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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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따금, 야... 이거 이상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이상하다... 싶은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읽는 내내 이게 뭐지... 대체 뭐지... 이런 걸 써내는 사람은 대체 뭘까... 를 중얼거리게 하는 그런 책들. 그대로 잊히면 좋으련만, 감상은 으레 질문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무엇이 이상한가? 어떤 이유로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가? 이상함의 기준이 기존 사회의 시선이기 때문이 아닌가? 누구의 입장에서 그것을 이상하다고 느끼는가?

무서우리만치 자연스럽고 정교한 가짜 세계에서 독자는 순식간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마치 꿈처럼. 어느 순간 어, 이상한데, 눈치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매끈한 웃음을 만면에 띄운 세계가 등을 떠밀어줄테니. 그래서요? 그런 것 따위 무시해버려요.


굉장히 태연하고 담담하게 돌아있다. 미쳐있다고 해도 딱히 과언은 아닌데, 어차피 인간은 조금씩 미쳐있는 존재가 아닌가요. 소매 마냥 까뒤집은 우리의 내면은 모두 차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무의식의 총체 아니던가요. 모든 꿈은 이성의 세계를 침범하는 순간 악몽이 되지 않던가요.

여상히 이어지는 작가의 세계를 몇 번이고 곱씹다보면 미묘하게 거슬리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것을 봉합지점의 발견이라고 부르는데, 마치 어울리지 않는 거죽을 뒤집어쓰운 흔적과도 같아 자세히 들여다보고 만져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제목이 그 단서가 된다. 남자는 안중에도 없다. 남성과 비-남성을 나누었을 때의 그 남성, 남자. 존재하기는 한다. 어쨌든간에 등장은 한다. 말도 하고 생각도 하지만, 그의 가치는 0에 수렴한다. 일껏 주인공으로 내세워봐도 그의 의식과 이야기의 초점은 여자에게로 옮겨간다.


당연한 일이다. 제목부터 “여자와 여자의 세계”의 세계가 아닌가. 여자의 세상이다. 여자의 상상으로 구성된 세계이다. 이상한가? 정답이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이상할 이유도, 이상하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

그간 당신은 높은 확률로 남자가 만들어낸 “남자와 남자의 세계” 를 읽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이상하다뇨. 참으로 나약하십니다. 아아, 안타까워라.

p.34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이름은 있는데... 심지어 여자들은 자손을 남기기 위해 남성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데도.

p.196 “네 영혼은 나랑은 다른 재료로 이루어져 있나 봐.” 엄마가 말했다. “응, 아마... 아주 질 나쁜 재료일거야.” 나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전반적으로 기괴나 기이보다는 그로테스크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시대감과 더불어 이질감에 뒷걸음치고 싶을 때면 “그래서, 안될까?”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벌리고 묻는 사람의 이미지가 한 데 엉겨있는 느낌이랄까.

여기서 사람을 닮았으되 기존-사람을 닮지 않은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나 또한 기존의 세계를 충실히 답습한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결국은 순응하고 마는, 살아있지 않은 관념적 존재로서의 사회 구성원처럼.

세계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배경으로서의 인간, 최대 가치가 가용 가능한 자원으로서의 인구 정도인 존재. 여자. 여성. 성별이분법적 세계에서 남성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 비-남성-존재들.

p.275 사람들은 얌전하고 밝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 소음이 넘치고, 그러면서도 다시 아주 고요해진 이 동네에서, 각자가 고립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극도로 지루하면서도 즐겁다고 믿으며.


혹자는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는 없다. 스즈키 이즈미는 개척자이지만 후계자는 없다”고 평했다지만 이런 사람이 또 있는 것도 썩 말랑말랑한 세계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도 그럴 것이, 스즈키 이즈미가 그려낸 세계는 기분나쁜 탄성으로 물렁물렁 말캉말캉하게 일렁이는 곳이 아닌가.

또한 그 자신에게 후계자는 없을지언정 살아남아 그를 읽어낸 비-남성-존재들, 1이 아닌 이들이 현실에 도사리고 있으니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오래된 모멸에 대적하는 경멸, 애완과 성애로 포장된 적의에 반격하는 전복.

정신 차릴 틈도 주지 않겠지만 차린대도 별 달라질 것은 없는, 너무도 당연한 세계. 도구들의 세계. 도구가 아니었던 자는 안중에도 없는 세계. 작가는 살며시 입꼬리를 당기며 묻는다. 그래서, 안될까?

p.343 “좋다. 악몽 같은 세계라니, 좋아.” “약간 혼란스럽긴 해. 어떤 일이 나한테 생긴 건지 드라마 주인공한테 생긴 건지, 잠시 생각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든가. 하지만 그런 건 별거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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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 톨게이트 투쟁 그 후, 불안정노동의 실제
기선 외 지음, 치명타 그림, 전주희 해제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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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혹 시장은 공정하며 인간은 이성적이고, 딱 문제없이 돌아가는 세상이라 믿는가? 비록 “조금 부족한” 점이 있을지언정 노사관계는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기업에게는 무한한 이유를 추구할 자격이 있으며 노동계약은 완전히 자유로운 두 주체의 자발적이고 합리적인 계약이라고 믿는가?

사람의 능력에는 차등이 있으니 마땅히 그 대우에도 차등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가? 이를테면, 당연히 노력하고 고생한, 젊고 힘세고 고학력이며 “정상”인 내가. 저 못 배우고 나이 들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떼를 써서” 부당하게 좋은 대우를 요구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 나가. 너같은 물건이랑 같이 쓸 사회 없어. 당신이 당연하게 밀어내고 지워낸 이들에게 떠받들려 유지되는 “정상적인” 세상 같은 건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테니 지구 밖으로 썩 나가.


협잡.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없다. 계약해지? 효율적인 인력 관리? 경영의 일환? 다 헛소리다. 사측의 행보에는 협잡, 비리, 공갈협박, 폭력, 무엇 하나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옳네 싫으면 소송을 하네 어쩌네 뻔뻔하게 윽박질렀다.

왜?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법이, 사회가 힘 있고 돈 있는 자의 편이라고 생각하니까. 우대도 필요없고 공정하게 대우하라 온 몸으로 외치는 이들에게 눈쌀이나 찌푸리고 “좋은 말”로 “점잖게”, “고용주 사정도 생각하라”는 이들이 거리에 차고 넘칠 줄 아니까.

여성, 장애인, 탈북민, 대학졸업자가 아닌, 아줌마, 육체노동자니까. 천여 명의 밥줄, 단숨에 틀어막아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테니까. 누구도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테니까. 그들쯤이야 대꾸 한 번 못 하고 고분고분 기어들어왔다 쉽사리 사라질테니까.


전부 틀렸다. 단 하나도 맞지 않았다. 권력 앞에, 돈 앞에 정의 따위는 힘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측에, 가해자에게는 없고 투쟁을 결심한 이들에게는 있었던 것, 그것이 정의고 신념이다.

부당함에 침묵하면 나도, 내 다음도, 내 옆의 이들도 소리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그런 믿음. 이것이 옳기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p.68 다른 일보다 그 두 경험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내가 뭘 해주지를 못할 때. 갈 수조차 없고 무얼 어떻게 해줄 수가 없을 때. (…) 정말 투쟁이 힘든 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하찮은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들게 하니까.

p.244 사업장에서는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서, 다른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의 부담은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그리고 이들을 구분 짓고 서로를 배척하도록 만들어서 동료가 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영웅담에 불과하면, 모든 사람이 ”사이좋게“ 지냈다는 행복한 이야기면 얼마나 좋겠느냐만은... 누차 말해왔듯 이 또한 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현실은 때 되면 배가 고프고 화장실에 가야하며, 다치면 아프고 더운 날엔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쏜살같이 달리는 쇳덩이에 목숨이 위험하고 쉽게 부서지고 죽는다. 그것이 사람이다. 악을 쓰고 드러누우며 구질구질하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의 현실은 경제법칙과 손익계산으로 설명될 수 없다. 사람은 숫자가 아니다. 사람은 숨만 붙여놓는다고, 모멸과 착취를 돈과 함께 쥐어준다고 기쁘게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존엄을 저울질하는 권력에 기쁘게 순응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손을 내밀 수 있다. 사람은 함께할 수 있다. 사람은 취약성이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럴 수 있다.

이것을 모른다면 당신의 삶은 당신 스스로가 지워버린 누군가에 의해 영위되고 있다. 알든 모르든, 당신의 삶은 당신 하나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자의 세계는 함께 살아가는 타인의 세계인 까닭이다.

p.93 우리가 그랬어요. 혹시 서로 다르게 가고 그래도 상대방을 비난하지는 말자, 각자 사정이 다 다르지 않냐. 이해해 주자. 비난하지는 말자. 그랬어요.

p.121 노동의 가치는 경제적인 것에만 있지 않다. 이들은 지금 '제대로 된' 일을 원한다. '제대로 된' 일이란 존중받는 노동일 것이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더미같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이나, 이들은 안다. 연대의 경험이, 이들이 쟁취한 것이 또다른 폭력 앞에 맞서는 힘이 된다는 것을. 언제 어디에서든, 누군가는 또다시 함께한다는 것을. 부당하게 대우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믿는 자는 끝까지 지지 않는다는 것을.

p.33 나중에는 내가 그랬어. 소장도 무섭지 않고, 아무도 안 무섭다고. 왜? 그 사람들은 1년 있다가 발령 나서 갈 사람들이야. 나는 여기 20년 다닐 사람이야. 나는 주인 의식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야. 누가 와도 나는 당당하다 그랬어요.

p.373 그럴 때면 이야기해요. 화장실 청소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라 입사할 때부터 해온 우리의 일이 있는데도 괴롭히려고 전혀 다른 일을 시킨다는 것, 우린 또 그걸 하고 있다는 것, 딱 거기까지다. 그리고 우리도 괴롭힘과 부당한 일에는 맞서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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