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필요한 시간 -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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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좋아하는 작품은 수없이 많지만, 개중 책 이야기를 할 때면 매번 떠올리는 문장들로 이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이다(p.19)."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우리는 혼자라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p.301).
개브리얼 제빈, 『섬에 있는 서점』, (문학동네).

책을 왜 읽느냐는 물음에 정보습득목적 외의 대답을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마도 문학이 거의 유일할테다. 또한,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마도 문학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명해내기 어려운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다. 모든 존재는 그만의 서사를 가지고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따지자면 모든 존재의 삶이 곧 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듬고 벼려낸 글, 쉼표와 마침표로 이어지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문학이 필요한 시간들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그런 것이 필요한 때가 있다. 때때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혹은 마치 내가 존재하지도 않던 때에 나를 위해 쓰여진 것만 느낌과 함께 어떤 문장을 떠올리게 될 때가 있다. 거꾸로 문장을 통해 삶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것을 문학의 쓰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거창하다면, 문학이 삶의 적재적소에 잘 들어맞아있다, 정도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따금, 그러니까 주로 에세이나 시를 읽을 때면 (대개는 책날개 상단에 위치한) 저자 소개를 꼼꼼하게 읽을 때가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요. 가만히 묻는 것처럼. 저자 정여울의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상의 모든 곳에서 신이 깜빡 흘리고 간 아름다운 문장을 용케 발견하고 싶은 사람". 이 문장을 읽자마자 『일리아스』를 떠올렸다.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오래되었다는 그 서사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어쩌면 무형의 초월자, 또는 인외의 신적 존재를 믿는 이들에게 문학은 신이 흘리고 간, 삶이되 삶 바깥에 위치하는 무언가의 조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실 에세이를 자주 읽지 않게 되는 것은 수많은 타인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치이는 일상 속에서 내 이야기를 찾기에도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작고 가볍고 한 장 찍어 올리기에 좋은, 짧고 아름다운 문장들의 모음집같은 에세이(맞다. 다분히 가치판단적이다. 나도 안다.)가 범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따금, 아니 꽤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자극적인 쾌락으로 가득해지는데, 그런 세상에서 한 자리에 붙어 책을 읽는 건 매력적이지 못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고, 독서는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결국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세상에서 홀로 침잠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간절하지만 그것은 점점 더 외롭고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이야기를 찾는 사람은 자꾸만 파고들어가고 찾지 못한 사람은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고. 어렵고 낯설어서 더더욱.

저자 정여울은 말한다. "문학이 필요한 시간은, 이곳에서는 마음껏 울어도 괜찮은 시간, 이곳에서는 마음껏 세상을 향해 소리쳐도 되는 시간을 꿈꾸는 모든 이를 위한 시간입니다". 그러니 다시 인생을 시작하려는 마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내가 꿈꾸던 어른은 어디로 갔을까, 내 안의 외계어를 지키는 일, 잃어버린 모모의 시간을 따라서. 총 다섯 장으로 나누어 각각의 작품들을 통해 풀어내는 저자 자신, 어쩌면 수많은 독자들의 이야기가 깊숙하게 와닿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의 책으로 다른 책, 영화, 노랫말까지 확장해가며 저자의 삶을 따라가는 여행이 『네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논제로섬과 서로를 세계를 이해하는 매개가 되는 언어를 이야기하고, 『행복한 왕자』를 통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자비를, 『손톱』을 통해 고통스러운 이의 곁에 나란할 때, 그의 곁에 머물고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을, 『모모』를 통해 무용과 유용, 근검절약과 태만의 구분과 선악의 권장이 아닌 삶의 모든 순간을 찬란하게 빛내는 소통과 애정,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p.236 "모든 순간이 찬란한 의미로 넘쳐흐르기에, 한순간도 쓸모없지 않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모는 무엇도 '쓸데없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기에 그 모든 존재에 깃든 찰나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들이마신다. 모모의 시간은 어떤 시간의 의미도 놓치지 않은 채 남김없이 불태워짐으로써 오히려 아름다워진다."

누군가 나에게 책을, 그 중에서도 문학 작품을 왜 읽느냐고, 결국 남의 이야기일 뿐인데(실제로 들었던 말이다) 왜 그렇게 울고 웃느냐 묻는다면 당신이 말한 것이 곧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다는 아니겠지만. 어떤 시대, 어떤 인물, 어떤 주제와 내용을 다루든 문학은 곧 삶의 이야기이다. 짧은 시간 특정한 존재하고 긴 시간을 자연의 일부로 흩어져 부재의 공간을 남기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결국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나와 남을 이해하는 일이, 작가의 세계를 공유하는 경험이 더없이 소중하고 즐겁기 때문이지 않을까. 결국 문학을 읽는 마음이라는 것은 혼자이되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과도 같다.
작품은 창작과 동시에 작가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문학은 누구의 것일까. 필경 누군가의 상상 혹은 시간의 기록일 그 문장들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상처가 두렵고 실망이 버거워 오늘도 책장 혹은 활자 앞에서 머뭇거릴 이들에게 저자의 말을 빌어 전한다.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이는 순간 오히려 환하게 떠오르는 생의 진실이 있다".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당신이 읽고 생각한 시간과 함께한 그 모든 문장들은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니 그렇게 오늘도 오늘의 책으로, 오늘의 문학이 열어젖히는 세계로 기꺼이 뛰어들라고.

p.94 "지상의 모든 곳에서 눈부신 문장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누구도 나의 힘, 즉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의지'를 빼앗지 못하도록, 책 한 권 없는 빈털터리가 될지라도 내 마음속에서만은 내가 읽은 모든 팩의 페이지가 숨 가쁘게 넘어갈 것이다. 어떤 권력도 우리의 소중한 권리, 문학의 아름다움을 느낄 권리를 빼앗지 못하도록,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 뜨거운 심장을 잃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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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환대
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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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러니까, 그러므로, 그래서 따위로 말을 시작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뒤에는 으레 어쩌면, 주저하는 마음이 따라붙기 십상이고. 결국 두려움 반 자진 반 하는 마음으로 나는, 우리는... 다소 유치하고 초라한 고백으로 말꼬리를 흐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모퉁이로, 옷자락 뒤로 숨어버리는 마음이 그러하듯이.
장희원의 소설집 『우리의 환대』 다른 언제도 아닌 이 계절에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찬 바람이 스치는 벽에 햇살로 새겨지는 그림자는 닿을 수 없는 것의 부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어쩌면, '부재의 현존을 드러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의 자리에는 그림자 외에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사실은 조금 차갑고 쓸쓸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평소와는 다르게 목차를 먼저 읽었다. "폭설이 내리기 시작할 때", 표제작인 "우리의 환대", "작별'과 "기원과 기도"를 지나 "우리가 떠난 자리에"로 맺는 글들.
각각의 수록작들은 결핍과 부재, 이별로 이어진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없는 것, 비워진 것, 떠나간 것들로 채워지는 관계라니. 잠들지 못하는 밤에 몇번이고 중얼거리고 뒤척여본 지금은 안다. 그것 또한 지극한 사랑이고, 우리(畜舍)와 우리의 환대가 될 수 있음을.
언젠가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하늘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인적 드문 도로에 가만히 누워본 적이 있다(그 날 본 하늘이 정말 마지막이 될 뻔 했다는 건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까 싶긴 하지만). 꼭 쏟아져내리는 것 같아서. 온 시야를 채우는 하늘이 서럽고 또 다정해서 언제까지고 이대로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이후로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 무너지고 또 바뀌었다. 그날 비워진 것은 새로 채워지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갓 파헤쳐진 흙내를 풍긴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p.87
"왜 저런 걸 받았니?"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기는 그를 빤히 보았다. 정호는 더 참지 못했던 것을 후 회하며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어쩔 수 없었어, 형.” 정기가 말했다.
“저걸 받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어. 도저히 앞으로 갈 수 없었다구."
정기는 아무런 높낮이 없이 차분히 말했다.

작가 장희원이 닿고자 하는 세상이 환대, 그러니까, 다가감의 이야기, 하나가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어쩌면 표지의 사진처럼 잡을 수도 닿을 수도 없는, 단절 혹은 상실을 그려내야만 했던, 그런 필요의 세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야기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우리 모두 다들 한구석이 무너져내린 채로, 그것을 알지 못한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춥다. 적응할 틈이라고는 조금도 주지 않고 몰아친 추위에 몇십년을 겪었던 지난 계절의 느낌이 벌써 가물가물하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든 자리니 난 자리니 거창하게 하지 않아도 사는 일이 그렇지 않은가, 허전함이라는 것은 불현듯 파도처럼 밀려와 자 여기가, 하며 누군가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가. 이것을 쓸쓸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언젠가 보았던 '물의 뼈'라는 말을 두고두고 생각한다. 햇살이 지나온 흔적을 드러내는 것.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의 부재를 드러내는 자욱. 그림자와 같은 것이 아닐지.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빈 자리를 빈 채로 두는, 흔적을 흔적으로 둘 수 있는 마음이 용기와 다정함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다.

한 해의 끝에서 우리(畜舍)와 우리를 생각한다. 그 모호한 테를 덧그리는 마음으로.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하늘의 느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의환대 #장희원소설집
#우리의환대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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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환대
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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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러니까, 그러므로, 그래서 따위로 말을 시작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뒤에는 으레 어쩌면, 주저하는 마음이 따라붙기 십상이고. 결국 두려움 반 자진 반 하는 마음으로 나는, 우리는... 다소 유치하고 초라한 고백으로 말꼬리를 흐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모퉁이로, 옷자락 뒤로 숨어버리는 마음이 그러하듯이.
장희원의 소설집 『우리의 환대』 다른 언제도 아닌 이 계절에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찬 바람이 스치는 벽에 햇살로 새겨지는 그림자는 닿을 수 없는 것의 부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어쩌면, '부재의 현존을 드러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말'의 자리에는 그림자 외에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사실은 조금 차갑고 쓸쓸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평소와는 다르게 목차를 먼저 읽었다. "폭설이 내리기 시작할 때", 표제작인 "우리의 환대", "작별'과 "기원과 기도"를 지나 "우리가 떠난 자리에"로 맺는 글들.
각각의 수록작들은 결핍과 부재, 이별로 이어진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없는 것, 비워진 것, 떠나간 것들로 채워지는 관계라니. 잠들지 못하는 밤에 몇번이고 중얼거리고 뒤척여본 지금은 안다. 그것 또한 지극한 사랑이고, 우리(畜舍)와 우리의 환대가 될 수 있음을.
언젠가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하늘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인적 드문 도로에 가만히 누워본 적이 있다(그 날 본 하늘이 정말 마지막이 될 뻔 했다는 건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까 싶긴 하지만). 꼭 쏟아져내리는 것 같아서. 온 시야를 채우는 하늘이 서럽고 또 다정해서 언제까지고 이대로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이후로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 무너지고 또 바뀌었다. 그날 비워진 것은 새로 채워지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갓 파헤쳐진 흙내를 풍긴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p.87
"왜 저런 걸 받았니?"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기는 그를 빤히 보았다. 정호는 더 참지 못했던 것을 후 회하며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어쩔 수 없었어, 형.” 정기가 말했다.
“저걸 받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어. 도저히 앞으로 갈 수 없었다구."
정기는 아무런 높낮이 없이 차분히 말했다.

작가 장희원이 닿고자 하는 세상이 환대, 그러니까, 다가감의 이야기, 하나가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어쩌면 표지의 사진처럼 잡을 수도 닿을 수도 없는, 단절 혹은 상실을 그려내야만 했던, 그런 필요의 세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야기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우리 모두 다들 한구석이 무너져내린 채로, 그것을 알지 못한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춥다. 적응할 틈이라고는 조금도 주지 않고 몰아친 추위에 몇십년을 겪었던 지난 계절의 느낌이 벌써 가물가물하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든 자리니 난 자리니 거창하게 하지 않아도 사는 일이 그렇지 않은가, 허전함이라는 것은 불현듯 파도처럼 밀려와 자 여기가, 하며 누군가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가. 이것을 쓸쓸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언젠가 보았던 '물의 뼈'라는 말을 두고두고 생각한다. 햇살이 지나온 흔적을 드러내는 것.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의 부재를 드러내는 자욱. 그림자와 같은 것이 아닐지.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이. 빈 자리를 빈 채로 두는, 흔적을 흔적으로 둘 수 있는 마음이 용기와 다정함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다.

한 해의 끝에서 우리(畜舍)와 우리를 생각한다. 그 모호한 테를 덧그리는 마음으로.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하늘의 느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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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중산층 - 한국 중간계층의 분열과 불안
구해근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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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서민'이라거나 '중산층' 정도의, 그러니까, '남들만큼은 산다'고 생각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런 한국인들에게 이제 와서 중산층의 동질성이 와해되고 있다든지 당신 정도면 '남들만큼'을 넘어 풍족한 지경이니 복지정책을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있나.
대체 누구 좋자고 저렇게 악을 써가면서까지 부자감세, 주택공급가 하락에 반대하는 걸까. 아무리 봐도 알랑거려봤자 콩고물 하나 나올 게 없는데 대체 무얼 위해 소수의 극상위층에 자원이 집중되는 나라에 매달리는 걸까. 당장 복지정책이 축소되고 세금 나올 구석이 줄어들면 그 일부의 '재벌' 외에는 사회 인프라도 안전장치도 기대할 수가 없는데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이들이 기대하는 본인의 미래상은 대체 무엇이길래. 정치경제뉴스를 접할 때마다 이런 의문을 가져왔다면 아마도 이 책이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 상류 중산층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극히 물질주의적, 가족이기주의적, 성공지상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p.244).

한국의 중산층 비율은 그 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인다. OECD 기준(중위소득의 50%에서 150%에 속하는 집단)으로는 1980년대의 75%에서 2010년대 60%중반으로 OECD 평균에 비해서는 급감하였으나 소멸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응답자 주관에 따른 분류, 즉 체감중산층은 1980년대 말 75%에서 2010년대 말에는 40%로 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2013년 한국사회학회의 조사 결과로는 20%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게 무슨 기가 막힌 일인가 싶다. 단순 소득 기준으로 중산층에 속하는 집단에서 스스로를 저소득층에 속한다고 여기는 이가 제법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과연 '배가 불러서' 내지는 '진정 힘든 시절 안 겪어본 세대가 허영에 차서' 스스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어 나타난 결과일까.

현재 한국, 6.25 전후 이래로 경제 상황이 언제는 퍽이나 안정적이었냐만은,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경제적 상황은 모래산 터를 박박 긁어다 꼭대기에 장식하기, 잘해봐야 아랫돌 빼어 윗돌 괴기 일색에 가끔가다 겨우 끌어 가린 것들 홀딱 벗겨 자 우리가 자유경쟁을 하겠습니다! 같은 꼴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 시간을 차근히 되새겨보면 최근 뜨거웠던 '공정'논란(담론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낯부끄러운 아귀다툼이었지 않은가)이나 각종 '사이다 서사'에 열광하고 재벌 선망을 감출 생각 없는 인터넷, 미디어 문화는 일견 당연하게까지 느껴진다. 별 방도가 있었겠냐는 말이다. 기를 쓰고 버티지 않는 이상은 저렇게라도 스스로가 바닥은 아니라는 생각에 매달릴 수 밖에 없지 않았겠나 싶을 정도로.
소득이 최상위층에서만 증가하고 다른 층에서는 정체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비중의국민소득이 럭셔리 소비에 집중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주된 결과는 무엇이 럭셔리인가에 대한 기준이 계속 상승하는 것이다(p.162).
웰빙에 포함된 먹거리, 운동, 여가 활동이 빠른 속도로 상업화되면서 광거에는 극히 사적이었던 영역의 것들이 차츰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위재로 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웰빙도, 더 정확히는 웰빙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도 아주 중요한 지위재로 변했다(p.164).

경제적 지표의 허리, 중심을 담당하는 중산층의 생활 양식은 말그대로 보통의, 대부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일상의 중요한 영역을 침해당하거나 포기해야 할 정도로 빈곤을 겪거나 막대한 부를 축적하지 않은 이상 대충 다 이정도의 소득, 소비, 저축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고 간주되는 집단이 중산층이다. 따라서 중산층의 안정성은 국가경제가 마지노선으로 방어해야할 수준이자 그들의 평균 상승을 통해 집단 성원 전체의 삶의 질 상승을 도모해야 할 집단적 지표라고도 할 수 있다.
집단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을 기준으로 삼는다. 어느 정도는 본능이라 할 수 있겠지만, 현대인은 이를 극대화하도록 부추기는 미디어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상향평준화가 아닌 도달하기 힘든 생활상을 정상, 동경하고 추구해야할 선으로 각인시키는 동시에 계층이동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소득의 원천에 대한 인식은 개인과 타인의 노력이라는 비교적 유동적인 것 대신 기회와 세습지위로 얻는 자본증식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에 가깝다. 와중에 자본을 소유한 집단은 정당성 획득을 위해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 즉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며 그에 동조하고자 하는 비 상류층, 특권중산층과 나머지 계층 간의 갈등이 더해지는 형국이다.
어쨌든 부유층의 특권적 지위가 그들의 전문적 지식이나 직업적 지위만이 아니라 그들이 이런 위치를 이용해서 창출하는 불로소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이상 한국의 신흥 상류층은 능력주의 엘리트로서의 계급적 정당성을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p.108).
그들이 특권적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시장이 그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한국의 신흥부유층은 아직 그들의 특권을 담보할 만한 도덕적 정당성은 물론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합법적인 수단이 자주 동원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회적 알력과 불안이 발생하고 있다(p.117).

어느 집단이든 중심이 무너지면 그 집단 전체의 균형은 손 쓸 길 없이 무너지는 꼴이 된다. 코로나19 판데믹으로 대규모 취약점이 드러난데다 전세계적 분열, 국수주의와 극단적인 이방인 배척과 혐오가 득세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없다.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 남은 중산층마저 완전히 갈라지기 전에. 저자는 작금의 상황을 아주 희망이 없는, 절멸에 직면한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위안이 아니라 경고가 된다. 무너지는 바닥을 밟고 올라갈 수 없어 목을 빼고 있는 이들에게 남아있을 것이 '평화롭고 정중한' 태도일 것이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현재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행되는 불평등의 패턴은 중간계층 내에서 중,하층은 하향 분화해가는 한편 상층에 있는 이루는 상향이동을 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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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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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미디어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상상해보자, 어느 나라의 기록이 있다. 모 년에 모 국으로 보내는 공물 내역.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은 오백여 관, 소 이천여 두, 쌀, 과일, 세공품, 자기... 그리고 여인 삼백여 명. 이 문서에는 사람이되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공녀(貢女), 공물로 보내지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아니, 노역을 질 인부가 필요하면 자국 장정을 모집하고, 기술자가 필요하면 사신단에 딸려 오가면 될 것을 사람을 아주 돌아오지 못하게 바친단다. 그것도 여인을, 조공품으로. 그려지는가.
이름이 무엇이든간에 건국 이래 한반도는 조용할 날이 없는 땅이었다. 툭하면 이리 치이고 저리 빼앗기고, 제법 나라같이 생긴 꼴을 갖추기 전까지는 달달 볶여 시달리는 것이 일상이었다는 뜻이다. 그 중에서도 제주는 이중, 삼중의 고생을 해야만 했던, 우리이되 우리가 아니었던 아픈 역사가 응축된 땅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있었을 이야기에 작은 위안과 사죄를 전하는 이의 마음이기도 하다. 벼락같이 끌려가 말도 글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살다 간신히 돌아오기라도 하면 손가락질에 숨어 살아야 했던 이들의 하나하나 읊어주는 상상이다. 동시에 서문처럼 저자 자신과 동생을 위한 화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최고의 수사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만 같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는지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제발 살아만 계시라고 빌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그저 그것에 매달려 오래 전 떠나온 고향 제주도로 향한다. 희미한 죄책감을 안고. 두고 온 동생을 떠올리며.
정의감 넘치는 수사관이었던 아버지는 소녀들이 연달아 사라지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찾은 제주 땅에서 실종되었다. 그리고 찢긴 옷소매만이 발견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면 아버지에게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도달한 섬, 바람과 바다가 모든 것을 가져갈 것만 같은 이 섬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먹하기만 한 동생은 아버지도, 나도 그저 원망할 뿐이고 그 동생이 가족처럼 여기는 늙은 무당은 수상하기 짝이 없다.
복순이라는 여인에게 전해받은 아버지의 수사일지와 기억을 더듬어가며 사건의 전말에 가까워질 수록 점점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늘어가고, 내내 불안하던 동생과의 관계조차 파탄이 나고 마는데...!

책을 덮고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다소 가벼운 성장소설이겠다는 예상과는 달리 중간중간 서럽게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람의 이야기이다. 밑바닥에서 끌려가고 짓밟히고 기껏해야 규중규수, 방 안의 화초로 자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판을 뒤집는, 모험이자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서로를 돕는 힘없는 사람 간의 연대를 잊지 말라. 높으신 분(스포일러 방지)의 말은 틀렸다. 약한 자가 승리할 수 있다. 선한 길을 가려고 투쟁하는 사람은 꽃처럼 짖밟혀도 들불로 살아난다. 그러니 부당한 요구에 저항할 힘이 없다고, 혹은 그럴 용기가 없다고 타인에게 고통을 떠넘겨서라도 자신을, 제 자식만을 구해보려 애쓰는 이가 그저 죄인만은 아닐지라도 그에게 죄가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제 자식에게, 남의 자식에게, 그 누구에게라도.

"아방이 대낮에 내 목을 졸라수다. 도와달랜 도와달랜 해신디도 마을 사람들은... 그 사름들 그냥 대문 앞에 고만히 보고만 있었수다. 얼굴 알려지면 공녀 된댄 아방이 나 얼굴 해싸지게 허는 동안에요(p.327)."
전에도 집안 물건들을 보관하기 위해 이런 자물쇠를 사용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나는 아무 열쇠나 골라 자물쇠를 열며 속으로 말했다. 이 아이들은 문갑에 보관하는 옥반지, 은 머리 장식, 비단이 아니야. 하지만 현실이었다. 보휘, 경자, 마리는 그런 물건처럼 우리 안에 갇혀있었다(p.381).
악마다. 이제야 알겠다. 이 사람을 이해하기가 왜 그리 힘들었는지. 나는 악마라면 뾰족한 뿔, 날카로운 이발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했다. 선하고 점잖은 겉모습으로 빛나고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의 말이 내 왼쪽 귀에 들렸다. 좋은 것들이 알고 보면 모조일 때도 있자. 문 촌장의 친절은 진심이었을지 몰라도 금칠한 놋쇠처럼 싸구려였다(p.388).

다만 시대 배경상의 한계인지 애쓰고 분투하는 여성, 어리고 약한 이들의 행동을 높은 지위의 남성이 인정하고 격려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 다소간 아쉽다. 허나 등장인물의 대사에서 제주말씨를 살리려 노력한 점과 주인공 민환이가 작중 높으신 분(스포일러 방지)의 권유와는 달리 궁내 수사관이 되어 강대국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 민중과 여성을 착취하는 또다른 가해자의 일원이 되는 길을 거부하는 선택은 마음에 든다. 미디어작품, 기왕이면 영화로 나오면 좋겠다. 어느 때에 나와도 우리 사회가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테니.
"(...) 아무리 깊이 묻혀 있어도 진실은 반드시 떠오른다고. 진실은 꺾이지 않으니까.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고 빛을 찾아 올라오는 게 진실이야(p.326)."
"나리께서 나헌티 한 가지 질문을 남겨신디. 좀좀허랜 할 순 있다. 허나 그 결정을 멫 년이 지나도 만족햄시나? 라고." (...) "아시 돕쟁 헐 때 내가 깨달은 게 이수다." 가희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캄캄한 밤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빛을 보는 듯했다. "옳은 행실 헌다는 건 죽을 만큼 무섭다고. 하지만 지금은 펜안해져수다(p.362)."


함께 읽기를 권하는 책들.
1. 조혁연, 『빼앗긴 봄, 공녀』 (세창출판사)
2. 정구선, 『공녀』 (국학자료원): 절판
3. 정승호, 김수진, 『명나라로 끌려간 조선 공녀 잔혹사』 (지식공감)
4. 로렐 켄달, 『무당, 신령, 여성들』 (일조각)
5. 진성기, 『제주도무속논고』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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