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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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미디어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상상해보자, 어느 나라의 기록이 있다. 모 년에 모 국으로 보내는 공물 내역.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은 오백여 관, 소 이천여 두, 쌀, 과일, 세공품, 자기... 그리고 여인 삼백여 명. 이 문서에는 사람이되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공녀(貢女), 공물로 보내지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아니, 노역을 질 인부가 필요하면 자국 장정을 모집하고, 기술자가 필요하면 사신단에 딸려 오가면 될 것을 사람을 아주 돌아오지 못하게 바친단다. 그것도 여인을, 조공품으로. 그려지는가.
이름이 무엇이든간에 건국 이래 한반도는 조용할 날이 없는 땅이었다. 툭하면 이리 치이고 저리 빼앗기고, 제법 나라같이 생긴 꼴을 갖추기 전까지는 달달 볶여 시달리는 것이 일상이었다는 뜻이다. 그 중에서도 제주는 이중, 삼중의 고생을 해야만 했던, 우리이되 우리가 아니었던 아픈 역사가 응축된 땅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있었을 이야기에 작은 위안과 사죄를 전하는 이의 마음이기도 하다. 벼락같이 끌려가 말도 글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살다 간신히 돌아오기라도 하면 손가락질에 숨어 살아야 했던 이들의 하나하나 읊어주는 상상이다. 동시에 서문처럼 저자 자신과 동생을 위한 화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최고의 수사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만 같던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는지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제발 살아만 계시라고 빌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그저 그것에 매달려 오래 전 떠나온 고향 제주도로 향한다. 희미한 죄책감을 안고. 두고 온 동생을 떠올리며.
정의감 넘치는 수사관이었던 아버지는 소녀들이 연달아 사라지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찾은 제주 땅에서 실종되었다. 그리고 찢긴 옷소매만이 발견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면 아버지에게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도달한 섬, 바람과 바다가 모든 것을 가져갈 것만 같은 이 섬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서먹하기만 한 동생은 아버지도, 나도 그저 원망할 뿐이고 그 동생이 가족처럼 여기는 늙은 무당은 수상하기 짝이 없다.
복순이라는 여인에게 전해받은 아버지의 수사일지와 기억을 더듬어가며 사건의 전말에 가까워질 수록 점점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늘어가고, 내내 불안하던 동생과의 관계조차 파탄이 나고 마는데...!

책을 덮고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다소 가벼운 성장소설이겠다는 예상과는 달리 중간중간 서럽게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람의 이야기이다. 밑바닥에서 끌려가고 짓밟히고 기껏해야 규중규수, 방 안의 화초로 자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판을 뒤집는, 모험이자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서로를 돕는 힘없는 사람 간의 연대를 잊지 말라. 높으신 분(스포일러 방지)의 말은 틀렸다. 약한 자가 승리할 수 있다. 선한 길을 가려고 투쟁하는 사람은 꽃처럼 짖밟혀도 들불로 살아난다. 그러니 부당한 요구에 저항할 힘이 없다고, 혹은 그럴 용기가 없다고 타인에게 고통을 떠넘겨서라도 자신을, 제 자식만을 구해보려 애쓰는 이가 그저 죄인만은 아닐지라도 그에게 죄가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제 자식에게, 남의 자식에게, 그 누구에게라도.

"아방이 대낮에 내 목을 졸라수다. 도와달랜 도와달랜 해신디도 마을 사람들은... 그 사름들 그냥 대문 앞에 고만히 보고만 있었수다. 얼굴 알려지면 공녀 된댄 아방이 나 얼굴 해싸지게 허는 동안에요(p.327)."
전에도 집안 물건들을 보관하기 위해 이런 자물쇠를 사용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나는 아무 열쇠나 골라 자물쇠를 열며 속으로 말했다. 이 아이들은 문갑에 보관하는 옥반지, 은 머리 장식, 비단이 아니야. 하지만 현실이었다. 보휘, 경자, 마리는 그런 물건처럼 우리 안에 갇혀있었다(p.381).
악마다. 이제야 알겠다. 이 사람을 이해하기가 왜 그리 힘들었는지. 나는 악마라면 뾰족한 뿔, 날카로운 이발로 만들어졌다고 상상했다. 선하고 점잖은 겉모습으로 빛나고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의 말이 내 왼쪽 귀에 들렸다. 좋은 것들이 알고 보면 모조일 때도 있자. 문 촌장의 친절은 진심이었을지 몰라도 금칠한 놋쇠처럼 싸구려였다(p.388).

다만 시대 배경상의 한계인지 애쓰고 분투하는 여성, 어리고 약한 이들의 행동을 높은 지위의 남성이 인정하고 격려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 다소간 아쉽다. 허나 등장인물의 대사에서 제주말씨를 살리려 노력한 점과 주인공 민환이가 작중 높으신 분(스포일러 방지)의 권유와는 달리 궁내 수사관이 되어 강대국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 민중과 여성을 착취하는 또다른 가해자의 일원이 되는 길을 거부하는 선택은 마음에 든다. 미디어작품, 기왕이면 영화로 나오면 좋겠다. 어느 때에 나와도 우리 사회가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테니.
"(...) 아무리 깊이 묻혀 있어도 진실은 반드시 떠오른다고. 진실은 꺾이지 않으니까.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고 빛을 찾아 올라오는 게 진실이야(p.326)."
"나리께서 나헌티 한 가지 질문을 남겨신디. 좀좀허랜 할 순 있다. 허나 그 결정을 멫 년이 지나도 만족햄시나? 라고." (...) "아시 돕쟁 헐 때 내가 깨달은 게 이수다." 가희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캄캄한 밤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빛을 보는 듯했다. "옳은 행실 헌다는 건 죽을 만큼 무섭다고. 하지만 지금은 펜안해져수다(p.362)."


함께 읽기를 권하는 책들.
1. 조혁연, 『빼앗긴 봄, 공녀』 (세창출판사)
2. 정구선, 『공녀』 (국학자료원): 절판
3. 정승호, 김수진, 『명나라로 끌려간 조선 공녀 잔혹사』 (지식공감)
4. 로렐 켄달, 『무당, 신령, 여성들』 (일조각)
5. 진성기, 『제주도무속논고』 (민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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