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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중산층 - 한국 중간계층의 분열과 불안
구해근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평점 :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서민'이라거나 '중산층' 정도의, 그러니까, '남들만큼은 산다'고 생각할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런 한국인들에게 이제 와서 중산층의 동질성이 와해되고 있다든지 당신 정도면 '남들만큼'을 넘어 풍족한 지경이니 복지정책을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있나.
대체 누구 좋자고 저렇게 악을 써가면서까지 부자감세, 주택공급가 하락에 반대하는 걸까. 아무리 봐도 알랑거려봤자 콩고물 하나 나올 게 없는데 대체 무얼 위해 소수의 극상위층에 자원이 집중되는 나라에 매달리는 걸까. 당장 복지정책이 축소되고 세금 나올 구석이 줄어들면 그 일부의 '재벌' 외에는 사회 인프라도 안전장치도 기대할 수가 없는데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이들이 기대하는 본인의 미래상은 대체 무엇이길래. 정치경제뉴스를 접할 때마다 이런 의문을 가져왔다면 아마도 이 책이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 상류 중산층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극히 물질주의적, 가족이기주의적, 성공지상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p.244).
한국의 중산층 비율은 그 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인다. OECD 기준(중위소득의 50%에서 150%에 속하는 집단)으로는 1980년대의 75%에서 2010년대 60%중반으로 OECD 평균에 비해서는 급감하였으나 소멸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응답자 주관에 따른 분류, 즉 체감중산층은 1980년대 말 75%에서 2010년대 말에는 40%로 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2013년 한국사회학회의 조사 결과로는 20%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게 무슨 기가 막힌 일인가 싶다. 단순 소득 기준으로 중산층에 속하는 집단에서 스스로를 저소득층에 속한다고 여기는 이가 제법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과연 '배가 불러서' 내지는 '진정 힘든 시절 안 겪어본 세대가 허영에 차서' 스스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어 나타난 결과일까.
현재 한국, 6.25 전후 이래로 경제 상황이 언제는 퍽이나 안정적이었냐만은, 19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경제적 상황은 모래산 터를 박박 긁어다 꼭대기에 장식하기, 잘해봐야 아랫돌 빼어 윗돌 괴기 일색에 가끔가다 겨우 끌어 가린 것들 홀딱 벗겨 자 우리가 자유경쟁을 하겠습니다! 같은 꼴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 시간을 차근히 되새겨보면 최근 뜨거웠던 '공정'논란(담론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낯부끄러운 아귀다툼이었지 않은가)이나 각종 '사이다 서사'에 열광하고 재벌 선망을 감출 생각 없는 인터넷, 미디어 문화는 일견 당연하게까지 느껴진다. 별 방도가 있었겠냐는 말이다. 기를 쓰고 버티지 않는 이상은 저렇게라도 스스로가 바닥은 아니라는 생각에 매달릴 수 밖에 없지 않았겠나 싶을 정도로.
소득이 최상위층에서만 증가하고 다른 층에서는 정체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비중의국민소득이 럭셔리 소비에 집중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주된 결과는 무엇이 럭셔리인가에 대한 기준이 계속 상승하는 것이다(p.162).
웰빙에 포함된 먹거리, 운동, 여가 활동이 빠른 속도로 상업화되면서 광거에는 극히 사적이었던 영역의 것들이 차츰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위재로 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웰빙도, 더 정확히는 웰빙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도 아주 중요한 지위재로 변했다(p.164).
경제적 지표의 허리, 중심을 담당하는 중산층의 생활 양식은 말그대로 보통의, 대부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일상의 중요한 영역을 침해당하거나 포기해야 할 정도로 빈곤을 겪거나 막대한 부를 축적하지 않은 이상 대충 다 이정도의 소득, 소비, 저축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고 간주되는 집단이 중산층이다. 따라서 중산층의 안정성은 국가경제가 마지노선으로 방어해야할 수준이자 그들의 평균 상승을 통해 집단 성원 전체의 삶의 질 상승을 도모해야 할 집단적 지표라고도 할 수 있다.
집단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을 기준으로 삼는다. 어느 정도는 본능이라 할 수 있겠지만, 현대인은 이를 극대화하도록 부추기는 미디어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상향평준화가 아닌 도달하기 힘든 생활상을 정상, 동경하고 추구해야할 선으로 각인시키는 동시에 계층이동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서 소득의 원천에 대한 인식은 개인과 타인의 노력이라는 비교적 유동적인 것 대신 기회와 세습지위로 얻는 자본증식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에 가깝다. 와중에 자본을 소유한 집단은 정당성 획득을 위해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 즉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며 그에 동조하고자 하는 비 상류층, 특권중산층과 나머지 계층 간의 갈등이 더해지는 형국이다.
어쨌든 부유층의 특권적 지위가 그들의 전문적 지식이나 직업적 지위만이 아니라 그들이 이런 위치를 이용해서 창출하는 불로소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이상 한국의 신흥 상류층은 능력주의 엘리트로서의 계급적 정당성을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p.108).
그들이 특권적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시장이 그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한국의 신흥부유층은 아직 그들의 특권을 담보할 만한 도덕적 정당성은 물론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합법적인 수단이 자주 동원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회적 알력과 불안이 발생하고 있다(p.117).
어느 집단이든 중심이 무너지면 그 집단 전체의 균형은 손 쓸 길 없이 무너지는 꼴이 된다. 코로나19 판데믹으로 대규모 취약점이 드러난데다 전세계적 분열, 국수주의와 극단적인 이방인 배척과 혐오가 득세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없다.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 남은 중산층마저 완전히 갈라지기 전에. 저자는 작금의 상황을 아주 희망이 없는, 절멸에 직면한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위안이 아니라 경고가 된다. 무너지는 바닥을 밟고 올라갈 수 없어 목을 빼고 있는 이들에게 남아있을 것이 '평화롭고 정중한' 태도일 것이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현재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행되는 불평등의 패턴은 중간계층 내에서 중,하층은 하향 분화해가는 한편 상층에 있는 이루는 상향이동을 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