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 마들렌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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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좋아하는 노래, 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좋아하는 가사는 있다. 우스꽝스럽고 조금 눅눅한,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게 하는 그런 가사. 노래의 기원은 시라고 하지 않던가. 아니, 반대였던가. 시가 먼저인가 노래가 먼저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가사는 노래되는 시, 시는 침묵을 멜로디로 하는 가사일테다. 그러니 둘 다 사는 이야기가 될 수 밖에.

뱀발이 길었다. 그래서 좋아한다던 가사가 대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에 우린 태어났으니까.” 라고 하겠다. 사는 일은 대개 멋지지 않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데. 많은 경우 고아한 미소를 자아낸다기 보다는 짠한데 웃기고, 자존심 상하고 짜증도 나는 와중에 그 꼬라지가 웃긴, 그런 희극이다.

세상의 끝은 훌쩍임과 함께 찾아온다는데, 아무리 울고 싶어져도 세상이 끝날 지경까지는 아니라 쾅 하는 소리가 아닌 컹, 하고 코먹는 소리와 함께 하루의 끝이 오나보다. 못난 것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웃기다는데, 대체로 만나기만 해도, 거울만 봐도 웃긴 건... 못난 동시에 평범하고, 울고만 있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인연과 웃기는 짬뽕(!)들의 연속이 곧 삶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뭐든 간에 웃다보면 눈물이 난다. 울다 웃으면 어디에 뭐가 난다는데, 웃다 울면 어떻게 되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허탈해서 웃음이 다 나든, 와중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든, 배를 싸쥐고 웃다 쥐가 날 지경이라 눈물이 나든 웃음 뒤엔 눈물이 있다. 울음의 끝은 웃음이고, 웃다보면 눈꼬리에 물이 맺힌다. 그 둘은 이어져 있다. 다르지 않다. 맞닿아 있다.

세상의 끝이 온다면,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 최소한의 사람됨이 의지 밖의 일로 소멸되는 틈을 타 알아서들 벗어던지는 탓에 배는 빠르게 무너져내리는 날이 온다면, 그렇다면 일상은 제법 익숙한 형태의 오래된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만약에“의 탈을 쓰고 그려내던 추잡한 폭력의 표출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 끈질기게 이어지던 한가닥 희망이나 그 둘이 뒤섞인 형태로.

그러니 사람이 사람 아닌 것이 되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는 때가 되더라도 누군가는 차마 살려달라는 이를 저버리지 못하고, 어느 순간 사람의 경계를 넘은 이를 차마 해치지 못한다. 물론 후자의 웃기는 꼬라지, 패기와는 다르게 차창 와이퍼에 머리카락이 집혀 아프다고 난리를 하는 꼴이 큰 몫을 했겠지만.


누군가는 이전과 다르지 않게, 그 와중에도 타인을 사람으로 존중하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그가 제게 주어진 물건쯤 된다는 듯, 그의 의지는 제 폭력에 설설 기며 아양을 떠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당연한 듯이.

p.36 곧 인간성이 만료된다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끝내 가야 했던 곳은 대체 어디였을까. 대체 뭘 하고 싶었을까. 누구를 만나려는 거였을까.

또 누군가는 달에 두엇이나 오면 웬일인가 싶을 작은 도서관(이라고 하기엔 창고에 가까운)을 지켜내려 발버둥을 치고, 누군가는 그 꼴에 한숨을 쉬고 진절머리를 내다가도 차마 저버리지 못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난리를 한다.

버려질 줄 알았던 것이 아주 작은 우연으로 살아남기도 하고, 묵혀둔 기억에서는 곰팡내가 나고, 달라진 위상에 주눅이 들기도 한다. 그게 다 사람의 일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죽은 자의 말은 죽지 않는다. 이따금 죽은 자는 말을 한다. 아직 죽지 않은 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를 잊지 말라고.


그리하여 소멸에의 요구는 소멸의 때를 늦추는 힘이 있다. 내가 지킨 것을 영영 해칠 수 없도록 잿더미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부재하는 이의 말은, 발화가 종료됨으로서 먼저 부재하게 된 그 말은 생생하게 남아 등을 떠민다. 부재는 빈자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없는 것은 힘이 세다.

필연적으로 도래할 존재의 소멸은 존재하는 시간을 슬프게 한다. 그래서 한 사람 분의 축적된 시간을 잃는 죽음은 도서관이 불타는 것과 같이 커다란 의미를 갖는지도 모른다. 상실은 아프고 부재는 서러우나, 남은 이의 삶은 여전히 얼렁뚱땅 이어진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지. 살아남아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웃기는 꼬라지를 이어갈, 남은 자의 시간을 살아낼 의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남은 자는 있는 힘껏 부재를 완성해낼 의무가 있다. 애도는, 충분히 기억하고 떠나보내는 일은, 그 시작일 뿐이다.

p.125 만드는 일과 지키는 일 중 전자가 더 중요하고 어렵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건 착시다. 인간을 만드는 것까지야 뭐 대충 아무나 최소한 두 사람만 모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기껏 만들어놓은 한 인간이 죽지 않게 돌보아 주는 일은 누구한테나 어려운 것처럼...

p.126 “세네갈? 그 아프리카 세네갈?” “그럼 경기도 의왕시 세네갈구 세네갈동이겠냐.”


앞서 말했듯이 사는 일은 웃기다. 정확히는, 살아가는 꼬라지가 웃기다. 사랑한다며? 믿는다며? 근데 왜 너는 과자고 나는 감자냐? 처럼. 평범한 이의 쫌(좀이 아니다) 치사하고 쪼잔하고 어이없는데, 황당하기까지 한 일도 구겨진 잔돈마냥 어찌저찌 쑤셔넣어가며 이어진다. 다시 한 번,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스꽝스럽다.

그와 동시에 살아내는 일, 처참한 수준의 발버둥이 우스운 이유는 그 버거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는 일은 무엇 하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토록 필사적이고, 그를 알고 있기에 웃다 울고, 울다 웃을 수 있다.

지는(!) 과자 나는 감자라고 뻔뻔하게 선언해도, 느닷없는 봉변에 환장의 3인가구가 되어도, 안그래도 맘에 안 들던 그 애가 쉽게 죽지 않겠다고 버텨내고, 주는 것 없이 내놓기만 하라는 작태에 짜증이 치밀어올라도 같은 사람이라 차마 모를 수 없는 타인의 심정이 신경을 거스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산다.


차마, 차마 외면할 수 없음이, 오직 그 이해의 가능성과 웃기는 꼬라지가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한다. 찌질하고, 연약하고, 웃기기 짝이 없는 인간종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건 바로 그 실낱같은 가능성 덕택이라고 믿고 있다. 다시 한번, 못난 것들은 얼굴만 봐도 즐거우니 오늘도 컹, 소리와 함께 하루가 끝날 것이고 내일도 환장의 호흡일 것이다. 사는 일이 그렇다.

p.201 마들렌은 나의 과자 친구. 나는 마들렌의 감자 친구. 어느 날 마들렌은 이제부터 여자 친구 대신 과자 친구라 불러달라고 말했고, 자기도 나를 여자 친구 대신 감자 친구라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자기는 왜 귀엽게 과자 친구고 나는 왜 텁텁하게 감자 친구인가?

p.262 물론 한동희가 믿는 것처럼 내가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듯싶었다. 나를 신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언젠가 자기에게 죽으라 했던 이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신에게 저항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신은 나한테 죽으라고 했지만 그렇게 순순히 죽지는 않겠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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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김정훈 옮김 / 호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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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번역본을 오래도록 기다려왔어요. 출판사의 첫 책이라니 기쁘고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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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 만성질환 혹은 이해받지 못하는 병과 함께 산다는 것
메건 오로크 지음, 진영인 옮김 / 부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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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부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는 일은 외롭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비롯해 삶의 본질적 요소 중에는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사는 일을 외롭게 한다. 그것은 존재라면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더이상 살아있지 않은 것이 되기까지의 시간 내내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이다. 삶은, 외롭다.

살아있는 것은 쉽게 병들고 자주 다친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손상도 겪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그 익숙한 경험, 질병, 통증, 일상의 곤란함, 장애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일까. 충분히 설명하고 고통을 호소한다면,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룩된 진단 체계를 통해 명명의 기회를 얻어낸다면 누구나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생래적으로 공감하는 탓에 타인의 고통, 정확히는 공감과 연민을 요구하는 호소는 쉽사리 구태연하고 지긋지긋한, 다소 피로한 일이 되기 마련이다.



또한 사람과 함께 사는 동물인 탓에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보느라 피곤해진 사람‘을 마주하고 또 그들의 감정을 읽어내지 않거나 끝없는 공감과 자리-내어주기를 강요할 방도가 없는 바, 외로움은 또다른 고통으로 이어진다. 안 그래도 외로운 삶, 사회로부터,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종내에는 자기자신으로부터 소외되기 마련이다.

고통은, 더욱이나 오래 이어지고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은 당사자로 하여금 몸과 시간을 이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선명히 지각하게 만든다. 이전의 일상을 제한당하는 불편감, 위축되는 생활의 경계, 반복될수록 예민하게 지각되는 통증은 몸이 하나의 현존하는 물체로서 지각 가능한 시간에 놓여있음을 알게 한다.

혹자는 말한다. 아픔으로 인해 얻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일상을 되찾은 행복이나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에 감사하는 태도로 살아갈 수 있다고. 으레 ‘그렇다고 하는데 왜 너는 맨날 아프다고 타령이냐’는 힐난이 따라붙지만 않는다면, 그게 일상과는 동떨어진 말이라는 걸 잠시 잊는다면 제법 멋들어진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말이다.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분명 삶의 질이 뚜렷하게 저하되고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기초적인 것들을 수행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내 몸이 아프다는데 도무지 설명할 말이 없다.

들어맞는 진단이 없으니 꾀병, 완곡하게는 ‘심인성 질환’이라고 치부된다. 부러진 뼈를 의지로 붙이라는 사람은 없는데, 피로나 발진, 구역감과 각종 통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쉽게 의지와 극복의 문제가 된다.

p.8 아픈 당사자는 질병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질병이 일으키는 두려움과도 싸워야 한다. 그래서 질병 서사는 늘 ‘극복’을 지향한다.

p.375 병은 분명 우리의 삶을 검증하고 다시 세우도록 떠민다. 병이 불러온 파괴로부터 재창조의 공간이 생겨난다. (...) 병의 아픔을 보상해 줄 만한 유용한 점을 찾는 행위와, 아픔의 본질에 관해 우리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는 행위는 한 끗 차이다.

p.384 발전하길 바랐던 자신의 어떤 측면들을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면서 생겨나는 지식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파멸과의 조우에서 입은 상처와 이어진 지식이다.


하다하다 도무지 길이 없어 대체의학이나 온갖 민간의학에 눈을 돌리면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는, 배교자와 그 어리석음을 질책하는 비난이 쏟아진다. 그러나, 몰라서 가는 사람은 없다.

생각없이, 처음부터 보다 쉽고 가까운 현대의학을 팽개치는 일은 적어도 현대화된 국가에서는 드물다는 뜻이다. 아프다니까요? 더 이상 답이 없다니까요?

p.125 인간이 자정 작용을 통해 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나 또한 이런 환상에 전적으로 빠져 있었다. 자기 관리의 행위에는 영적인 데가 있다. 나는 의식을 치르면서, 부서진 삶을 다시 맞추어 연속성을 찾고자 했다.

p.164 이미 문제가 있는데 타인에게 지독히 인정받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악화 하고, 우리는 윤리적 외로움을 느낀다. 침묵을 강요당한 집단에 속하는 특별한 고통, 단지 정체성 때문에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고통을 지적하는 개념이다. 그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저자 메건 오로크는 십여년간 시달려온 원인불명의 다발적 통증과 불편감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는 과정과 그 경험에서의 여러 통찰을 조심스러우면서도 뜨겁게 전달한다. 각자의 고통, 말할 길을 찾지 못한 각각의 아픔 무엇도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통증과 질병이 일상으로 편입되는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진단을 받고,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하고, 수차례 좌절하고 비난받으며서도 살아남기를 포기하지 않는 지난한 과정을 세세하게 풀어놓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만성질환을 대하는 사회의 문제점, 현대서구의료시스템이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내보인다.

p.346 건강이란 "질병을 앓지 않거나 허약하지 않은 상태를 넘어서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온전히 안녕한 상태"다. 의학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이 정의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특히 만성질환의 경우 그러하다. 의사들이 환자의 치유를 돕고 싶다면, 환자가 온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전세계를 휩쓴 COVID-19. 모두가 공포에 떨고 전반적인 일상이 흔들리는 때는 지났다고들 한다. 더러는 한 번 앓고 지나가면 면역이 생긴다든지, 까짓것 감기와 다를 게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회복’이나 ‘지나간 경험‘ 뒤에는 상세불명의 후유증을 겪거나, 지금까지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가 겪은 여러 자가면역질환 또한 이름 탓인지 그 원인이 환자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경향이 있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스스로에게 신경쓴다면 면역 시스템이 정상값을 찾을 것처럼.

심각해보이는 특징적인 급성기 증상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일상적이거나 가벼운 질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그들의 환자-됨, 아픔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의 호소는 과거의 히스테리나, 더러는 의료진의 권위를 의심하는 주제넘은 환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p.334 잘 알지 못하는 병을 심리적 문제로 해석하는 문화의 비극이다. 그렇게 병을 등한시하면 환자는 홀로 남겨져 안 보이게 되고, 그들의 병은 성격적 결함으로 취급된다.


이들을 대하는 ‘참 쉬운 말들’은 명시적으로든 잠재적으로든, 도덕적 훈계의 양상을 띈다는 특징이 있다. 전문 교육을 받은 학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왜 반복적으로 증상을 호소하는가? 왜 보다 건강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왜 연민과 공감, 알아주기를 원하는가? 노력과 마음먹기가 모자란 것이 아닌가?

언제는 병이 똑똑, 들어갑니다. 하고 온다던가. 아픈 몸이 개인의 부주의나 불량한 생활로 인해서만 초래되던가. 남에 비해 덜 아프니 안 아픈 셈 칠 수 있는 고통이 어디 있던가. 당장 죽지 않는다고, 보기에 괜찮다고 아프지 않은 게 되던가.

p.277 확실한 단서와 증거가 없으면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 병은 심각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현실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 냈다.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로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아프기로 말하자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 거의 매일 현기증과 소화불량, 전신 통증을 안고 산다. 이것들은 일종의 ‘기본값’이 되었기 때문에 견딜만한 날과 덜 견딜만한 날이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이는 부상이나 증상이 아니기에 이해를 바라기도 어렵다. 통증과 제한이 없는 이들과 동일한 수행을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과 혼자 있는 시간들에 겪어내는 고통이 필요하다.

일상 얘기에서 아픈 이야기를 제하는 기술이 늘었다. 적당히 불편하지 않게,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 내가 나를 연기해내는 시간들. 아픔과 꼬리를 무는 우울, 절망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아픈 사람을 보는 일은 괴롭다.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나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히 아플 수도, 고통 줄이기에 전념하기도 어렵다. 아픈 사람은 자의든 타의든 까다롭고 신경이 쓰이는, 불편한 존재가 된다.

p.353 "네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행위만으로도 내겐 어떤 입장을 요구하는 일이야. (...) 공감해야 하고. 힘든 일이지. (...) 병을 알아달라는 주장은 입장을 정해달라는 뜻이 되거든." (...) 인식의 행위에도 진정으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아픈 사람을 힘들게 한다.


장성한 자녀, 유쾌한 친구, 자기 분야에서 재능을 펼치는 한 사람의 시인, 작가, 저널리스트, 편집자, 강사... 사회에서 ‘1인분 몫’을 다한다고 생각했던 일상은 온몸을 덮치는 병에 시달리는 시간들에 밀려났다.

그것을 어느정도 되찾기까지 너무나도 긴 시간을 자기부정과 가까운 이들의 비난과 피로, 사람이 아닌 그저 하나의 몸으로 여겨지는 치료 경험과 대체의학에 기대고 전방위로 붕괴되는 삶을 수습하려 애써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이 책은 ‘완치’로 나아가는 희망과 극복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넘어지고 무너지고, 구르고 부서지다 끝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보기를,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강인하고 눈물겨운 이야기다. 그러나 성공담 내지는 동정심을 짜내려는 글이 아니다.

p.22 이 책은 병을 없애거나 무찌르는대신 병과 함께 사는 이야기다. 병을 극복하는 미국적 정신을 놓아 주고, 상호 의존성을 찾는 이야기다. (...) 신체는 언제나 다른 신체와 소통한다. 면역계는 보건 정책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과 정서에도 반응한다. 그래서 면역 기능에 이상이 생긴 신체란, 우리가 서로 영향을 잘 주고받는 존재임을 구현한 몸이다.


그렇기에 나의 긴 시간, 아프지 않았던 때가 거의 없는 나의 과거, 안팎으로 의심과 훈계, 죄책감에 시달렸던 나와 내 몸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내 울며 읽었다. 울 수밖에 없었다. 모를 수가 없으니 아프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결국 이것은 아픈 사람, 오래, 자주 아프면서도 병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도 아프다는 사실, 나으려고 애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리석거나 부도덕하다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이 책은, 늘어나고 다양해진 삶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사람을 위한 위로이자 그들이 존재함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그와 동시에 용기와 사랑의 기록이다. 이 책을 읽을 아픈 사람들이 살아보기를 포기하지 말 것을, 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병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삶이 있음을, 당신 자신을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말기를 바란다.


p.136 만성질환에 시달리면 건강을 향한 길로 무작정 밀고 나아갈 수 없다. 오히려 전신에 나타나는 모호한 병을 받아들이려면, 우리가 아픈 존재이고 증상은 나타났다 사라지며 우리의 병은 환자가 정복할 수 있는 그런 질환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p.327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야 했다. 정체성과 건강과 희망이 우연히 만나는 이야기. 어떤 종류의 생존이든 그 안에 힘이 있다고 보는 이야기. 내 경험은 삶 그 자체였다. 불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몸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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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세창명저산책 100
박찬국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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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랑! 고래로부터 지고의 가치, 삶의 필수조건, 인간성의 정수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히 여기는, 소중히 여기고 즐기는 마음이나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p.7 사랑이란 감정은 우리의 온몸과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우리의 온 에너지를 사랑의 대상에 쏟게 만든다. 따라서 사랑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위대한 힘을 갖는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외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일이기도 하다. 사랑을 하는 나,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나,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의 주체인 내가 없으면 사랑 또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타인이든 비-인간 존재, 심지어 자기 자신이든 간에 사랑은 행위자로서의 내가 아닌 무언가를 상정해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사랑은 그 정의부터 심히 난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잘 한 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본능에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잘 수행해내는 데는 배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과연 ‘이끌리는 대로’ 해내는 사랑은 그 자체로 ‘잘 하는 사랑’일까.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음을 전달하는 일이 늘 그러하듯, 마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일이 늘 그러하듯.

p.8 사랑은 또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많은 사랑이 상대방의 개성과 고유한 인격을 존중하는 성숙한 형태가 아니라, 사실은 사랑하는 상대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고 싶어하는 집착의 형태를 띈다.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사랑은 기술이라고. 사랑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삶의 다른 기술이나 행위와 마찬가지로 배우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앞서 말했듯 사랑은 본질적으로는 대상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나, 그 방향이 그릇될 경우 오히려 자기 자신과 상대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행복을 향한 욕망이었으되 반대로만 나아가는 꼴이다.

p.25 프롬은 사랑을 두고 흔히 말하듯 ‘즐겁고 흥분된 감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 사랑의 기술 역시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오직 성애적인 관계만이 사랑으로 불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랑의 기술』에서는 부모자식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신을 향한 종교적 사랑 등을 사랑의 범주 안에 넣고 있다. ‘사랑‘으로 묶일 수 있는 다양한 관계 내에서의 각기 다른 표출은 다시금 공통점을 갖는다.

그것은 애틋함이 될 수도, 강렬한 환희가 될 수도, 자기 희생을 가능케 하는 헌신이 될 수도 있으나, 결국 과정과 방향이 엇나가는 순간 더이상 사랑으로 불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되어버리는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p.92 연인의 사랑에서도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능력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면서 (...) 숭배하는 대상 없이는 자신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상대를 사랑할수록 자신을 더욱더 상실해 간다.

p.123 많은 사람이 여전히 신을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생각하면서 신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기복신앙에 빠져 있다. 이에 반해 정신이 성숙한 사람들은 동일한 종교를 믿어도 부처나 예수가 구현했던 자비와 사랑의 삶을 자기 삶에서 구현하는 것을 과제로 생각한다.


프롬은 오직 성숙한 인간만이 상호간의 성숙한 사랑을 가능케 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교리에 목을 매달고 ’우리‘외의 존재를 박해하거나 자신을 고통으로 내모는 것도, 희생에 따르는 찬사에 도취되는 것도, 연인을 이상으로 숭배하는 것도, 자식을 자신의 분신 내지는 소원 성취의 대리자로 여기는 것도 모두 성숙하지 못한 인간의 그릇된 사랑이다. 아니, 사랑조차 아니다.

p.137 신경증적 사랑의 또 하나의 형태는 자신의 소망과 기대를 상대방에게 투사하면서 상대방이 그러한 소망과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사소한 결점까지도 낱낱이 비판하면서 자신의 결점은 천연덕스럽게 무시해 버린다.


또한 진보의 환상, 무고통의 신화와 함께 현대인은 어떤 기술을 습득하고 연마하는 데에 들여야할 필수적인 단련과 과제마저도 즐거워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것은 부정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고 비판한다.

여기까지의 긴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야기는 ‘힘드니까 하지도 말라’ 가 아닌 ‘잘 해야 한다’로 귀결된다. 잘 해야 한다. 잘 알아야 하고, 도취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행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서로에게 행복을 주어야 한다고.

일찍이 괴테는 말했다. 'Lieben belebt', 사랑이 살린다, 고. 사랑은 그 자체로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나의 사랑이 스스로와 상대를 말라죽게만 한다면, 그 이름을 정말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돌아봐야 한다.

200여 쪽의 얇은 책을 곱씹는 시간에서 나또한 같은 결론을 내렸다. 행복해야 한다고. 주고 싶은 마음이 퍼붓는 나에 쏠리면 안된다고. 내가 사랑하는 것이 대상인지 ‘사랑하는 나’인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고.

너저분하고 지긋지긋한 세상이지만 아직까지는 사랑을 믿는 사람이고 싶다. 고리타분하게 보일지언정 사랑의 가치와 힘을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이 연약한 인간의 삶과 기억을 끈질기게 이어지게 하는 유일한 동력일지 모른다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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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리터러시 - 혐중을 넘어 보편의 중국을 읽는 힘
김유익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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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중국에 대해 말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중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사실이다. 이상한 일이다. 경계와 이름을 달리해가며 수천년을 지근거리에 존재해온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많은 경우 남한에 거주하는 한국인 개인은 “내가 직접 겪은 중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어쨌거나 법적으로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한국인 중 편견이 없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운 나라, 중국.

척수반사 급으로 튀어나오든, 나름의 근거를 대겠다고 용을 쓰든 간에 곱게 보는 일이 없고 경탄 섞인 멸시의 대상이 되는 중국, 그리고 중국인.


집단으로서의 중국, 중국인이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서의 중국인,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 중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중국을 마주할 수 있는가? 막연한 혐오를 넘어 그들 삶 전반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시각이, 어떤 정보가, 어떤 방식의 소통과 이해가 필요한가?


서문에서 밝히듯, 이 책의 저자는 외교나 역사, 문화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이가 아니다. 해당 분야의 공직에 몸담은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한 권으로 역사나 사회, 국가 정책 등을 총망라하는 경험을 기대하는 것은 다소 과욕이라 하겠다.

다만 여기서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국인 개인이 중국과 중국인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한 시각, 그리고 그에 필요한 태도이다.

가족과 그가 속한 문화로, 또한 저자 자신이 몸소 겪은 시간으로 축적된 경험으로 인해 던질 수 있는 질문이 날카롭다.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가 있지요. 또 이 부분은 이렇게 연결될 수 있고 현지에서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깔보고 펄펄 뛰던 문제는 사실 이럴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생각만큼 당신과 한국이라는 나라에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화가 난다면, 왜일까요.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차이나 리터러시, 단순한 반감이나 추상적인 이미지로 뭉뚱그리는 것이 아닌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를 권하는 책이다. 부제를 보자. 혐중을 넘어 보편의 중국을 읽는 힘이다.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국제적으로 불거지는 한국의 인종차별주의, 타민족 배척에 대해 생각해야한다. 이를 접한 한국인이 즉각 부인하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본다.

개인을 집단의 이름으로만 호명될 때 무엇을 놓치게 되는지, “남”의 자리에서 “남”을 재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고 세밀한 오류를 낳는지, 그러므로 왜 정확한 이해와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필요한지를 몸으로 깨닫는 탓이다. 자기 일이 되어서야.


나 자신도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었던 만큼 중국의 대내외 정책이 무조건 무류하고 온정적이라거나, 개개인이 희생적인 태도로 일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해에는 앎과 생각이 필요하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것이 정말 타당한지. 400쪽이 채 안 되는 이 한 권으로 모든 것을 얻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목차를 따라 생소한 중국과 생생한 중국인, 추상적인 거악을 넘어 뻗어나가는 새로운 보편, 도그마 너머의 중국과 두려움과 부러움 사이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중국을 고민하고 또 곱씹어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기쁘다고 하겠다.

역사와 정책, 사회문화와 문학, 미디어로 그려내고 또 그려지는 가깝고도 먼 그들에 대해 자동화된 고정관념이 아닌 숙고와 경험으로 다양한 시각을 제기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소개하는 보람이 그보다 더 클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다시금 묻는다. ”-하더라“가 아닌, 당신이 이해하는 중국과 중국인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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