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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ㅣ 세창명저산책 100
박찬국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6월
평점 :
*세창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랑! 고래로부터 지고의 가치, 삶의 필수조건, 인간성의 정수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히 여기는, 소중히 여기고 즐기는 마음이나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p.7 사랑이란 감정은 우리의 온몸과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우리의 온 에너지를 사랑의 대상에 쏟게 만든다. 따라서 사랑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위대한 힘을 갖는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외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일이기도 하다. 사랑을 하는 나,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나,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의 주체인 내가 없으면 사랑 또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타인이든 비-인간 존재, 심지어 자기 자신이든 간에 사랑은 행위자로서의 내가 아닌 무언가를 상정해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사랑은 그 정의부터 심히 난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잘 한 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본능에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잘 수행해내는 데는 배움이 필요하지 않을까. 과연 ‘이끌리는 대로’ 해내는 사랑은 그 자체로 ‘잘 하는 사랑’일까.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음을 전달하는 일이 늘 그러하듯, 마음을 행동으로 보이는 일이 늘 그러하듯.
p.8 사랑은 또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많은 사랑이 상대방의 개성과 고유한 인격을 존중하는 성숙한 형태가 아니라, 사실은 사랑하는 상대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고 싶어하는 집착의 형태를 띈다.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사랑은 기술이라고. 사랑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삶의 다른 기술이나 행위와 마찬가지로 배우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앞서 말했듯 사랑은 본질적으로는 대상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나, 그 방향이 그릇될 경우 오히려 자기 자신과 상대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행복을 향한 욕망이었으되 반대로만 나아가는 꼴이다.
p.25 프롬은 사랑을 두고 흔히 말하듯 ‘즐겁고 흥분된 감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 사랑의 기술 역시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오직 성애적인 관계만이 사랑으로 불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랑의 기술』에서는 부모자식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신을 향한 종교적 사랑 등을 사랑의 범주 안에 넣고 있다. ‘사랑‘으로 묶일 수 있는 다양한 관계 내에서의 각기 다른 표출은 다시금 공통점을 갖는다.
그것은 애틋함이 될 수도, 강렬한 환희가 될 수도, 자기 희생을 가능케 하는 헌신이 될 수도 있으나, 결국 과정과 방향이 엇나가는 순간 더이상 사랑으로 불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감정이 되어버리는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p.92 연인의 사랑에서도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능력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면서 (...) 숭배하는 대상 없이는 자신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상대를 사랑할수록 자신을 더욱더 상실해 간다.
p.123 많은 사람이 여전히 신을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생각하면서 신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기복신앙에 빠져 있다. 이에 반해 정신이 성숙한 사람들은 동일한 종교를 믿어도 부처나 예수가 구현했던 자비와 사랑의 삶을 자기 삶에서 구현하는 것을 과제로 생각한다.
프롬은 오직 성숙한 인간만이 상호간의 성숙한 사랑을 가능케 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교리에 목을 매달고 ’우리‘외의 존재를 박해하거나 자신을 고통으로 내모는 것도, 희생에 따르는 찬사에 도취되는 것도, 연인을 이상으로 숭배하는 것도, 자식을 자신의 분신 내지는 소원 성취의 대리자로 여기는 것도 모두 성숙하지 못한 인간의 그릇된 사랑이다. 아니, 사랑조차 아니다.
p.137 신경증적 사랑의 또 하나의 형태는 자신의 소망과 기대를 상대방에게 투사하면서 상대방이 그러한 소망과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사소한 결점까지도 낱낱이 비판하면서 자신의 결점은 천연덕스럽게 무시해 버린다.
또한 진보의 환상, 무고통의 신화와 함께 현대인은 어떤 기술을 습득하고 연마하는 데에 들여야할 필수적인 단련과 과제마저도 즐거워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것은 부정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고 비판한다.
여기까지의 긴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야기는 ‘힘드니까 하지도 말라’ 가 아닌 ‘잘 해야 한다’로 귀결된다. 잘 해야 한다. 잘 알아야 하고, 도취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행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서로에게 행복을 주어야 한다고.
일찍이 괴테는 말했다. 'Lieben belebt', 사랑이 살린다, 고. 사랑은 그 자체로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나의 사랑이 스스로와 상대를 말라죽게만 한다면, 그 이름을 정말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돌아봐야 한다.
200여 쪽의 얇은 책을 곱씹는 시간에서 나또한 같은 결론을 내렸다. 행복해야 한다고. 주고 싶은 마음이 퍼붓는 나에 쏠리면 안된다고. 내가 사랑하는 것이 대상인지 ‘사랑하는 나’인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고.
너저분하고 지긋지긋한 세상이지만 아직까지는 사랑을 믿는 사람이고 싶다. 고리타분하게 보일지언정 사랑의 가치와 힘을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이 연약한 인간의 삶과 기억을 끈질기게 이어지게 하는 유일한 동력일지 모른다고,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