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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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래빗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완전한 정착을 말하기엔 멀고, 그렇다고 불가능을 못박자니 가까운데다 제법 가능성은 있어 오래도록 SF 장르의 무대로 사랑받아온 곳, 화성.

이를테면, 화성에 독립적인 행정기관이 수립된다면, 살인사건이 발생한다면, 포기하자니 간절하고 수급하자니 영 요원한 음식이 그리워진다면, 시공간의 벽이 어렵지만 투과(정복이 아니다) 가능한 것이 된다면, 그 모든 만약에 ‘지구인들’이 고개를 쭉 빼고 기웃거리고 있다면.

요컨대 나의 고민은 이런 것이다. 화성에도 사랑이 있을까요. 화성의 노을은 푸르다던데, 붉은 땅에서 바라보는 푸른 노을에도 여전히 눈물짓는 사람이 있을까요. 시간과 중력을 공유할 수 없는 행성에서도 여전히 사람은 사람의 삶을 살까요.

p.10 가혹한 환경과, 화성 표면에서 생명의 흔적을 발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유 같은 것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며, 여기서는 서로가 서로의 신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럼 우리는 이미 다 끝장난 게 아닌가, 하고 지요는 생각했다.


필요가 정착을, 정착이 토대를. 자연발생이 아닌 모든 것이 계산되고 통제된 형태로 생산되는(설사 그것이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우리는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정상을 구축하게 될까요.

개인적 감상이기는 하나, 수록작에 이전 작품들에 비해 쓸쓸함이 크게 묻어난다. 이미 이주가 시작된, 그것도 허허벌판 꼴은 면한 어색한 환경을 굳이 부정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래서일까. 표지의 홀로 선 사람이 너무도 외로워보였다. 지구는 푸른 별, 그곳의 노을은 붉은데 정반대로 뒤집힌 붉은 땅의 푸른 노을이기 때문일까. 띠지의 “이 행성에서는 지구에서 해결할 수 없던 문제를 가뿐히 초월하기를”, 기원처럼 느껴지는 이 문장마저 쓸쓸하게 느껴졌다.

p.40 ‘다음 날 아침에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발견되는 것. 이 행성에는 그게 사건이야. 여기는 차가운 지옥이지만 우리는 매일 그 사건을 일으키고 있어. 그것도 아주 많이. 공동체의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서 아침마다 일으키는 기적이지.’


배명훈이 그려내는 화성은 결핍되고, 척박하고, 어떤 때엔 쫄쫄 굶을 지경인데다 살인을 저지른 자조차도 도망갈 곳 없이 덩그러니 그 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속된 말로 좁아터진 곳이다.

마음도, 공간도. 이 넓은 우주의 한 행성에 바글바글 몰린 지구인처럼, 그 넓은 행성의 기지 어딘가에 이리저리 낑겨있는 화성인들.

낯선 곳에서의 빈곤한 상황, 우리가 본디 유래하지 않은 환경에 적응하고 나아가 환경 자체를 구축하는 것. 어쩌면 이 모습은 지구에 처음 문명을 건설할 때의 인류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러니, 또한 어쩌면, 작가가 그려내는 화성의 척박함, 설움, 권태, 고립과 무용은 지구인이 수차례 겪어 무뎌진 고통일지도 모른다.

p.60 “쓸모 있는 사람들만 보내서는 100년이 지나도 사회가 완성되지 않아요. 쓸모 있는 인간이란 결국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될 사람들이니까요. 문명이 완성되는 건 다른 목적이나 임무를 지니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화성으로 건너가는 순간부터입니다.”


한 번도, 그러니까 그 개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에 비하면 기존의 것을 삭제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개념도, 존재도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불가능에 맞닥뜨린다. 상상은 쉽지만 말살은 어렵다는 것. 아주 작은 기억만으로도 불씨가 당겨진다는 것.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아주 새로운 곳의 새 문명에서도 어떻게든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배척하려 드는 존재인 동시에 어디선가는 기어코 사랑을 발명해낸다. 그 또한 지구-유래 인간의 오래된 습성이라 할지라도.

그렇기에 때때로 슬프고, 자주 외롭더라도 옆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들이 아닌가. 마치 사는 일이 그러하듯이. 새로운 곳에서 이제까지의 문제를 초월할 수 있기를, 더이상 이렇게 슬퍼하지는 않기를. 화성과 나, 낯선 곳의 외로운 이가, 깊은 우주의 공백을 건너.

p.180 미사일은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안전장치가 부착되지 않은 지하철 자동문처럼 인간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미사일은 키스가 뭔지 몰랐다. 인간의 마음이 왜 움츠러들거나 황홀해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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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약시대 - 과학으로 읽는 펜타닐의 탄생과 마약의 미래
백승만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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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히포크라테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마약청정국, 적어도 나는 그렇게 듣고 자랐다. 우리나라는 마약 사용자가 거의 없으며 유통 단속에 엄격하다고. 그래서 어쩌다 한 번씩 마약사범 관련 뉴스가 떠도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 당장 코앞에 닥친 일이 될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러니 세대와 계보를 잇는 미국의 마약 중독 사태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마약이라고 하면 단순한 환각제, 기껏해야 수면제 정도를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제까지 무심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갈수록 의문이 든다. 이제는 확신에 가까울 정도다. 그렇게 단속과 처벌이 엄격했다면 이름만 달리할 뿐, 하루가 멀다하고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이야기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근래에는 “마약”이 최상급 수식어로 칭해지지 않았던가? 그것은 어디에든 붙어, 종류를 가리지 않고 광고부터 개그까지, 말그대로 전국을 도배하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이전부터 수없이 제기된 지적이 있다.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우리 사히는 마약으로부터 안전한, 순수한 청정지대가 아니다. 알지 못하고 알아도 쉬쉬했을 뿐, 묵인과 무지로 덮였을 뿐이다. 코앞에서 사건이 벌어져도 태반은 무슨 일인지도 모를만큼.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대참사로 기억되는 2001년 9.11 테러 사망자는 약 2,980명이었다. 그렇다면 최근 CDC 통계 기준 오피오이드 남용으로 인한 사망자는? 무려 일평균 약 220명, 전자의 약 두 배다. 그 끔찍했던 대량사망이 한 달에 두 번 꼴로 일어나는 셈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충돌과 달리 마약 중독자의 사망은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조용히 죽는다. 그들은 말을 잃고, 사회적 지위에서 밀려나며, 쉽게 잊힌다. 원인과 해결책을 모르는 이 없으나, 너무도 큰 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개인의 부도덕, 공포심 조장, 뒷골목의 어둠으로 밀려난다. 정말 큰 일이 나기 전까지.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이 사회 전체를 뒤덮을 때까지.

p.6 대마약시대가 왔다. 연예, 스포츠,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에서 마약 관련 뉴스를 접할 수 있다. 검사를 시행한 모든 하수처리장에서 마약이 검출됐고, 다크웹과 SNS를 이용한 마약 거래가 늘어나면서 마약 사용자의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다. 마약류 사범의 수는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우리 사회의 약물 중독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비난과 처벌에 머물러있다. 중독을 개인의 일탈로 보는 시선이 지배적인 탓이다. 물론 그런 사례를 배제할 수 없다. 쾌락범죄자를 왜 세금까지 들여가며 치료하고 사회 복귀를 도와야 하느냐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독성 약물, 특히나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펜타닐의 기원은 처방약물이다. 제약회사가, 전문가가 안전성을 토대로 제조하고 처방되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중독장애를 초래했다. 이것은 재난, 그것도 인재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결과는 의도만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비난이 해결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좋은 이유로 만들어낸, 적어도 처음부터 중독을 야기할 목적으로 개발되지는 않은 약물이 도리어 평균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지금의 펜타닐 중독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현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게 하고 더 큰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지적인 치료 환경과 낙인찍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p.75 펜타닐이 마냥 나쁜 물질도 아니다. 약에 무슨 좋은 약, 나쁜 약이 있겠는가. 효과적으로 쓰는 약과 그렇지 않은 약이 있을 텐데 펜타닐은 제대로 쓰기만 하면 이보다 더 좋은 진통제도 찾기 어렵다. (...) 양날의 검이다. 극도로 위험한, 그래서 제대로 알고 써야 하는 기적의 진통제가 바로 펜타닐이다.


엄청난 손실을 겪으면서까지 중독성 물질에 손대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을 때, 불운한 경우로 중독에 이르러도 얼마든지 안전하게 회복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이 당연해진 때에 비로소 사욕을 위해 수많은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는 이들에 대한 처벌을 논할 수 있다.

대마약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약이 꼭 필요한 사람 외에는 선택지에 들지 않는 것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 수준이 마약 사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편안하고 행복해야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마약중독을 외부의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이전의 방관을 그만두고 긴장해야 할 때이다. 환자, 처방에 관여하는 의료진 뿐만 아니라 사회정책에 책임을 지는 모든 이들과 시민까지도.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이제는 알아야 한다.

p.255 중요한 것은 예방 교육이다. (...) 처음부터 마약류 시장이 작다면 펜타닐이 발붙일 여지가 없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다. 펜타닐 사태의 처음 원인이었던 공급을 억제하면 더 좋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약류 중독자를 줄여야 하고, 그래서 예방 교육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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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인간 선언 - 기후위기를 넘는 ‘새로운 우리’의 발명
김한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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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대뜸 이렇게 묻는다고 치자. “너는 무엇이냐?” 퍽 당황스러운 질문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나름 예의랍시고 답해본다. 내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몇이며... 뭐가 더 있나, 머리를 굴리던 차에 또다시 대뜸 말허리를 잘라먹고 묻는다. “너는 무엇이냐?” 직장인이고... 뭐가 더 있나?

이제 짜낼 것도 없다. 억울한 마음에 되묻는다. “그러는 넌 뭐냐?” 애써 답한 보람도 없이, 같은 질문이 되돌아온다. “너는 무엇이냐?” 욱하는 마음에 악을 지른다. “사람이다. 왜!”

그렇다. 사람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지구는 일단 우리가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며 인간으로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잠깐. 정말 지구로 돌아가는가? 원래 있었던 대로, 다시금 생태계의 일부로 돌아가느냔 말이다. 인간이 생물로서 태어나 지구의 일부로 살다 다시금 거대한 순환계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이 맞는가? 조심스러운 수사를 덧붙이지 않더라도, 답은 ‘아니오’다.

인간은, 적어도 현대 인류의 대부분은 좋게 쳐줘도 쓰레기를 늘리는 쓰레기일 뿐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쓰레기다. 본질적 의미로서의 쓰레기는 어디 쓰임이라도 있다지만 인간은 죽어서도 죽기를, 살아가는 중에도 적당히 살기를 거부하며 살아있는 모든 것의 터전을 깎아먹는 데 열을 올린다.

정말이지 창조적 쓰레기가 아닌가. 좋게 쳐줘도 쓰레기를 뿜어내는 쓰레기다. 자기는 괜찮다며 남의 집을 허문다. 어차피 다들 이러고 산다며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이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p.81 내게 가장 극단적으로 보이는 것은, 기후 자살도 조력자살도 아닌 현상 유지라는 선택이다, 연알 심화하는 기후 재난에 수수방관하는 정치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우리야말로 극단적으로 안일하고, 극단적으로 무감각하고, 극단적으로 무책임하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떠든다. ‘이 정도는 괜찮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내 일이 아니다’, ‘알지만 싫다’... 자기가 선 곳을 허물어뜨리며 연신 괜찮다는 주문을 되뇌인다.

지구는 너무도 거대하고, 자연은 지금까지도 ‘별 문제 없었’으니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 하나쯤 보탠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어차피 내가 죽을 때까지 지구는 망하지 않으니까’. 이걸 말이라고 하는가.

이게 무슨 짓이냐, 더는 안 된다 항의하는 이들을 추방하고 몰아넣는다. 지금까지의 인간이 인간중심주의의 탈을 쓰고, 자본의 이름으로 해온 짓이다. 안 보이면 없는 척, 뻔히 보여도 모른 척.

순응은 너무나도 쉽다. 책임 면피를 위해 동원되는 절망의 다른 이름은 동조와 비겁함이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단지 상상하기 어렵고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포기하는 것은 적극적인 가담이다.

p.104 자본은 절대로 아무 의도나 방향성 없이 가치 중립적으로 투입되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사람을 특정 방향으로 인도하고 그 경향성을 강화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은 자본의 반대 방향이 아닌 순방향으로 더 빠르고 힘차게 앞서 나가라는 명령이다.


탈인간 선언은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모순에서 출발한다. 오직 인간됨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만이 인간이기를 거부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이 아닌, ‘이전의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몸부림이다. 영원히 성취될 수 없는 것의 외침은 당장의 시급함을 역설하는 절박함이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다른 사람과, 다른 생명과 함께하지 않고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공존 아니면 공멸 뿐이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가? 해야한다. 유일한 선택지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할 시간이다.

이것은 비정상인가? 아니, 이제는 유일한 선택지다. 정상이 되어야만 한다. 위기를 넘어 기후절멸로 향하고 있는 지금의 지구에서 인간이 맞닥뜨린 외길이다. 착취를 포기하라.

이제는 말해야 한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인간중심주의가 초래한 기후위기 시대, 이제 우리는 어제의 인간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p.9 탈인간은 먼저 탈인간중심주의의 준말로, 말 그대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그것이 몸부림인 이유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벗어남을 완벽히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세의 비극을 탄생시킨 인간에 대한 반성과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목표로 삼을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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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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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통은 외롭다. 객관적인 자극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이 한 개체의 내부에서 해석된 결과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주체가 타자의 유무형적 경계를 넘을 수 없기에, 단지 그렇기에 고통은 있는 그대로 공유될 수 없다. 기껏해야 설명, 그마저도 개인 내적으로 해석된 고통을 그의 언어로 재해석한 것, 지극히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내용만이 간신히 내보여질 뿐이다.

그것은 곧 존재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외로움으로 연결된다. 고통의 언어는 비명이다. 호소다. 타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필사적인 의문이다. 왜 이렇게 괴로워야 하느냐고, 대체 이것의 끝은 어디며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고통스러운 사람은 묻는다.

답을, 그것도 만족스러운 답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애써도 답을 얻지 못한 자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그저 수동적으로 내맡겨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자는 절망한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미완의 질문을 답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뿐이다. 답이 없다면 만들어내면 된다. 이해할 수 없다면 외워버리면 된다. 주문처럼.

p.21 그는 절망했다. 그의 삶은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달린 전력 질주와 같았다. 무기징역 선고와 함께 그 목표가 사라졌다. 죽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의 삶은 의미를 잃었다.


괴로운 자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것은 2차적 고립이다. 나의 의미가 오직 나만의 믿음일 때, 그것은 쉽사리 무의미한 광신으로 취급된다. 무시된다. 다시금 궁지에 내몰린 자는 동지를 찾는다. 나의 믿음이 우리의 것, 공동의 것이 될 때 그것은 힘을 얻는다. ‘나만 믿고 따르라’ 이끄는 자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무의미에서 오는 절망을 믿음 너머로 던져버린다. 모든 것은 초월 너머로 감춰진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순종과 헌신 뿐이다. 더는 갈등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다. 신의 뜻이 이끌 것이다. 들어주는 존재가 있다.

가자. 나의 믿음이 너의 것이 되도록. 이는 구원을 위한 시련이니, 불신하는 자에게 영원한 ‘그것’ 있으라.

p.128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선의가 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 선의의 표현이다. 문제는 상대가 원하리라 생각하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좋은 것을 떠안기는 일을 선의로 착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작가는 선의와 무심, 이기심과 가학의 난장판이 한 데 뒤섞인 것을 보여준다. 상냥하게 풀어헤치지 않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 보세요. 무용의 지옥에서 구했어. 괴롭게 하는 것을 전부 없애버렸어. 구원으로 이끌었어. 분열시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치워버렸어. 받아먹지 못하기에 쑤셔넣었어. 어때, 고마운가요.

p.245 그들은 너무 늦게 알았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알게 된 뒤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고통과 죽음은, 그것이 타인에게 강요되는 경우, 그들의 의도에 대체로 부합했다.

p.290 물리적으로 감각하는 모든 정보를 신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마음은 그것을 고통이라 정의했다. 그러므로 기쁨도, 환희도, 초월도, 아마 구원조차도, 인간이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 때는 모두 고통이었다.


알 수 없다. 영원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느낄 수는 없지만 함께할 수 있는, 고통이 연대와 공생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타인의 세계를 비집고 들어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경험마저 빼앗을 수 없다면, 그것을 약탈-대리해 정의할 수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타인의 경계를 부수거나 심지어 그 자체를 파괴해버린대도 그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이것은 절망인가. 그렇지 않다. 그 한계가 시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p.301 흉터는 상처와 고통과 회복의 과정과 회복에 동반하는 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 뒤에 남는 감정과 기억을 대표했다. (…) 신체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을 간직한 채, 상처 입은 흉터투성이 존재를 떠안고 죽는 순간까지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다.


고통이 고독의 고통으로 자라나지 않으려면 함께 어깨를 들먹이고 온 품으로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인 이를 완전한 고독으로 몰아넣지 않으려면 그의 떨림과 울음에 함께해야 한다. 그 자신의 언어에게 자리가 있어야 한다.

자기 것이 아닌 세계를 자기로 끌어넣어 부서뜨리려는 이에게 맞서 살아남은 흉터가 지나간 기억이 되려면, 부술지언정 부서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알 수 있다. ‘큰 뜻으로 내리신 은총’으로서의 고통이 아니더라도. 고통이 없기에 타인의 세계도, 자기자신의 안팎도 알 수 없는 무능한 전능자가 부여하는 시련이 아니더라도.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게조차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함께할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삶에서 의미를 찾아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당신과 나는.

p.320 "너는 내 삶의 어떤 부분을 아주 크게 부숴놨어. 물론 이미 망가져 있어서 차라리 부숴버리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너한테 부탁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너는 내 인생에 마음대로 들어와서 마음대로 부술 권리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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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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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은행나무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인생사 본질적으로 구질구질하고 못나기 마련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예, 제가 했습니다.

사람 사는 일이 환희와 완벽의 순간으로 가득할 수는 없다고, 결국 사는 일에는 근원적으로 구차한 면이 있다고 말해왔으나 사실 또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는 일에는 고통이 수반되나 고통스러워야만 삶인 것은 아니다.

고통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어쩔 수 없는 고통, 겪지 않아도 되거나 마땅히 처해도 될 이는 없는 고통. 전자가 삶의 본질적 요소로 불리는 고통에 속한다면 후자는 사회의 일면이다. 떠넘겨지는 고통이다.

구조의 틈새에 끼인 존재들, 시스템의 부산물, 제거보다 월등히 저렴한 방임에 의해 유지되고 당연시되는 고통.


우리의 주인공, 전혀 easy하지 않은 인생, 안이지씨의 여정은 그야말로 딱, 궁상맞음이다. 구질구질하고 짜증스럽다. 그의 취급 또한 그렇다. 그는 예술가인 동시에 노동자다. Mass, 대중이다.

그는 많은 경우에 존중받는 사람이 아니다. 지도 위의 파란 점, ‘담당자’의 사정에 따라 미뤄지고 잊혀지는 짐,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동시에 파격적으로 타오를 것을 요구받는 생산자.

가난한 예술가와 그의 열정이 사회의 냉대와 가난에 좌절되는 이야기야 속된 말로 ‘쌔고 쌨으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딱히 달라진 점은 없다. 오히려 예술과 자본의 촘촘한 결탁으로 더 많은 것, 더 높은 강도의 노동, 더 파격적일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모를까.

p.170 내가 거쳐온 동네들이 모두 값이 뛴 것은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값이 뛰었기 때문에 더 싼 곳으로 밀려났던 거니까.


‘굶어죽어도 예술이 좋은’ 이가 아닌, 평범하게 살아온 이상 ‘굶어죽을 각오’를 해야만 시작이라도 해보는 것이 작금의 젊은 예술인 아닌가. 우리의 안이지씨처럼.

그저, 점. 그의 가치는 사회의 하층, 우매한 대중이며 그의 고통은 어깨 한 번 으쓱이는 사이에 말끔히 무시된다. 제자리로, 마땅히 있어야 할... 그의 자리로. 어쩌겠어요. 안그래요?

p.38 그가 내민 휴대폰 화면 속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두 발… 어떤 이동 수단을 사용하든 나는 그저 동그랗고 파란 점으로 요약되었다.

p.112 이렇게 모든 것의 제자리가 있는데 정작 내 자리는 아주 희미해 보였다. 방이 나를 뱉어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진 건 곳곳에서 사소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그러나 사소한 게 아닌) 무신경의 흔적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처량하고 궁상맞은 데다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으며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어울리지 않는다. 어긋난다. 엇갈리고 뒤처진다. 숭고한 이상과는 영 거리가 멀다. 형식의 미와 정신은 커녕 선택된 자만이 초대되는 자리에서도 고상한 냉소와 경멸에 시달리고는 야밤에 즉석밥 돌릴 전자레인지를 찾아 헤맨다.

속 시원한 부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도 전무하다. 끝까지 그는 무시된다. 마지막까지 그는 그 자체로서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한다. 딱 한 순간, ‘그것’의 공모자가 되는 것만 빼면.

끝끝내 기만적이고 냉소적이다. 작품 내내 독자는 초대받은 불청객, 미덥지 않은 ‘하층민’, 경박한 소비자와 무력한 방관자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그와 우리의 잘못인가? 이건 아마 우리의 잘못이 아닐거야. 맞아. 다 니 잘못이야...

p.273 금기 혹은 생략, 그 둘에 대해 헤아리다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들어왔고 이 전시회의 주인공이 내가 아님이 자명해졌다. (…) 전시 기간 동안 고용된 경호 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보호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그린 작품들보다도 한참 뒤에 있었다.


시작부터 결말까지 단 한 순간이라도 통쾌한 부분이 있었다면,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무시되지 않았다면, 상여가 현대 슈퍼카로 와전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멸과 경멸까지도 닿지 못한, 인간의 바운더리에서 밀려나 잊혀지는 인간들. 매캐한 연기와 진짜를 모방한 가짜-진짜, 여전히 지지리 궁상인 몸과 알 수 없는 영혼에 박수를 보낸다. 타오르는 불길에서 감히 살아남아 더이상 진짜가 아니게 된 가짜-진짜에 눈부신 조소를 보낸다.

별 것 아닌 인생, 그 이상의 예술을 위하여. 라이더님, 당신을 위한 스페셜!

p.186 "의미 없어요." "네?"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을 로버트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작가가 사랑하게 되는 구조겠죠. 어떤 경우에든 작가는 사랑하는 걸 불태울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당신은 결국 그것과 사랑에 빠질 겁니다."

p.341 불타는 작품만이 진짜라고. 불타고 있을 때, 그 순간의 화력만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런 의미에서 화염을 피해 밖으로 나온 건 진짜일 수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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