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이야기
이이지마 나미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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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 이란 뭘까. 어떤 사람은 먹기 위해 살고, 또다른 누군가는 살기 위해 먹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까. 물론 맛있는 것을 먹으면 즐겁다. 입에 맞는 음식이나 식재료는 한참씩이나 질리지도 않고 줄기차게 찾아 먹는다. 당연히, 좋아하는 음식이나 맛도 있다. 몇 개라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만큼 귀찮다. 먹는 행위에도 체력이 필요하다. 먹기 위해서는 메뉴를 고민하고, 재료와 과정을 생각해 적절한 품을 들여 차려야 하지 않는가. 만든다기보다 해치우는 느낌으로 해내고 밥상 앞에 앉았을 땐 이미 반쯤 곤죽이 된 상태다.

어디 먹는 사람만 있나. 치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혼자 차려 혼자 먹는 식사라면, 집밥이든 도시락이든, 대개는 둘이 같은 사람이다. 포만감에 속은 불편하고, 몸은 무거운 와중에 냄새는 나니 상을 닦고 설거지를 하고 행주며 난리통을 정리하고 나면 '사람은 왜 먹어야만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생각만으로도 지레 피곤해지기 십상인 이 먹고 사는 일, 혹은 살기 위해 먹는 일, '먹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매번 지난 날의 귀찮았던 기억은 싹 지워버리고 먹을까, 내지는 먹여볼까, 를 고민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사람은 의미를 갖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한번쯤은 즐거웠던 적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여행지에서 마주친 맛을 잊지 못해 낯선 식재료에 허둥거렸던 날, 별 것 아닌데도 문득 떠오르는 익숙한 맛, 경쾌한 식감이라든지 맛있다!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얼굴이라든지... 웃고 울었던 날들에.

p.30 촬영 현장에서 정신없이 요리를 완성해나가는 와중에 찡해지는 일도 있었다. 단순히 피와 살이 되는 것, 맛만 좋은 것이 요리는 아니구나, 때로 맛과 냄새를 누군가의 기억과 추억을 불러오는 것이 요리로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요리란 참 좋은 것이네요.

p.92 즐기면서 만드는 요리는 틀림없이 맛있을 터다. 그런 요리는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요리를 먹고 자랐다는 사실, 누군가에게 소중히 여겨졌다는 사실이 자신감으로 이어져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서가 풍부한 식탁을 둘러쌈으로써 요리에도 이야기가 태어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단순히 맛만 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적재적소에 알맞은 모양새의 알맞은 요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 저자 이이지마 나미는 광고와 영화 촬영 현장 등에서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푸드 스타일리스트다.

스쳐지나간 소품, 혹은 주인공이 차려내고 먹는 음식을 딱 알맞은 모양새로 그려내는 사람. 이 자리에 어떤 음식이 있어야 자연스러울지, 이런 사람이 하는 요리는 어떤 느낌일지, 어떤 곳의 요리는 그 지방의 특색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

해외 촬영의 현지 로케라든지, 세계 곳곳에 이벤트삼아 내는 테마 식당이라든지, 짧은 여행에서 만난 색다른 요리를 더 맛있게, 때로는 편안하게 만들어내는 방법을 고민하는 그는 맛있다!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 부러워지기도 했다.

p.156 바쁘게 일하다 보면 식사를 대충 때우기 쉽지요. 그럴 때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위안을 받거나 저거 나도 먹어보고 싶다, 하고 밥을 제대로 먹는 계기가 된다면 그런 것도 하나의 치유일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인은 바쁘다. 나도 바쁘다. 너무너무 바쁘다. 끼니는 커녕 물도 제대로 못 챙길만큼 바빴던 날은 밥이고 뭐고 까딱도 하기 싫어 늘어져있을 때도 있다. 휴식과 식사라고 하면 단연코 휴식이 먼저일 터, 앞서 말했듯이 먹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먹기보다는 때우는 일상은 어딘가 비었다는 느낌을 준다. 묘하게 허전하달까. 오늘은 뭘 먹었나, 짚어보노라면 메뉴가 아니라 상표만 줄줄이 이어질 때, '제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쩐지 아픈 기분, 든든한 식사 한 끼가 간절할 때다.

눈으로도 맛있는, 바로 그 장면, 그 곳에 있어야 할 요리를 최선을 다해 자리하게 하는 일, 먹고 먹이는 일의 기쁨을 고민하는 저자의 기억을 따라가며 내일의 메뉴를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 즐겁게, 기꺼이 만들어보자고 다짐하며. 맛있었다!로 기억할 식사를 기대하며 말이다.

"즐겁게 기꺼이 만든 요리가 맛있죠!"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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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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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국가, 인신공양제, 의례화된 식인. 이런 단어들은 뭐랄까, 어쩐지 전설 속의 이야기 같다. "문명화된"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야만과 원시"의 자취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과연 그럴까.

전설이라 못박아진 신농, 황제, 복희씨도 아니고 요순우탕 문무주공, 태평성대의 대명사와도 같은 이름들에 허구가 섞여있다고 하면 그 누가 믿을까. 사서삼경의 그 역경, 주역이 사실은 일종의 은폐를 위한 재구성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그 누가 당혹스러워하지 않을까.

상나라 정벌,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이라는 심상찮은 부제를 달고 나온 탓에 시작하기까지 고민이 깊었다. 과연 나는 이걸 읽고도 성인 혹은 난세의 대학자로서의 공자, 세상을 크게 보는 이치로서의 주역의 참뜻과 의의를 말할 수 있을까. 겁이 나서.

층층이 사람도 묻고 개도 묻고 와중에 껴묻거리도 끼워 층층이 쌓은 구덩이가 심심찮게 발견되었다는데, 아무래도 곱게 죽은 모양새는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죽이기만 했으면 다행인 것이, 토막나고 태워진 잔해까지 수두룩하다. 먹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은 역사 이전, "야만과 원시"의 이야기라고 치부되곤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적어도 상나라가 세워지고 번성한 시기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국가와 문자 체계가 존재했으며, 제례로서의 살인과 식인은 계획과 통제 하에 시행되었다.

앞서 말했듯 태평성대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 요순우탕이 있다면. 폭군은 단연 하걸은주라 할 수 있다.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 여기서 말하는 은이 곧 상이라 할 수 있다. 주왕이 누구인가? 주지육림과 포락으로 기억되는 달기를 거느린, 타락과 포악함의 상징인 자다.

그는 진실로 패악무도한 폭군이었을까? 그다지도 선명한 흔적과 가공할 규모로 역사에 기록된 국가와 왕실의 몰락이라면, 그들의 번영은 최소한 원시와 야생의 수준을 뛰어넘고도 남았을 것이 아닌가? 주의 살육은 과연 후대의 평가처럼 쾌락을 위한 일탈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 기록이 언제, 누구에 의해 쓰여지고 정설의 지위를 획득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사기』는 진실인가? 갑골문에 남은 상의 사회상과 제의체계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후대에 이르러 단순한 점복서가 아닌 인문 경전의 지위에 오른 역경은 정말 하늘과 운수의 흐름, 처세의 지혜를 담은 "온순한" 내용이었을까?


현대에 발굴된 것만으로도 생생하게 설명될 수 있는 이 장대한 살육의 역사는 어떻게 감춰진 것일까? 상의 몰락은 정말 개인의 폭정과 탐욕으로 초래된 것일까? 주나라의 문왕은 정말 무고한 성군이었을까? 역경의 구절 곳곳에 심긴, 단순한 고사 내지는 구절 풀이라고 하기엔 다소 미심쩍은 이야기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쯤해서 지금까지의 조각난 이야기들을 맞춰보기로 하자. 사라진 고대 국가, 정사 한켠의 몰락왕국으로 좌천된 상나라에서는 인신공양과 식인이 우발적 보복행위가 아닌 엄연한 국가제례의 형식으로 존재했다.

강성했던 상나라에 복종했던 주나라 일족들은 타 부족을 인간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살아남았고, 천기누설의 점술서로 여겨지는 역경, 즉 주역은 일종의 자전이자 반란모의를 위한 계획서였던 것이다.


앞서 말한 미심쩍은 구절들, 어딘가 어긋나는 서술들은 후대에 살육제의 사회의 흔적을 지워내고자 애쓴 흔적이다. 충격적인 것은, "성인" 공자가 그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오히려 '육경' 편찬으로 주역을 경전의 지위에 놓음으로서 그를 공고화하는 데 힘을 보탰으리라 추정된다.

어쩌면 공자가 역설한 괴력난신의 부정과 인애는 인본 이전의 사회로 퇴보하는 것이 곧 전쟁통과 다름 없는 살육의 일상화임을 무섭도록 깨닫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책의 주장은 완전히 새로운 입장으로의 도약이 아니다. 오히려 그간의 고고학적 발굴의 역사와 이전의 갑골문 연구를 재분석하고 통합해낸 것에 가깝다. 강한 부인은 강한 긍정의 흔적을 남긴다. 소름끼치는 역사에도 사람이 있기에. 철저한 합리성이 인간의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과연 신화 이후, 찬란한 문명 시대의 서막을 여는 그 시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고궁의 아래에는 무엇이 묻혀있는가. 다만 상상하고 그려볼 뿐이다. 사라져가는 흔적으로, 불태워진 뼈로.

#글항아리 #상나라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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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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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얄미운 선에 그쳐 그만저만하게 보아 넘길 수 있다든지, 미운 짓만 골라 하다가도 때때로 칭찬할 만한 면을 보여 웃고 넘어가게 한다든지. 어쩌면, 이를테면, 그 모든 말 앞에 차마, 가 붙는다든지. 왜 그랬느냐고 등짝이나 세게 한 대 때려주고 싶다가도 그저 안쓰러워할 수밖에 없다든지.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사는 내내 해결하지 못한 결핍, 열등감과 불안에 시달려온 사람이다. 그에게는 죽을 자리조차 넉넉히 허락되지 않았다. 가진 것은 없으며 행복은 착각이었다.

여기, 구멍이 뚫린 사람이 있다. 꿰뚫린 흔적인가, 잃어버린 자리인가. 알 수도 메울 수도 없는 공허가 무서워 되는대로 채워넣으려고 애썼다. 남들 다 하는 정도면 괜찮을 거라고, 조금만 더 가지면 더이상 지긋지긋한 그녀석을 떨쳐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p.35 훔칠 돈은 많았다. 너무 많았다. 단위를 조금씩 늘렸다. 그래도 아무도 몰랐다. 원도가 치밀했기 때문이 아니라 돈이, 숫자가,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떄문에. 너무 많은 그것은 그저 종이였고, 숫자였고, 쓰레기였다.

p.52 버려지긴 싫었다. 내 것이라 믿는 것을 타인에게 뺏기지 않는 것. 원도의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공식은 그뿐이었다. 하지만 원도는 그것을 몰랐다. 혹은 모른척했다.


이 자는 죽어가는 중이다. 죽을 자리를 갖지도, 최소한의 이유를 알지도 못한다. 어쩌면 알았을지도 모른다.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게 중요한가. 모든 것을 잃었으며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줄 이는 아무도 없다. 혼자가 되었다. 위로를 구할 수도 없다.

숨차게 달려온 시간들, 지긋지긋하게 악물고 살아온 나날들. 쓰레기같은 놈, 평생 그렇게 살다 이름 없이 그렇게 죽을 놈. 아무도 널 기억하거나 눈을 맞추지 않을거야. 넌 그렇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안착할 수 없을 거야. 패배자.

도망쳤다. 무서워서. 따라잡힐 것 같아서. 내 자리를 빼앗기고 지워질 것만 같아서. 이해할 수 없어서. 짓밟히고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아서. 마주할 눈이 없어서.

p.75 원도가 생각한다. 나는 어째서 죽지 않았는가. 정말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은 살아 있는 원도를 거듭 위협했다.

p.234 과거는 빠르게 지워졌다. 죽은 아버지도 산 아버지도 죽은 장민석도 사라진 그녀도 더는 원도를 괴롭히지 않았다. 의심은 없었다. 확신뿐이었다. 그리고 원도는 혼자가 되었다.


선악의 구분으로 읽어서는 끝까지 가기는 커녕 시작에서 덮어버릴 법한 이야기다. 그가 저지른 짓은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낳았고, 그가 받은 상처는 생애 그 어느 자리에서도 회복되지 않았다.

만일 끝없는 울음떼를 그칠 때까지 안고 달래며 기다려주는 이가 있었다면, 한 번이라도 완전한 너의 것이 있다고 말해줄 이가 있었다면, 뺨을 갈겨서라도 파국으로 치닫는 욕심을 가로막았던 이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여전히 살아있는가.

p.225 질문은 더 깊은 상처를 만든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고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되지는 않는다. 그대로 있다. 벌건 살을 드러낸 채 끊임없이 피를 흘리며, 굳지도 아물지도 하물며 썩지도 않고, 처음 구멍 그대로 존재한다. 그 자리에서 시간은 멈췄다.

p.239 지금까지 원도의 기억을 쫓아온 당신도 한 번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


참으로 당혹스러운 작가다. 최진영은. 내는 작품마다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는 듯도 한데, 전체적인 인상은 같은 사람이 쓴 글이 맞나 싶게 다르니 말이다. 그럼에도 매번 오래, 아주 오래 아파하게 한다. 잊을 수 없게, 생생하게 벌어진 상처를 내보이며.

『구의 증명』을 비롯해 최진영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처참했고, 절절했으며, 절망과 외로움의 크기만큼 뜨거웠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다시 묻는다. 아니, 오래된 질문을 다시금 불러낸다. 아니, 아니다.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을 다시금 세상에 던져보인다.

왜 죽지 않았는가, 어째서 아직도 살아있는가. 당신은 누구인가.

p.182 질문은 다시 시작된다. 도처에 죽음이 널려 있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p.240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 역시 아니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이것이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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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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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숱하게 봐왔으나,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에 깊이 박혀버린 바는 오직 이것 뿐이다. 초자연적 두려움의 근원에는 죄책감이 있다, 는 것.

조금 돌아 갈 필요가 있겠다. 나는 "사람 허투루 보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스스로에게도, 남에게도. 누구나 존귀하다느니, 평등하다느니 하는 원리적 이유는 제쳐두고라도, 그래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무시와 모욕에 예민한 동물이기 때문에. 이쪽에서 업수이 여기는 낌새를 언제고 눈치채지 못할 이는 거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그러니 어째서 두려워 하는가? 어째서 저항의 가능성을 뿌리부터 죽여 없애고자 하는가? 그럴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 혹은 미래에 사악함을 입혀 두려운 존재로 이름지어버리고 마는가? 죄책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의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가해의 기억과 불가역적 말살에 대한 확신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 이 둘이면 충분하다.

p.50 "회사는 언제나 석탄 채굴량에만 신경 써. 노동자가 일본인이라도 상관없어. 탄광회사에게 탄광부는 어느 시대에나 완전히 소모품이었지. 하물며 조선인 따위는 처음부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어. 한 명의 인간을 개인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거야."


사람에게는, 적어도 일반론의 측면에서 간주되기로는, 타자의 마음을 상상할 능력이 있다. 사회적 동물, 무리지어 살 수밖에 없는 동물. 지위 역전에 대한 두려움은 약한 동물의 본능에서 출발한다. 내물리고 죽임당하는 이의 원한을 예상하지 못하는 가해자는 없다.

또다시 돌아 가는 길. 산 자들의 땅은 살아있는 자들의 것인가? 죽은 자는 어디에 자리하는가? 살아있는 이들은 죽은 자들, 결국은 무덤을 딛고 산다. 아니. 산 자의 세계에는 죽은 자들이 떼어낼 수 없이 엉기어 존재한다.

잠시간 앞으로 돌아가, 저항의 가능성을 말살하는 것, 잊혀질 가해와 정상이 될 지배는 환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 존재가 무가 아닌 0에서 시작해 부재로 돌아가는 이상, 보복과 원한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은 영영 떨쳐질 수 없는 것이다.

p.324 죽은 자가 생긴 집과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집의 차이인가... (...) 죽은 자는 생겼지만, 산 자도 살고 있다... 순간 떠오른 말을 떨쳐내듯이 하야타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낡아빠진 노트의 모든 문장이 살려달라고 소리지르는 것만 같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 점이 찍힌 자리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숨죽여 묻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말해지지 않은 모든 것이 절망같았고 사방을 알 수 없는 무저갱같았다.

예정된 비극을 읽는 일은 그렇지 않은 것과는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알면서도 끌려들어가기를 자처하는 일, 그것은 '도망치지 못함'과는 다른 적극성을 요구한다. 역사, 즉 지나간 일의 현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약자, 의지를 가진 몸뚱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짐승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

p.448 건물이 완전히 널판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게다가 담장 위에는 끝을 뾰족한 창처럼 다듬은 대나무가 수없이 꽂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철조망까지 둘러쳤다. 형무소 같지 않은가. 모두 절망적인 시선으로 널판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철조망에는 엄청나게 강한 전기가 흐르고 있다. 건드리기만 해도 감전되어 죽을 거다." 그런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조선인 탄광부 전용 기숙사, '협화 기숙사'였다.

p.468 우리보다 먼저 온 주 씨가 계약 기간 이 년이 지나서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주 씨는 광산 사무소에 끌려가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이런 비상시에 채탄을 팽개치고 돌아간다고?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버리며 싸우는데, 넌 무슨 헛소리냐!" (...) 그러나 이 전쟁은 일본의 전쟁이며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다.



지나가버린 일들과 사라져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는 방관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과거에게 현재의 자리를 돌려줌으로써 회복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 혹자에게는 갈망하던 상상 속 가해의 권력을 맛보는 일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다른 기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독자는 알고 있다. 이 전쟁의 끝이 절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핍박이 끝난 자리에 또다른 참화와 살육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정의는 여전히 무력할 것이며 평화는 침묵의 자리로 밀려난다는 것을. 작가도 그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전히 희망을 볼 수 있는가. 이야기의 끝, 자 그럼 언젠가 또, 기약할 수 없는 인사와 힘께 사건의 전말을 안고 현재로 내동댕이쳐진 독자는 시간 너머를 응시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있다. 그 때 그 곳 밖이라는 "역사적 특권" 덕택에.

모든 것을 잊고 순순히 떠밀려 들어갈지, 나란히 선 이들의 절망에 눈감을 것인지, 어쩌면, 어쩌면 간신히, 옳지 않다, 이럴 수는 없다고 있어야 할 곳으로, 마땅한 죄책을 떠안고 죽은 자의 대열에 뒤섞일 것인지. 그것은 죽음이 아니며 답은 정해져있지 않다. 그러니 나의 말 또한 언젠가, 언젠가의 몫으로 남겨둘 뿐이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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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오래 산다 - 30년 문학전문기자 생애 첫 비평에세이
최재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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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참에 '아, 이건 분명 필연적으로 멀리 돌아가는 감상을 남길 것이다' 싶은 책은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것들은 십중팔구 문학이나 역사서처럼 개인의 해석이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분야에 속해있기 마련이다. 이 책도 그랬다. 비평에 에세이, 아무래도 할 말이 많아지는 게 당연지사 아닐지.

그러므로 이 글은 책의 내용 그 자체보다 장르와 문학, 그와 관계된 소회라고 보는 편이 옳겠다. 읽는 일과 쓰는 일, 독자로서의 정체성과 말과 일상을 대하는 전반적인 태도에 대해 먼저 말해두는 편이 좋겠다.

내게는 운 떼자마자 앞뒤 재지 않는 이들에게 욕 얻어먹기 십상이라 어지간한 자리가 아니고서는 꺼내지 않는 말이 몇 가지 있다. 개중 몇 가지만 꼽아보자면, 완전히 무결한 존재는 없다는 것, 누구의 무슨 말이든 어떤 주장이든 들어볼 필요가 없는 것은 없다는 것, 모순처럼 보이는 주장들이 같은 곳을 향할 수 있다는 것.

p.143 생각해 보면 비평이란 옳고 그름 또는 참과 거짓을 따지는 일과는 성격이 다른 행위이다. 비평의 가치는 타당성과 설득력의 다과로써 판단되어야 한다. 타당성과 설득력이 떨어지는 비평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생존 근거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건강한 토론 문화다.


문제는, 이 피로한 원칙이 바람 잘 날 없다고 표현하기엔 추잡하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피로감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 속 세계가 현실의 권력구조와 폭력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현실 반영이라더니, 한 술 더 떠 읽는 사람을 고통으로 밀어처넣는 꼴이다.

이를테면 신념에 버금가는 내면 세계를 쌓아올리는 데 일조한 문인이 실은 걸레짝보다 못한 인성을 지녔다든지, 삶의 고비를 넘기게 했던 문장들이 위태롭고 약한 이들을 착취해 얻어진 것이었다든지.

문학을, 예술을, 세계를 사랑하는, 삶을 사랑하려 애썼던 적이 있다면, 경멸과 환멸이 줄지어 찾아오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사랑했던 것을 버리려면, 사랑했던 마음과 시간, 나의 일부를 함께 떼내야만 한다.

사랑했던 스스로를 부정하는 고통. 같은 상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또다른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가장 먼저 지치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모욕으로 돌려받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쓰는 사람 이상의 읽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읽는가, 어째서 글 너머의 세상을 갈구하는가.

역설적이게도, 문학이 알고 싶지 않은 세계의 존재를 가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그가 보이려는 세계를 잘라내고 확대하고 재창조한다.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의 내면을 마치 배경처럼, 별빛처럼 도처에 흩뿌리고 심어놓는다. 독자가 만나는 문학은 그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는 것,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너무나도 나의 이야기임을 다시금 바라보게 하는 것, 대안을 상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문학의 역할 아니던가. 그 즐거움을, 고통을, 눈물과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독자로 남는다.

p.282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고통스럽고 절박한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워 놓는다. 그리고 추궁한다. 우리는 짐승인 것이냐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냐고. 그 고통스러운 질문을, 일상의 균열과 한밤의 악몽을 피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악몽은 언젠가 잔인한 현실이 되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여기, 오랜 시간, 반평생을 문인을 만나고, 글을 읽고 쓰는 일에 바친 사람이 있다. 쓰는 일에 사람이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가 있다. 저자 최재봉은 문학전문기자로서 문학과 독자를 잇는, 문학이 문학으로만 끝나지 않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젖히는 데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만나온 이들, 그가 사랑하고 비호해온 작품 중 일부는 이제 와 낡은 것이 되기도 했고, 알지 못한 채로, 혹은 부정해온 모욕에 참지 않은 독자들이 등을 돌린 것이 되기도 했다. 문학은 살아있는 것이라, 세상 그리고 독자와 단절되어서는 질식해 죽어버리는 것이라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수많은 시간, 쌀알만큼 많은 문장을 읽으며 '글밥'을 먹어온 저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어떤 시간을 살아왔던가. 그의 세계를 엿보는 방법은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 발을 맞추어 서는 것 뿐이리라. 그 자신 또한 그래왔듯이.

p.218 리외가 기록자가 되기로 한 까닭을 설명하는 소설 말미의 문장은 문학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문학은 발언이며 증인이고 추억이라는 것,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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