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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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얄미운 선에 그쳐 그만저만하게 보아 넘길 수 있다든지, 미운 짓만 골라 하다가도 때때로 칭찬할 만한 면을 보여 웃고 넘어가게 한다든지. 어쩌면, 이를테면, 그 모든 말 앞에 차마, 가 붙는다든지. 왜 그랬느냐고 등짝이나 세게 한 대 때려주고 싶다가도 그저 안쓰러워할 수밖에 없다든지.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사는 내내 해결하지 못한 결핍, 열등감과 불안에 시달려온 사람이다. 그에게는 죽을 자리조차 넉넉히 허락되지 않았다. 가진 것은 없으며 행복은 착각이었다.

여기, 구멍이 뚫린 사람이 있다. 꿰뚫린 흔적인가, 잃어버린 자리인가. 알 수도 메울 수도 없는 공허가 무서워 되는대로 채워넣으려고 애썼다. 남들 다 하는 정도면 괜찮을 거라고, 조금만 더 가지면 더이상 지긋지긋한 그녀석을 떨쳐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p.35 훔칠 돈은 많았다. 너무 많았다. 단위를 조금씩 늘렸다. 그래도 아무도 몰랐다. 원도가 치밀했기 때문이 아니라 돈이, 숫자가,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떄문에. 너무 많은 그것은 그저 종이였고, 숫자였고, 쓰레기였다.

p.52 버려지긴 싫었다. 내 것이라 믿는 것을 타인에게 뺏기지 않는 것. 원도의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공식은 그뿐이었다. 하지만 원도는 그것을 몰랐다. 혹은 모른척했다.


이 자는 죽어가는 중이다. 죽을 자리를 갖지도, 최소한의 이유를 알지도 못한다. 어쩌면 알았을지도 모른다.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게 중요한가. 모든 것을 잃었으며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줄 이는 아무도 없다. 혼자가 되었다. 위로를 구할 수도 없다.

숨차게 달려온 시간들, 지긋지긋하게 악물고 살아온 나날들. 쓰레기같은 놈, 평생 그렇게 살다 이름 없이 그렇게 죽을 놈. 아무도 널 기억하거나 눈을 맞추지 않을거야. 넌 그렇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안착할 수 없을 거야. 패배자.

도망쳤다. 무서워서. 따라잡힐 것 같아서. 내 자리를 빼앗기고 지워질 것만 같아서. 이해할 수 없어서. 짓밟히고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아서. 마주할 눈이 없어서.

p.75 원도가 생각한다. 나는 어째서 죽지 않았는가. 정말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은 살아 있는 원도를 거듭 위협했다.

p.234 과거는 빠르게 지워졌다. 죽은 아버지도 산 아버지도 죽은 장민석도 사라진 그녀도 더는 원도를 괴롭히지 않았다. 의심은 없었다. 확신뿐이었다. 그리고 원도는 혼자가 되었다.


선악의 구분으로 읽어서는 끝까지 가기는 커녕 시작에서 덮어버릴 법한 이야기다. 그가 저지른 짓은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낳았고, 그가 받은 상처는 생애 그 어느 자리에서도 회복되지 않았다.

만일 끝없는 울음떼를 그칠 때까지 안고 달래며 기다려주는 이가 있었다면, 한 번이라도 완전한 너의 것이 있다고 말해줄 이가 있었다면, 뺨을 갈겨서라도 파국으로 치닫는 욕심을 가로막았던 이가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여전히 살아있는가.

p.225 질문은 더 깊은 상처를 만든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고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되지는 않는다. 그대로 있다. 벌건 살을 드러낸 채 끊임없이 피를 흘리며, 굳지도 아물지도 하물며 썩지도 않고, 처음 구멍 그대로 존재한다. 그 자리에서 시간은 멈췄다.

p.239 지금까지 원도의 기억을 쫓아온 당신도 한 번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이런 인물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은가?


참으로 당혹스러운 작가다. 최진영은. 내는 작품마다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는 듯도 한데, 전체적인 인상은 같은 사람이 쓴 글이 맞나 싶게 다르니 말이다. 그럼에도 매번 오래, 아주 오래 아파하게 한다. 잊을 수 없게, 생생하게 벌어진 상처를 내보이며.

『구의 증명』을 비롯해 최진영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처참했고, 절절했으며, 절망과 외로움의 크기만큼 뜨거웠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다시 묻는다. 아니, 오래된 질문을 다시금 불러낸다. 아니, 아니다.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을 다시금 세상에 던져보인다.

왜 죽지 않았는가, 어째서 아직도 살아있는가. 당신은 누구인가.

p.182 질문은 다시 시작된다. 도처에 죽음이 널려 있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p.240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 역시 아니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이것이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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