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얼굴의 여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5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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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숱하게 봐왔으나,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에 깊이 박혀버린 바는 오직 이것 뿐이다. 초자연적 두려움의 근원에는 죄책감이 있다, 는 것.

조금 돌아 갈 필요가 있겠다. 나는 "사람 허투루 보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한다. 스스로에게도, 남에게도. 누구나 존귀하다느니, 평등하다느니 하는 원리적 이유는 제쳐두고라도, 그래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무시와 모욕에 예민한 동물이기 때문에. 이쪽에서 업수이 여기는 낌새를 언제고 눈치채지 못할 이는 거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그러니 어째서 두려워 하는가? 어째서 저항의 가능성을 뿌리부터 죽여 없애고자 하는가? 그럴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 혹은 미래에 사악함을 입혀 두려운 존재로 이름지어버리고 마는가? 죄책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의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가해의 기억과 불가역적 말살에 대한 확신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 이 둘이면 충분하다.

p.50 "회사는 언제나 석탄 채굴량에만 신경 써. 노동자가 일본인이라도 상관없어. 탄광회사에게 탄광부는 어느 시대에나 완전히 소모품이었지. 하물며 조선인 따위는 처음부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어. 한 명의 인간을 개인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거야."


사람에게는, 적어도 일반론의 측면에서 간주되기로는, 타자의 마음을 상상할 능력이 있다. 사회적 동물, 무리지어 살 수밖에 없는 동물. 지위 역전에 대한 두려움은 약한 동물의 본능에서 출발한다. 내물리고 죽임당하는 이의 원한을 예상하지 못하는 가해자는 없다.

또다시 돌아 가는 길. 산 자들의 땅은 살아있는 자들의 것인가? 죽은 자는 어디에 자리하는가? 살아있는 이들은 죽은 자들, 결국은 무덤을 딛고 산다. 아니. 산 자의 세계에는 죽은 자들이 떼어낼 수 없이 엉기어 존재한다.

잠시간 앞으로 돌아가, 저항의 가능성을 말살하는 것, 잊혀질 가해와 정상이 될 지배는 환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 존재가 무가 아닌 0에서 시작해 부재로 돌아가는 이상, 보복과 원한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은 영영 떨쳐질 수 없는 것이다.

p.324 죽은 자가 생긴 집과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집의 차이인가... (...) 죽은 자는 생겼지만, 산 자도 살고 있다... 순간 떠오른 말을 떨쳐내듯이 하야타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낡아빠진 노트의 모든 문장이 살려달라고 소리지르는 것만 같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 점이 찍힌 자리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숨죽여 묻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말해지지 않은 모든 것이 절망같았고 사방을 알 수 없는 무저갱같았다.

예정된 비극을 읽는 일은 그렇지 않은 것과는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알면서도 끌려들어가기를 자처하는 일, 그것은 '도망치지 못함'과는 다른 적극성을 요구한다. 역사, 즉 지나간 일의 현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약자, 의지를 가진 몸뚱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짐승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

p.448 건물이 완전히 널판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게다가 담장 위에는 끝을 뾰족한 창처럼 다듬은 대나무가 수없이 꽂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철조망까지 둘러쳤다. 형무소 같지 않은가. 모두 절망적인 시선으로 널판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철조망에는 엄청나게 강한 전기가 흐르고 있다. 건드리기만 해도 감전되어 죽을 거다." 그런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조선인 탄광부 전용 기숙사, '협화 기숙사'였다.

p.468 우리보다 먼저 온 주 씨가 계약 기간 이 년이 지나서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주 씨는 광산 사무소에 끌려가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이런 비상시에 채탄을 팽개치고 돌아간다고?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버리며 싸우는데, 넌 무슨 헛소리냐!" (...) 그러나 이 전쟁은 일본의 전쟁이며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다.



지나가버린 일들과 사라져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는 방관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과거에게 현재의 자리를 돌려줌으로써 회복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 혹자에게는 갈망하던 상상 속 가해의 권력을 맛보는 일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다른 기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독자는 알고 있다. 이 전쟁의 끝이 절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핍박이 끝난 자리에 또다른 참화와 살육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정의는 여전히 무력할 것이며 평화는 침묵의 자리로 밀려난다는 것을. 작가도 그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전히 희망을 볼 수 있는가. 이야기의 끝, 자 그럼 언젠가 또, 기약할 수 없는 인사와 힘께 사건의 전말을 안고 현재로 내동댕이쳐진 독자는 시간 너머를 응시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있다. 그 때 그 곳 밖이라는 "역사적 특권" 덕택에.

모든 것을 잊고 순순히 떠밀려 들어갈지, 나란히 선 이들의 절망에 눈감을 것인지, 어쩌면, 어쩌면 간신히, 옳지 않다, 이럴 수는 없다고 있어야 할 곳으로, 마땅한 죄책을 떠안고 죽은 자의 대열에 뒤섞일 것인지. 그것은 죽음이 아니며 답은 정해져있지 않다. 그러니 나의 말 또한 언젠가, 언젠가의 몫으로 남겨둘 뿐이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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