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미술관 - 다정한 철학자가 들려주는 그림과 인생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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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들어가려면 여성은 나체여야 하느냐'고 묻는 슬로건이 벌써 40여년 전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그동안, 아니, 그 전부터, 세계는 여성에게, 딸, 누이, 언니에게 자신을 모욕하는 것들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라 얼마나 끈질기게 말해왔을까.

여성의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인간다움의 이야기와 중첩된다. '여성'이기 전에 인간이고, 인간다울 권리 이전에 '여성다워'지기를 요구받기 때문이리라. 슬프게도 근래의 급진적 변화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여성에게 인간이기 전에 여성이기를, 인간성을 뛰어넘는 여성이기를, '남성-인간'에 못미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기를 요구한다. 아니. 강요한다.

p.43 산다는 것은 동사다. 어딘가에 가만히 놓여 있는 명사가 아니라, 걷고 달리고 고꾸라져 넘어지고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서서 발을 내딛는. 그렇다면 이렇게나 무수한 동사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데 어째서 근육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 딸들에게 울퉁불퉁한 근육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너희는 가만히 명사로 살아가라는 얘기다.

p.61 오늘날 메두사의 머리는 아직도 한스럽게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여성 정치인이나 지도자,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가진 여성들이 못마땅한 대중은 이들을 줄기차게 메두사의 이미지로 합성해낸다. 조롱과 혐오의 의미를 담아서 '끔찍한 괴물, 참수해야 할 대상'으로.


많은 이가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나누는 오랜 도식에 익숙할 것이다. 길들여졌다는 쪽이 더 어울릴, 치밀하고 공고한 모욕. 오래된 멸시, 협박에 가까운 그것은 시대에 따라 이름을 조금씩 고쳐가며 반복되었을 뿐, 사라진 적이 없다. 재생산의 수단, 성욕의 배출구, 노동력, 가재도구, 권력 없는 자, 마녀, 이성 없는 자인 동시에 이성을 흐리는 자, 숭배와 경멸.

이 모든 말들은 권력이 내세운 얼굴과는 달리 양분되지 않고 이체자로 기능했다. 그러면서 어느 것하나 여성 스스로에 의해 취해지지 못하고 그저 주어지는 것, 낙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마치 그 '행실'에 달린 것인양. 하늘이 내려준 숙명인 양. 생각할수록 놀랄만큼 효율적이고 강력한 고삐였던 셈이다.

p.83 마녀라는 단어는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대명사다. 나는 천사보다 마녀라는 단어가 더 사랑스럽다. 그 안에는 눈물과 멍자국도 있지만 아름다운 불꽃이 들어 있다. 세상이 나를 부당하게 대할 때, 너를 당치 않은 이름으로 부를 때, 우리를 어처구니없게 만들 때, 그 작은 불꽃들이 꺼지지 않고 아름답게 타오르기를 응원한다.

p.98 우리는 젊고 예쁜 것에 과도한 권력을 주는 경향이 있다.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모두 필연적으로 지는 게임을 만들어두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게임에 열광하는 것과 같다. 나도 이 게임을 가끔 하고는 있지만, 이 전국민적 차원의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생각해보면 밑지는 장사인 이 게임을 내가 왜 하고 있는지 모두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 게임은 대체 누가 만들어 유통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그런 세상에서 여성은 슬퍼하고, 연약하며, 섬세하기 때문에 열등하다. 사람이기 때문에 열등하고,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을 견뎌내야 한다. '몸'인 동시에 몸을 가진 존재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떻게 딸에게, 자매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우리가, 그들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들에게 이 세계를 사랑하라 말할 수 있을까. '안돼'와 '안 돼'로 점철된 세계에서 어떻게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을까. 과연 혼자 살기도 벅찬 세상에, 손을 내밀기를 멈추지 않아도 되는 걸까. 마음껏 주저하고 감각하는 사람이어도 좋을까.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이 책은 미술 작품에서 나타난 여성과 그를 다루는 시선을 넓고 깊게 확장해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가닿고자 하는 시도다. 제목처럼 딸에게, 자녀에게 건네는 말이다. 정답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살아본, 조금 먼저 태어난 여성으로서 풀어놓는 경험담이다.

p.176 생긴 대로 존재할 수 있는 너그러움, 갈팡질팡과 우왕좌왕의 아름다움이 없다면 우리 삶의 조건은 잔인해진다. 매끄러움은 대체로 다정하지 않다. 포옹도 근본적으로 마찰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서로에 대한 저항력 덕분에 우리는 상대를 더 꼭 껴안을 수 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것, 틈의 존재와 서투름의 미학을 불편해한다면 내 삶도 결국 불편해진다. 우리는 모두 서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서투르고 연약하지 말라고, 슬픔과 사랑 없이 홀로 영원히 강한 존재가 되라고 하는 대신, 서투름과 연약함, 슬퍼하고 사랑하며 기뻐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의 가치를 말한다. 고르지 않은 세상을 끊임없이 감각하는 소중함을 통해, 여성들에게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을 돌려주는 일이다. 처음부터 늘 그래왔듯이. 사람 바깥으로 불리면서도 한 번도 사람 아닌 적이 없었듯이.

내게 그랬듯, 누군가에게 이 책이 잔잔한 위로이자 응원으로 읽히면 좋겠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주고받는 한담처럼, 다정하게 읽히기를 바란다. 사는 일이 그렇지 않은가. 조금쯤 슬프고, 쉴새없이 감각하는 일이지 않은가.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처럼. 수많은 시선으로 읽히는 것처럼.

p.161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슬픔의 영역이 늘어나지만, 영역의 확장이 저절로 일어나지만은 않는다. 슬픔을 감각하는 능력을 부지런히 키우는 것은 어른의 책무이기도 하다. (...) 뒤에 오는 이들에게 눈물로 씻어낸 조금 더 맑은 세상을 전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을 '할 일'로 여긴다.

p.288끝이 새로운 시작이 되듯이, 뒤는 새로운 앞이 된다. 우리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지 단계별로 단절된 시간들이 아니듯, 우리는 봄에서 여름을 보고, 여름에서 또 가을을 본다. 모든 계절은 무 자르듯 토막토막 잘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드랍게 포개 안고 있다. 봄꽃 향기 속에서 문득 여름의 태양 냄새가 느껴지고, 여름날 장대비 속에서 볼을 빨갛게 하고 있는 나뭇잎 하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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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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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속 젊음의 표상은 수차례 변해왔다. 지금 우리 시대의 젊음은 어쩔 수 없이 이런 모습일지 모른다. 들척지근하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기침이 아닌 트름에 가까운 소리가 나는, 반투명하고 답답한 것. 말캉하고, 보드랍고, 희미한 빛을 가만히 품은 것.

상상해본 적 없는, 안정된 삶에서는 알아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 누군가에게 인생은 찬란하고, 말끔하고, 이해 가능한 무언가일까. 합판처럼 얇은 벽 너머로 스며드는 기침소리는 과연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p.24 어쩌면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그냥 한 장의 종이일 뿐이다. 사람과 감정과 배경은 만질 수 없지만 사진은 손에 쥘 수 있다. 그것이 주는 안도감. 검은색 종이나 그냥 흰색 혹은 녹색 종이 한 장을 보면서도 같은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인생이 들어 있는, 어디서 더는 구할 수 없는 한 장의 종이다.

p.85 그날 내 작업 노트에는 미끈액과 물렁뼈가 더해졌다. 이런 메모들이 언제 작업이 될 수 있을까. 아이디어는 살아가는 힘이기도 하지만 빚쟁이처럼 나를 짓누르기도 했다.


작가 이지의 세계는 현실과 환상을 무시로 넘나든다. 엄마가 떠난 이후 '남자가 되었다'는 주인공, 우리에 들어가 동물 행세를 하는 사람, 사람같이 행동하는 동물들. 누구도 그것이 현재진행형인 한, 묻지 않는다. 지나치고, 일상이 되고, 바라보고, 다시 지나친다. 환상은 일상의 소음과 리듬에 묻히고 녹아든다. 이 작가의 세계에서 현실에 현실성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금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운상가와 닮아있다. 언제나 재개발 진행 중인 세운상가. 부수고 짓고 다시 부수고 짓기를 반복하는 곳, 늘 어디선가 누군가는 떠나기를 요구받는 곳, 밀려나는 곳, 재생이 아닌 재개발, 자주 신축 딱지가 붙는 곳. 부서지고, 사라지고, 새로 만들어지는 곳에 가득한, 금세 사라지고 자주 치워지는 것들.

비현실적으로 현실적인 이 공간은 소설 바깥에서도 숨 쉴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내지는 작가 스스로도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썼는가, 싶었는데, 마지막쯤 가서 묻게 되더라.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뭐가 그렇게 슬프고 초라하고 또 외로웠길래 이런 글을 썼을까.

p.43 생은 어쩌면 음식과도 비슷하다. 모르는 음식은 영원히 그 맛을 알 수 없지만, 한번 맛을 본 것은 모른다고 할 수 없다. (...) 세상의 모든 전성기는 그 찰나다. 모든 것이 아주 잠깐 동안 딱딱 맞아떨어지던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긴 어둠 속에서 아직 먹지 못한 음식을 기다리거나, 단 한 번 맛본 그 최고의 맛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그런 이유로 표지의 점 내지는 작은 사각형들은 꼭, 젤리 씹는 소리나, 입안에서 조각난 젤리를 닮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세운상가의 청년들, 그들의 일상과 닮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턱이 벌어지고 닫힐 때마다 짝, 짝, 소리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채 씹히지도 못하고 넘어가는 조각들이.

누군가는 죽고싶어요? 무심한 질문을 던지겠지만 정작 그들은 어떻게 살지, 를 고민하지 죽을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p.102 세상에 무심한 듯 굴지만 가장 주목받고 싶어하는 게 아티스트라는 걸 그때 또 한 번 깨달았다. 욕망이 없다면 아무도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욕망 안에는 '욕망 없고 싶다'는 욕망까지도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을 욕망 없 음으로, 흥건함을 건조함으로, 매끄러움에 대한 갈망을 거칢으로, 주목받고 싶다는 소망을 무심함으로 위장한다. 모든 작업은 위장술이다.

p.207 사랑은 그렇다. 하리보 같은 것. 인생도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것. 젤라틴이 들어간 젤리 같은 것. 모양은 악어나 새, 콜라와 딸기지만 그냥 그것은 입에 쫄깃한 젤리다. 엘과 나는 서로 바라는 것이 없으므로 욕망도 금지도 없었다. 그런데 끝나버렸다. 물론 어떻게든 끝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의 벌어져 있는 틈은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나는 유예하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읽는 내내 지나간 노래를 번갈아 들었더니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다. 제3한강교, 아파트. 이 작품과 닮았다. 외롭고 모호하고, 우유부단하고 초라하고, 원하는 것은 있지만 번듯하지는 않은. 환상과 현실 어디쯤 발을 걸친 핑크스 핑크스, 아니, 핑크스핑크스처럼.

이리저리 치이고 밀려나다 에라, 하고 드러누워 있는 '청년'에게, 그래도 살거니, 정말, 하고 휴일이, 엘이, 형수가, 도도와 태유 그리고 민지가 묻는다면,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이리라. 후줄근하고 초라한 비정형 가운데 여전히 꺼지지 않은 빛이 있으니.

결국 이 두루뭉술한 감상이 전부다. 근데, 사는 것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한 짐승인 거잖아요.

p.241 우리의 멜랑콜리는 따뜻하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재 같은 우울이 눈과 진흙처럼 쌓인 것은 재의 마을 때문이 아니라, 카페 수영장 때문이 아니라, 하리보 때문이 아니라, 핑크스핑크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불확실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사람이라서다. 그리고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살아온, 살고 있는, 살아갈 생 그 자체. 지분이 없어도 발이 떠 있어도 결국은 나의 삶이니까.

p.243 그래서 둘만의 우주가 필요하다는 것. 약하디약한 우리는, 눈과 진흙처럼 서로에게 스며들고 녹아 더러워진다. 약하디약한 우리는.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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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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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우리는 서로를 아는가. 과연 누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으로 이루어진 존재인지 답할 수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겠냐는 물음에 피와 살, 과거와 현재, 수많은 타자의 시선과 기억이라 답한다면, 어떨까.

사람이 사람에게서 태어나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다 죽는 존재인 탓에,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지각하는 때부터 '나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시달리며 시선을, 이름을 갈구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부재가 아니다. 육신의 소멸로 존재의 부재는 부재의 현존으로 이행해 어긋나고 단편적인 기억으로, 이해와 오해, 진실과 침묵의 불협화음으로 재배열된다.

p.84 전철이 왔다. 개찰구에서 배웅하는 그에게 손을 흔들고 재빨리 계단을 올랐다. 머릿속에 자욱한 미련을 애써 떨치며 나는 손을 가슴에 갖다 댔다. 그곳에 남은 한 줄의 상처. 이런 때면 그것이 지독한 콤플렉스가 되어 욱신거렸다.

p.158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미안해서 괜히 해본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때까지도 나유타라는 화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
내 속을 꿰뚫어 봤는지 어쨌는지, 가세는 답이 없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은, 퍽 애달프고 간절한 일일지 모른다. 알아달라고, 나를 보라고, '진짜' 이름을 불러달라고. 아니, 부르지 말라고,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고, 그 누구도 '진실'을 감당할 수 없다고. 스스로조차. 지극한 무한에 가까운 이름이 곧 부재이자 영원한 존재의 그것과 맞닿는 것처럼.

어떤 진실은 영영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감은 눈과 서투른 비밀 속에 묻혀버린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태어나 존재하는가. 마음과 형상 중 흉내내기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이냐는 물음에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p.269 미코토의 죽음을 슬퍼하는 형제, 가족, 무리의 멤버들. 소메이는 생각했다. 이 소박한 사람들은 슬퍼하는 법을 아는구나. 그게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두 더듬이가 뜯겨 나간 곤충이랬던가, 물속에서 세상을 보는 듯한 감각이랬던가, 아무튼 본인 말로는 그랬어요."

p.314 "그런데 소메이 군은 아니래요. 실패는 노이즈 마케팅 탓이 아니라 죄책감 탓이다, 남의 비난과 악평을 견디지 못하는 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을 버리지 못해서, 진부한 양심을 버리지 못해서다. 세기의 예술가를 만들어내는 데 그런 게 필요하냐, 외려 그리 되물으면서요.”


그러나 같은 이유로, 기억과 시선은, 믿음은, '나의 세계'의 '너'는 무엇으로 믿어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란, 구성된 기억이란, '진짜 의미'란 무엇인지. 믿음의, 바로 그것을 이루는 믿을 수 없는 연약함이란. 어떤 상처, 연약함에서 삶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더 큰 상처를 내야한다. 더 깊고 더 위태로운 지점까지.

새로운 상처가 아문 자리에는 새 살이 차오르고 한때 무엇이 있었다는 흔적이 남는다. 공백과 부재는 꼭 그만큼의 무게와 자리를 갖는다. 면책의 괴로움과 부정(不定)의 공포, 죽을 힘을 다해 기억되는 상실. 돌이켜보면 모든 순간이 초대이자 애원이었던 셈이다. 나를 기억해줘요. 나를 알아봐줘요. '진짜 나'를 만나러 와줘요.

p.270 "면책. 그게 그를 미치게 한 거죠." 에베 씨가 말했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 오로지 저쪽에서만 살아있음을 실감했다고. 그런데 그건, 죽은 거 아닌가? 나는 죽었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실감한 거죠."

p.341 "그래서 더욱 기를 쓰고 기억하려 했어요. 잊는 게 무서웠어요. 절대 잊기 싫은 것은 매일매일 떠올렸어요."


작품 전체가 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한 사람의 세계라는 커다란 그림으로 그려나가는 과정과도 같다. 헤매는 듯도, 자꾸만 멈춰서는 듯도 한 여정은 진실에 다가갈수록 속도를 더하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라서는 숨을 멈추고 읽게 한다.

슬프고 무력한 존재가 마침내 서로의 '진짜' 이름을 부를 때, 마주할 용기를 냈을 때, 그제야 다음을 말할 수 있다. 새 살이 차오르고, 기억은 흔적으로 남는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여전히 살아갈 수는 있다. 그제야 비로소 생과 사란 무엇이냐는 물음에, 우리는 무엇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물음에의 답을 찾아나설 수 있다.

어렴풋한 혼란으로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무언가 왈칵, 하고 와닿는 이야기로 읽기를 바란다. 밝기를 낮추고, 조금쯤 지친 목소리로 읽기를 바란다. 이해란 그런 것이므로. 안다는 건, 꼭 그만큼이므로.

p.403 분명 인생에선 누구에게나 한 번은 이런 일이 찾아온다. 수많은 우연과 필연이 한 점에 집결하여, 나는 이걸 위해 태어났던가, 하고 깨닫는 순간이. 유년 시절 나를 살리기 위해 가차 없이 그어졌던 상처의 자국. 그걸 그에게 드러내며 나는 순수하게 실감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 그려지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래서 이 사람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거라고.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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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괴이 비채 미스터리 앤솔러지
조영주 외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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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전, 세간을 충격에 빠트리고는 씻겨내리듯 잊혀진 사건이 있다. 10여 년 전, 한 사람이 황량한 돌언덕에서 발견되었다. 머리에는 가시관, 옆구리에는 상흔이, 손발에는 못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오래된 종교의 교리적 순간을 집착적으로 재현된 듯한 느낌을 주는 그 현장.

사람이 스스로를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자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끔찍하다. "신의 아들"마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을 만큼. 그러나 타살로 보기에는 증거가 없다. 잠정적 결론만이 내려진 채 여전히 해결이 미뤄지고 있는 이유다.

아무것도 믿지 마라.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의심마저 무지와 미지에 갇혔음을 잊지 마라. 의심의 끝에서 미지는 발걸음을 쫓아 질문하는 자를 집어삼켜 새로운 미지가, 무지, 의심의 시작이 되리니. 여섯 편의 이야기는 죽은 자만이 아는 순간, 공란으로 남겨진 조각들에서 출발한다.

p.192 인간은 십자가 아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자신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해야 한다. (...)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은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한 것인가? 자신의 죄를 자책하기 위해서 자기 육체를 학대한 것인가? 정신적 고통을 육체적 고통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이야기일까? 에셔의 유명한 작품처럼, 쓰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이야기까지도 이야기가 된다면. 마치 클라인의 병처럼, 안팎을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의 독자는 누구이며, 그것을 써내리는 자는 누구인가.

이는 또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예비하신 그 분"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가. 선험적인 전능자로 세계와 함께 존재하는가. 어쩌면, 불경하게도 그의 "의지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 구현되는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의 존재에 대한 순종은 저 바닥에서는 굴종과도 닮아있지 않은가.

p.138 그것은... 나를 알고 있었다. 단순히 내 이름과 사는 곳을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내 삶 전체를 관통해 모든 것, 약점이나 강점, 밝은 면이나 어두운 면까지 속속들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것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나를 내려다본 것만 같았다.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으스러지고, 마침내 내 안의 모든 것이 피를 뚝뚝 흘리며 드러나 보이는 기분이었다.

p.183 그분의 계획 안에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 나는 태초에 존재했다. 이 이야기의시작에. 그러니 내가 처음이었고, 그분이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진상은 죽은 자만이, 어쩌면 그조차도 모르는 채로 남겨져있다. 오래된 신을 흠숭하여 그 자신이 신성의 자리에 오르고자 했던 이의 마지막인지, 타락한 신성으로 모반을 꾀한 흔적인지, 그저 사람이 사람을 죽였을 뿐인지, 어쩌면 또다른 "의지"였는지. 그도 아니면... 영원히 알 수 없을 무언가일지.

여섯 명의 작가가 스스로를 이야기에 끌어들여 내놓는다. 달리 말하면 가장 자신있는 이야기로도 완벽하게 설명되지 못한 '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를 빌어 묻고자 한다. 그 날, 그곳의 진실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은 이 무지와 미지 사이의 어딘가일 이야기에서 살아 나갈 수 있겠습니까. 길고 긴 낮, 사방을 알 수 없는 밤의 시간에.

p.57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만 같았다. '같았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런 그의 손이 내 눈엔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나를 믿을 수 없다.

p.227 어쩌면 이런 식으로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배우는 건 아닌가 느끼며 안은 지금의 이 모호함을 견뎌보려고 한껏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무진의 밤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제법 긴 밤이 될 것이었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할 것. 이 사건에 영웅은 없다. 추대된 순교자 혹은 제물이 있을지라도. 폐허의 시신, 그 끔찍한 참상은 여전히 진실을 파헤치는 자와 재야의 음모론자를 매혹한다. 추측컨대, 오래도록 이 이야기는 살아남을 것이다. 으스스하다기에는 지극히 황량하고, 짜릿하다기엔 너무도 처참한 탓이다.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모든 창작물을 마주하는 독자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책무가 있다는 것을. 실제에 허구를 덧입히는 일 자체에 대한 고민이 바로 그것이다. 주저함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상상하되, 주장하지 않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머무는 것, 거기까지도 독자와 창작자의 몫이라 믿는다.

다시금, 진실은 무엇인가. 여전히 이야기 바깥에 머무는 독자를 이 순간에도 바닥부터 집어삼키는 심연은 무엇인가. 미지의 몫으로 남길 뿐이다.

p.192 인간은 십자가 아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자신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해야 한다. (...)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은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한 것인가? 자신의 죄를 자책하기 위해서 자기 육체를 학대한 것인가? 정신적 고통을 육체적 고통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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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클보다 스파게티가 맛있는 천국
김준녕 지음 / 고블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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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 발전했다. 과학기술로는 첨단을 달리고 있으며, 삶의 곳곳에 현대사회의 기술과 제도가 녹아들어있다. 나아졌고, 달라졌으며, 진보했다. 과연 그러한가? 근 십여 년 들어 뉴스 보기를 포기했다는 말을 주변에서 여럿 들었다. 체면치레로도 감당키 어려울 만큼 버거운 소식이 연일 밀려드는 탓일까. 상상도 못한 일을 해내는 지금의 세상은 정말 나아졌을까. 보다 치밀하고 다양하게 잔인해진 것이 아니라?

야만의 시대, 어둠의 시대. 희망도 미래도 없이, 각자도생과 눈 앞의 생존이 모든 가치를 전도한 시대. 이에 혹자는 100여 년 전의 전란을 떠올리고, 또다른 누군가는 익히 들어온 "야만", 즉 전자기기도 첨단기술도 없는 고립된 자연 속 어느 집단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지금 우리의 시대는 인간의 시대라 할 수 있는가. 문명과 지성의 시대라 할 수 있는가.

p.34 "예산이나 실적같이 눈에 보이는 거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은 절대 저 같은 사람을 이해 하지 못해요. 저도 그런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없다고 믿고요. 서로 살아온 세상이 너무나도 달라요. 보는 시각도 다르고. 이걸 이겨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세계 어딜 가나 돈, 돈, 돈이니까요."

p.136 "프로젝트는 성공했습니다. 사람들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한 단계 도약했다고 말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도약이라는 작용은 개인의 희생이라는 반작용으로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 국가는 우주를 향해 나아가는데, 개인의 처지는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불안정합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연구소 노동자들의 현실을 제발 한 번만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만 아니면 돼"와 "누가 칼 들고 협박했느냐", "왜 나한테만 그러냐"가 일종의 지상명제처럼 떠받들어지는 시대, 대를 이어도 남을만치 차고 넘치는 재화와 말그대로 굶어죽고 맞아죽고 헐벗어 죽어가는 이가 같은 세상에 놓여있는 지금이 과연 야만과 어둠의 시대가 아니라고 할 자가 있는가.

누군가 내게 우리 시대와 사회를 한 단어로 묻는다면, 억울함의 총집합이라 답하겠다. 저마다의 이유로 내몰리고 뜯어먹히며, 제각기 그만한 사정이 있다. 도통 양보와 절제를 말할 수가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세상에서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며,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손해를 넘어 어리석음과 자멸을 자초하는 꼴일지도 모른다.

p.161 사라는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사라의 눈에 카탈로그 속 정제된 모습이 아닌 실제 논휴먼들의 생활 양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그들의 평화로움은 다른 논휴먼을 죽이고, 행성의 환경을 파괴하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었다. 웃음 아래에는 비명이 잔뜩 깔려 있었다. 죽어가던 논휴먼 하나가 하늘을 바라보고서 신을 찾았다. 사라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p.226 빛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 뿐이었다. 그곳에 다른 것이 존재할 틈은 없었다. 핍은 수잔에게 목소리들에 관해 물어보려다 말았다. 관측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그에 관해 말하기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삶의 아주 작은 일부 뿐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이 내일을, 다음 세대를, 우리 바깥의 이들을 모조리 같은 꼴로 끌어당긴다. 그렇게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사는 것 외의 방법을 모르니까. 당장 보이지 않는 것, 닫힌 문과 깊은 금 너머의 것을 믿기에는 팍팍하고 급박하다. 다시금, 목구멍이 포도청이요 내 코가 석자다.

어쩌면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되는 중일지 모른다. 존재의 테두리 안에 '우리'만을 밀어넣는, 점점 좁아지고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일찍이 누군가가 말했듯,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p.170 선배들은 내게 눈에 불을 켜고서 잘못된 점을 찾으라고 했다. 종사자만 해도 삼십 명인 그리 작지 않은 규모의 공장이었기에 막무가내로 폐쇄할 수는 없었고, 위생 문제나 비리 등 공장 사람들이 꼼짝없이 공장 폐쇄를 받아들일 만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야 추후 구조 조정 때 보다 쉽게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p.227 눈을 감아도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빛으로 가득한 세상에는 그 어떤 상상도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핍이 말했다. "보지 않으면 없는 거야. 그런 거야."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핍은 살고 있었다.


아홉 편의 수록작, 그 주인공들은 제각기 외롭다. 때로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때로는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눌러 삼키게 한다. 그들에게서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있기에, 결국 그 뒷맛이 씁쓰레할 것을 알기에 그렇다. 미련하다 불리는 이들은 말한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차마 그렇게는 안 된다고, 이렇게 가다간 모두가 죽는다고,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사람은 생존 이상의 것으로 움직이기도 하는 동물이라고,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곧 죽게도 한다고.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무엇이어야 하는가. 어느 작가의 말을 빌어 묻는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47 그가 말했다. 이렇게 해도 뭐, 뭐라도 해줄 것 같습니까? 그는 침을 튀겨가며 말을 이었다. 저 새끼들이 더 빼먹었으면 빼먹었지, 더, 더 줄 놈들입니까? 아내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입이 떨어졌다. 그렇게 부서지면 안 되는 거잖아요. (...) 그러지 말라고 만들어진 건데 그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p.280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소설의 방점을 찍었을 때 나는 이미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내 행동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시대에도, 쓰는 사람, 아니 목격하는 사람은 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작가라고 불렀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인간 창작 확인 센터로 발걸음을 돌렸다.


*도서제공: 고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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