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 필사적 SF 읽기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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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완벽히 만족하는 자가 있다고 치자.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고 하자. 그는 홀로 완전하며, 모든 것이 그의 세계에 완벽하게 존재한다. 그의 존재는 유일한 완전 그 자체이므로, 타자도, 바깥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을 동시에 알며, 예지와 기억에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오랜 생각이다.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아무것도'이다. 전지전능한 자에게, 혹은 모든 것에 만족하는 이에게 상상은 필요치 않다. '가능성을 상상'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의 다른 이름은 결핍의 결핍이다. 현실이 이상과 다르지 않고 결핍과 균열이 없다면 무엇을 꿈꾸고 대안을 말할 수 있겠는가?

p.8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기보다는 비관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 디스토피아를 전망한 음울한 SF보다 현실이 더 잿빛인 상황이라서 이 책을 쓰면서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이런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선택하고, 실천하는 일이 우리의 미래를 좀 더 낫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정해진' 미래 따위는 없습니다.

p.45 당장 내일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어려운 상황에서 인류는 직접적인 생존과 무관한 어떤 것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 그들은 무사히 살아 있음을 기념하면서 일상의 삶을 벽화로 그리고, 생존을 자축하는 손바닥을 찍었죠. 또 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풍요의 상징을 만들고, 내일의 사냥 성공을 기원하고요. 예술 활동은 그들의 생존을 기념하고 또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일이었습니다.


혹자는 이에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의 존재와 내면이 나의 뜻으로 충만해 조금도 이변과 예측불가능의 여지가 없다면, 타자 또한 나의 연장일 뿐이다. 타자가 '나'의 불완전을 반증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나의 의지와 이해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인간은 스스로에게조차 자기인 동시에 타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완벽히 만족하는 자에게 상상의 여지가 없다면, 상상을 기반으로 하는 문학은, 상상의 세계는 불만에서 출발한다. 그 말은 곧 비현실이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상상은 현실을 반영하며, 그런 까닭에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 세계야말로 가장 현실적이다.

p.47 이 남자는 셰익스피어의 유쾌한 희곡 〈한여름밤의 꿈〉 을 보고서 웃기는커녕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처한 생존의 고단함은 소설을 통해 그의 삶을 만나는 우리로서는 짐작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왠지 그 남자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알 것 같습니다. 연극을 보면서 그는 따뜻한 위로를 받았어요. 정말로 삶은 생존만으론 부족합니다.

p.86 누스는 단순히 지적 능력이 뛰어난 존재에 그치지 않습니다. 평범한 인간과 차원이 다른 도덕의식을 포함한 정신까지 지닌 이 '초인류'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거울이자 인간 윤리의 시험대 역할을 하죠. 순종 세력에게 누스는 위험 요소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관용을 베풀 수는 없네. 우리보다 머리가 좋은 생물이 있다는 점을 허용할 수 없는 걸세."


이런 이유로 상상에서 출발하는 이야기, SF는 가장 현실적인 장르일 수밖에 없다. 같은 이유로, 디스토피아는 희망의 열쇠이기도 하다. 작가가 써낸 게 예언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미 절망스러운 현실, 뻔하거나 알 길 없게 된 미래. 그것들은 결국 지금 당장, 여기에서 해결해야만 할 문제들이다.

가장 우려해야 할 것은 절망의 도래를 말하는 이들이 가져올 '사회적 혼란'이 아니라 상상이 더이상 상상이 아니게 되는 것, 문학이 현실의 단순 서술에 그치게 되는 것,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p.124 한국 사회를 복지국가로 만드는 일이 이토록 지지부진한 데는 상위 20퍼센트 혹은 그 바로 밑에서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믿는 이들의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딸이 계속 불평등 사회의 상위 20퍼센트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유리 바닥'을 단단하게 만든다면, 사회 전체가 복지국가가 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p.182 AI나 로봇과 일자리의 관계를 짚을 때마다 나오는 장밋빛 전망 가운데는 재교육의 신화가 있어요. 설사 AI나 로봇으로 일자리를 잃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재교육을 통해서 그들을 새로운 산업의 노동자로 변신, 아니 개조시킬 수 있다는 발상이죠. 정말로 그럴까요?


손 쓸 길 없이 닥쳐버린 재앙을 들이미는 이야기는 기실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으려면, 절망을 비극인 채로 남겨두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냐는 절박한 물음이다. 저자는 열 여덟 편의 작품, 그것도 하나같이 절망스러운 현실을 그려내는 이야기들을 통해 현실을 돌아보고자 한다.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이라는 제목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리 인간은 불완전하고, 세계는 타자로 가득하며 이미 망가져있다. 통제 불능한 세계에서 우리는, 상상하는 인간은, SF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능과 절망을 인식하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미래를 상상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가진 힘이자 유일한 길일 것이다.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다. 미래가 현실이 되도록, 상상이 예언이 되지 않도록.

p.213 눈앞의 현실도 이런데, 지구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고 나아질까요? 인류는 우주 멀리에 사는 외계인과 접촉하기는커녕 지금의 문명조차 유지하기 벅찬 상황입니다. 우주 식민지를 개최하기는거녕 석기시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죠, 우주 저쪽의 지적 외계 생명체의 사정은 어떨까요? 인류처럼 상호 공감이 아닌 상호 갈등의 문명을 일군다면 그들 역시 우주를 가로지르기 전에 자멸할 가능성이 훨씬 크지 않을까요?

p.255 흥미롭게도 똑같이 인공 자궁을 반기지만 그 이유는 정반대인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극단적인 여성 혐오주의자예요. 황당하게도 그들은 여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여성 없이 남성만으로 사회를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하죠. 이들에게 인공 자궁은 인류의 재생산, 즉 임신과 출산에서 여성의 역할을 없애도록 돕는 과학기술입니다.길 이들은 기꺼이 인공 자궁을 이용할 경제적 능력이 되는 부유한 계층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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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세계에서우리는 #SF #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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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서양
니샤 맥 스위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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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은 어디인가? 아니, 서양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서양이란 무엇인가? 상대적인 방위가 문명과 인종의 절대적 선으로 자리하기까지, 어떤 분투와 경합, 왜곡과 해석이 동원되었는가? 대관절 "서양 문명"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세계'에서 신을 모사한 최고의 인종이 일구어낸 유산이자 결과인가? 그의 기원은, 문화적 토대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수천 년 간 셀 수 없이 많은 접촉과 교류, 분쟁과 정복, 사기와 기만에 가까운 재정립과 경계짓기가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의 중심에서 누군가에겐 정당성의 근간, 누군가에게는 야만과 문명의 경계였던 이름, "서양"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확고한 경계와 명백한 승계로 형성된 관문과도 같은 것일까? 마치, 환영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서양, 백인의 땅입니다. 처럼.

p.20 첫째, 모든 역사는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쓰기, 재고하기, 공식 역사 수정하기 등을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 행동이다. 마찬가지로 역사를 다시 쓰지 않겠다는 선택 역시 정치적 행동이다. 둘째,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언제나 분쟁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논쟁은 어느 사실이 언제 어디서 강조되어야 할지에 초점을 맞춘다.

p.21 거대 서사를 뒷받침할 증거는 오랫동안 무너져 왔고, 개별적 요소들이 여전히 유지되는 동안 전체적 서사는 더는 우리가 아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일부 세력은 아직도 이념적 가치를 위해 이 거대 서사를 고수하고 있다.


만일 저자의 말처럼, 서양의 개념이 지금까지의 "상식"과 달리 의도적으로 편집되고 해석된 일종의 구성물이라면, 그것은 누구의 이득을 위한 추동이었는가? 진보와 문명, 합리와 보편의 가치가 어떤 "인종", 문화, 국가 혹은 체제를 올바른 기준으로서 대표하도록 의도되었다면, 그 기준 자체를, 기준이 목표하는 이상의 본질부터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한 덩이로 묶여 서술되는 그리스-로마 문화는 정말 비슷한 근원을 가진 대체로 동질한 꼴이었을까? 익히 알려진 고대의 사상가, 예술가, 심지어 신성의 계보까지도 푸른 눈에 하얀 피부를 가진 남성의 전형이었을까? 피부색에서 인간성까지, 인간을 분류하는 미묘하고도 "과학적"인 스펙트럼은 정말 확고한 기준에 따라 분류될 수 있는, 신의 섭리를 드러내는 불변의 증좌였을까?

p.79 대륙을 아우르는 유산을 지녔고 아시아의 트로이가 자신들의 기원이라는 자의식은 로마인의 세계가 서양이나 유럽인의 눈으로 보는 것과 달랐음을 드러낸다. (...) 로마 제국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압도적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근대 서양인은 로마인을 백인종으로 특징짓고 민족적이고 관상학적인 용어들을 그들에게 적용했다. 하지만 정작 로마인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을 범주화했을 것이다.

p.271 인종 만들기의 과정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일정 범주의 인구 집단으로 규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인구 집단은 선천적이고 태생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특징에 의해 규정된다고 상상된다. 그리고 그 특징이 그 인구 집단에 부여된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한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은 근대 서양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여러 사회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간을 그 차이점에 따라 분류했고 권력 위계를 만드는 데 그 차이를 이용했다.


저자는 기존의 통념과 편견을 정면으로 부수고 나와 사회적 비주류와 정당성 경합의 역사에 주목한다. 그는 수사가 아닌 증거를 발굴해냄으로서. '전통적인' 역사서는 시간 순으로 배열되며, 대표적인 인물과 사회를 통해 당시를 재구성하고 박제하는 식으로 나열된다.

이 방식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주류와 비주류를 보편과 어긋남으로, 권력자의 입장에서 해석된 역사를 정답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부분의 '권위있는 역사가들의 공신력있는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아버지들'의 세계는 이미 무너지고 해체되고 있다.

p.292 계몽주의 시기 유럽에서 베이컨과 그 동시대인이 서양이라는 개념의 토대를 다졌다면 그 개념적 구조는 유럽인이 지배하게 된 유럽 바깥의 더 넓은 세계에서부터 쌓아 올려졌다. 서양과 그 나머지 사이의 구분은 그곳에서 더욱 선명한 의미를 가졌고, 비서양 세계를 인식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그곳의 거주민을 길들일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그들을 서양인에게 친숙한 고대사 속 존재들로 은유했다.

p.388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식민주의적 세계의 오랜 질서를 성공적으로 뒤엎으면서 서양의 세계적 패권은 융해되기 시작했다. (...) 식민 제국의 해체는 〈저 바깥〉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 것은 〈집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식민지 피지배민의 이민과 노예의 강제 이주는 제국의 심장부에서 인구 구성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물어야 한다. 굳이 지금에 와서, 이 모든 혼란과 억지 반, 선언 반의 결과물일지언정 일견 진리와도 같이 믿어지는 '서양'의 개념에 의문을 던져야만 하는가? 혹자는 이런 우려를 내비칠 것이다. 서양의 개념을 해체하는 과정은 더이상 어떤, 서구 사회의 미덕으로 알려진 모든 가치와 역사까지도 해체해버리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세계는 그 어느때보다 구시대로 역행하려는 반동적 흐름에 휩싸여있다. 저자는 '서양'이란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패권이 정의를, 해석이 진리를 대체하려는 시대에 통찰을 제시한다. 흠모와 무조건적 부정이 아닌, 지워지는 이름을 되살려내 총체적인 비판으로 사고할 때 비로소 열리는 미래를. 다시금 전란으로 향하는 세계의 모든 지성인에게 일독을 권한다.

p.456 이들은 서양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지난 세기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사회 변화를 무위로 되돌리고 서양이 세계를 지배했던 영광의 나날을 회복하길 바란다. (...) 현재 서양의 핵심을 이루는 원칙들을 반대하면서 이제는 명백히 과거에 속한, 철 지난 서양의 원칙들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들이 새된 소리로 서양 문명을 수호해야 한다고 부르짖을 때 사실 그들은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파산한 허구를 지키기 위해 결집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p.458 이 책은 서양에 대한 공격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이 서양과 그 근본적 원칙에 대한 찬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 의문을 던지고 비판하며 주어진 지혜를 논박하는 것보다 더 서양다운 것이 있을까? 대화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서양다운 것이 있을까? 역사를 다시 형성하기 위해 재상상해 보는 것보다 더 서양다운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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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솔드 : 흩어진 조각들 언와인드 디스톨로지 3
닐 셔스터먼 지음, 강동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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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오래전에 무너졌다. 그리고 재건되었다. 이전의 평화를 되찾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평화롭고 진보된 세상으로의 진일보를 이룩하였다.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10대 무법자"들을, 한정된 자원을 축내는 "잉여인간"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유익한 방식으로 "재활용"할 방법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언와인드. 죽음이 아닌 분열된 상태로 살아가는 삶. 언제든 새로운 몸을, 영생을 얻으세요.

혼란한 사회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언제나 그랬듯, 자본이다. 금전적으로, 지위적으로 이득을 보는 이들. 자신만은 희생자가 되지 않을 것을 확신한 채로, 죽어도 될 생명을 추려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이들. 익숙한 도식과는 다르게, 권력은 더이상 무시무시한 이빨을 내보이지 않는다. 미소를 띄고 '공익'을 섬기는,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선구자로서 손을 내민다. 이 얼마나 선량하고 올바른지!

p.12 〈이 전쟁이 낳은 10대 무법자들에게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입법부라는 울타리 안에서 푸념한다. 아니, 교육 예산을 전쟁용으로 돌려놓고서도 이럴 줄 몰랐다는 건가? 어떻게 공교육이 실패하리라는 걸 모를 수 있단 말인가? 학교도, 직업도 없이 손에 쥔 것이라고는 시간뿐인 저 아이들이 말썽을 부리는 것 외에 무슨 일을 한다고?

p.571 「모두가 하트랜드 전쟁이 끝나고 10대 무법자들을 눈앞에서도, 머릿속에서도 치워 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 애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누구도 생각하려 하지 않았어. 이제는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익명의 장기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지.」


그런 이유로, '언와인드'라고 쓰고 인권 박탈이라고 읽는 끔찍한 '제도'는 사회 구성원들의, 정확히는,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대다수의 성인과 소수의 자본가들의 합의로 이 사회에 무사히 정착했다. 이전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나아가 미성년자 뿐 아니라 재소자까지도 언와인드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사회 시스템에 "기생하는" 이들을 '유용한 자원'으로 환원하자는 데 그 누가 반대할까.

지난 권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능동적 시민"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분해되고, 완전해지지 못하고, 영혼을 부정당한 '어린 인간'들은 여전히 패배의 연속에 맞닥뜨린다. 반면 언와인드 대상을 확대하려는, 더 많은 "잉여인간"들을 거대 산업의 아가리로 밀어넣으려는 세력은 일상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누가 그들을 연민하는가. 이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대체 누가 인간일 수 있을까.

p.188 한 가지는 확실하다. 타일러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에게는 성장할 여지가 있다. 리사는 분열된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아니면 그들은 그냥 언와인드된 나이로 굳어 버리는 걸까. (...) 「너희는 모두 타일러가 언와인드당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뭘 원했는지에만 집착해. 왜 타일러가 3년 뒤에 무엇을 원했을지는 생각하지 않는 거야?」

p.397 하지만 소변으로 얼룩진 리와인드의 바지를 보고 냄새를 맡자 다시금 리와인드의 무력함이 떠오른다. 아전트의 지하실에 갇혀 있던 자신의 모습이. 동정심은 코너가 절대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지만, 어쨌든 느껴진다. 그 감정은 증오를 부식시킨다. 리와인드의 솔기에서 절망감이 그야말로 스며 나오는 듯하다. 코너는 이 생명체에게 고통을 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물어야 한다. 누가 이 공고한 구조에, "모두의 이익"에 반대를 말하게, 혹은, 그럴 수 없게 하는가. 누가 그들을 현재에 박제하는가. 누가 그들에게 과거가 있었음을,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있었음을 부정하는가. 누가 그들 모두에게 어른이 되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기회를 빼앗는가. 실패하고 혼란스럽게 살아갈 가능성을,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갈 가능성을, 미래를, '언와인드' 바깥을 빼앗는가.

카뮈 콩프리를 보라. 가장 완벽한 존재, 인간 이상의 인간. 가장 좋은 '부품'을 한 데 모아 최고의 인간으로. 그의 존재는 과학기술의 쾌거, 언와인드의 존재의의를 증명하는 최고의 현신이다. 그는 인간인가? 적어도 그 자신만은 그렇게 믿었다. 아무렇지 않게 팔려나갈 때까지는. 그를 추앙하고, 흡족해한 이들 중 인간으로 본 자는 없었다. 단 한 명도. 그는 언제나 상품이자 물건이었고, 부품의 조합일 뿐이었다.

p.250 예전에는 의학이 세상의 질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다. 연구 자금은 해결책을 찾는 데 쓰였다. 하지만 지금의 의학 연구는 언와인드의 다양하고 잡다한 부위를 사용할 점점 더 기괴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일 뿐이다. (...) 언와인드가 유지되는 건 자식을 구하고자 하는 부모의 간절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와인드가 이토록 활기차게 번성하게 된 건 그것이 허영 어린 거래이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p.463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나는 침해당했다고 느낀다. 캠이 어떻게 감히 윌의 음악으로 우나를 이렇게까지 깊이 밀어붙일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윌의 음악이다. 캠은 윌의 영혼 위에 자신의 영혼을 쌓았으니까. 캠은 그를 창조한 괴물들이 깔아 놓은 토대 위에 세워진, 새로운 무언가다.


어떤 모욕에는 대단한 선언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너는 인간이 아니라는,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위해 소모되어도 좋다는 합의, 그걸로 충분하다. 언와인드, 반란자들의 여정을 함께해온 독자라면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수요가 공급에 선행하는가, 너무 오래 닫혀있어 벽이 되어버린 문 앞의 우리는, 어떻게 다시 '바깥'을 가능하게 하는가.

가치 없는 몸이 감히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더 귀한 생명'이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너의 생존은 이기심이다, 사회의 해악이다. 합의와 홍보의 형태로 퍼부어지는 프로파간다는 현대사회에도 너무 선명하게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무엇이 무엇의 재현인가. 현실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반란의 불씨는 당겨졌고, 옳지 않음을 외면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여기서 작은 희망을 본다. 이 절망의 끝은 어디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p.572 「그게 끝이 아니죠, 소니아? 뭐가 더 있을 게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다면 왜 능동적 시민이 지금도 자신들이 무너뜨린 남자를 두려워하겠어요? 왜 잰슨 라인실드의 이름이 지금까지도 놈들을 덜덜 떨게 하겠느냐고요?」 이제 소니아는 미소 짓는다. 「어느 업계에서든 그 핵심에 두려움을 박아 넣는 단어가 뭘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어둠의 주문이라도 되는 듯 속삭인다. 「쇠퇴.」

p.574 소니아의 온몸이 떨린다. 약해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다. 「지금 이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많은 걸 투자했기에, 놈들이 언와인드에 대한 해법을 없애 버렸다면?」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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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우화소설 세트 - 전3권 - 연인 + 항아리 + 조약돌 정호승 우화소설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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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도 위안과 정답이 간절한 시대다. 따지자면 사람 사는 세상에 그렇지 않은 적이 얼마나 있었겠냐만은, 그렇다 쳐도 너무, 너무도 버겁고, 빠르고, 있는 힘껏 움켜쥐고 욕심껏 제 몫을 챙기지 않으면 말 그대로 손가락만 빨다 홀랑 털려먹히기 딱 좋은 세상이 아닌가. 거친 말로, 전쟁통에도 이 지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전쟁의 시대의 세계가 지금과 사뭇 달랐다는, 이렇게까지 무한이기주의가 개인과 사회 시스템에 촘촘히 스며들지는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작은 것은 짓밟히고, 약한 것은 잡아먹히며, 소박하고 고요한 것은 금세 밀려나고 잊혀진다. 세상의 많은 부분은 그런 것들이 지탱하는데도. 목소리를 높이고, 덩치를 부풀려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p.127 (『조약돌』). 돌맹이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사라졌다. 조금만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도 온몸이 팽팽히 긴장되었다. '돌탑이 무너지면 맨 밑에 있는 내가 그대로 깔려 죽어버릴 텐데, 이 일을 어떡하나. 무슨 수를 쓰든 써야 돼. 이대로 밑에 깔려 죽어버릴 수는 없어.' 돌맹이는 이제 어떻게 하든 미리 돌탑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p.249 (『항아리』)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대로 햇볕이 계속 내리쬔다면 강물이 말라 더 이상 거센 풍랑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갈수록 강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강바닥이 훤히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강물은 말라버리고 말았다. (...) 이제야말로 거센 물결에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은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그러나 그날부터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인 정호승은 언젠가 말했다. 외로우니 사람이라고,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고,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비가 오면 그 또한 그런 대로, 이 외로운 세계를 그렇게 살아가라고(〈수선화에게〉). 또다른 날엔 이렇게 말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고, 넘어지고 있을 때,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때엔 넘어지지 않는다고(〈넘어짐에 대하여〉).

그는 아득바득 붙잡고 천년만년 불타올라야만 사랑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말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랑이 있다고, 사랑이 끝난 곳에도 스스로 사랑이 되어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봄길〉). 그런 이유로 이 시인이 전하는 이야기는 어렵다. 다 퍼주고 다 놓아주면 대체 나한텐 뭐가 남느냐고 따져묻고 싶게 한다.

p.34 (『연인』) "푸른툭눈, 자제는 내가 천 년이 지났는데도 왜 미완성 부처인 줄 아는가? (...) 그건 사랑이 미완성이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 와성된 사랑이란 없어.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과정만 있을 뿐... 그 과정의 연속이 바로 사랑이야."

p.155 (『연인』) "난 네가 원하는 대로 너를 떠나보내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너와 함께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네가 떠나려 할 때 떠나게 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 난 너를 떠나보냄으로써 진정 다시 만나게 되기를 소원했던 거야."


남의 입에 든 부스러기까지 뺏어서라도 차지하고 움켜쥐어야 할 것을 다 놓아주라니. 잘나지 않아도, 내가 나의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어도 된다니. 자기희생에, 반대로 가는 길에 답이 있다니, 큰 뜻이라는 것이 꼭 커다란 복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니. 지금 즉시 알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것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다 잘 될 거라는, 아무튼 잘 하고 있다는 위로는 온데간데 없이 너 어리석다, 지금 가는 길이 옳은지 그른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악만 쓰고 있구나, 자 이게 정답! 하고 딱 짚어주지는 못할 망정 그저 고요히 바라보기나 하니 제법 서운하고 야박한 글이 아니라 할 수 없다.

p.207 (『항아리』) "실은 나도 너 때문에 내가 아프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서로 한 몸인 줄 모르고 널 원망한 거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다들 종이 되려고만 해. 다들 종이 된다면 이 세상에 종소리는 존재할 수 없는데도 말이야." "맞아. 나 같은 종메가 있어야 이 세상에 종소리가 올려 퍼지는 거야." 나는 그제서야 나 자신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다.

p.238(『항아리』) "그렇게 울고 있을 게 아니라, 이제부터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해. 네가 진정 다시 땅 위로 나가길 원한다면, 네가 진정 강물 속을 헤엄치길 원한다면, 이제 가슴속에 기다림을 하나 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항상 어둠 속에서 눈물이나 흘리면서 살게 돼. (...) 그건 네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야. 네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시간이며 의지라 할 수 있지."


그러나, 그 시선에, 기다림에 큰 위안이 있다. 수없이 틀리고, 실패할 텐데요, 그래도 집착을 끊어내야 할 때가 있는 거지요. 그 깨달음에 늦었다는 질책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아둔하고 모자란 인간아, 너처럼 속된 존재가 없다, 매섭게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것들의 삶을 빌어 은근한 가르침을 전하는 다정에 위로를 받는 것이다.

깨닫기를 기다려주는 것, 무조건적인 순종이 아니라 책임질 자유를 주는 것. 언젠가 말했듯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고,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산산조각〉). 세 권의 이야기에서 그 이상을 배웠다. 평온한 마음으로 한 발씩 나아가는 삶이란 이런 의미겠거니, 인생의 스승처럼, 모든 것을 품는 마음으로 지긋이 전해주는 가르침이 이런 이야기겠거니. 그렇게.

p.58 (『연인』) "파도가 부서졌다고 바다가 없어지던가? (...) 죽음도 그와 같은 것이다. 바다의 파도와 같은 것이다. 파도는 스러져도 바다는 그대로 있다. 죽음이 있다고 해서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부이듯이 죽음도 삶의 일부다."

p.263 (『조약돌』) 그는 벼룩을 데리고 노는 노인의 천진한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일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물을 먹으려고 바가지를 쳐다보는 순간, 물 위에 잔잔히 어린 미소, 그것은 그가 평생 찾아 헤매던 부처님의 미소 바로 그것이었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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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몰이꾼 이기 2 - 하계의 기지로 가는 길 펑 2
허진희 지음 / 북트리거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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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바이러스가 휩쓸고 지나간 세상, 어딘가의 외딴 섬, 보드를 타고 바다를 따라 달리며 좀비와 함께 살아가는 이가 있다. 이름은 '이기'. 손에 들린 게 채찍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밝게 웃는, 신참내기이자 단짝인 '도나'와 이기는 늘 함께다. 작고 가난한 섬, 섬 안의 좀비들을 이리 몰고 저리 몰아 관리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좀비몰이꾼들.

섬을 지배하는 것은 죽음보다 두려운 권력자, '테'와 그의 일족들이다. 섬 전체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들의 존재가 법이자 그들이 있는 곳이 곧 무법지대이다. 이 세계의 좀비는 "대체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어떠한 욕구만이 남은 채 멍하니 비틀거리며 썩어갈 뿐.

p.54(1권) 사람들을 죽인 건 좀비만이 아니었어. 이 세계를 진짜 박살낸 존재는 바로 우리, 붉게 요동치는 혈맥을 감출 수 없는 적맥인들이지. 언젠가 저 멀리 시뻘건 노을을 뒤집어쓴 테의 요새를 바라보며 우 씨 아저씨는 그렇게 말했다.

p.157(2권) 겁 많은 천성을 타인을 배척하는 행위로만 달랠 수 있는 비루하고 졸렬한 존재.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공부에는 한없이 게으른 헛똑똑이. 이런 자들은 자신의 악취나는 감정을 기회만 생기면 언제고 드러내기 마련이다.


테의 섬은 꽉 닫혀있다. 누구의 침입도, 탈주도 용납하지 않는 세계이다. 절대적인 권력 아래 누구도 어른이 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다름을 꿈꾸지 못한다. 권태로운 일상, 언제까지나 한결같을 것만 같았던 그 세계는 느닷없이 나타난 아이 '눈'과, 돌변하기 시작한 좀비들의 폭주로 무너져내린다. 권력의 아귀다툼과 자멸은 약자들의 삶마저 뿌리채 뒤흔들기 마련. 이기와 도나, 눈은 섬을 떠나야만 한다.

이별은 죽음만큼 고통스럽다. 평생을 살아온 자리를 떠나야만 하기에. 온통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나아가야 하기에.. 새로운 삶을 찾아나선 그들이 당도한 오아나의 해변. 낙원처럼 보이지만 또다른 절망이었다. 권태와 공포를 벗어난 곳에 무욕과 몰개성으로 통제된, 미래도 현재도 스스로에 대한 생각조차 잊어버린 채 멍하니 거니는 이들.

p.208(1권) "우정은 끊임없이 너를 시험에 들게 할 거다. 네가 그 얄팍한 우정을 지키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저들은 끝까지 널 몰아붙이겠지. 하지만 이기 넌 결국 아무도 지키지 못하고 모두를 실망시킨 채 괴로워하게 될 거야. 내 눈엔 네 미래가 빤히 보이는구나."

p.44(2권) "아나수는... 그런 쓸데없는 욕망을 모두 잠재워 줘. (...) 욕망이 없는 존재가 얼마나 멋진 줄 아니? 아나인들을 봐. 얼마나 평온한지. 아나인들은 근심, 걱정, 두려움, 그 어떤 것도 느끼지 않아. 자기 욕구를 채우려고 전전긍긍하는 일이 없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니 아무 것에도 실망하지 않고."


평화 이면의 실상은 또다른 통제였다. 모든 자아를 거세당한 채 행복도 갈망도 사랑도 미움도 알지 못하는 마취상태. 이곳은 낙원일 수 없다. 생각하지 않으므로 원할 것이 없다. 불만하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고,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다. 이기와 도나, 눈이 다시금 안주하지 않기로 결정한 때, 눈을 아는 자를 만나 하계의 땅으로 향한다.

과연 그곳은 종착지가 될 수 있을까? 한순간에 어린 시절을 떠나온 이기 일행은 또다시 '말 잘 듣는 아이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이 그들을 온통 뒤흔들고 끝없는 삶의 길로 떠밀게 될까.

p.44(2권) 그래. 그거였구나. 내가 아나인들을 어색해한 이유. 그 안온한 미소에 거리감을 느낀 이유. 이기는 자기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욕망마저 제거된 아나인들을 복잡한 심정으로 휘둘러보았다. 보기 좋게 그을린 살갗과 고요한 표정만이 다를 뿐, 이기의 눈에 아나인들은 각성 전의 좀비들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p.64(2권) "그 열매를 처음 먹은 날 밤, 우린 모든 악몽에서 벗어나 깊이 잠들었어. 악몽 없이도 잠들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이렇게 편히 잠잘 수 있다고? 그동안 내가 겪은 고통은 무엇이었나 싶어서 좀 허탈할 정도였지." (...) 그럼 그렇지. 하늘의 뜻이라는 게 그리 시시할 리가 없다. 하늘의 뜻이라는 핑계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뿐.


작중 주인공인 이기와 도나는 퍽 다른 성격의 캐릭터들이다. 내가 어떤 쪽이냐, 하면, 낯선 사람을 믿지 못하는 점에서는 이기와 같다고 하겠다. 섣부른 신뢰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탕발림이라고 믿는 사람이기에. 모험은 두렵고 타인은 의심스럽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도나와 같이, 종내에는 이기가 그러하듯이, 기꺼이 끌어안고, 환대하고, 차마 떨쳐내지 못하는 시선에 또다른 해답이 있는 게 아닐까.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닫힌 세계를 부수고 '나'에게로 뛰어드는 '너'를 향해 달려가지 않을 방법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러니 기꺼이 끌어안을 수밖에. 이 모험에 함께하는 독자가 너를 구하는 일이 나를 구하는 일임을, 세계와 세계가 맞닿는 일이 모험이자 또다른 세계의 시작임을 깨닫기를. 부디, 마음껏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두렵고 위태로운 청춘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있는 힘껏 누리기를.

p.225 (1권) 이기는 자신에게 매달린, 이 작은 존재의 떨림을 느끼며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했다. 너를 구한 날, 나는 내가 너의 운명을 만들어 줬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젠 알아. 네가 내 운명을 바꿨다는 것을.

p.199(2권) 이기. 이기. 이기. 눈의 목소리가 뜨겁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오직 자기 이름만 소리 내어 말하던 아이가 난생처음 다른 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기는 이제 그 아이를 향해 질주한다.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있는 힘껏. 눈을 향해 보드가 날아오른다.


*도서제공: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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