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우화소설 세트 - 전3권 - 연인 + 항아리 + 조약돌 정호승 우화소설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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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도 위안과 정답이 간절한 시대다. 따지자면 사람 사는 세상에 그렇지 않은 적이 얼마나 있었겠냐만은, 그렇다 쳐도 너무, 너무도 버겁고, 빠르고, 있는 힘껏 움켜쥐고 욕심껏 제 몫을 챙기지 않으면 말 그대로 손가락만 빨다 홀랑 털려먹히기 딱 좋은 세상이 아닌가. 거친 말로, 전쟁통에도 이 지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전쟁의 시대의 세계가 지금과 사뭇 달랐다는, 이렇게까지 무한이기주의가 개인과 사회 시스템에 촘촘히 스며들지는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작은 것은 짓밟히고, 약한 것은 잡아먹히며, 소박하고 고요한 것은 금세 밀려나고 잊혀진다. 세상의 많은 부분은 그런 것들이 지탱하는데도. 목소리를 높이고, 덩치를 부풀려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p.127 (『조약돌』). 돌맹이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사라졌다. 조금만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도 온몸이 팽팽히 긴장되었다. '돌탑이 무너지면 맨 밑에 있는 내가 그대로 깔려 죽어버릴 텐데, 이 일을 어떡하나. 무슨 수를 쓰든 써야 돼. 이대로 밑에 깔려 죽어버릴 수는 없어.' 돌맹이는 이제 어떻게 하든 미리 돌탑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p.249 (『항아리』)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대로 햇볕이 계속 내리쬔다면 강물이 말라 더 이상 거센 풍랑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갈수록 강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강바닥이 훤히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강물은 말라버리고 말았다. (...) 이제야말로 거센 물결에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은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그러나 그날부터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인 정호승은 언젠가 말했다. 외로우니 사람이라고,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고,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비가 오면 그 또한 그런 대로, 이 외로운 세계를 그렇게 살아가라고(〈수선화에게〉). 또다른 날엔 이렇게 말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고, 넘어지고 있을 때,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때엔 넘어지지 않는다고(〈넘어짐에 대하여〉).

그는 아득바득 붙잡고 천년만년 불타올라야만 사랑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말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랑이 있다고, 사랑이 끝난 곳에도 스스로 사랑이 되어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봄길〉). 그런 이유로 이 시인이 전하는 이야기는 어렵다. 다 퍼주고 다 놓아주면 대체 나한텐 뭐가 남느냐고 따져묻고 싶게 한다.

p.34 (『연인』) "푸른툭눈, 자제는 내가 천 년이 지났는데도 왜 미완성 부처인 줄 아는가? (...) 그건 사랑이 미완성이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 와성된 사랑이란 없어.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과정만 있을 뿐... 그 과정의 연속이 바로 사랑이야."

p.155 (『연인』) "난 네가 원하는 대로 너를 떠나보내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너와 함께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네가 떠나려 할 때 떠나게 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 난 너를 떠나보냄으로써 진정 다시 만나게 되기를 소원했던 거야."


남의 입에 든 부스러기까지 뺏어서라도 차지하고 움켜쥐어야 할 것을 다 놓아주라니. 잘나지 않아도, 내가 나의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어도 된다니. 자기희생에, 반대로 가는 길에 답이 있다니, 큰 뜻이라는 것이 꼭 커다란 복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니. 지금 즉시 알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것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다 잘 될 거라는, 아무튼 잘 하고 있다는 위로는 온데간데 없이 너 어리석다, 지금 가는 길이 옳은지 그른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악만 쓰고 있구나, 자 이게 정답! 하고 딱 짚어주지는 못할 망정 그저 고요히 바라보기나 하니 제법 서운하고 야박한 글이 아니라 할 수 없다.

p.207 (『항아리』) "실은 나도 너 때문에 내가 아프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서로 한 몸인 줄 모르고 널 원망한 거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다들 종이 되려고만 해. 다들 종이 된다면 이 세상에 종소리는 존재할 수 없는데도 말이야." "맞아. 나 같은 종메가 있어야 이 세상에 종소리가 올려 퍼지는 거야." 나는 그제서야 나 자신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다.

p.238(『항아리』) "그렇게 울고 있을 게 아니라, 이제부터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해. 네가 진정 다시 땅 위로 나가길 원한다면, 네가 진정 강물 속을 헤엄치길 원한다면, 이제 가슴속에 기다림을 하나 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항상 어둠 속에서 눈물이나 흘리면서 살게 돼. (...) 그건 네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야. 네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시간이며 의지라 할 수 있지."


그러나, 그 시선에, 기다림에 큰 위안이 있다. 수없이 틀리고, 실패할 텐데요, 그래도 집착을 끊어내야 할 때가 있는 거지요. 그 깨달음에 늦었다는 질책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아둔하고 모자란 인간아, 너처럼 속된 존재가 없다, 매섭게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것들의 삶을 빌어 은근한 가르침을 전하는 다정에 위로를 받는 것이다.

깨닫기를 기다려주는 것, 무조건적인 순종이 아니라 책임질 자유를 주는 것. 언젠가 말했듯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고,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산산조각〉). 세 권의 이야기에서 그 이상을 배웠다. 평온한 마음으로 한 발씩 나아가는 삶이란 이런 의미겠거니, 인생의 스승처럼, 모든 것을 품는 마음으로 지긋이 전해주는 가르침이 이런 이야기겠거니. 그렇게.

p.58 (『연인』) "파도가 부서졌다고 바다가 없어지던가? (...) 죽음도 그와 같은 것이다. 바다의 파도와 같은 것이다. 파도는 스러져도 바다는 그대로 있다. 죽음이 있다고 해서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부이듯이 죽음도 삶의 일부다."

p.263 (『조약돌』) 그는 벼룩을 데리고 노는 노인의 천진한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일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물을 먹으려고 바가지를 쳐다보는 순간, 물 위에 잔잔히 어린 미소, 그것은 그가 평생 찾아 헤매던 부처님의 미소 바로 그것이었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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