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곽재식 지음 / 비채 / 2022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온라인 서점사(알ㄹ딘, 교ㅂ문고)에서 이 책의 장르를 무엇으로 구분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소설, 현대소설, 그 중에서도 과학소설입니다. 무려 SF라는 아름다운 태그를 달고 있단 말입니다. 표지를 보세요. 귀엽지요? 띠지를 보세요. 한입 와앙 베어 문 자국 같은 모양이 아주 사랑스럽지요? 귀여운 디자인과 귀여운 제목, 귀여운 작가에 속아서 사신 분 손 들어보세요. 당신은 속았습니다. 물론 나도 속았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이건 과학소설의 탈을 쓴 현실 호러입니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합니다. 이건 현실고발 호러입니다. 소설가 외의 생업으로 받은 스트레스와 환장대잔치 현실을 나만 당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삭삭삭 썰어넣은 것 같다구요.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디곱게만 살아온 사람은 현실적이라는 평과 함께 드라마같은 느낌으로 재밌게 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평범한 노동자들은 이 책의 몇 번째 수록작을 펼치든, 읽는 순간 비명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좋은 소설은 현실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니, 떠날 수 없습니다. 후자가 전자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를 버린 전자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책은 너무도 현실적인, 너무도 정직한, 그래서 아, 너무 좋아! 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할 수 밖에요.
표제작을 포함해 총 10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귀엽고 발랄한, 희망으로 하나되는 우리!에서는 한참 벗어나있습니다. 오히려 맵고, 쓰고, 때로는 속이 터질만치 답답한, 그렇지만 당장 어디서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개라 더 간담이 서늘해지는 내용이지요. 개중 일부 수록작에 대한 감상을 짧게 전하고자 합니다. 놀라운 반전을 기대하기 보다는 왜 이런 이야기가 필요한지, 왜 이것이 현실일 수 밖에 없는지 고민해보시길 바라요. 스펙타클보다는 우당탕탕이 어울리는 작고 작은 존재 SF의 묘미입니다.
1.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표제작은 언제나 기대를 싣고... 지만,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동물인가. 저의 답은 "니가 동물이 아니면 대체 뭔데!"입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애인은 생명체에 불과하지만 인류를 타자의 시선에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뿐더러 모종의 공포에 가까운 불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인간이 침략적 지배종으로 자리잡은 이래로 우리는 언제나 관찰자였고 타자는 철저한 대상, 객체였을 뿐이니.
빵을 좋아하는 악당이라. 거참 요즘 인기인 모 캐릭터 빵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귀엽기까지 한데요. 물론 이 작품의 서술자도 악당=인간종을 나름 귀엽게 보기는 합니다. 인간은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아니 재넨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에 대한 관찰자의 답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경험이지 않은가. 다만 이제... 아니 이게 이런 이유로? 싶은 소통의 오류가 p.15에 있으니, 꼭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2. 이상한 녹정기
녹정은 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의 3월과 4월의 기록에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길지만 요는 깨달음을 얻은 사슴이 인간의 형상을 취한, 신원불상의 요괴같은 존재지요. 만일 이 사슴-인간-요괴가 현대에 존재한다면? 우리 곁에 있다면? 살다보니 뉴스에도 나오고 광고까지 찍었다면? 그치만 그의 정체를 아는 것은 나뿐이라면? 게다가 그녀석이 은인인 나를 걷어차고 자기 혼자 홀랑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인간사 섭리라지요. 그 누구도 절대 그이를 곤란에 빠트리지 않으리라 다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바로 직전 수록작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속물근성을 꼬집었지만 마치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생생한 문체로 이렇게 들이밀어 줄 줄이야. 저는 여기서 이 작가가 사람의 바닥을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있는걸까, 어쩐지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신들의 황혼이라고 마술사는 말했다.
저도 장르소설, 그 중에서도 호러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는 않습니다만 러브크래프트 풍 코스믹 호러의 분위기랄까, 그런 느낌에 대해서는 많은 독자들이 어렴풋하게마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히 대적할 수 없고 그저 고통과 두려움에 떨기만 할 뿐인 무력한 인간 존재와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키는 이계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이젠 문법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까지 자리잡았지요.
게임을 매개로 나뉘는 초월적 존재-플레이어와 수동적 대상-마법사의 이야기에서 어떤 독자는 매몰과 의존, 전복보다는 주객전도에 가까운 관계의 역전을 통해 느껴지는 쾌감을 말할 수도 있고, 또다른 누군가는 앞선 작품들에 이어 작가의 냉소적인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후자에 한 표 던지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4. 슈퍼 사이버 펑크 120분
앞서 소개한 "신들의 황혼이라고 마술사는 말했다"가 표면적으로나마 한발짝 물러선 배경 설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독자에게 퇴로를 열어주고 있다면 이번건 국물도 없습니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습니다. 처음 읽고 나서는 '이걸 좀 더 길게, 단행본 한 권 정도로 풀어주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두 번째로 읽은 후에는 아 역시, 이건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고 난 다음 퇴근해서 엉엉 울어야 할 것 같은 분량이 제격이라는 확신이 차올랐습니다.
무서워요. 무섭습니다. 귀여운 표지에 큐티빠띠요정 곽 작가님을 내세워 독자를 으앙-울려버리려는 속셈인 게 분명합니다. 국가장학금, 공인인증서, 기타 공공기관 및 금융기관 사이트에서 고통받은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채 한 장을 넘기기도 전에 의식의 깊은 곳부터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보니 제목도 무섭습니다. 슈퍼, 펑크, 사이버라니 좋아보이는 건 다 갖다 붙여놓고 120분이요? 그것은 지옥의 예고편이었습니다.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코리안의 관료주의 행정과 마구잡이식 누더기 사이트만 있다면, 지옥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당신 곁에 언제나, 민주노총 말고 키보드보안.
5. 멋쟁이 곽 상사
한편으로는 이 책을 4월 즈음에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참 행운이었습니다. 뭐만 하면 안돼, 길게 말해서 안 되고 짧게 말해도 안 되고, 어떻게든 협조 안 하려는 명망높은 어르신. 대체 정체가 뭘까. 남은 바빠죽겠는데 허구헌날 옷만 빼입고 오면 다란 말인가.
으레 용기와 사랑을 말한 때는 극적인 장면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정의의 사도처럼 모두를 안아올려 날아오르는, 그로 하여금 모두의 기억에 남는 의롭고 능력있는 위인을 떠올리게 되지요.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렇답니까. 찍소리도 못 하고 기어야 할 때가 부지기수고 능력있고 지체높은 인물은 권력과 결탁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로 인해 권력구조의 최상부에 있지 않는 한 더러운 꼴, 좋지 않은 말을 안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살려면, 살고 싶으면, 때로는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까지도 살리기 위해. 현실의 영웅은, 비정상이 정상으로 군림하는 세계에서는 살아만 있어도 영웅이고, 정의는 구질구질하고 하찮은 것을 지켜내는데서 찾을 수 있기도 합니다.
한강 작가가 제주 4.3을 다룬 작품 소개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저는 이 작품 또한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남아야 했던, 살려야 했던 개인의 최선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그것또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고, 그것도, 지극한 사랑과 사투의 이야기라고. 그 공적을 자기 입으로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고도 닿지 못한 이들에 대한 해묵은 죄책감에 슬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이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내는 작가 또한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개인적으로 표제작과 더불어 가장 추천하고픈 작품입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기실 우리 사회에서 때가 아닌 때가 어디 있겠느냐만, 때를 놓치지 말고 읽기를. 사랑을, 사람을 말할 수 있기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었으니 더 늦지만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