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곽재식 지음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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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온라인 서점사(알ㄹ딘, 교ㅂ문고)에서 이 책의 장르를 무엇으로 구분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소설, 현대소설, 그 중에서도 과학소설입니다. 무려 SF라는 아름다운 태그를 달고 있단 말입니다. 표지를 보세요. 귀엽지요? 띠지를 보세요. 한입 와앙 베어 문 자국 같은 모양이 아주 사랑스럽지요? 귀여운 디자인과 귀여운 제목, 귀여운 작가에 속아서 사신 분 손 들어보세요. 당신은 속았습니다. 물론 나도 속았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이건 과학소설의 탈을 쓴 현실 호러입니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합니다. 이건 현실고발 호러입니다. 소설가 외의 생업으로 받은 스트레스와 환장대잔치 현실을 나만 당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삭삭삭 썰어넣은 것 같다구요.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디곱게만 살아온 사람은 현실적이라는 평과 함께 드라마같은 느낌으로 재밌게 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평범한 노동자들은 이 책의 몇 번째 수록작을 펼치든, 읽는 순간 비명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좋은 소설은 현실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니, 떠날 수 없습니다. 후자가 전자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를 버린 전자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책은 너무도 현실적인, 너무도 정직한, 그래서 아, 너무 좋아! 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할 수 밖에요.

표제작을 포함해 총 10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귀엽고 발랄한, 희망으로 하나되는 우리!에서는 한참 벗어나있습니다. 오히려 맵고, 쓰고, 때로는 속이 터질만치 답답한, 그렇지만 당장 어디서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개라 더 간담이 서늘해지는 내용이지요. 개중 일부 수록작에 대한 감상을 짧게 전하고자 합니다. 놀라운 반전을 기대하기 보다는 왜 이런 이야기가 필요한지, 왜 이것이 현실일 수 밖에 없는지 고민해보시길 바라요. 스펙타클보다는 우당탕탕이 어울리는 작고 작은 존재 SF의 묘미입니다.

1.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표제작은 언제나 기대를 싣고... 지만,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동물인가. 저의 답은 "니가 동물이 아니면 대체 뭔데!"입니다. 인간은 동물입니다. 애인은 생명체에 불과하지만 인류를 타자의 시선에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뿐더러 모종의 공포에 가까운 불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인간이 침략적 지배종으로 자리잡은 이래로 우리는 언제나 관찰자였고 타자는 철저한 대상, 객체였을 뿐이니.
빵을 좋아하는 악당이라. 거참 요즘 인기인 모 캐릭터 빵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쩐지 귀엽기까지 한데요. 물론 이 작품의 서술자도 악당=인간종을 나름 귀엽게 보기는 합니다. 인간은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아니 재넨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에 대한 관찰자의 답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경험이지 않은가. 다만 이제... 아니 이게 이런 이유로? 싶은 소통의 오류가 p.15에 있으니, 꼭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2. 이상한 녹정기
녹정은 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의 3월과 4월의 기록에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길지만 요는 깨달음을 얻은 사슴이 인간의 형상을 취한, 신원불상의 요괴같은 존재지요. 만일 이 사슴-인간-요괴가 현대에 존재한다면? 우리 곁에 있다면? 살다보니 뉴스에도 나오고 광고까지 찍었다면? 그치만 그의 정체를 아는 것은 나뿐이라면? 게다가 그녀석이 은인인 나를 걷어차고 자기 혼자 홀랑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인간사 섭리라지요. 그 누구도 절대 그이를 곤란에 빠트리지 않으리라 다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바로 직전 수록작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속물근성을 꼬집었지만 마치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생생한 문체로 이렇게 들이밀어 줄 줄이야. 저는 여기서 이 작가가 사람의 바닥을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있는걸까, 어쩐지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신들의 황혼이라고 마술사는 말했다.
저도 장르소설, 그 중에서도 호러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는 않습니다만 러브크래프트 풍 코스믹 호러의 분위기랄까, 그런 느낌에 대해서는 많은 독자들이 어렴풋하게마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히 대적할 수 없고 그저 고통과 두려움에 떨기만 할 뿐인 무력한 인간 존재와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키는 이계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이젠 문법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까지 자리잡았지요.
게임을 매개로 나뉘는 초월적 존재-플레이어와 수동적 대상-마법사의 이야기에서 어떤 독자는 매몰과 의존, 전복보다는 주객전도에 가까운 관계의 역전을 통해 느껴지는 쾌감을 말할 수도 있고, 또다른 누군가는 앞선 작품들에 이어 작가의 냉소적인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후자에 한 표 던지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4. 슈퍼 사이버 펑크 120분
앞서 소개한 "신들의 황혼이라고 마술사는 말했다"가 표면적으로나마 한발짝 물러선 배경 설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독자에게 퇴로를 열어주고 있다면 이번건 국물도 없습니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습니다. 처음 읽고 나서는 '이걸 좀 더 길게, 단행본 한 권 정도로 풀어주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두 번째로 읽은 후에는 아 역시, 이건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고 난 다음 퇴근해서 엉엉 울어야 할 것 같은 분량이 제격이라는 확신이 차올랐습니다.
무서워요. 무섭습니다. 귀여운 표지에 큐티빠띠요정 곽 작가님을 내세워 독자를 으앙-울려버리려는 속셈인 게 분명합니다. 국가장학금, 공인인증서, 기타 공공기관 및 금융기관 사이트에서 고통받은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채 한 장을 넘기기도 전에 의식의 깊은 곳부터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보니 제목도 무섭습니다. 슈퍼, 펑크, 사이버라니 좋아보이는 건 다 갖다 붙여놓고 120분이요? 그것은 지옥의 예고편이었습니다.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코리안의 관료주의 행정과 마구잡이식 누더기 사이트만 있다면, 지옥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당신 곁에 언제나, 민주노총 말고 키보드보안.
5. 멋쟁이 곽 상사
한편으로는 이 책을 4월 즈음에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참 행운이었습니다. 뭐만 하면 안돼, 길게 말해서 안 되고 짧게 말해도 안 되고, 어떻게든 협조 안 하려는 명망높은 어르신. 대체 정체가 뭘까. 남은 바빠죽겠는데 허구헌날 옷만 빼입고 오면 다란 말인가.
으레 용기와 사랑을 말한 때는 극적인 장면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정의의 사도처럼 모두를 안아올려 날아오르는, 그로 하여금 모두의 기억에 남는 의롭고 능력있는 위인을 떠올리게 되지요.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렇답니까. 찍소리도 못 하고 기어야 할 때가 부지기수고 능력있고 지체높은 인물은 권력과 결탁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로 인해 권력구조의 최상부에 있지 않는 한 더러운 꼴, 좋지 않은 말을 안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살려면, 살고 싶으면, 때로는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까지도 살리기 위해. 현실의 영웅은, 비정상이 정상으로 군림하는 세계에서는 살아만 있어도 영웅이고, 정의는 구질구질하고 하찮은 것을 지켜내는데서 찾을 수 있기도 합니다.
한강 작가가 제주 4.3을 다룬 작품 소개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저는 이 작품 또한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남아야 했던, 살려야 했던 개인의 최선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그것또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고, 그것도, 지극한 사랑과 사투의 이야기라고. 그 공적을 자기 입으로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고도 닿지 못한 이들에 대한 해묵은 죄책감에 슬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이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내는 작가 또한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개인적으로 표제작과 더불어 가장 추천하고픈 작품입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기실 우리 사회에서 때가 아닌 때가 어디 있겠느냐만, 때를 놓치지 말고 읽기를. 사랑을, 사람을 말할 수 있기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었으니 더 늦지만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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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모든 순간이 시였다
박신규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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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인은 왜 시인일까. 소설가도 화가도 아니고, 의사도 판사도 아닌 시를 쓰는 사람. 스승도 대가도 아닌 사람. 시 옆에 나란히 선 인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고민할 때가 있다. 시-인, 시와 사람 혹은 시를 쓰는 사람. 그 소박하고 절박한 이름은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전체적인 구성은 각 장마다 박신규 시인의 에피소드와 그에 담긴 생각, 내용과 관련이 있거나 이어지는 시로 구성되어 있다. 부디, 이 글을 통해 이 책을 만날 독자라면 책 전체를 한 번에 들이켜지 말고 차근차근 곱씹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화려한 일러스트나 으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도는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라든지, 서릿발같은 촌철살인, 네가 다 옳다 위로해주는 말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어찌보면 낡은 사고일 수도, 지루할만큼 담담하고 고요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는 짧고 긴 글이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잔잔한 물 같은 글을 따라가노라면 보면 어느새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커다란 강 한 가운데 서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흐르는 대로 고요한가보다 했던 수면 아래에는 얼마나 사납고 거센 물살이 흐르고 있는지, 기원도 종착지도 알 수 없는 흐름이 생겨나 패이고 쓸어내려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민이 필요했을지, 독자로서는 그저 어렴풋이 더듬어나 볼 뿐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냐만은, 책 디자인은 규격화된 네모지고 납작한 표면을 어떻게 채워넣느냐, 그로 인해 그 책을 집어드는 독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느냐, 그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자 결과이다. 이 책을 처음 만난 날, 나는 꼭 오래된 얼음 아래를 흐르는 물 혹은 산만큼 거대하고 그 두께가 동굴만치 엄청나다는 오래된 빙하 아래서 바라보는 하늘같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서 시작된 감상은 마지막 글을, 문장을, 마침표를 지나 마침내 끝을 말하며 덮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오래된 사람이다, 오래된 생각, 오래된 고민과 사랑을 말하는 시인이구나. 하고.
사랑없는 시는 존재할 수 없다. 온 마음이 부서지도록 사랑하고 또 부딪다 마침내 산산조각난 폐허에서 간신히 건져내는 말이 곧 시가 된다. 타는 목마름으로 숨죽여 불러본 이름이, 빈 집에 갇힌 것이, 심장소리를 빼닮은 가을 모과가, 지구만큼 커다란 슬픔이, 문득, 이탈한 자가 자유롭다는 그 깨달음이. 모두가 사랑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절실하고 절박한 사랑, 삶의 순간을 잇는 깨달음, 그것이 시가 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시를 잘 쓰는 법이 있나요(p.147~)"에 대한 작가의 답과 멀지 않다고.
여러모로 바쁘고 숨차고 또 화려하고 자극적이지 않으면 있던 줄도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시대에 "당신의 모든 순간이 시"라고 말하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모든 순간이 시였음을 고백하는 글들이 참 귀하다. 어쩌면,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고통이 그저 고통뿐만은 아닐거라는 생각과 함께 여물었던 시절들을 껴안고 나 역시 모든 순간이 시였음을 속삭여본다.

*알립니다
위의 "사랑"들은 순서대로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빈 집(기형도)', '가을 모과(문태준)',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신철규)', '이탈한 자가 문득(김종서)'의 것이다.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좋은 작품이니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덧붍여 신철규 시인이 새 시집 『심장보다 높이』(창비)을 냈으니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마음을 함께 느껴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모든순간이시였다 #박신규 #미디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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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의 노래 - 국내 최초 중세 프랑스어 원전 완역본
김준한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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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만 남았던 책을 펀딩을 통해 이렇게 공들인 번역과 디자인으로 만날 수 있다니 기쁘고 또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른 고전문학도 이렇게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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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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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부터 속도감 넘치는 전개에 정신을 차리는 것 조차 어렵다. 대체 어느 동네 작가가 4부 짜리, 그것도 연작도 아닌 작품을 시작부터 이렇게 몰아친단 말인가? 어이가 없다 못해 난감하기까지 한 기분이 들자마자 저번에도 안 읽어 냅다 매운맛을 봤던 그것, 작가의 전작 이력을 뒤졌으나...
국내 번역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지? 나만 빼고 서로 다 아는 사이인 이 기분? 뭐지? 작가부터 캐릭터까지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하는 이 분위기?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 하고 1장을 읽다보면 정의롭고 냉철한 주인공에서 벗어나 현실성있게 부패한 인물과 어딘지 모르게 헐렁헐렁한, 세간에선 나사빠졌다(...)고 일컬어질 인물을 비중있게 내세움으로써 식상함을 탈피하는 작가에게 이유모를 애정같은 것이 솟구쳐오른다. 그래, 추리소설은 이래야지.
그러나? 그 애정은 1장과 함께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는 작가에게 편지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대체 4분지 1을 이렇게 끝내버리면, 나는 어떡해? 나는 어떡하고 당신들끼리만 사이다야? 나도 데려가!
걱정 마세요. 다음 주자가 나를 내다버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각 장 별로 서술자가 다른 만큼 분위기도, 서술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모두가 기발하고 완벽한 추리를 빛내지만 그 모두가 완전하지도, 끝까지 치밀하지도 못하다. 서로가 서로의 뒤통수를 치는 뒤통수 타격 맛집으로 초대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그것이 도리어 매력이랄까.

2장을 마친 나는 또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이 작가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길래 이 야심한 시각에 나를 고민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가... 뒤통수 스코어 2:0. 1장에서의 고민을 되새겨보자. 대체 이 작가는 남은 분량을 어쩌려고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가? 물론 앞사람 가면 뒷사람 온다고, 1장의 해답은 2장에서 얻을 수 있다. 그걸 동치미 국물마냥 홀라당 집어삼킨 범인이 접니다. 전데요. 아니 그치만 들어보세요? 저 작가가 먼저?
폭포처럼 쏟아지는 추리의 달달한 맛에 눈이 돌아가 2장을 해치우고 대가로 얼얼한 뒤통수를 얻어가며 3장을 마친 제 소감은요. 나의 뒤통수 오목거울이 되었다. 작가는 이 한반도 한구석에 놓인 독자의 뒤통수를 물어내라 물어내라.
당신이 누구든, 어떤 추리를 펼치며 각 인물의 행보와 추리에 얼만큼 고개를 끄덕였든 그것은 높은 확률로 뒤통수를 향해 날아온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배신과 충격만을 굳게 각오하고 전진하십시오. 그것만이 당신과 함께할테니. 네, 각오해도 소용 없다는 뜻이지요. 이제사 말하지만 이건 추천글입니다. 앉은 자리에서 숨도 못 쉬고 완주했다는 평을 남기려고 쓴 글입니다.

매번 신간이든 구간이든 소개글을 쓸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어떤 작품은 단 하나의 단서도 커다란 스포일러가 되어 읽는 사람의 김을 빼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과 앞둿면 표지는 작가와 편집부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독자에게 전하는 최고의 단서이자 간절한 힌트이기도 하다. 인터스텔라의 책장 너머 외침처럼. 변방의 일개 독자인 저도 딱 한 마디만 보태겠습니다. 표지에서 느껴지는 모 영화의 기운이 있지요? 분명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표지 귀엽네~하고 넘겼지요? 바로 그것때문에 오목통수 클럽에 회원 하나 늘어났습니다. 축하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선 편지에 추신을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님께. 당장 차기작을 내놓으십시오. 재밌는 책은 무슨무슨 법에 의해 한 번에 두 권씩 내야합니다. 아무튼 그런 법이 있습니다. 당장 차기작을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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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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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소개에 앞서, 습관을 하나 고칠 필요가 있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 대개 앞쪽 책날개에는 저자나 작품 소개가 들어간다. 표지나 띠지, 뒷면의 추천사보다 조금 더 정돈되고 간락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소개고 뭐고 뒤로 하고선 냅다 본문으로 뛰어들어가는 독자는 딱히 숨기려던 의도가 없었을 저자를 향해 "이게 이런 내용이었어?!"라며 전방에 서프라이즈 발사를 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렇다. 띠지의 홍보문구는 저자 안드레 애치먼의 히트작을 거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띠지와 뒷표지의 홍보문구까지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는 나보다 딱 세 걸음 앞서가는 내 운명이었다.", "그는 젊고 서툰 나를 보아준 단 한 사람이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단박에 '옳거니! 이건 아주 화끈한 로맨스다!" 함성을 지르며 냅다 뛰어든 독자가 있었으니, 그래. 내가 그랬다.
반이 넘어가도록 둘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에서 보여준 말랑말랑 끈적끈적 로맨스를 보여줄 기미가 안 보이니 대체 이 남은 분량을 어떻게 수습하려는 작정인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이 어린양이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결국 (아마도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잘 살고 있었을) 저자를 향해 '이녀석 날 속이다니!'라는 노성을 지르고야 말았다는, 그래놓고 곱씹어보니 지나친 문장들이 떠오르면서 결국 앉은 자리에서 밤을 새워가며 다시 한 번 읽었다는, 그런 후기입니다. 애꿎은 저자만 욕을 먹었다는 이야기.

혼자만의 배신과 혼란으로 점철된 초회독은 뒤로 하고, 줄거리도 역시나 뒤로 하고, 개인적인 감상을 나누고 싶다. 전작 『파인드 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그러했듯 애치먼은 독자를 화자의 추억으로 끌어들이는 재주가 아주 탁월한 작가이다. 마치, 독자를 그 때 그 장소에 함께하는 것처럼. 때로는 관객으로, 때로는 이웃한 좌석에 앉아 등장인물의 만담인지 다툼인지 장광설인지 모를 대화를 엿듣는 사람들로 만든다. 그 추억이 허구이든 사실이든 간에.
으레 추억이라 함은 어딘지 모르게 달콤하고 아련하고 그리워 소중하게 품고싶은 무언가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치먼이 그리는 추억은 아련하고 그립기는 하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곱씹자니 고통스러우면서도 놓을 수 없어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는 성질의 것에 가깝다. 그것을 지난 날에 대한 애정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나는 그것을 회한 섞인 향수라고 부르고 싶다. 초회독에 지나쳤던, 책날개의 소개글처럼, 자기애와 자기혐오가 뒤섞인 청춘의 회상은 숨막히는 날씨의 여름, 홀로 취기 오른 밤처럼 고통스럽고, 새로운 질서에 편입해 어서 털어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영영 그 때 그 시간, 그 감각에 머물고 싶어지는, 모순적인 경험이다.

(자꾸만 거론하게 되는) 전작에서 그러했듯 주인공 '나'를 포함해 등장인물 모두는 각자의 결함, 각자의 열등감과 불안을 가지고 있다. 불안한 유학생 신분인 '나'와 택시운전사 '칼라지' 뿐만 아니라 무슨 이유로 잠시 들여보내 준 지는 모르겠으나 용건을 마친 후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내가 닿을 수 없는 기득권, 상류사회의 폐쇄성을 드러내는 교수 부부 까지도. 그렇기에 읽는 내내 고통스럽다. 누구에게나 열등감과 불안과 막무가내로 치닫고픈, 히스테리에 가까운 파괴적 충동이 휘몰아치는 때가 있다. 혹자에게는 현재,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땐 그랬지'라고 회상할 수 있는 아련한 과거일지도 모른다. 누구의 언제가 되었든 간에, 자전소설에 가까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통스럽지 않을 이는 없으리라, 있다면, 필시 고통스러웠을 누군가를 떠올리리라.
두 번을 연달아 읽고나서야 뒷표지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서로에게 무엇이 될 수도 없었던, 다신 돌아갈 수 없어 아름다운 시절에 대하여..." 돌이킬 수 없어 잔인할만큼 그리운 시절이 있다. 어쩌면 풋내가 난다고 할 수 있는 전작들에 비해 헐씬 원숙미가 돋보이기도, 그러면서 역시 설익은 과일처럼 뜨겁고 아리고, 또 아름다운 청춘에 대한 회상이 아주 절정에 이르렀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시대의 젊음과 젊은이였던 모두에게 권햔다. "인플루언서의 브이로그" 속 정돈되고 화려한 삶이 아니라 냄새나고 구질구질하고 두렵고 또 불안한, 그렇지만 찬란하기 그지없는 현재와 기억을 눈부시게 비추는 경험을 할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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