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
도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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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중독이라고 하면 어쩐지 병리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중독'으로 수식되는 것들은 대개 알코올, 마약 등 해로운 물질이나 도박, 게임처럼 썩 긍정적으로 권해지지는 않는 행위가 아닌가. '중독'이 붙으면 어쩐지 문제가 커지는 것 같다. 밤낮없이 그것에만 매달리고 일상을 매몰해가며 파멸로 치닫는...!

다음 내용은 오는 주 같은 시간에 방송됩니다. 유튜브나 OTT 채널에서 짧은 클립과 하이라이트 씬을 모아 볼 수도 있어요. 주연배우의 인스타그램이나 팬사이트에서는 화보와 착용 제품을 모아 볼 수 있고, 소속사에 따라 메신저 대화 서비스를 구독하시면 아침 점심 저녁 새벽 짬짬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
마음에 드는 제품이 너무 비싼가요? 모처럼 마음 먹고 새벽부터 줄 서서 사온 것보다 마음에 드는 모델이 나왔다구요? 걱정마세요. 중고거래가 있잖아요. 매너있는 말투와 좋은 별점 부탁드려요^^ 눈 뜨면 출근, 퇴근하면 녹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다? 배달음식이다. 문앞에 두고 가주세요. 리뷰이벤트 참여해주신 분들께 서비스를 쏩니다! 별점 다섯개 꼭 눌러주세요!
매일 먹는 맛도 질린다. 내 인생 왜 이래? 그래 이게 다 사주가 안 맞아서 그래. 전애인 성격을 봐. INFJ니까 ESTP인 나랑 맞을 리가 있나. 역시 데이트앱을 믿는 게 아니었어. 내가 거기서 왼쪽으로 스와이프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 클래스 강의 밀렸었지. 하나라도 더 해야 뭐라도 비벼볼텐데. 어제 본 가구 예뻤지. 홈꾸는 언제 하고 미라클모닝은 언제 하냐. 이러다 죽기 전에 갓생러 될 수 있기는 할까? 지친다 지쳐. 아 인스타 알림 왜 이렇게 안 와.

지치지 않을 턱이 있나. 우리는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확히는 저자와 같은 대다수의 '젊은 도시인'은 자극 과잉의 시대를 허부적대고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온 감각을 꽉꽉 들어채우는 오감 뿐만 아니라 더 성실하게, 더 짜릿하게, 더 화려하고 더 '있어보이게'. 더, 더, 더!의 세계를 살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이 수수하고 건실하기를 바라는 게 더 우스운 시대가 되었으니 누굴 탓하랴.
근면성실과 노력으로 정상 사회에 녹아들기만 하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이미 세대와 지역으로 촘촘하게 나뉘는 빈부격차로 사라진 지 오래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죽자사자 버티던 젊은이들은 한 번 사는 인생, 즐겨! 질러!를 외치며 YOLO를 외쳤고, 돌아온 일상은 여전히 최저한의 생계보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 사회의 최신 트렌드는 결국 또다시 '노오력(노력이 아니다. 힘주어 '오'를 발음하는 것이 포인트.)'과 자력갱생, '귀티'를 외치며 극복할 수 없는 격차를 겉으로나마 메꿔 모방하거나 어떻게든 차별화를 강조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이것을 'MZ세대 의 빠르고 신속하며 저렴하거나 화려한 만족을 추구하는 세태'라고 조롱하고 싶은 자, 얌전히 정수리에 쟁반이나 맞도록 하라(안다. 이 또한 지나간 유행임을).

누군가는 공감하고 또 누군가는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느냐며 혀를 차겠지만, 이 과잉 자극, 과열 경쟁, 과소비와 헐값 그리고 끝없는 소비촉진 사회에서 청년세대가 '월든'같은 삶을 바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꿈이 되었다. 이 책은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세대에 대한 보고서이자 저자 자신에 대한 분석 내지는 고백이기도 하다.
저자 도우리는 '그들'이 아닌 '나'를 이야기하며 우리 사회의 현재를 낱낱이 들어보인다. 아마도 저자 자신이 클럽 앞에서 첫차를 기다리고 내일이면 후회할 소비에 매달려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리라.

SNS 서비스 오류에 문 닫힌 단골가게 앞을 서성이는 사람처럼 임시보관함을 채우고 또 채우며 트위터야 아프지마!를 외치는 우리는 과연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걸까. 사이버 파랑새는 갓생러의 꿈을 꾸는가? 알티 탄다. 뮤트할게요~

#우리는중독을사랑해 #도우리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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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맑음 - 사진과 이야기로 보는 타이완 동성 결혼 법제화의 여정
무지개평등권빅플랫폼 지음, 강영희 옮김,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네트워크 감수 / 사계절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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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국수한사발, 국화는 찬 모래땅에 피어난다고 했던가. 맥락이야 다를지라도 이따금 그 문장을 떠올려본다. 국수한사발. 국화는 찬 모래땅에 피어난다고. 사람 사는 일에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고.
비가 지나면 무지개가 뜬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큰 비가 지나간 자리에도 무지개가 뜬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약속의 징표라 하지 않았는가.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 우중에 휩쓸려 끝내 마른 땅에 닿지 못한 이들에게 또한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을거라는, 당신 이후의 우리가 같은 곳에서 다른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그런 약속.
무지개는 다양성이기도 하다. 집단에 따라 무지개를 셋, 또는 그 이상의 색으로 나누어 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결국 누군가는 셋, 여섯, 일곱 혹은 그 이상으로 나누어져있다고 말하는 그 무지개는 수많은 색의 연속, 무한한 다양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지개는 또한 다양성 그 자체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소수자인권운동은 꾸준히도 무지개를 상징으로 삼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과 다양성의 상징으로. 비는 영원히 내리지 않는다. 비가 온 다음이면 맑은 날이 찾아온다. 그것은 희망과도 같다. 이 책의 제목처럼. 비 온 뒤의 맑음.

일상을 살아내는 데 급급하다보면 운동이고 뭐고 내 앞가림하기에도 벅찬 게 사실이다. 그러다 현실에 부딪히는 순간, 비단 행사나 시위 현장이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내가 이 사회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주저앉고 싶어진다. 무릎에 힘이 풀리는 것처럼. 그것도 잠시, 결국 숨죽이고 사는 데 익숙하니 도로 말끔한 얼굴을 뒤집어쓰고 '정상인'에 녹아들고자 애쓸 뿐이지만.
2019년 5월 17일, 타이완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 법제화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아시아 최초라니. 이게 찬사가 된다는 것부터가 슬퍼지지만 이러나 저러나 축하할 일이다. 나는 그 현장에도, 당장 한국의 운동현장에도 있지 않은지 오래이니 비슷한 문화권에 선례가 없어 더욱 고된 여정이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소식은 들었으나 이렇게 그 기록을 한 데 모아 보니 그저 부럽고 또 서럽고 두려울 따름이다.
읽는 내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느냐고, 어떻게 그 좌절과 모멸을 견뎌낼 수 있었느냐고, 어떻게 먼저 간 '우리'가 늘어남에 따라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 마음을 끌어안고도 버텨낼 수 있었느냐고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느냐고.

어느 한 순간도 쉬운 것이 없었다. 아마 평등한 혼인권을 쟁취하고 이 책이 나오기까지 그 역사를 써온 이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를 알고 읽는 독자이면서도 순간순간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선거에서 보수 정당이 승기를 잡고 그에 편승하는 혐오발언이 득세할 때 타이완의 활동가들과 연대하는 시민들은 그 어두운 시기를, 끝나지 않을 것처럼 세차게 내리던 그 큰 비를 어떤 마음으로 견뎌낸걸까.
순간순간마다 서로가 서로를 다잡고 전진한 끝에 쟁취한 평등은 그 무엇에도 비견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리라. 이 책은 그 순간들을 함께 헤쳐나온 이들의 기록이자 추모이자 위안과 희망의 등불이다. 나의 기분이, 나의 가치가 다른 이들의 행복을 가로막고 '교화'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 나의 신념이 누군가를 혐오하고 공격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다고 한들 세상은 변할 것이고 우리는 살아남아 새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선언 언제까지나 숨죽이고 살지만은 않겠다는 다짐, 행복해질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런, 그런 외침.

물론 타이완의 선례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동성혼이 법제화되어도 성소수자들이 겪는 인권침해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들을 우리라고 부른다고 한들 우리 사회의 문제가 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은 틈을 내고 앞서나간 이가 있다면 그 다음은 조금 더 넓은 길을, 또 그 다음은 더욱 넓은 길을 내고 더 많은 이들이 나아갈 수 있다. 그들의 승리가, 그들의 평등이 그들만의 것이 아닌 까닭이다.

2018년 11월 24일, 가장 어려웠던 때를 건너게 한 문장과 함께 이 글을 마친다. 잊지 말자. 빛이 도달하기 직전, 그곳이 가장 어둡다. 비가 그치면 맑은 날이 오고 무지개가 뜬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함께다. 이 거대한 우주에서 당신은 혼자 고립된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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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의 나라 - 문화의 경계에 놓인 한 아이에 관한 기록
앤 패디먼 지음, 이한중 옮김 / 반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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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반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상상해보자. 당신에게는 가족이 있다. 집도, 땅도, 마을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온 나라가 전쟁통이 되어 살기 위해서는 세간도 추억도 하다못해 자식까지도 버려가며 낯선 땅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도, 문화도, 생활도 그 어느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 땅의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당신의 언어, 가치관,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도움을 청할 길이 없다. 능력있던 가장도 모든 일을 해치웠던 지혜로운 어른도 한순간에 온종일 집에만 처박혀 멍하니 앉아있다. 때때로 도움이나 제도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손짓발짓을 해가며 온갖 눈총과 한숨 끝에 맞는 건지 아닌건지 모를 뭔가를 구해와야 한다.
어찌저찌 먼저 정착한 먼 친척과 같은 민족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집 한칸을 구해 살아가던 나날, 아이가 아프다. 사랑을 다해 키우던 아이가 눈을 뒤집고 숨을 못 쉬며 온몸을 경련한다. 병원에 갔더니 나의 믿음과 지식은 전부 무용한 것이 되고 말도 생김도 다른 이들이 떼로 몰려와 아이를 이리 뒤집고 저리 헤집어가며 온갖 장치를 매달아놓는다. 듣기로는 저 백인들이 사람 장기를 먹는다고 한다. 혹자는 우리 민족의 수를 줄이기 위해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수를 쓴다고도 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윽박지르는데 서로가 서로의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 서명을 하라니 한다. 그 알 수 없는 문자의 나열, 이 땅에 오기까지 수십수백번도 더 했다. 했다. 내가 알기로 가장 필요한 방법이 있는데 그건 안 된다고 한다. 저들이 주는 약과 주사와 처치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 내가, 온 우주만큼 사랑하는 내 아이를 학대하고 있다고 한다.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남의 집에 훔쳐다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댄다.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단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믿음과 언어, 정체성을 모두 버려야 한다. 거부는 없다. 저항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모두가 이 땅의 이방인이다.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보편적이며 누구에게나 쉽게 납득 가능한,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내가 정당한 성원으로 여겨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세계는 누구에게나 그러한 곳일까? 그렇지 않다. 당장 낯선 장소에만 가도 사람은 적응에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나마 조금 긴장하는 정도로 해결되는 것은 그 장소, 그 상황이 그나마 이해 가능한 시스템에 속하기 때문이다. 범위를 넓혀보자. 해외에 가기 전 우리는 도착지의 문화나 언어를 미리 학습한다. '덜' 당황하기 위함이다. 만일 그럴 시간이 없다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가치관이나 절차를 요구한다면? 뭔가를 설명하려고 애쓰다 결국 찌푸려지는 미간을 하루, 이틀, 일주일, 반년... 수도없이 마주해야 한다면? 평생을 당연한 것으로 믿고 살아온 삶의 방식을 보고 충격을 금치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비명을 지르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면? 그러고도 나의 세계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 책의 주인공처럼 서구사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몽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언제든 갑작스레 낯선 상황에 놓인다면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다.

사람은 그가 속하고 오랜 시간을 살아온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사람의 일 또한 그러한 까닭에 질병 또한 문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적어도 환자 개인 또는 그 보호자가 질병을 이해하는 관점은 그가 속한 문화, 그의 위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4장에서 볼 수 있듯 의료현장에서 발생하는 문화 충돌에 대해 다수 혹은 강자의 입장에 있는 이들은 어떻게 우열을 배제하고 의료대상자와 보호자를 존중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치료적 협력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현대 서구 의료 체계, 그 중에서도 대형병원은 환자보다는 의료진 및 기관을 중심으로 한다. 환자 또는 보호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맥락 안에 있든 간에 의료현장에서 주도권을 갖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분명 효율성을 높이고 각종 변수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에 적합하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스템 앞에서 단순한 몸 또는 부위, 질병으로 존재하는 환자에게는 그 자신의 배경이 있다. 그는 사람이다. 6장과 7장에서 볼 수 있듯 문화적 배경과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다중압박상태에 놓이는 의료대상자 및 보호자에 대해 공공의료시스템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들의 장기적인 건강을 위해 사회복지시스템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하는가? 만일 문화적 신념이 효과적인 치료방침과 충돌할 때 의료진은 어떤 태도로 대상자들을 대해야 하는가?

이 책은 비극인가. 그러하다. 그것도 아주 큰 비극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감히' 고마워할 줄 모르는, '미개하고 비문명적인' 몽족 이주민의 탓인가? 과연 그럴까? 애초에 그들은 왜 자급자족하던 땅에서 벗어나 이곳까지 떠밀려왔는가? 왜 알지도 못하는 언어의 나라로 도망치고 쫓겨와야 했는가?
민족으로서의 몽족의 역사는 가히 피란과 자구의 삶이라고 할 만하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면서도 굴복과 동화를 거부했던 이들은 미국에 '비밀군사'로 이용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이 난민이 되어 미국으로 몰려왔다. 살기 위해서, 또 마땅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그렇게약속했기 때문에, 우리의 목숨을 걸고 당신들의 전투를 대신 치렀으니 응당 신의를 지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문제는, 달리고 떠내려가며 당도한 나라가 입을 싹 닦은 정부와 그런 일이 있었던 줄도 모르는 대다수의 국민, 알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 오지는 말라는 파렴치한으로 구성된 곳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기가 울면 아편을 물에 타서 먹었어요. 이기가 잠잠해져서 군인들한테 들키지 않게요. 아기 소리 매문에 알려지면 다 죽을 수 있으니까요. 아편을 타 먹이면 아기는 대개 곯아떨어져요. 하지만 잘못해서 너무 많이 먹이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 일이 아주 많았어요.” (…) 몽족의 경우 아편 과다 복용으로 아기가 죽는 일은 워낙 자주 일어나서 신문 머리기사를 장식하거나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한 나라에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기는커녕 살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로 무덤덤하게 가족과 친지에게 알려지는 정도였다.(p.270)

어쩌면, 아니 분명히 이것은 받아들인 나라의 시스템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마땅히 환대해야 할 이웃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렀다 가는, 돈만 축내는,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대상'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과 생각이 다른 사람간의 소통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조율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과 비용과 기회가 충분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될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이 책에서 리아, 한 아동과 그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모든 비극들이다.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다. 억울한가. 과연 그럴까?
이제 우리는, 적어도 한국은 다민족국가임을 부정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그저 모르쇠하며 단일민족의 순수성으로 대중을 동원하기에는 개개인이 마주하는 사회의 모습이 이미 그렇지 않게 되어버렸다. 몽족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 그들의 혐오범죄가 남 일처럼 느껴지는가? 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한다고 치자. 어느 누가 선뜻 환영하겠는가? 적어도 목소리 큰, 다수라고 여겨지는 권력집단은 아닐 터이다. 당장 온 나라를 시뻘겋게 뒤덮는 십자가는 그러려니 하면서도 모스크 하나 들어선다는 데 온 나라가 뒤집어져가며 악을 쓰지 않는가? 이주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난민을 환대하는 것에도 하늘이 무너질세라 반대하지 않는가? 자치권을 줄 수 없다면, 우리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이 다르게 살아가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사회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이전에, 그들이 나와 같은 권리를 보장받는 것에 크나큰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책을 단순히 의사소통과 협력에 실패해 가능성을 놓친 비극적 케이스로만 기억할 수도 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전보다 더, 앞으로는 더욱 다채로워질 사회는 소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을 읽을 모두가 곱씹어보기를 바란다. 잠을 설치고 막막함에 몸부림치며. 내가 아닌 그들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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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사윌 때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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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이를테면, 죽은 이를 살려내거나 무너지는 집을 떠받치는 것과 같은 것들. 내 나라, 기껏해야 이웃 나라 내지는 높으신 분들이나 오간다는 저 먼 나라가 세상의 전부이던 시대가 있었다. 나라가 없어진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아 상상도 할 수 없는 재앙과도 같던 시대가 있었다. 나라 없는 설움, 그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없고 보호받을 길 없는, 이름을 잃은 사람들. 그 막막함의 한복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가 제목으로 말하고자 했던, 별빛이 사위는 때는 언제일까. 사지임을 뻔히 알면서도 부러진 다리를 동여매고 바라보는 하늘이 아닐까. 오래된 밤하늘이 신새벽에 밀려 바래지는 때가 바로 별빛이 사위는 때이다. 오래된 나라가 새로운 이름과 힘에 밀려 사그라지고 보이지 않는 이름과 터와 사람을 남기듯이. 또한 작가의 말처럼 어둠이 머물고 먼동이 트이는 때가 별빛이 사위는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금 살아남아 이어질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하는 것은 아마도 독자의 몫이리라.

읽는 내내 몇번이고 등장하는 망국의 옛땅을 그리워했더랜다. 기억 속에 교과서며 시험에나 나오던 먼 옛날 지도로만 남아 희미해진 그 땅과 지워진 물길을 손끝으로 더듬어보고 싶었다. "애달파서 더 망설이지 못"한다는 마음이 대체 무엇일까, 헤아려보며(p.250). 아마도 누군가에겐 존재했을 그 이름과 사연이 쓰리고 서러워 알지도 못하는 이의 절망에 덩달아 주저앉고 싶어졌다.
망국이란 단어는 참으로 묘하다. 사람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그것에 실체없는 이름을 붙여 살을 붙이고 테를 쌓는데, 기이하게도 그 이름에서 힘이 나온다. 여러사람이 같은 이름으로 뭉치고 공유하는 믿음이 있을 뿐인데, 그 허상이 사라지고 먹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이, 때로는 아주 많은 사람이 살고 죽어나가며 때로는 죽느니만 못하다고 외치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망국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망한 나라의 이름을 떠안아야 했던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누구 하나 편치 못한 이 이야기는 외로워졌다 끝내 혼자가 되고 다시금 전장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덧붙여진 후기에서 말하는 평화는 과연 누구의 평화인가. 명분이 무엇이고 세상이 어떻든 전쟁은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죽어야, 부딪는 힘이 사그러들어야 끝을 본다. 평화를 얻은 땅은 그곳이 어디든간에 기실 온 땅이 무덤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전쟁은 영웅의 것이 될 수 있을까. 전쟁은 웅장하고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 장관이 될 수 있을까. 남의 전쟁은 그렇다. 한치도 나의 일이라 여기지 않는 남의 전쟁이 그러하고 상처 없이 살아남은 자에게 그러하다. 남의 전쟁이 나의 것이 될 때, 전쟁에 휩쓸린 자의 심정을 이해할 때 그것은 더이상 장관도 무훈도 아닌 그저 상처요 참극이 되고 만다. 그 안에서 없는 자는, 약한 자는, 아래에 있는 자는 더더욱 무덤 가까이, 어쩌면 무덤이 될 진창에서 허부적대는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살아남기 위해 강도질을 하는 무리가 내일이면 살려달라고 목숨을 애걸하는 쪽이 된다. 이것이 참극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모두가 불행해진다. 전쟁을 무용담으로 말할 수 없는 이 모두가.
”아암, 우리가 가엾고 불쌍허다마다...... 다들 지발, 싸움질 좀 그만해야 쓰는디...“ (p.226)
“(…) 오랫동안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려온 백제 사람은 당의 황제와 신라의 왕 중에서 누가 나은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걸 모르시진 않겠지요?" (p.278)

작중 예스럽고 드문 말 뿐만 아니라 구어체가 문어체가 섞여 다양한 어투가 자주 등장한다. 시대를 구현해내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까? 말맛이 사는 것도 있지만 도리어 약간 낯설게 느껴져 이것이 과연 누구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어쩌면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승리와 혈기의 기록이 아닌 위와 아래를 가리지 않는 설움과 처참함이었을 것이다. 찰나와도 같았던 일부의, 겉으로나마 평화로운 시대가 가고 다시 전세계가 전쟁과 대립으로 휘말려들어가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별빛사윌때 #역사소설 #별빛사윌때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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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궁궐 기담
현찬양 지음 / 엘릭시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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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로부터 금기는 여러 종류의 진실-때로는 고발에 가까운 내용-을 함축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나는 이것을 불가해한 것 혹은 차마 입밖으로 내기도 두려운 것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전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창귀에 얽힌 금기 같은 것들. 국토의 많은 부분이 산지인 한반도는 오래도록 호랑이의 영역권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호랑이가 수영까지 잘 하는 짐승인 탓에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조차도 안전지대가 될 수 없었다. 오죽하면 호랑이표 단골 밥집 쯤 되는 진도의 전통 가옥에는 개구멍이 따로 있겠는가. 이런 땅에서 호환은 한 집 건너 한 집, 해마다 일어나는 일이었고 그 누구도 안전할 수 없었다. 그 덩치며 힘이 인간이 대항하기에는 터무니없이 강대한 탓에 일행 내지는 일가의 몰살을 피하기 위해서는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가족, 친척, 이웃의 처절한 비명을 무시하고라도 도망치거나 숨어야했고,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창귀가 사람을 홀린다는, 절대로 돌아보지도 가까이 가지도 말라는 금기가 생겨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혹은 잊힐만하면 등장하는 어린아이, 여인, 한을 품고 죽은 짐승의 이야기는 금기가 지닌 죄책감과 그것을 면피해보려는 발버둥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한다. 박해가 없었다는 강력한 부정은 도리어 그 박해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밤 늦게 나다니지 마라, 특정한 어느 날에는 어디에 가지 말라, 누군가가 흔적없이 사라지더라도 그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존재의 소행이니 이유를 묻지 말며 그 부재는 존재를 지워버림으로써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것이 되게 하라. 그런 말들이 금기를 품은 괴담, 기담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궁궐에는 왜 이리 금기가 많습니까?"
그야, 궁궐만큼 억눌리고 숨죽인 사람이 모인 곳이 없기 때문이다. 구중심처 권력을 틀어쥐고 군림하는 이만큼 죄가 많은 이가 없기 때문이다. 신분과 성별, 계급으로 짜여진 철저한 수직사회 속에 자유로운 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정보를 나른다. 설령 그것이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지어낸 것일지라도. 입에서 입으로, 귓속말과 그믐달 아래 은밀한 속삭임으로 전해지는 밤의 이야기에는 양기, 남성, 양반, 떳떳한, 높으신 분들, 그런 단어로 묶인 낮의 말로는 차마 상상할 수도 없는 세계를 전한다. 군자불어 괴력난신이라. 두려워하되 인정하지 않으니 말할 길이 없다. 누구보다 죄, 보복, 분노로 웅크린 존재를 확신하되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꺼리니 피하고 도망칠 길이 없다. 실로, 군자불어 괴력난신이라.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도 직접 읽는 경험에 미치지 못하리라. 엎드린 자의, 공동체의 밑바닥 그 어디에 눈을 빛내며 웅크린 '것'에, 속삭이고 인내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쉿, 우리 중에 우리가 아닌 것이 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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