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맑음 - 사진과 이야기로 보는 타이완 동성 결혼 법제화의 여정
무지개평등권빅플랫폼 지음, 강영희 옮김,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네트워크 감수 / 사계절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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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국수한사발, 국화는 찬 모래땅에 피어난다고 했던가. 맥락이야 다를지라도 이따금 그 문장을 떠올려본다. 국수한사발. 국화는 찬 모래땅에 피어난다고. 사람 사는 일에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고.
비가 지나면 무지개가 뜬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큰 비가 지나간 자리에도 무지개가 뜬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약속의 징표라 하지 않았는가.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 우중에 휩쓸려 끝내 마른 땅에 닿지 못한 이들에게 또한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을거라는, 당신 이후의 우리가 같은 곳에서 다른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그런 약속.
무지개는 다양성이기도 하다. 집단에 따라 무지개를 셋, 또는 그 이상의 색으로 나누어 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결국 누군가는 셋, 여섯, 일곱 혹은 그 이상으로 나누어져있다고 말하는 그 무지개는 수많은 색의 연속, 무한한 다양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지개는 또한 다양성 그 자체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소수자인권운동은 꾸준히도 무지개를 상징으로 삼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과 다양성의 상징으로. 비는 영원히 내리지 않는다. 비가 온 다음이면 맑은 날이 찾아온다. 그것은 희망과도 같다. 이 책의 제목처럼. 비 온 뒤의 맑음.

일상을 살아내는 데 급급하다보면 운동이고 뭐고 내 앞가림하기에도 벅찬 게 사실이다. 그러다 현실에 부딪히는 순간, 비단 행사나 시위 현장이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훅 치고 들어오는 '내가 이 사회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주저앉고 싶어진다. 무릎에 힘이 풀리는 것처럼. 그것도 잠시, 결국 숨죽이고 사는 데 익숙하니 도로 말끔한 얼굴을 뒤집어쓰고 '정상인'에 녹아들고자 애쓸 뿐이지만.
2019년 5월 17일, 타이완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 법제화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아시아 최초라니. 이게 찬사가 된다는 것부터가 슬퍼지지만 이러나 저러나 축하할 일이다. 나는 그 현장에도, 당장 한국의 운동현장에도 있지 않은지 오래이니 비슷한 문화권에 선례가 없어 더욱 고된 여정이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소식은 들었으나 이렇게 그 기록을 한 데 모아 보니 그저 부럽고 또 서럽고 두려울 따름이다.
읽는 내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느냐고, 어떻게 그 좌절과 모멸을 견뎌낼 수 있었느냐고, 어떻게 먼저 간 '우리'가 늘어남에 따라 포기하고 싶어지는 그 마음을 끌어안고도 버텨낼 수 있었느냐고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느냐고.

어느 한 순간도 쉬운 것이 없었다. 아마 평등한 혼인권을 쟁취하고 이 책이 나오기까지 그 역사를 써온 이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를 알고 읽는 독자이면서도 순간순간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선거에서 보수 정당이 승기를 잡고 그에 편승하는 혐오발언이 득세할 때 타이완의 활동가들과 연대하는 시민들은 그 어두운 시기를, 끝나지 않을 것처럼 세차게 내리던 그 큰 비를 어떤 마음으로 견뎌낸걸까.
순간순간마다 서로가 서로를 다잡고 전진한 끝에 쟁취한 평등은 그 무엇에도 비견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리라. 이 책은 그 순간들을 함께 헤쳐나온 이들의 기록이자 추모이자 위안과 희망의 등불이다. 나의 기분이, 나의 가치가 다른 이들의 행복을 가로막고 '교화'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 나의 신념이 누군가를 혐오하고 공격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다고 한들 세상은 변할 것이고 우리는 살아남아 새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선언 언제까지나 숨죽이고 살지만은 않겠다는 다짐, 행복해질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런, 그런 외침.

물론 타이완의 선례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동성혼이 법제화되어도 성소수자들이 겪는 인권침해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들을 우리라고 부른다고 한들 우리 사회의 문제가 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은 틈을 내고 앞서나간 이가 있다면 그 다음은 조금 더 넓은 길을, 또 그 다음은 더욱 넓은 길을 내고 더 많은 이들이 나아갈 수 있다. 그들의 승리가, 그들의 평등이 그들만의 것이 아닌 까닭이다.

2018년 11월 24일, 가장 어려웠던 때를 건너게 한 문장과 함께 이 글을 마친다. 잊지 말자. 빛이 도달하기 직전, 그곳이 가장 어둡다. 비가 그치면 맑은 날이 오고 무지개가 뜬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함께다. 이 거대한 우주에서 당신은 혼자 고립된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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