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이런 말은 본 적이 있다. 어렸을 땐 누구나 화가를 꿈꾼다고, 그러나 자라서도 그리는 사람만이 화가가 된다고.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모두 청자로 태어나 독자가 된다. 이것은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주어지는 대로 수용하던 존재가 자기만의 서사를 쌓는다. 최후의 영역, 그 어떤 존재도 침범할 수 없는 세계, 내면의 이야기가 차올라 형태를 갖추고 마침내 범람하는 것, 그것이 이야기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이가 작가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 글에는 힘이 있다.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만한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가? 침묵은 쉽다. 침묵하게 하는 것,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더 쉽다. 그러나 '쓰기'의 원천을 말살하기란 쉽지 않다. 열망은 힘이 세다. '써야만 하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약자란 무엇인가. 쉽게 사라지고 지워지는 자다. 그렇게 여겨지는 자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약자는 약한 자인가? 뺏길 것이 거의 남지 않은 이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기를 요구받을 때 순순히 빼앗기는가? 사람을 삶의 경계밖으로 밀어내는 일은 그렇게나 간단한가?


"그"의 도둑질은 문학혼이다. 열정이요 온갖 사연을 방패처럼 휘감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지사다. 연민의 대상이자 사소한 오점이다. 반면 도둑맞은 "그녀"의 분노는 한갖 발버둥에 그친다. 치사스런 투정이다. 대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적

빼앗김에 익숙한 이들은 안다. 그렇게라도 악을 쓰고 지켜내지 않으면 내 것은 이름조차도 존재하지 못할 것을. 그런 연유로 "그녀"의 이름은, 정당한 주인이자 한 사람으로서의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못했다. 하다못해 반역자, 반동분자로도.

이것은 완전한 패배를 시사하는가? 지겹도록 들어온 "현실"의 재현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닐 수 있음에서 시작한다. 너무도 뛰어났으므로, 그러나 순종하고 침묵하기를 거부했으므로 지워졌다. 어떤 공백은, 어떤 '부정'은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존재를 증명한다. 지워졌으므로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p.125 작희가 수저를 놓은 후 트림을 하자 탕국집에서 밥을 먹던 남자들이 무슨 연유인지 '되바라진 년'이라는 소릴 했다. 남자도 대동하지 않고 그것도 여자 혼자 아무 거리낌 없이 밥을 먹는 게 그들 눈에는 속이 뒤틀릴 정도로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작희는 남자들을 경멸하는 눈으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되바라진 년이면 당신들은 여자나 깔보는 치졸한 놈들이겠지.


나는 여기서 다시 묻는다. 결국에는 누가 "약한 자"였느나고. 고고한 명예로 담장을 쌓는, 제 말을 하는 여자를 집안에 처박아놓고 주먹질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속이고 훔치지 않으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닌, "모던 걸"을 욕하고 후려잡는 그러지 않으면 어떤 자리도 내지 못하는 "그들"은 강자였는가.

목숨을 걸고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부, 누군가에게는 쾌락, 누군가에게는 영예,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글. 쓰는 것.

유사 이래 글쓰기가 좋은 밥벌이 수단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좋은 글이 그 자체로 인정받은 경우는 드물다. 즐거운 글쓰기,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무시로 굶어죽고 밀려나 입을 닫고 붓을 꺾었다.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p.244 "우리는 무엇을 위해 쓰려고 하는 걸까요?" 나는 남은 힘을 쥐어짜 가까스로 작희에게 물을 수 있었다. 작희는 대답 대신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그렇게 지워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낼 수 있을까? 지워지고 덧씌워진 자리에서 희미한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까? 본래의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기가 막혀 말이 되지 못하는 것을.

이 책은, 작은 정의다.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에 이대로 끝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설사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괴로워도 충분히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만 쓸 수 있다면 그 어떤 고독이라 해도 친구처럼 곁에 두고 오래오래 쓸 터"인 이들의 흔적이다.

이름을 돌려주는 것. 쓰려는 여자를 쓰는 여자로 두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무도 모르게 두지 않는 것, 그럴 수 없는 것. 시간을 넘어 시선이 맞닿는다. 바람이 분다. 멀고 오래된 곳으로부터.

p.290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것조차 비루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티나 싶은 날도 있었다. 문득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러나 작희는 한 번도 목숨을 버리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꼭 살아야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쓰고 싶은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제공: 교유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평등 이데올로기 - 수저 계급 사회에 던지는 20가지 질문
조돈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부터 경제면 기사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보더라도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만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재빨리 쓱쓱 읽은 뒤에 덮어두고 다시금 숨을 고르는 식이다. 첫째 이유는 속된 말로 빡쳐서...고 둘째는 이 "경제"가 누구 입장에서의 "경제"인지가 너무 뻔해 도무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의문이었다. '떨어질 콩고물도 없는 자들이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왜 저렇게 재벌에 이입하지 못해 안달인가'? 다시금 시작되는 질문. 어째서 이 극심한 빈부격차의 사회에 저 비논리적인 믿음이 일종의 진리 내지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자리하고 있는가?

조금 돌아가보자. 한국 태생의, 이주배경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 한국 바깥의 삶, 비주류의 경험을 하지 않았던 이라면 '다름'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실질적으로는 섬인 국토, 인접국의 그것과 소통이 어려운 언어, 비교적 "단일한" 인종을 상정하는 전체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이념 교육. 그 모든 것들이 다양성을 경험하고 체화할 기회를 가로막는다.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배경과 사회경제적 계급에 속한 이들과 뒤섞이는 경험이 부족하다. 징집대상 집단은 "군대에서 온갖 사람 다 만난다"고 여겨지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환경이다. 삶의 전반에서 마주치고 알아차릴 기회 자체가 적고, 있다고 한들 실제적인 경험으로 와닿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파편화된 사회' 라든지, '개인주의 세대'나 '좁은 식견' 따위로 치환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사회적 안전망과 공생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계급체계 바깥을 상상할 능력마저 잃은 꼴이 작금의 우리 사회인 셈이다.

전국각지에 공실이 남아도는데도 "내 집 마련"이 인생 목표인 사회, 평생을 벌어도 노후를 장담할 수 없는 사회, 아무리 발버둥쳐도 "타고난 수저"를 뛰어넘을 수 없는 사회, "어린이 재벌"의 이자소득이 평생을 노동한 숙련공의 전재산을 뛰어넘는 사회는 분명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가 아니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도, 실력과 자격의 문제도 아니다.

p.38 반세기 동안의 고속 경제 성장을 통해 1인당 GDP가 미국 달러 명목 가치 기준 30배나 상승했지만 생활 수준이 그만큼 상승했다고 실감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국민소득 총액은 크게 팽창했지만, 소득 분배가 불평등하다면, 경제적 풍요의 혜택은 일부 고소득층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 실태의 문제다.

p.83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피지배계급을 상대로 지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계급이 수용하여 사회 전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배계급은 기존의 계급 역학관계와 함께 자원의 분배•재분배 구조를 유지하며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현대와 같은 형태의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역사는 생각만큼 길지 않다. 사유재산의 범위가 기초인권과 생존, 사회적 안전망까지도 침범하는 횡포의 뿌리는 기대만큼 깊지 않다. 그 말은, 이 체제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타들어가는 도화선에 모른척 눈 돌리고 있는 사회는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다. 분노는 힘이 세다. 공분이라면 더더욱.

"못 살겠다. 갈아보자". 익숙한 구호다. 그러나, 가능한가? 지금 우리 사회는, "기회는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가? 국가는 정의의 편인가? 그 "국가"는 누구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다시금, 우리 사회는 진실로, '이렇게는 못 살겠으니 갈아볼' 준비가 되어있는가?

p.84 이데올로기적 호명은 호명자와 피호명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와 각자의 위치•역할을 확인해주고 사회 질서의 지시와 요구를 수용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피호명자는 불평등 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불평등한 분배•재분배 구조를 수용하게 된다.

p.336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편, 경험 속에서 형성된 시민들의 평등 감수성과 공정 감수성은 불평등 이데올로기가 불평등을 공정한 것으로 정당화하기 어렵게 한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에 대한 기대와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현실 사이의 괴리는 시민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주며 시민들의 불만을 증폭시킨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당연하지 않음에 대해 고민해온 이에게 제목이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 "불평등 이데올로기". 이미 사회체제 전반에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해버린 지배논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책은 답이 아니다.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 단일한 해답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제제기다. 이러다간 정말 다 죽는다는 절박한 호소이자 이해를 도울 하나의 길이다. 독자에게는 응답하고 질문할 책임이 있다. 어째서 이렇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p.285 한국 재벌은 경제적 수탈로 이득을 취할 뿐만 아니라 온갖 불법•비리 악행으로 명백하게 상호성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상호성 원칙을 위반하는 재벌들은 시민들의 마음속에 신뢰와 존경이 아니라 불신과 질시의 정서가 자라게 한다. (...) 재벌들이 상호성의 원칙을 위반할 때 국가 권력은 상호적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할도 수행하지 않았다.

p.329 사회 서비스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공성을 강화하여 사회적으로 제공하고, 공기업을 사유화하지 않고 공공재를 위한 국가•지자체의 정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며, 기업 지배 구조를 주주 지배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 협력 업체와 지역 공동체 등 이해 당사자가 지배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 노동자 중심 주체 형성 전략과 소득 재분배 과제가 잘 진행되어야 이행 주체와 폭넓은 지지 기반이 형성될 수 있어서 시장경제 모델의 제도 개혁도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랑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빼앗긴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대화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건인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는 이와 마주해본 적이 있는가. 분명히 말을 한 것 같은데, 분명 소리를 지르고 미간을 찌푸리거나 애원하거나 눈을 크게 뜬 것 같은데, 상대에게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던 적이 있는가.

그럴 때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제일 먼저, 다시 말하게 된다. 묻는다. 내가 한 말을 이해했냐고, 제대로 들었냐고. 그 다음엔? 화를 내거나 애원하거나 가진 것을 총동원해 상대를 이해 가능한 세계에 놓으려 애를 쓰겠지만...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는, 해 본 사람만이 안다. 그것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세계에 놓인 자가 가장 잘 안다.

p.337 나는 소피아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만, 소피아는 내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소피아가 쓰는 말을 알아듣지만, 소피아는 내가 쓰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는,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권력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지금까지 읽어온 켄 리우의 작품들은 내게 공통된 인상을 남겼다.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외롭고 잔인한 세계라 할지라도 마주할 눈이 있다면, 천진한 웃음이 있다면, 소박하고 따뜻한 대화가 오가는 자리가 있다면, 지켜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먼 미래의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이번엔 달랐다. 냉소적이고 절망적이었다.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희망은 더욱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오만함과 무력함. 최악의 최악만을 골라 선택하는 동물, 끝없이 가지고도 탐욕스럽기를 멈추지 않는 동물, 반성도 참회도 모르는 동물. 그리고, 아주 드물게 차마 선하지 않기를 택하지 못하는.

p.27 "환경을 오염시킨 책임이 가장 컸던 부자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발전을 멈추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지 말라고 했어. (...) 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가난한 이로 하여금 부자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도, 피부색이 어두운 이들이 피부색이 밝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애쓰지 못하게 막는 것도."

p.371 선진국이라는 오래된 꼬리표는 비록 수 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 뜻이 변하기는 했지만, 강직한 도덕성과 비슷하게 여겨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계를 가장 먼저 가장 지독하게 오염시킨 장본인이 바로 선진 제국이었고, 그럼에도 감히 자신들을 따라 했다는 이유로 인도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장본인 또한 다름 아닌 선진 제국이었다.


만일, 틀에 박힌 상상처럼 외계 종족이 찾아와 묻는대도 할 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너희 종족이 여전히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렇기에 묻고 싶어졌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따뜻한 이야기를 그려내던 사람을 이렇게나 냉소적으로 변하게 했는지.

다시금 더듬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전에도 충분히 그래왔음을. 보고 싶은 면만 보고, 잠시간의 동정과 감동에 젖어 성급히 책장을 넘겨버린 건 바로 나였음을. 말이 되지 못한 것을 애써 활자로 그려내는 시도에 의미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p.154 "그자들은 너한테 과거는 과거고, 죽어고, 이미 사라졌다고 말하지. 자기네는 새사람이라고, 예전 자신들이 한 짓에는 책임이 없다고 말해. (...) 우리 가운데 일부는 집단 망각을 생존의 대가로 받아들였어.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난 너고, 넌 나야. 과거는 죽지 않아. 과거는 배어나고, 누출되고, 침투하고, 튀어나올 기회를 기다려. 네가 지닌 기억이 곧 너야..."

p.325 감정의 합의가 사실의 합의를 대체했다. 가상현실을 통한 대리 체험의 감정적 수고는 실제로 조사하고, 비용 및 편익을 평가하고,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등의 육체적 수고와 정신적 수고를 대체했다. 여기서도 진위를 입증하는 수단은 작업 증명이었다. 단지 작업의 종류가 다를 뿐이었다.


13편의 단편들은 일관되게 물러설 수 없는 의지를 담고 있다.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 지켜야만 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꺾이고 부러지고 상처입을지라도. 과연 독자가 자신의 집으로 삼을 이야기를 발견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마음이 가득 배어있었다.

이에, 나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답하련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한 줄을 덧붙인다. '...그런데 빛이 있다. 아주 희미한, 그러나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어떤 빛이 있다. 이 빛은 무엇인가?'"

p.43 나는 엄마에게 말해 주고 싶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위대한 삶을 살고 싶었던 엄마의 충동을, 자신의 사랑으로 태양을 어둡게 만들어야만 했던 엄마의 간절함을, 난해한 문제들을 풀고자 했던 엄마의 분투를, 불완전한 것인 줄 알면서도 기술적 해법에 걸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믿음을, 이해한다고. 우리는 흠 있는 존재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이롭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엄마에게 말해주고 싶다.

p.248 앞서 본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거듭 또 거듭 스쳐 지나갔다. 이해가 늘 생각을 거쳐서 찾아오는 건 아니구나. 때로는 이렇게 두근대는 심장 고동이나, 이렇게 가슴 저린 뭉클함을 거쳐서 찾아오기도 하나 봐.


*도서제공: 황금가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월의 은빛 눈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이지 않는 것은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알지 못하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사람의 존재가 그러하다.

유난히 견디기 힘든 날들이 있다.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고 느낄 때, 여긴 내 자리가 아니라고, 사실 그런 건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느낄 때. 돌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이대로 영원히 떠돌며, 주변인으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숨이 턱 막혀올 때.

부적절감, 어울리지 못하는 느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수치심, 그리고 자괴감. 중심과 정상으로부터 밀려나있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주변인, 2류인간이라는 뼈아픈 모멸감.

p.19 다 됐고, 이제 더 이상 '당신은 필요없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 더는 못 참겠다. 다른 것보다 이제 두 번 다시 면접 같은 건 보고 싶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소리내서 크게 울지도, 악을 쓰며 발버둥치지, 차마 애꿏은 데에 분풀이를 하지도 못하는 보통의 사람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세계만큼이나 잔잔한 이야기. 쓸쓸하지만 따뜻한 문장들은 가만히 등을 받쳐주고 손을 잡아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 부분이 일본소설다운 면이려나. 잔잔히 흘러가는 일상, 아침으로 시작해 밤으로 끝나는 하루, 그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울분, 좌절, 외로움, 그리고... 무능감.

그 모든 울음, 채 눈물이 되지 못한 두려움과 서러움과 외로움을 끌어안는 품, 눈을 감고 고개를 기대라는 손짓, 더는 혼자 두지 않겠다는 다짐, 너도, 나도.

p.60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나한테 말해줬으면 싶었다. 너는 너 나름대로 열심히 해왔구나, 하고.

p.92 독자들은 주인공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과 캐릭터에 빠져들 것이다. (...) 주연급 이외의 인간은 너무나 쉽게 목숨을 잃는다. 자신의 인생이나 사정은 단 한순간도 조명받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의 사정으로 살해당하는 이들. 그리고 나는 말할 것도 없이 간단히 죽는 쪽의 인간이다.


세상에 주먹질을 하지 않고도 위로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함께 설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안일함으로 충분히 물러난 태도인가. 이 또한 방관인가. 그럼 어떤가, 우리는 이렇게 작고 무력한 존재인 것을.

인간애를 녹여낸 미스터리, 라는 소개에 잠시간 망설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사람의 마음, 그 바닥을 의심케하는 장르가 인류애도 아니고 인간에를 끌어안는 시도를 했다고?

첫 작품을 읽자마자 느꼈다. 미스터리가 꼭 무서울 필요는 없다.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동시에 이렇게, 작게 웃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우리 종족의 잔인함과 어리석음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절망을 안겨줄 수 있지 않은가.

p.264 "문제는 우리 인간이 대단한 위험을 동반하는 방법이나 사악한 방법도 생각해내고 만다는 겁니다. 생각해낸 이상 그것을 실현하고 싶다는 호기심을 누르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 위력을 알게 되면 쉽게 버릴 수 없지요. 헤매면서도 그때그때 변명을 찾아내서 결단을 뒤로 미루고 계속 사용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파멸적인 피해가 발생한 뒤에도요. 가장 바보 같은 예가 핵무기이고, 가장 무책임한 예가 원자력발전입니다."


희망은 모든 것이 술술 풀려나가는 행운에 있지 않다. 고난조차 알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무심히, 당연하게 받아먹는 삶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독과 좌절, 연민과 낯선 이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말의 힘을 믿는다.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에서 소리없이 내리는 눈,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믿음, 희망. 그 앞의 작고 작은 인간에 손을 내미는 일, 그것이 문학의 힘이라면 힘일 것이다. 나는 이 손길의 미약한 힘을 믿는다.

"지구 중심에 소복이 쌓여가는 은빛 눈. 내 안에도 뭔가가 내려서 쌓이고 있을까."

p.68 "맞아, 연구도 사람 흉내에서 시작이에요. 과거의 연구, 누군가의 방법, 많이 공부하고 똑같이 해봐요. 잘 안 되는 부분, 더 잘 하고 싶은 부분, 반드시 생겨나요. 그러면 궁리하죠. 그렇게 해서 조금씩 진보해요. 정말 조금씩. 당신 일도 똑같죠?"

p.230 "그래도, 대단한 건 내가 아닙니다. 자연이죠. 이렇게 작고 이렇게 정교한 유리그릇을 만들어냈으니까요. 나는 그저 인간이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유리 예술품을 줍고 모을 뿐, 자연을 빌려서 내 작품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도서제공: 비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건한 미식가 - 나를 돌보고 남을 살리는 초식마녀 식탁 에세이
초식마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You are what you eat". 무엇을 먹는지 알려주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던, 어느 미식가가 했다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먹고싶은 것과 차마 먹을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고민한 나는, '먹는 인간'인 나는 무엇인가.

사는 일은 먹는 일. 살아있다는 것은 먹고 먹히는 거대한 순환 사이클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태어난 것은 다른 존재를 먹고, 흡수하고, 자신의 일부로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자기 자신마저 자연으로 흩어져 되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예외일 수 있는 생명은 없다. 뭉쳤다, 흩어진다. 먹고, 먹힌다. 삶은 생명-물질의 이동이다. 주고받기다.

진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연속에서 유일하게 어긋난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인간이다. 길을 끊는다. 먹기만 할 뿐 먹히지 않는다. 착취할 뿐 되돌려주지 않는다. 마치 생명이 인간의 전유물인 것처럼. 온 세상이 인간을 위한 무한의 자원인 것처럼.

p.172 누군가는 비건을 극단적이라고 말하지만 순서가 거꾸로입니다. 극단적인 육식주의 때문에 비건을 택합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고기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같이 동물이 들어간 식사를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맛을 위해 먹습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인간조차 생명일 수 없다. 살아있음으로서 마땅히 거치는 과정과 본질적인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생명은 기계화된다.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으니 무엇으로부터도 존중받을 수 없다. 인간 스스로조차.

죽음의 일상화. 피를 흘리고 살점을 썰어내는 식사를 매일같이, 필요 이상으로 즐긴다. 산더미같은 음식을 쑤셔넣는 "쇼"에 열광하는, "고기예찬"과 "육즙"의 황홀함을 끝없이 반복하는 미디어. "정육 코너" 조명 아래 "용도에 따라 분류된 고기"를 바라보노라면,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 먹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p.113 한국에서만 한 달에 1억 가까이, 하루에 약 284만 명의 닭이 조각납니다. 공장에서 길러진 닭의 뼈가 지구를 뒤덮습니다. 닭 뼈는 '인류세'를 나타내는 지표 화석이 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 대멸종으로 향하는 우리에게 치킨은 더 이상 잔치에 어울리는 음식이 아닙니다.

p.197 동물을 포함한 자연을 착취하는 모든 산업이 '돈'을 위해서는 학대·살상을 허용한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개인 역시 동물 학대가 옳지 않다는 공동의 합의와 정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동물 학대를 구매합니다. 강자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눈감는 사회에서 생명은 숫자가 되고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됩니다. 인간은 돈을 나르는 역할로서 존재합니다. 돈 없이, 착취 없이 평등하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법을 잊어갑니다.


나는 완전채식을 지향한다. 어떤 숭고한 대의가 있어서도, 종교적 신념이나 자연에 대한 경외감 때문도 아니다. 언젠가 문들, 도마 위의 살점을 보며 그것이 한때는 살아 숨쉬는 존재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칼을 들고 죽은 살점을 내려다보는 나를 '살해'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마 '그들'을 먹을 수 없어서, 라고 한다면, 필경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평을 듣고야 말 것이다. 부정할 수 없다. 한때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객관적"인 답변을 찾으려 애썼으나 지금은 다르다. 기실 육식으로 도배된, 산더미같은 시체를 가공하며 전지구적 파멸로 달려가는 기후재난 사회는 대체 무엇이 얼마나 논리적이란 말인가.

p.113 치킨은 닭의 고통입니다. 아무리 두꺼운 튀김옷을 입히고 자극적인 소스를 발라도 닭들이 평생을 비좁게 갇혀 살다 피 흘리며 죽었다는 사실을 감추지는 못합니다. 닭은 지구상의 모든 새를 합친 것보다 많이 태어나고 많이 죽습니다.

p.244 누군가 철석같이 믿는 당연함은 실존하는 다양함을 지웁니다. 편리하지만 배타적이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폭력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들은 일시적으로 다수의 동의를 얻은 상태거나 수많은 희생을 치른 대가입니다. 운이 좋아 누리는 권리를 당연히 여기면 안됩니다. 끼니마다 고기 반찬을 먹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당장 문제가 보이지 않으니 그래도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저 할 수 있기에 한다. 육식을 하지 않아도 될 충분한 대안이 있다. 나의 욕망과 불편함 외의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당연하지 않음을, 득보다 실이 많음을, 풍요 과잉의 폐해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알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모두가 외면하고 침묵한대도 이미 벌어진 일은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덜 해치고 덜 고통스러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할 수있으니까.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나와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먹었습니까. 그것은 어떻게 먹을 것이 되었을까요. 당신의 식탁에는 무엇이 있나요.

p.172 혀가 즐겁기 위해 이렇게까지 고통을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많이 태어나게 하고 이렇게까지 많이 죽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저는 비건을 선언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육식을 정당화하기엔 너무 거대한 폭력이 존재했습니다.

p.226 비건은 오히려 고립에서 연결로 확장되는 경로 중 하나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나뿐인 삶을 벗어나 다른 존재와 연대하는 삶으로 향하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식을 통해 아이의 삶과 연결되고, 누군가는 노동을 하며 다른 노동자의 삶과 연결됩니다. 모든 연결은 고통을 타자화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입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