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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한 미식가 - 나를 돌보고 남을 살리는 초식마녀 식탁 에세이
초식마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평점 :
"You are what you eat". 무엇을 먹는지 알려주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던, 어느 미식가가 했다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먹고싶은 것과 차마 먹을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고민한 나는, '먹는 인간'인 나는 무엇인가.
사는 일은 먹는 일. 살아있다는 것은 먹고 먹히는 거대한 순환 사이클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태어난 것은 다른 존재를 먹고, 흡수하고, 자신의 일부로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 자기 자신마저 자연으로 흩어져 되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예외일 수 있는 생명은 없다. 뭉쳤다, 흩어진다. 먹고, 먹힌다. 삶은 생명-물질의 이동이다. 주고받기다.
진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연속에서 유일하게 어긋난 존재가 있으니. 그것이 인간이다. 길을 끊는다. 먹기만 할 뿐 먹히지 않는다. 착취할 뿐 되돌려주지 않는다. 마치 생명이 인간의 전유물인 것처럼. 온 세상이 인간을 위한 무한의 자원인 것처럼.
p.172 누군가는 비건을 극단적이라고 말하지만 순서가 거꾸로입니다. 극단적인 육식주의 때문에 비건을 택합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고기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같이 동물이 들어간 식사를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맛을 위해 먹습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인간조차 생명일 수 없다. 살아있음으로서 마땅히 거치는 과정과 본질적인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생명은 기계화된다.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으니 무엇으로부터도 존중받을 수 없다. 인간 스스로조차.
죽음의 일상화. 피를 흘리고 살점을 썰어내는 식사를 매일같이, 필요 이상으로 즐긴다. 산더미같은 음식을 쑤셔넣는 "쇼"에 열광하는, "고기예찬"과 "육즙"의 황홀함을 끝없이 반복하는 미디어. "정육 코너" 조명 아래 "용도에 따라 분류된 고기"를 바라보노라면,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 먹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p.113 한국에서만 한 달에 1억 가까이, 하루에 약 284만 명의 닭이 조각납니다. 공장에서 길러진 닭의 뼈가 지구를 뒤덮습니다. 닭 뼈는 '인류세'를 나타내는 지표 화석이 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 대멸종으로 향하는 우리에게 치킨은 더 이상 잔치에 어울리는 음식이 아닙니다.
p.197 동물을 포함한 자연을 착취하는 모든 산업이 '돈'을 위해서는 학대·살상을 허용한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개인 역시 동물 학대가 옳지 않다는 공동의 합의와 정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동물 학대를 구매합니다. 강자의 이익을 위해 폭력을 눈감는 사회에서 생명은 숫자가 되고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됩니다. 인간은 돈을 나르는 역할로서 존재합니다. 돈 없이, 착취 없이 평등하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법을 잊어갑니다.
나는 완전채식을 지향한다. 어떤 숭고한 대의가 있어서도, 종교적 신념이나 자연에 대한 경외감 때문도 아니다. 언젠가 문들, 도마 위의 살점을 보며 그것이 한때는 살아 숨쉬는 존재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칼을 들고 죽은 살점을 내려다보는 나를 '살해'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마 '그들'을 먹을 수 없어서, 라고 한다면, 필경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평을 듣고야 말 것이다. 부정할 수 없다. 한때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객관적"인 답변을 찾으려 애썼으나 지금은 다르다. 기실 육식으로 도배된, 산더미같은 시체를 가공하며 전지구적 파멸로 달려가는 기후재난 사회는 대체 무엇이 얼마나 논리적이란 말인가.
p.113 치킨은 닭의 고통입니다. 아무리 두꺼운 튀김옷을 입히고 자극적인 소스를 발라도 닭들이 평생을 비좁게 갇혀 살다 피 흘리며 죽었다는 사실을 감추지는 못합니다. 닭은 지구상의 모든 새를 합친 것보다 많이 태어나고 많이 죽습니다.
p.244 누군가 철석같이 믿는 당연함은 실존하는 다양함을 지웁니다. 편리하지만 배타적이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폭력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들은 일시적으로 다수의 동의를 얻은 상태거나 수많은 희생을 치른 대가입니다. 운이 좋아 누리는 권리를 당연히 여기면 안됩니다. 끼니마다 고기 반찬을 먹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당장 문제가 보이지 않으니 그래도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저 할 수 있기에 한다. 육식을 하지 않아도 될 충분한 대안이 있다. 나의 욕망과 불편함 외의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당연하지 않음을, 득보다 실이 많음을, 풍요 과잉의 폐해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알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모두가 외면하고 침묵한대도 이미 벌어진 일은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덜 해치고 덜 고통스러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할 수있으니까.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나와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먹었습니까. 그것은 어떻게 먹을 것이 되었을까요. 당신의 식탁에는 무엇이 있나요.
p.172 혀가 즐겁기 위해 이렇게까지 고통을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많이 태어나게 하고 이렇게까지 많이 죽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저는 비건을 선언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육식을 정당화하기엔 너무 거대한 폭력이 존재했습니다.
p.226 비건은 오히려 고립에서 연결로 확장되는 경로 중 하나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직 나뿐인 삶을 벗어나 다른 존재와 연대하는 삶으로 향하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식을 통해 아이의 삶과 연결되고, 누군가는 노동을 하며 다른 노동자의 삶과 연결됩니다. 모든 연결은 고통을 타자화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입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