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랑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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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대화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건인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는 이와 마주해본 적이 있는가. 분명히 말을 한 것 같은데, 분명 소리를 지르고 미간을 찌푸리거나 애원하거나 눈을 크게 뜬 것 같은데, 상대에게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던 적이 있는가.

그럴 때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제일 먼저, 다시 말하게 된다. 묻는다. 내가 한 말을 이해했냐고, 제대로 들었냐고. 그 다음엔? 화를 내거나 애원하거나 가진 것을 총동원해 상대를 이해 가능한 세계에 놓으려 애를 쓰겠지만...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는, 해 본 사람만이 안다. 그것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세계에 놓인 자가 가장 잘 안다.

p.337 나는 소피아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만, 소피아는 내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소피아가 쓰는 말을 알아듣지만, 소피아는 내가 쓰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는,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권력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지금까지 읽어온 켄 리우의 작품들은 내게 공통된 인상을 남겼다.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외롭고 잔인한 세계라 할지라도 마주할 눈이 있다면, 천진한 웃음이 있다면, 소박하고 따뜻한 대화가 오가는 자리가 있다면, 지켜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먼 미래의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이번엔 달랐다. 냉소적이고 절망적이었다.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희망은 더욱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오만함과 무력함. 최악의 최악만을 골라 선택하는 동물, 끝없이 가지고도 탐욕스럽기를 멈추지 않는 동물, 반성도 참회도 모르는 동물. 그리고, 아주 드물게 차마 선하지 않기를 택하지 못하는.

p.27 "환경을 오염시킨 책임이 가장 컸던 부자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발전을 멈추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지 말라고 했어. (...) 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가난한 이로 하여금 부자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도, 피부색이 어두운 이들이 피부색이 밝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애쓰지 못하게 막는 것도."

p.371 선진국이라는 오래된 꼬리표는 비록 수 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 뜻이 변하기는 했지만, 강직한 도덕성과 비슷하게 여겨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계를 가장 먼저 가장 지독하게 오염시킨 장본인이 바로 선진 제국이었고, 그럼에도 감히 자신들을 따라 했다는 이유로 인도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장본인 또한 다름 아닌 선진 제국이었다.


만일, 틀에 박힌 상상처럼 외계 종족이 찾아와 묻는대도 할 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너희 종족이 여전히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렇기에 묻고 싶어졌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따뜻한 이야기를 그려내던 사람을 이렇게나 냉소적으로 변하게 했는지.

다시금 더듬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전에도 충분히 그래왔음을. 보고 싶은 면만 보고, 잠시간의 동정과 감동에 젖어 성급히 책장을 넘겨버린 건 바로 나였음을. 말이 되지 못한 것을 애써 활자로 그려내는 시도에 의미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p.154 "그자들은 너한테 과거는 과거고, 죽어고, 이미 사라졌다고 말하지. 자기네는 새사람이라고, 예전 자신들이 한 짓에는 책임이 없다고 말해. (...) 우리 가운데 일부는 집단 망각을 생존의 대가로 받아들였어.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난 너고, 넌 나야. 과거는 죽지 않아. 과거는 배어나고, 누출되고, 침투하고, 튀어나올 기회를 기다려. 네가 지닌 기억이 곧 너야..."

p.325 감정의 합의가 사실의 합의를 대체했다. 가상현실을 통한 대리 체험의 감정적 수고는 실제로 조사하고, 비용 및 편익을 평가하고,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등의 육체적 수고와 정신적 수고를 대체했다. 여기서도 진위를 입증하는 수단은 작업 증명이었다. 단지 작업의 종류가 다를 뿐이었다.


13편의 단편들은 일관되게 물러설 수 없는 의지를 담고 있다.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 지켜야만 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꺾이고 부러지고 상처입을지라도. 과연 독자가 자신의 집으로 삼을 이야기를 발견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마음이 가득 배어있었다.

이에, 나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답하련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한 줄을 덧붙인다. '...그런데 빛이 있다. 아주 희미한, 그러나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어떤 빛이 있다. 이 빛은 무엇인가?'"

p.43 나는 엄마에게 말해 주고 싶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위대한 삶을 살고 싶었던 엄마의 충동을, 자신의 사랑으로 태양을 어둡게 만들어야만 했던 엄마의 간절함을, 난해한 문제들을 풀고자 했던 엄마의 분투를, 불완전한 것인 줄 알면서도 기술적 해법에 걸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믿음을, 이해한다고. 우리는 흠 있는 존재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이롭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엄마에게 말해주고 싶다.

p.248 앞서 본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거듭 또 거듭 스쳐 지나갔다. 이해가 늘 생각을 거쳐서 찾아오는 건 아니구나. 때로는 이렇게 두근대는 심장 고동이나, 이렇게 가슴 저린 뭉클함을 거쳐서 찾아오기도 하나 봐.


*도서제공: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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