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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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말은 본 적이 있다. 어렸을 땐 누구나 화가를 꿈꾼다고, 그러나 자라서도 그리는 사람만이 화가가 된다고.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모두 청자로 태어나 독자가 된다. 이것은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주어지는 대로 수용하던 존재가 자기만의 서사를 쌓는다. 최후의 영역, 그 어떤 존재도 침범할 수 없는 세계, 내면의 이야기가 차올라 형태를 갖추고 마침내 범람하는 것, 그것이 이야기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이가 작가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 글에는 힘이 있다.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만한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가? 침묵은 쉽다. 침묵하게 하는 것,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더 쉽다. 그러나 '쓰기'의 원천을 말살하기란 쉽지 않다. 열망은 힘이 세다. '써야만 하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약자란 무엇인가. 쉽게 사라지고 지워지는 자다. 그렇게 여겨지는 자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약자는 약한 자인가? 뺏길 것이 거의 남지 않은 이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기를 요구받을 때 순순히 빼앗기는가? 사람을 삶의 경계밖으로 밀어내는 일은 그렇게나 간단한가?


"그"의 도둑질은 문학혼이다. 열정이요 온갖 사연을 방패처럼 휘감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지사다. 연민의 대상이자 사소한 오점이다. 반면 도둑맞은 "그녀"의 분노는 한갖 발버둥에 그친다. 치사스런 투정이다. 대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적

빼앗김에 익숙한 이들은 안다. 그렇게라도 악을 쓰고 지켜내지 않으면 내 것은 이름조차도 존재하지 못할 것을. 그런 연유로 "그녀"의 이름은, 정당한 주인이자 한 사람으로서의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못했다. 하다못해 반역자, 반동분자로도.

이것은 완전한 패배를 시사하는가? 지겹도록 들어온 "현실"의 재현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닐 수 있음에서 시작한다. 너무도 뛰어났으므로, 그러나 순종하고 침묵하기를 거부했으므로 지워졌다. 어떤 공백은, 어떤 '부정'은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존재를 증명한다. 지워졌으므로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p.125 작희가 수저를 놓은 후 트림을 하자 탕국집에서 밥을 먹던 남자들이 무슨 연유인지 '되바라진 년'이라는 소릴 했다. 남자도 대동하지 않고 그것도 여자 혼자 아무 거리낌 없이 밥을 먹는 게 그들 눈에는 속이 뒤틀릴 정도로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작희는 남자들을 경멸하는 눈으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되바라진 년이면 당신들은 여자나 깔보는 치졸한 놈들이겠지.


나는 여기서 다시 묻는다. 결국에는 누가 "약한 자"였느나고. 고고한 명예로 담장을 쌓는, 제 말을 하는 여자를 집안에 처박아놓고 주먹질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속이고 훔치지 않으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닌, "모던 걸"을 욕하고 후려잡는 그러지 않으면 어떤 자리도 내지 못하는 "그들"은 강자였는가.

목숨을 걸고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부, 누군가에게는 쾌락, 누군가에게는 영예,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글. 쓰는 것.

유사 이래 글쓰기가 좋은 밥벌이 수단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좋은 글이 그 자체로 인정받은 경우는 드물다. 즐거운 글쓰기,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무시로 굶어죽고 밀려나 입을 닫고 붓을 꺾었다.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p.244 "우리는 무엇을 위해 쓰려고 하는 걸까요?" 나는 남은 힘을 쥐어짜 가까스로 작희에게 물을 수 있었다. 작희는 대답 대신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그렇게 지워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낼 수 있을까? 지워지고 덧씌워진 자리에서 희미한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까? 본래의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기가 막혀 말이 되지 못하는 것을.

이 책은, 작은 정의다.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에 이대로 끝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설사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괴로워도 충분히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만 쓸 수 있다면 그 어떤 고독이라 해도 친구처럼 곁에 두고 오래오래 쓸 터"인 이들의 흔적이다.

이름을 돌려주는 것. 쓰려는 여자를 쓰는 여자로 두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무도 모르게 두지 않는 것, 그럴 수 없는 것. 시간을 넘어 시선이 맞닿는다. 바람이 분다. 멀고 오래된 곳으로부터.

p.290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것조차 비루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티나 싶은 날도 있었다. 문득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러나 작희는 한 번도 목숨을 버리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꼭 살아야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쓰고 싶은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제공: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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