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구할 여자들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과학기술사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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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부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인류 최초의 도구는 창과 칼이었을까? 뒤집개나 그릇이 아니라? 왜 온갖 것에 바퀴를 달면서 가방에는 그럴 생각을 못 했을까? 전쟁이 기술 발전의 동력이었을까? 만일 휘발유차가 아니라 전기차가 먼저 시장을 점유했다면 지금의 교통 환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해가는 세계에서 "단순하고 고급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저임금으로 유지되는 노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컴퓨터 공학은 남성에게 알맞은 분야이기 때문에 여학생과 여성 노동자가 드문 시장이 형성된걸까? 정말로 여자아이들에게 코딩을 가르치지 않거나 "여성의 기질이 과학적이거나 기술적인 직종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는 설 자리를 잃거나 저임금 노동으로 밀려나는 걸까? 이 모든 것에 정말 그럴까? 를 물은 적이 있다면, 최소한 이 세계 또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 구조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면 이 책은 당신을 위한 책이다. 바로 당신을.

모 사업가가 최근 전기차를 혁명적이고 친환경적인 것으로 마케팅하기 이전에는 당연히 차는 휘발유나 가스로 움직이고, 자동차의 발명 이래로 쭉 그래왔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과연 그럴까? 최초의 장거리 운전자는 운송노동자나 고가의 연료비를 댈 수 있는, 모험심 넘치고 부유한 남성이라고 여겨지기 쉽다. 과연 그럴까? 최초의 전기차는 20세기 초에 등장해 판매까지 이루어졌고 최초의 장거리 운전자는 여성이었다. 그것도 자녀가 둘이나 있는.
시동을 걸기 위해 크랭크를 조작하고 기름이 튈 위험과 엔진의 소음을 감수해야하는 휘발유차 대신 소음이 적고 비교적 안전한, 심지어 조작 레버도 옷자락에 걸리적거리지 않는 곳에 위치한 전기차가 주류로 자리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것은 "여성을 위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숙녀를 위한 물건"이기에 부드러운 디자인과 장거리 기동을 시도하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숙녀를 위한 크리스털 꽃병"까지 구비된 그것은 값비싼 유아차 내지는 이동형 티파티 장소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에게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속도와 거친 운전을 즐길 수 있는 차가 알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억측이라고 생각하는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삽화나 영화에서 흔히 그려지는 구식 여행가방, 각지고 큼직한 상자에 손잡이가 달린 그것은 왜 진작 바퀴를 달지 못했을까? 수레며 대포에는 애진작에 바퀴를 달아 그 편리함을 알고 있었을텐데. 이유는 짜증날 정도로 단순하다. "남성이라면 그깟 가방쯤 힘으로 가뿐하게" 들어 옮길 수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숙녀"를 위해 얼굴이 벌개지도록 용을 쓰면서까지도. 바퀴달린 가방이라니! 그런 물건은 "연약한 여성들"이나 쓸 물건 아닌가! 게다가 "품위있는 숙녀"의 옷가지와 장신구로 가득할 가방은 대개 "신사"나 짐꾼이 들어주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 꼴사나운 물건 따위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얼굴이 벌개지고 손바닥에 통증을 남기면서까지도.
물론 누군가는 (온가족 내지는 생면부지의 타인의 짐가방을 이고지고나르면서) 진작에 그 필요성을 절감했고 상품화를 시도했으나 당시에는 실컷 비웃음만 당하고 잊혀져버렸다. 수차례나. 어느 버스운전사가 승객에게 요구했듯 "바퀴달린 물건은 유아차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렇게 "남성성을 훼손하는" 것은 차라리 수치에 가까운 물건이었기 때문에.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전문직 여성과 여성 개인의 이동이 대두되기 까지, 항공기 승무원들이 바퀴달린 가방을 끌고 매끄러운 공항 바닥을 가로지르기 전까지 말도 안 되는 모두의 사서고생이 이어졌다. 믿어지는가.

이처럼 허무하기까지한 남성 중심, 아니 여성배제적 발명사를 포함해 시대마다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이어져온 산업구조와 경제논리의 여성 차별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다시금 불거진 여성, 유색인종의 저임금노동과 돌봄노동, 기계화시대의 일자리 대체와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성차별을 기반으로 이어져온 그 촘촘하고 집요한 "당연한 것"의 실상을 파헤친다.
솔직히 말해 모든 챕터와 문장에 플래그를 붙이고 밑줄을 긋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읽을수록 "기업과 산업은 합리적"이라는 말만 되뇌는 사람들을 쫓아가 그 입을 꼬집어주고 싶어졌다. 여전히 여성들이 "편하고 쉬운" 일만 찾기 때문에, 돌봄이나 공예는 경제 발전에 불필요하거나 비숙련 노동자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혹은 더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현실을 외면하고 아웅다웅 자기들만의 세계를 그리는 이들을 찾아가 대체 떼를 쓰고 있는 건 누구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과 통렬한 비판에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다. "퇴근하고 돌아온 따뜻한 집에서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놓고 웃는 얼굴로 맞이해줄 아내"가 필요하다 못해 맡겨놓기라도 했는지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일단의 무리들에게 차가운 경멸과 매서운 지적으로 일갈한다. 그렇게나 좋아라하는 "팩트"를 가지고 이야기해보라. 아 원래 그랬다고!를 제하고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세계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너의 세상도 그렇게 당연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아닐거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자아이들은 자라고 그 아이들이 자라 너의 한심하고 얄팍한 아집을 부술거라고, 그 때도 "합리와 이익"을 말할 수 있는지 보자고. 이 책은 밀려났고 밀려나고 있으며 시작조차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힌 여성들에게 전하는 진실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벽은 사실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시작부터 주저앉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 여성은 그래왔고, 그럴거라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지금 이 순간에도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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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조형근 지음 / 창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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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말했다.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옆으로 비켜서있으며 그것이 비겁함을 알고 있다고. 모래에게 바람에게 먼지와 풀에게 이런 나는 얼마나 적으냐고.(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다면, 필경 부끄러웠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분노에, 올바름에 말과 행동에 부끄러웠던 사람만이 정의를 묻는다. 나는 정의로운가, 나의 말과 행동이, 생각이 정의롭다는 착각은 아니었을까. 나는 얼만큼 적고 또 옹졸한 그릇이냐, 라고.

사회학자 조형근은 제목으로 말한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고. 동시에 각 부의 소제목을 통해 독자에게 묻는다. 대학은, 지식인은, 과거와 현재의 청년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부하는 우리 시민들은 정의롭느냐고.
이제는 허울뿐인 말로 여겨지는 "대학은 지식의 상아탑"은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걸까. 본디 대학이라고 하면 학문적 진리를 추구하는 교육과 지식의 장이 아니었던가. 언제부터 학위며 전공이 취업을 위한 수식어로 전락했던가. 혹자는 대학 서열화 이후를, 또다른 이는 이사진 및 커리큘럼이 기업 맞춤화가 되기 시작했을 때, 또는 산학협력 모델이 확산되었을 때를 꼽는다. 요는, 제법 오래된 현상이라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사실상 대학 졸업장이 필수품처럼 여겨지고 출신 대학이 곧 "라ㅇ "문송합니다(문과+죄송합니다)"라느니, 인문/사회 분야 전공해봤자 치킨집 차린다느니 하는 농 아닌 농이 자리잡은 사회에서 마음놓고 연구해라, 공부해라, 지식인의 의무를 다해라 하는 것도 다 배부른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학자는 죽었다, 지식인은 없다고 일갈하기에는 지금 이순간에도 등을 밝히는 학자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이래도 성에 안 차고 저래도 성에 안 차는 어정쩡한 형국이 우리네(라고 하기엔 지구촌이 되게 생겼지만) 현실이라 할 수 있겠다.
분명 이제는 대학 교수는 대물림되는 특권층의 지표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도 없다. 교수 집안 교수 부모의 고학력 자녀 경향이 뚜렷해진 지 오래임을, 용이 날 개천은 씨가 말랐다는 게 정설 아닌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되지 않았나.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민중의 삶과 유리되었고, 세계 최고 수준의 등록금과 서열 구조로 민중의 고통의 원천 중 하나가 되었다. 비판적 교수지식인은 대개 중상류 계급이 되어 있고, 계층 재생산을 위해 애쓰는 중이다(p.47)." 이런 사회에서 구 청년지식인들이 현재의 청년지식인을 어르고 달래봐야 "나 때는 말이야"꼴을 면하기도 어려우니.
이에 대해 저자는 구 청년세대, 즉 86세대 또한 기득권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이 좀 덜 힘들게 사는 세상을 만들려면 상위 1%만이 아니라 20%가 지금보다 꽤 많이 돈을 내야"한다고, "알고 보면 나도 서민이고 어렵다며 쏙 빠지고 재벌, 수구보수 세력만 기득권이라고 탓해서는 세상과 화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p.103). 현재와 과거의 청년이었던 이들, 결국 모두가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절박하게 외치는 것이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세월호 사고, 사고라고 하기에는 사건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2014년의 참사가 벌어진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실시간 뉴스를 보고 듣고 읽으며 과정을 지켜본 사람 중 여태껏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인부터 결과까지 다 떼고 보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죽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일테다. 이것만 해도 큰일이다. 더군다나 여러 분야의 책임자가 제대로 대처하지 않거나 못했고, 그 결과 살릴 수 있었던 사람까지 죽었다. 이 상황에서 대체 피해자를 욕할 부분이 어디 있는가? 그것도 모자라 현재까지 집요한 조롱과 모욕이 이어지고 있다. 유가족 또는 생존자의 증언은 정치공작으로 몰리고 숨은 의도가 있음을 추궁당한다. 이런 유형의 참사가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언론, 정치권, 특정 집단의 공격은 유례없는 형국이다. 그 사이에 우리 사회가 반쯤 뒤집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없던 사람과 말이 생겨난 것인가? 아니면 반쯤 긍정적인 태도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정보망의 발달로 확산이 빨라진 것이라고 치부해야 하는 것인가?
사회를 하나로 모으고 발전 또는 안정의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정치권의 메세지는 기실 유구한 것이나 속칭 비국민과 국민을 나누어 성원 일부에 대한 증오와 배제를 지지기반으로 삼는 것은 적어도 겉으로나마 지양되는 태도가 아니었던가. 입에 발린 말이라도 우리는 하나라고 외쳐야 하는 세상이 아니었나. 못살겠다 갈아엎자로 시작해 현대시민운동의 주요 사례로 남은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정부 인사, 정치권의 메세지와 의식주를 넘어 방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가 된 세상을 살고 있는가?
더이상 우리 사회의 갈등 주체는 갑과 을이 아니다. 갑은, 원인은, 크게 뜯어고쳐야 할 것은 아득한 구름 너머에 있고 을과 병과 정이 서로를 물어뜯는다. 그렇게 된 원인은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생각할 겨를이 없고 그럴 엄두도 나지 않는다. 비국민, 비정규직, 비중산층, 비한국인... '아님'이 붙은 대부분의 것들이 증오의 대상이 된다. 저것을 몰아내고 욕하고 뿌리뽑아야 우리가 산다고 말한다. 누가? 미디어가, 언론이, 부채질하고 확성기를 쥔 이에 '감화'된 우리가. 아파트에도 대문과 담을 세우고 집과 차와 학력과 직장으로 나뉘어 틀어박히는 우리가. 모두가. 정의와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고작 푼돈을 받으러 오는 야경꾼만 이를 갈며 증오하는 우리가. 모든 것에 시험과 자격을 들이대며 '공정'과 '편'과 '척결'을 목놓아 부르짖는 우리가.

이 난리도 아닌 꼬라지에도 탈출구가 있을까? 해결은 요원한 것인가? 현대인은 유구한 유토피아의 꿈을 꾸는가? 저자는 말한다.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고, 희망이 실망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희망이라는 원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직 희망만이 실망할 수 있기" 때문에(p.217).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각자도생, 악착같이 모으고 '부국강병', '이익선점과 끝없는 성장', '복지 축소로 능력주의와 공정 실현'을 말하는 작은 정부를 정의로 철석같이 믿었던 기득권과 그에 동조했던 수많은 우리가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퇴보와 사회 붕괴를 목도했던 시대를 지나 다시금 정치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이 되고 시민으로 자리잡아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민중의 정의라는 것이 실존하는가? 지배계급의 아이러니를 답습할 뿐이 아닌가? 저자의 말처럼 쉽고 낙관적인 전망을 노래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그러나 여전히 "신발에 흙이 묻고 몸이 더러워지는 것, 실망하고 실패하는 것, 그것들 없이 우리는 구체적 현실로 나아갈 수 없다(p.243)." 앞서 말했듯 희망만이 실망할 수 있기에, 그 과정에서 무너지고 사라질 사람들이 무너지고 사라진 이름이 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를 붙잡는 수 밖에, 희망하기를 잃지 않는 수 밖에.

앞서 말했듯 부끄러웠던 자만이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는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고로, 사는 동안 스스로의 언행과 사고에 단 한치 부끄러움도 없었으며 스스로는 늘 옳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이 책을 권하지 않겠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런 이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가닿지 않는다. 그러나, 더 나은 세상을, 함께 사는 세상을, 편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자리와 관점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이것 또한 지고의 진리가 아님을 명심하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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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별의 유령들
리버스 솔로몬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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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떠도는 것에게는 떠나온 곳과 그리워하는 곳이 있다. 전자가 과거의 장소라면 후자는 미래의 장소이다. 여정이 세대를 이어 계속되는 경우에는 가본 적 없는 곳을 떠나 알지 못하는 곳을 그리워한다. 그것이 부유하는, 혹은 떠도는 존재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유령에게 도착해야 할 곳은 안식처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는 곳인가? 떠도는 별의 유령들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제목의 '유령'은 무엇을 의마하는가?
봉건적 전제군주제와 견고한 계급, 성별. 빈부 차별의 요새, 여정의 끝을 바라기엔 모든 것이 알 수도 알아서도 안되는 규율과 폭력으로 가득한 우주선, 마틸다. 주인공 애스터는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머니는 죽은 지 오래, 아버지는 등장조차 않고, 무리의 여인들에게서 자랐다. 다른 아이들 또한 그러했듯이. 의료인 비슷한 지식으로 의무관 비슷한 노릇을 한다.

그나저나 세계관을 이해하기도 전에 냅다 발부터 자른다는 이 불친절한 전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름다운 표지에 품은 작은 기대를 처음부터 말려, 아니 얼려 죽이려는 듯 작중 묘사되는 데크와 선내 생활, '경비원'들의 태도는 암울하고 또 절망적이기 짝이 없다. 그들의 폭력은 공기처럼 약자를 향한다. 그들의 권위는 단지 단발적인 시비에 그치지 않고 하층 데크 거주민의, 여성의, 어린아이, 노인, 어쩌면 '불순분자'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시작부터 이게 무슨 희망이란 말인가. 자고로 어딘가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갈 때, 이유가 무엇이든 새로운 세계를 이룩할 때는 이전보다 하나라도 나은 구석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포기하시라. 피부색도, 지식도, 인간의 존엄함을 말하는 신의 말씀까지 그 무엇도 하층민의 생존을 지켜주지 못한다. 출신, 계급, 힘과 연줄이 그 모든 자리를 채운다. 나은 것은 없다. 유토피아 내지는 협동? 질서? 꿈 깨라. 여기는 지구 ver.2다. 그것도 절망 버전이다.
이런 세계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사람은 살아간다. 멀리서 봐야 곱든지 말든지. 애스터도 그렇다. 사사건건 열받게 하는데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자매, 친구, 가족 이상의 어떤 존재, 지젤과 친구가 아닐까? 시오, 멜루신 아주머니와 비비안, 피비, '위대하신' 누구로부터 누구를 지키는 건지 너무 뻔해 신물이 다 나는 경비병들. 애스터에게 남겨진 것은, 죽은지 오래인 어머니 룬이 남겨준 일지. 수수께끼인지 신변잡기인지 종잡을 수 없는 메모들 뿐. 엄마는 왜 죽었을까. 일지를 해독해나갈 수록 하루가 멀다하고 불안해지는 선내 상황, 시시각각 달려드는 위협과 폭력, 간절한 만큼 위험천만한 희망. 애스터에게, 일지의 끝엔, 죽어가는 군주와 더욱 잔인하고 추악한 새 군주의 통치가 도래하는 날엔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걸까. 삶인가, 죽음인가.

혼란의 1, 2, 3부를 지나 종장에 다다르면 그간의 불만이 일시에 사라져버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분노하고, 비명을 지르는 이들. 저 깊은 물 아래에서 일렁이는 애스터의 분노, 웅크리고 터져나와 모든 것을 재로 돌려버리는, 그 자신은 여신의 창조라고 말하는 지젤의 분노, 신과 같은 군주와 그 권력이 흔들리는 순간 전복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하층 데크 거주민들의 분노. 작중 지배계급이 아닌 자들은 모두 분노해있다. 비명을 지른다. 비명은, 고함의 씨앗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절망의 기록으로 바스라지기 직전에 발굴된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독자를 달랠 생각도 없이 이야기는 터지기 직전의 폭탄같은 상황을 비껴나가고 때론 휩쓸리며 종장을 향해 달려나간다. 열역학, 금속공학, 계통발생론, 우주항공학이라는 애스터의 생각을 빼다박은 소제목들과 함께. 독자는 아래 문장에서 터져나올 분노의 선언을 엿볼 수 있다.
"애스터가 소중히 여긴 것은 전부 식물관 안에 있었다 .이번에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사람이 해낸 일을 파괴하는 것은 애스터가 쉽게 잊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한 사람의 삶에서 남은 것은 전부 종이에, 일지로, 연감으로, 만든 물건으로 기록됐다. 그걸 없애는 건 사람의 역사를, 현재와 미래를 없애는 짓이었다."(p.467)

너무나도 선명한 은유로 가득한 작품이다. 불러오고자 하는 대상이 우리 사회여서 그렇지 . 유색인종이어서, 가난한 자라서, 저소득 노동자라서, 여성이어서, 성소수자여서, 힘이 세고 덩치가 크고 우수한 학력을 갖추지 못해 그것이 곧 부도덕함의 반증으로 불리는 이들이어서 그렇지. 괴롭다. 너무 잘 아는 고통, 너무 익숙한 멸시와 차별의 시선과 적대감이 선명하게 찌르고 누르고 조여온다. 괴롭다. 그 와중에 당연하지 않은 모성애와, 생명의 가치와 권력구조가 도덕적 정당성으로 위장될 때의 추악함까지 꼭꼭 씹어 삼키라며 들여다보는 작가의 집요함이 아주 잘 느껴진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으레 유능하고 아름다운 주인공 클리셰들과는 딴판으로 애스터는 그다지 아름답게 묘사되지도 않을 뿐더러 언어 발달이 늦었고 사회적 상호작용에 서툴거나 무심하며 특정 주제에 깊게 몰두하는 것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애스터는 자폐인인가? 아쉽게도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정확히는 반복적으로 불편을 겪는 장면이나 이질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신경다양성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는다.
저자의 의도가 뭘까. 싶다가도 굳이 이유가 있어야 하냐는 물음이 고개를 든다. 불편을 겪을 수는 있는데, 뮤지컬 넘버처럼 대놓고 나의 삶을 사랑해! 내 이름은 애스터! 나는 자폐인! 이라고 콕 짚어 말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 기실 부조리한 세계가 당연히 장애를 비난의 용어로 삼아야 할 이유도 없기는 하다. 받아들이세요.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울창한 나무를 보며 생명으로 가득한 땅에서, 바로 그 지구에서, 약속의 별에서 애스터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죽은 자를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죽은 자와 함께 몸을 감싸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야, 드디어, 독자는 이 작품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서사시다. 혹은 생명 기원의 신화이다. 약하고 무시당하는 것이 판도를 뒤집고 혼돈을 지나 생명의 땅에 뿌리내리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사랑이 있어야만, 보살핌과 죽은 자를 쉬게 하는 연민이 있어야만, 또한 역설적으로 피와 혼돈과 분노가 있어야만 시작할 수 있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느 한 쪽의 힘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하고 어린 것은 영원하지 않다. 그들은 당신의 세계를 부수러 온다. 기억하라. 이것이 떠도는 별의 마침표이자 유령들의 이야기라고, 최초는 끝과 함께 시작된다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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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사람 - 내 삶을 바꾸는 소소한 물음들에 관하여 이매진의 시선 15
김영서 지음 / 이매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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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디서부터 얘기할 수 있을까. 요사이 읽는 책은 주로 윤리학, 그것도 타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목놓아 부르짖다시피 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윤리학이라는 어떤 거대한 짐승에 올라탄 것처럼 순조롭게 세상을 훑고 다니던 와중에 그것이 대뜸 나를 향해 뒤돌아서서는, '그러는 너는'이라며 질문...이라기 보단 들이받는 형국에 당황스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아마도, 아니, 확실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숨길 수도 없이, 저자의 전작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는 아주 남 이야기로 읽었다.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고작 '만약'으로 시작하는 상상적 공감에만 그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접하고 생각하는 세계가 다를 수 밖에 없으니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삶에는 그 정도가 한계 아니겠나,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살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에, 저자의 순간들과 생각을 따라가는 시간들에,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도 마음이 복잡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대체 이 사람은 왜 쉽게 살지를 못하는가, 하는 원망이 조금 섞여 유난히 심란했던 마음도, 어쩌면.

흔히 말하는 '화려하고 잘 나가는 삶'과도, '소박하고 안온한 삶'과도 영 거리가 있는데다 대체 뭘 어떻게 하고 다니기에 하루가 멀다하고 소란이 끊이질 않는 그런 삶, 초라하다면 초라하고 누군가는 '저렇게는 안 살겠다'며 악을 써도 그렇구나. 말고는 할 말이 없는 그런 삶의 순간을 짚어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평화롭고 행복해서 모든 문장이 웃는 얼굴 이모티콘으로 끝나는 인생이 있을까? 동화에도 없을텐데. 그러니 구르고 깨지고 한푼이 아쉬워 아등바등 아끼다가 샛길로도 빠졌다가 누군가를 흘겨보고 불의에 슬쩍 눈감기도 하는 그런 삶을 감히 비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도 진창 너도 진창, 너도 나도 조금쯤 더럽고 비굴하게 사는데 대체 무슨 질문이며 쓸 데도 없는 반성이냐, 고 묻는다면 그래서 묻는다고 답하겠다. 그래서 멈춰서고 돌아보며 질문하기를 그만둘 수가 없다고, 그래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고.

종교 에세이인가? 싶을 정도로 짤막한 글 곳곳에 신을 찾고 신의 의미를 새기는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이해할 수 없는서문에서 일러주듯 저자의 삶과 생각에 종교가 큰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한데, 과연 초월적 절대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믿음이 개인에게 위안 또는 용기로 작용하는 것은 대체 어떤 느낌일까. 딱히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싸움을 걸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양가가 독실한 신앙인들로 가득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여전히 무신론을 말하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하고 그의 고통을 외면해서도, 할 수도 없는 윤리철학을 공부했다 말하는 내가 과연 뭘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었는지, 누군가의 고통과 삶을 이해한다고 뻐기던 것은 아니었는지 부끄러운 마음일 뿐이다.

책을 덮으며 새로이 자라난 물음들이 마음을 소란하게 한다. 공감과 동정은 얼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을까. 에서 자랐지만 여전히 무신론적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제목의 "질문하는 사람"은 무슨 의미일까. 질문한다는 것은 의문을 갖는다는 것, 의문은 곧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 당연하지 않다는 것은 외면하고 묵인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질문하는 행위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으로 정리될 수 있을까. 답을 주지 않는 것을 넘어 질문하는 책이다. 나는 이랬다고, 나는 이런 사람과 세상을 이해할 수 없어 번민하고 흔들리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는데 거기 멀거니 서서 바라보는 당신은, 아팠고 아프게했고 번민하며 흔들리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고 있냐고. 어쩌면 사는 일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이 글을 읽는 이에게도, 언젠가 이 책의 내용을 되새겨볼 나에게도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로 기억될 시간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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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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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푸른숲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임을 밝힙니다.

어느날, 큰 의미 없이 집어든 책이 당신에게 말을 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작가가 전하는 다정한 위로'라거나 '책과의 대화' 같은 말랑말랑 보송보송 감성이 아니라, 그 분(무생물이긴 하지만 인간은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에게 본능적으로 존칭을 붙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바선생처럼.)이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상황을 넘어 생각까지도 마치 들어갔다 나온 양 술술 읊어대고 있다면? 나였으면... 버렸어요... 나약한 코리안은 귀신들린 책이 무서워서 냅다 한강물에 집어던졌을 거라구. 물론 이런 슈퍼겁쟁이 독자만 있는 세계에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시작도 못하고 사라지거나, 첫페이지부터 "잠깐잠깐잠깐 던지지 마세요! 귀신 아닙니다! 한강물 안돼!!!!"라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소설을 소개할 때는 가급적 줄거리를 피하는 편입니다. 한 명이라도 더 이 시간의 즐거움을 공유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쓰는 글인데, 다 말해버리면 재미 없잖아요. 10분 요약! 영화 한 편! 같은 게 되어버리니까. 이것만 보면 다른 건 다 필요 없다고 유혹하는 건 수험생 요약노트로도 충분합니다. 남의 집 일이라는 뜻.

다른 건 덮어두더라도, 시작부터 참 불친절합니다. 대뜸 너만 알고 나는 모르는 얘기로 시작해 묘하게 이리저리 지적받고 나니 대체 뉘시오? 하는 말이 목구멍, 아니 손가락까지 차오르는 순간 '당신은 곧... 죽습니다...' 같은 느낌의 불안한 메시지라니요. 이거 행운의 편지 아니야? 당장 베껴서 일곱명한테 보내야 하는 건가? 칭찬입니다. 시작부터 독자를 꽉 쥐고 휘어잡는 문장에 푹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적어도 도입부에서는 제목을 알 수 없는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필요할 때마다 이 책을 가져다가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으"라고. 그말인즉슨 달리 말하면 모든 문장이 두루뭉술하게 적혀있다는 게 아닐까요? 조금 더 따라가봅시다.
주연 중 하나인 우리의 벤(어쩐지 강아지같은 이름!)은 좋게 말하면 평범하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초라한 인물입니다. 동창의 성공에 열등감을 느끼고, 뛰어난 인재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무슨 발달린 주석기계 취급인데다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들은 방대하지만 대체 쓸 날이 오기는 할까 싶게 중구난방인, 그런 소시민이지요. 그런 사람이 무작정 '너 죽게 생겼다!' 식의 위험에 휘말려버렸으니 얼마나 눈물이... 짠내가 나겠습니까... 그걸 다잡아주는 건 '이자식 묘하게 꼬인데다 찌질해...!'라는 마음의 소리겠지요, 아마도.

소설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뭘까요? 소설을 읽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무엇보다도 캐릭터입니다. 등장인물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면, 악인이든 선인이든 말과 행동에 전혀 공감하거나 이입할 수 없다면 영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얼마 가지 못하고 벗어던지게 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껏 한 번이라도 남을 평가하고 위아래로 훑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삶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딱히 사랑스럽지만은 않은) 주인공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열등감, 이기심, 오만함을 끌어안고 있거든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듯이 타인과 그들의 삶,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하고, 밀어내고, 맛보고, 때론 집어삼키고 싶을 만큼 욕망하는 그런 마음들.
달리 말하면 저자의 인간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란 나약하고 불완전하기에 오만하고 욕망에 휩싸인 사람일 수 밖에 없다고. 더해서, 인생이란 게 누구나 그렇게 비틀거린다고. 앞서 말한 것처럼 "필요할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뚝딱 얻을 수 있는 해답은 없다고, 완벽한 승리자의 완벽한 인생비법으로 가는 왕도같은 것은 없다고, 행복은 그렇지 않다고.
물론 악당은 있습니다. 그가 저지른 일은 용서할 수도 그래서도 안되는 악행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요. 그렇지만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독자라면 마음 한 켠에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겠지요. 무조건 너 나쁜놈! 하기 전에 그의 삶을, 고통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습니다. 공감은 그 사람의 신을 신고 걷는 것과도 같다던 어느 옛말처럼 위스키 한 잔, 어쩌면 한 방울과 함께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고통에 함께 잠겼다가 그것을 당신의 것으로 소화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되새기며. 그러니 당신의 삶에도 행복이 필요하다고, 다만 이런 방식은 절대 아니라고.
삶은 어쩌면 준비된 필연과 우연의 연속이고, 행복은 삶의 아주 작은 순간에도 스며들어있으니 감사하라고, 사랑하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삶이라고.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개개인들의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쓸어온 꽃처럼 끌어안고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작은 정원이 되어 있을 것이고, 또다시 어느새 그 정원 안을 헤매고 있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고 출구 앞에서 아쉬운 마음에 발끝을 차다보면 한 폭의 그림을 안고 미소짓고 있을거라고. 이 책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이 책은 당신을 그렇게 만들거라고. 다시 한 번, 위스키, 와인, 칵테일, 어쩌면 초콜릿과 함께.
작은 팁을 드립니다. 충격적일 거라고, 이 작품의 주인은 독자가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해야지. 말 그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가지고 노는 누군가라고. 이 글을 ,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누구든간에 한번쯤 이렇게 외칠거라고. '아니 이걸 이렇게까지 써먹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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