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 - 신화에 가려진 여자
제시 버튼 지음, 올리비아 로메네크 길 그림, 이진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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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야기, 인간 사회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신화는 누구의 이름으로 쓰여졌는가? 이야기가 전제하는 "인간"과 그들의 운명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옳은 것, 가치, 수용해야만 할 운명... 그것들은 어떻게 다른 길을 지우고 거부하는 이를 추방하는 세계를 구축하는가?

이야기만큼이나 오래된 의문이다. 지워지는 길에 선 사람들, 경계를 부수고 나가는 이들, 끊임없이 순응을 거부하는 목소리들리 이야기 이전에도, 지금까지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듣지 않았던 이야기에, 숨겨지고 쫓겨난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질서있게 정렬된 세계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권력을 뒤흔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p.9 내가 눈빛만으로 남자를 죽였다고 말하면, 당신은 나머지 이야기를 듣겠는가? 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듣겠는가? 아니면 나에게서 도망치겠는가? 이 흐릿한 고대의 거울로부터, 이 기이한 육체로부터 도망치겠는가?


메두사는 괴물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탓에, 감히 신을 유혹했고 교만으로 다른 신을 모욕했기에 벌 받은 자다. 악녀, 적어도 사람으로도 남지 못하고, "퇴치되어야 할" 존재로 격하되었다. 정말 그러한가? 그는 누군가의 영웅-되기를 위해, 죽기 위해 태어날 운명이었나? 교만하고 타락한 여자였나?

여기서 우리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느냐'는, 익숙한 의심, 힐난, 수군거림을 마주한다. 그러나 불 질러진 집에서도 연기는 나는 법이다. 세상은 침묵당하는 이의 저항을 너무도 쉽게 넘겨짚는다. 생각을 사실이라 믿으며, 그것을 진실로 만드는 일만큼 쉬운 것도 없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무도 묻지 않고 듣지 않는다.

p.85 "예쁜 여자라는 말보다는 잘생긴 남자라는 말을 듣는 편이 더 쉬울 것 같아. 여자한테 아름답다는 말이 따라붙으면, 그게 곧 그 애의 존재의 본질이 되거든. 그 애가 가진 다른 모든 가능성을 덮어버려. 남자는 그 사실이 다른 모든 가능성을 덮어버리진 않잖아."

p.147 "약속을 했다고요? 허락을 했다고요? (...) 메두사가 당신의 신전에 초를 밝혀놓고 그 짐승한테 초대장을 보내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그런 식으로 강요당한 약속은 언제는 깨어지는 게 옳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 (...) 메두사는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당신이 메두사를 보호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따지려면 메두사가 아닌 포세이돈에게 가서 따져요."


그렇게 "다물게 하기 쉬운 쪽"의 말은 지워진다. 몇 번이고, 어디서든. 남겨진 바가 없으니 다르지 않다고 믿어진다. 세상 일은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법이라던가. 그렇다면 말을, 경청을 빼앗긴, 파묻히고 등돌려져 깨끗하게 지워진 목소리의 주인은 언제나 지는 법일까.

이 책은 '다시 쓰기'를 넘어, 일종의 당연한 세계선이다. 사악한 여자들, 메데이아, 키르케, 메두사에 이르기까지, 추방된 이들에게 빼앗긴 목소리를, 그 자신의 서사를, 사라지지 않을 자리를, 마땅한 세계를 돌려주려는 시도다.

읽는 내내, 줄곧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말하고 있잖아. 사람이 말을 하면 일단 들어야 할 게 아니냐고. 빼앗기고 쥐어흔들리는 이가 뿌리치고 악을 쓸 줄은 정말 몰랐냐고. 더는 참지 않는다.

p.178 "조용히 해봐, 페르세우스. 내가 얘기하고 있잖아."

p.193 "페르세우스, 그만 눈을 뜨고 똑바로 봐. 난 살고 싶은 것뿐이야. 그저 나 자신이고 싶은 것뿐이라고. (...) 내가 내가 나를 방어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면, 넌 네 어머니의 시련을 지켜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거야."


벽 너머의 메두사는, 죽임당하기를 거부하는 이는, 잊혀지지 않은 이야기는 세계를 응시한다. 맞받아친다. 쏘아본다. 눈을 피하지 않고. 규범, 진리, 운명... 어떤 이름을 빌든, 두려움은 생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이 또한 진실이 아니던가.

이것은 이야기다. 신화이자 가능성이고, 진실이자 사실이다. 죽지 않은 것은 언젠가 돌아온다. 누구도 파괴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흘러넘치고 뻗어 나가 닿을 것이다. 태어난 이들에게, 감히 사악하고 교만하다 불릴 여자들에게.

p.207 그가 나를 베려고 칼을 높이 든 순간, 이미 우리 중 한 사람은 살아서 동굴을 나갈 수 없었다. 그가 나를 공격한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혹은 그가 생각하는 나라는 이유로, 그 자신의 결말을 위해 나를 파괴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것, 그건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p.216 나는 앞으로 수백 년을 살며 대륙과 바다, 제국과 문화를 넘나들 것이다. 동상과 달리 신화는 부술 수도 없고 절벽에 세워둘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화는 스스로 기억되는 길을 찾는다. 신화는 얕은 무덤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찬란하게 솟아오른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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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장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1
조지프 콘래드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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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흄세 시리즈와 역자를 믿고 펀딩했습니다. 역시 틀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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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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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 자기 자신으로 살기를 포기했는가? 언제부터 꿈을 누르고, 목소리를 낮추고, 당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세계에 편입하려 애쓰던 시간을 잊었는가?

어린 여자, 이방인이 이른바 "주류"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죽을만큼 외롭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짐승이, 표본이 된다. 숨을 죽이고 눈을 내리깔고, 순종하여 이름마저 지워질 것을 요구받는다. 그래야만 그들의 "우리"를 뒤따를 것을, 주변을 맴돌 것을 허락받을 수 있다.

세상에 내놓기에는 너무 위험해 많이 배우고 문명화된 소수가 "보호"해야만 할 존재, 영원히 닫혀야할 문, 권력과 지식처럼 독점되어야만 하는, 상상조차 해서는 안될 자유.

견뎌야 해, 재뉴어리.

p.41 런던에서 아프리카인은 유색인으로 취급되는지, 그렇다면 나도 거기에 포함되는지 궁금했다. 나는 몸이 살짝 오싹해질 만큼 갈망을 느꼈다. 큰 무리의 일원이 되어 타인의 시선을 끌지 않고, 내 분수를 정확히 알고 싶은 갈망이었다. 알고 보니 '유일무이한 표본'으로 사는 건 외로웠다.


꽉 막힌 규범과 오래된 권력은 교묘하고 촘촘해 마치 상식처럼 세계를 옭아매고 있어 이방인, 어긋나는 것, 이레귤러, 우리-아닌 자, "인간 짐승"의 숨통을 죄인다. 그것들은 이름을 바꿔가며 나타난다. 문명, 지식, 정상... 때로는 사랑까지도 참칭하며.

그러나, 당연하게도, 날개를 꺾고 팔다리를 잘라 영구히 썩지 않는 표본으로 만들어 자격있는 신사와 귀부인만이 초대받아 관람하는 전시실, 다락방, 오래된 성채와 거대한 저택의 어딘가에 처박아두는, 이름과 얼굴과 시간을 빼앗아 숨겨두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벽도, 밀실도 아니야, 재뉴어리.

p.32 나를 살피는 로크 씨의 표정을 보니 옛날 화가들이 그린 하느님이 떠올랐다. 이리저리 저울질하고 평가하여 당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결과가 나온 후에야 사랑을 주는, 가혹하리만치 가부장적인 하느님. 그의 눈빛은 바위처럼 날 내리눌렀다. "이제부터 넌 분수를 파악하고 착한 아이가 돼야 해." 나는 간절히 로크 씨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p.259 진정한 사랑은 결코 침체되지 않는다. 사실 사랑은 문이나 다름없어서 기적적이고 위험한 가지각색의 일들이 들어올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은 위험을 동반한다. 자유는 다름의 가능성이다. 불확실성과 위험을 끌어안는 모험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자유를 품는다. 희망한다는 것은, 지금-여기가 아닌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곳으로 손을 뻗어 문을 그리고 길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저앉고 부서지기를 요구받는 자, 소리없이 존재해야만 자리를 적선받는 자- 는 곧 경계를 넘는 자, 멈추지 않는 배, 하늘과 바다를 뒤집어 가장 높게, 멀리 나는 새다. 시작의 이름으로 불리는, 최초를 열어젖히는 자다. 살아남아, 재뉴어리.

p.342 네 엄마는 네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다. 위험할 정도로 자유롭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모든 문이 네 앞에 열려 있는 삶.

p.354 어쩌면 더 절망적이면서도 순진한 희망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일 수도 있다. 나보다 더 용감하고, 더 훌륭한 누군가가 내 죄를 대신 속죄하고, 내가 실패한 일을 해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이 세상을 그 형제들과 단절시켜 척박하고 오로지 이성만 지배하며 지독히 외로운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어둠의 조직과 누군가가 싸워줄지 모른다는 희망. 누군가가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 있는 열쇠가 되어 문들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작가는 현실도피라는 간단하고 기만적인 해법 대신 그를 희망없는 세계로 돌아오게 한다. 도망치는 대신 자유로이 항해하는 자로, 바람처럼 불어와 경계를 넘는 자로. 그 덕에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자아찾기, "문명 유럽"에서의 유색인종, 상상과 희망의 힘...

그러나 어떻게 읽더라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현실 너머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재뉴어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닫힌 벽이 아니니까, 유순한 애완-인간의 세계는 기어코 산산이 깨지고야 말 테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대도, 포기할 수 없는 자유가 있으니까. 문을 열어, 재뉴어리. 살아가, 너로 살아, 재뉴어리.

p.505 세상은 결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닫히고 숨 막히고 안전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둔 저택과 같아야 한다.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여름비가 들이치고, 옷장은 마법의 통로가 되어야 하고, 다락에는 비밀 보물 상자가 있어야 한다.

p.533 "쉿,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제가 가끔 겁에 질렸고, 상처 받았고, 혼자였지만 결국 이겨냈다는 거죠. 전 이제 자유예요. 그리고 이게 자유를 얻은 대가라면 전 기꺼이 치를 거고요. (...)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도서제공: 밝은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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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철 - 독일 제국의 흥망성쇠 1871-1918
카차 호이어 지음, 이현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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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번치현 - 일본 근대국가 탄생의 무대 뒤
가쓰타 마사하루 지음, 김용범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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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메이지(1867~1912)4년, 7월 14일. 재경 지번사 56인이 황거 회합장으로 호출되었다. 그곳에서 우대신(산조 시네토미)가 천황의 칙서를 낭독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아니, 극소수의 최측근을 제외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폐번 합의는 폐번치현 선언 닷새 전. 이 갑작스러운 단행의 이유는 무엇인가?

변화의 규모에 비해 서두른 감이 없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말했듯 대부분의 관료들이 언질조차 받지 못하였으며, 그간 2년간의 가히 쿠데타라 부를만한 전쟁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살펴보자.
1. 부번현 삼치제: 이전의 영주, 즉 다이묘는 지번사로 지방행정관의 역할을 수행하나, 일부 번에 대해서는 정부 직할지인 부와 현을 설치, 중앙정부에서 지사를 파견함
2. 1868~1869, 2년간의 보신전쟁(무신전쟁)에서 신정부(메이지정부) 승리
3. 1869.07.25 판적봉환 실시: 토지와 인민(영지민)을 정부 관할에 두고 지방 행정 관할 토지와 녹봉, 조세 시행을 개정토록 함
4. 1871.07.12 폐번치현. 이후 각 번내 번사들의 대량 해고, 번-정부와의 대립으로 인한 징벌적 재정 악화 등으로 자발적 폐번 요청.
5. 기존의 봉건적 토지 지배 방식의 전면 개정으로 세금확보 및 군사력 통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도모하였으며 근대형 중앙집권 국가로 이행하는 초석이 됨


조세와 군사력을 통제하에 두려는 중앙정부와, 기존 봉건체제 하의 생활양식이 뿌리채 흔들리며 졸지에 신분이 이동되는 번사들과 가신들을 포함한 번 간의 갈등으로 인해 어수선한 시대였다.

지방 통치 기관의 힘이 강했던 기존의 막부/번 체제를 중앙 정부가 통제하는 부/현제로 변경한다. 이에 단순한 칙령과 명칭 변경 이상의 의미가 있는 만큼 다각적인 이해가 필요한 만큼, 위의 단순한 설명에 의문이 남는다.

이는 일본을 지방무사와 토호의 영향력이 건재하던 기존 영지제도와 봉건국가에서 근대형 정부국가로 이행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으니, 행정체계를 말 그대로 뒤집어 엎는 과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결과로부터의 해석이 아닌 발단부터 충돌 과정과 영향까지, 당시의 혼란스럽고 불안했던 상황으로 직접 들어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정해진 답에서 출발해 일방향적인 설명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닌,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시행착오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개인적으로 쉽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와 학교에서 배워온 당시 조선의 역사와는 방향성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리라. 지금까지 메이지 유신의 유익성이나 제국 일본의 부정적 여파가 아닌, 폐번치현만을 단독으로 들여다보는 책이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점 또한.

이 책이 독자에게 번의 해체 과정과 현 제도 탄생 이후, 이전의 다이묘-천황 이중 체제에서 강력한 천황중심국가, 즉, 천황이 권력의 핵심이 되는 중앙집권적체제로 확립되도록 한 쿠데타의 실태 뿐만 아니라 이후 2차대전 참전 및 태평양 전쟁을 발발케 한 제국 일본의 역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도서제공: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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