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번치현 - 일본 근대국가 탄생의 무대 뒤
가쓰타 마사하루 지음, 김용범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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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메이지(1867~1912)4년, 7월 14일. 재경 지번사 56인이 황거 회합장으로 호출되었다. 그곳에서 우대신(산조 시네토미)가 천황의 칙서를 낭독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아니, 극소수의 최측근을 제외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폐번 합의는 폐번치현 선언 닷새 전. 이 갑작스러운 단행의 이유는 무엇인가?

변화의 규모에 비해 서두른 감이 없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말했듯 대부분의 관료들이 언질조차 받지 못하였으며, 그간 2년간의 가히 쿠데타라 부를만한 전쟁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살펴보자.
1. 부번현 삼치제: 이전의 영주, 즉 다이묘는 지번사로 지방행정관의 역할을 수행하나, 일부 번에 대해서는 정부 직할지인 부와 현을 설치, 중앙정부에서 지사를 파견함
2. 1868~1869, 2년간의 보신전쟁(무신전쟁)에서 신정부(메이지정부) 승리
3. 1869.07.25 판적봉환 실시: 토지와 인민(영지민)을 정부 관할에 두고 지방 행정 관할 토지와 녹봉, 조세 시행을 개정토록 함
4. 1871.07.12 폐번치현. 이후 각 번내 번사들의 대량 해고, 번-정부와의 대립으로 인한 징벌적 재정 악화 등으로 자발적 폐번 요청.
5. 기존의 봉건적 토지 지배 방식의 전면 개정으로 세금확보 및 군사력 통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도모하였으며 근대형 중앙집권 국가로 이행하는 초석이 됨


조세와 군사력을 통제하에 두려는 중앙정부와, 기존 봉건체제 하의 생활양식이 뿌리채 흔들리며 졸지에 신분이 이동되는 번사들과 가신들을 포함한 번 간의 갈등으로 인해 어수선한 시대였다.

지방 통치 기관의 힘이 강했던 기존의 막부/번 체제를 중앙 정부가 통제하는 부/현제로 변경한다. 이에 단순한 칙령과 명칭 변경 이상의 의미가 있는 만큼 다각적인 이해가 필요한 만큼, 위의 단순한 설명에 의문이 남는다.

이는 일본을 지방무사와 토호의 영향력이 건재하던 기존 영지제도와 봉건국가에서 근대형 정부국가로 이행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으니, 행정체계를 말 그대로 뒤집어 엎는 과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결과로부터의 해석이 아닌 발단부터 충돌 과정과 영향까지, 당시의 혼란스럽고 불안했던 상황으로 직접 들어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정해진 답에서 출발해 일방향적인 설명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닌,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시행착오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개인적으로 쉽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와 학교에서 배워온 당시 조선의 역사와는 방향성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리라. 지금까지 메이지 유신의 유익성이나 제국 일본의 부정적 여파가 아닌, 폐번치현만을 단독으로 들여다보는 책이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점 또한.

이 책이 독자에게 번의 해체 과정과 현 제도 탄생 이후, 이전의 다이묘-천황 이중 체제에서 강력한 천황중심국가, 즉, 천황이 권력의 핵심이 되는 중앙집권적체제로 확립되도록 한 쿠데타의 실태 뿐만 아니라 이후 2차대전 참전 및 태평양 전쟁을 발발케 한 제국 일본의 역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도서제공: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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