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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따금 털어놓곤 한다. 사람이 제일 어려워요.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도 확실한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도 얻을 수도 없어서, 너무 어려워요. 뚝뚝 흘러넘치는, 원망 반 서러움 반의 무언가를 주워담으려 애쓸 때도 있었으나...
그러니 이 글은 아마도, 말줄임표와 흐리는 말끝으로 가득할 것이다. 시작도 전부터 감이 온다. 어물거리다 슬며시 멋쩍은 웃음으로 뒷걸음질 칠 것이다. 신발코로 땅을 파헤치는 것처럼, 시큼하고 눅눅하고 바삭거리고 향긋한 냄새처럼. 수록작들의 줄거리를 한숟갈 맛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영 뜻밖일테다. 읽어달라고 쓰는 글이니 읽어줄 이들에게 미리 사과를 전한다(그치만 사는 게 다 그렇잖아요?).
p.184 사람이 다 다르다는 것이 가끔은 무섭게, 그래서 외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나요? 저 역시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상대방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했고 상대의 감정을 잘 모르겠다고 느껴질 땐 조심스레 질문을 더 해보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 듣기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자주 실패했습니다.
별 일은 없고요? 이 별 것 아닌 질문에 얼마나 많은 침묵과 마음이 담길 수 있을까. 이주란이 그려내는 세계는 소란하지 않다. 적어도 겉으로는. 느리고, 따분하고, 시시한데다 조금 꿉꿉한 느낌마저 든다. 쩍, 오래된 장판에 발바닥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이리저리 뒤섞인 반찬 냄새, 흙 묻은 옷자락, 낡아빠진 상다리나 조금 부서지고 헤진 살림살이들…
이런 것들은 쉽게 버려지고 잊혀진다. 왜, 좀 그렇잖아요. 변변찮고 초라해 뒤로 쓱 감추고는 사는 게 다 그렇죠, 멋쩍게 웃어버리는 그런 것들.
p.54 나는 평생 엄마에게 받기만 했기 때문에 그땐 내가 모든 것을 주고싶었으나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너는 이제 혼자가 될 거고 많이 울지도 모르니까. 엄마가 말했고 나는 옆집에서 종종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엄마의 그 말을 가만히 떠올려보곤 한다.
아마도 옥상일 곳이 그려진 표지를 보고 생각한다. 멀리, 높게 보는 일에 굳이 대단한 것이 필요하지는[[ 않겠구나… 그곳에 멋들어진 정원이 차려져있든 꽁초 조금에, 칠 벗겨진 방수 페인트, 시들거리는 쌈채가 널려있든 간에.
표제작 ”별일은 없고요?“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잔잔하고 느리고 조금 주눅들고 지쳐있고 후줄근하면서도 생활 냄새가 나는 이야기다. 좋은 아침이야, 로 시작해 잘자요, 로 끝나는 고요하고 잔잔한 영화같기도 하다. 별일은 없고요? 네. 조심히 가세요. 이렇게 이어지는 늦봄의 약간 눅눅하고 작은 이야기, 여기에 위안을 받으면 그런 삶을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기만일까.
p.68 나는 그 순간이 괴로웠다. 비가 좀 잦아들길 기다렸다가 나왔고 우산도 크고,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한 것 같은데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지겨웠다. 아니, 안 맞을 수도 있는데.....왜 나는 빗물을 맞았을까. 알 것 같았고 나는 내가 어느 날 태어난 이후로 줄곧 빗물을 맞으며 살아왔다는 것이 싫었고 앞으로도 계속 빗물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전반적으로 초라하고 변변찮고 시시하고 느리다. 사는 일이 대개 그렇다. 별 일은 없고요? 예, 일은 무슨… 흐리는 말꼬리 어딘가에 대충 욱여넣는 일상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안부를 묻는 말에, 대수롭잖게 밀어주는 반찬에, 별 거 아니라며 극구 얹어주는 김치 쪼가리에, 꼬깃해진 지폐나 오천원 이하 카드결제 사절. 에 지갑을 털어 모은 미지근한 동전 쇳내에 사람을 담을 수는 없다.
우리는 영영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지나치게 가깝습니다. 바짝 들이대면 뭉그러지고 멀찍이 밀어낸 화면에서는 어디가 초록인지 경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삶이란 한 사람 몸에 담기기도 버거울만큼 거대하고 길고 뜨거운 것이 아니던가. 영웅은 현실 너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p.80 우리는 가졌던 것을 잃었다기보다는 원래 없는 사람들이었고 삶 속에서 어떤 이야깃거리를 발견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듯하다. 그래서 몇 마디 한다고 하는 게 늘 싱겁기만 한 그런 사람들이었고, 은영 씨의 그런 점이 나는 좋았다.
이따금 잘 알지 못하는 길, 많이는 아니고 조금 낯선 흙길을 걸을 때, 오가는 사람이 없으면 잠시간 뒤로 걸어보곤 한다. 온 길을 등지고 향한다. 가던 곳은 멀어지고 온 곳은 가까워지게 걷는다. 그렇게 시선을 멀리 두고 한 걸음씩 뒤로 끌다 보면 이따금 장하게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는데, 앉은 김에 쉬어가지 뭐… 는 축축한 느낌에 기겁하는 비명으로 끝나버리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어, 사는 일이 이런 건가, 내지는 그 때 그 시간은 이런 느낌이었던 걸까, 하는 순간이 온다. 나는 이것을 의미를 발견해내는 때라고 부른다. 그리곤 답할 수 없는 이름을 떠올린다.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것을 입속말로 가만히 굴려보듯이.
볕 좋고 고요한 날에, 때로는 습하고 뜨듯한 공기에 숨이 갑갑한 날에, 또 언젠간 숨 한 번에 연기 한 번을 내뱉는 날에 가만히 눈을 감고 웅크려 앉아있던 시간들이 있다. 매번, 날이 어떻고 몸이 어떻고 간에… 아, 사는 일은 조금 슬프고 작고 허둥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아마, 아니 확실히, 정답은 내 몫이 아니다.
무자비한 다정함. 다정이 잔인할 수 있을까. 조건 없는 다정함, 신세-갚을-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는 다정함은 그럴 수도 있겠다. 포옹에 목이 졸려 죽듯이. 누군가의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다정이 나를」, 김경미).
p.114 그러다 갑자기 눈물을 조금 흘린 것은 호박죽이 너무 맛있어서도, 무언가가 슬퍼서도 아니었다. 아줌마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을 내가 지금 나눠 받고 있다는 무자비한 따뜻함 때문이었다.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어느 길가 돌 위에 앉아 눈을 감고 해가 비치는 곳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면, 감은 눈 뒤로 보이는 핏줄이나 불그스름한 그것을 바라보는 일과 같다면… 으레 하는 생각은 매번 끝을 맺지 못한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사람이 두 발로 서는 이유는 가슴을 맞대고 끌어안기 위함이라고. 꼭 맞지는 않겠지만. 포옹으로 말을 대신할 때 매번 그 말을 떠올린다. 심장이 뛰는 이를, 찌그러지고 닳아빠진 것을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토닥이거나 바라보는 것은 사람이 두 발로 서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p.158 수현은 그것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경험해본 다음에야 할 수 있는 말. (…) 해본 적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말들. 그걸 하고 싶었다. 우월하려고 한 말이 아닌데 우월해 보인다면 그런 시선 따위 너그러이 이해해줄 여유도 있지.
어쩐지 흉터는 자꾸 만지작거리게 되지 않냐고 하던 이가 있었다. 다쳤다 아문 자리, 살이 패이고 찢기고 문드러졌다 붙은 자리… 그게 흉터 아니냐, 손상의 물리적 기록이 아니냐 묻는 내게 그러니까, 라고 하던 그 사람, 누구였더라…
아마도 읽은 기억마저도 희미해질 때 쯤 다시 찾게 될 책이다.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또다시 말을 흐리면서 꺼내들테다. 그리곤 다시금 위로받겠지. 먼지 묻고 구겨진 모자를 탁탁 털어 쓰듯이. 아휴, 모래냄새, 하며.
별 일은 없고요? 예, 일은 무슨... 잘 지내시죠? 그럼요, 날씨가 좋네요. 그러게요...
p.194 그에게 짐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내가 괜찮은지 물었더니 사랑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너한테 집이 될 것 같아. 응. 우리 서로의 집이 되어주자. 짐이 될 것 같다고 말하려던 것이 ㅁ을 ㅂ으로 잘못 쳐 그에게 서로의 집이 되어주자는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타였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서로의 집이 되어주자는 말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기 때문입니다.
p.200 물론 어디선가 술에 취해 누군가를 패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왠지 제가 너무 힘든 순간에 어디선가 평범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을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수없이 저를 죽고 싶게 만들고 수없이 저를 죽이겠다고 말하던 그 사람을 생각해야 죽지 않을 수 있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