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살리는 기발한 생각 10 - 기후위기 탈출로 가는 작지만 놀라운 실천들
박경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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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환경보호, 기후위기, 지속가능한 발전, 생태환경조성... 대부분에게 익숙한 주제들이다. 누군가는 그만 좀 할 수 없냐, 지겹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느냐... 안다. 분노와 불안은 큰 피로를 동반하는 감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긋지긋하고 흔해빠진 말을 꺼내야만 하는 것은, 기십년도 더 전부터 외치는 ”지금 당장!“을 다시금 치켜드는 것은, 정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놈의 위기 위기... 석달열흘째 말하는 그 엄청나고 위기가 오기는 하는거냐, 따지고 보면 이전 세대 잘못이 아니냐, 왜 지금의 젊고 어린 세대가 더 불편하고 더 수고로운 생활방식까지 동원해가며 노력해야 하느냐 묻는다면...

나와 당신, 그들 또한 동시대의 지구인이며 ”지금 당장!” 사라질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을 포함하는 미래 세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살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간소한 삶의 방식, 미니멀 라이프부터 포장지 없는 가게와 재활용 등 소비 방식, 도시 재생과 생태도시, 생태 여행 등 우리 개인의 삶을 거쳐 도시광산과 공정무역, 친환경 경제와 탄소중립사회까지 “지구를 살리는 기발한 생각”을 열 가지 주제로 나누어 제시한다.

대부분의 책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권할 수 있는 대상과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학교로, 어디든 청소년이 있는 곳으로 가야하리라.

막상 펼쳐보니 별다른 것도 아닌데 기발하다고 유난을 떤다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알고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몰랐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챕터 말미의 딸림자료와 토론 과제는 이 책의 내용이 단순한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고 삶과 밀접한, 깊숙하고 사소한 영역까지 도달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사실 이 얘기를 하려고 저 위에서부터 판을 깔았지만, 청소년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이들이 있는 곳에 가야하리라. 그 말은 곧 모두가 읽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어른인 나는, 우리는, 당신들은 가만히 손 놓고 지구를 말 그대로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와중에 청소년들에게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며 독려 비슷한 말을 해댈 수야 있겠는가. 그것도 방긋방긋 웃는 낯으로.

어쩌면 누군가는 하고싶어도 못 하는 게 문제 아니냐, 나 하나 바뀐다고 뭐가 달라지느냐 물을지도 모른다. 틀린 말이 아니다.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어른,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를 모르지는 않는다고 자부하는 나는 안다.


저자가 제시하는, 적게 소유하고 낡은 것과 함께하는 삶, 다소 불편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차단되기도 한다. 그것은 비용이나 넘쳐나는 구조적 스트레스에 대한 해소 방안 제약의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은 보다 큰 규모, 제도와 사회구조 전체를 뒤바꿔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밖의 문제라면,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요”로 수렴되는 문제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사는 일은 원래 불편하고 번거로운 거라고, 일상은 원래 좀 구질구질하고 낡은 데가 있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호텔이나 한껏 꾸며놓은 쇼케이스가 아니라고. 내 기분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행성에 함께 머무는 생명들에 대한 의무라고.

그러니까, 우리 이제 좀 덜 게으르고 덜 해로울 수 없을까. 여기서부터 저 멀리까지, 작은 습관부터 전세계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큰 일까지 늘 그래왔던 방식이 아니기를 시도하는 것. 그 기발한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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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인류의 흑역사 -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인 폐허 40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성소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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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작고 사소한(?) 편견 하나를 고백해야겠다. 나는 ‘흑역사’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를 대자면 석달열흘을 화내고도 모자랄 긴 것과 예의상 답할 수 있는 짧은 것까지 다양하겠으나, 여기서는 ‘비극을 흥미로운 무언가로 소비하고 넘어가 잊어버려도 되는 것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다’ 정도가 적당하리라. ’다크 투어‘를 기꺼워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처음 본 순간, 머리속으로 그간 차라리 안 보고 못 본 것으로 넘기고 싶었던 제목들이 스쳐지나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여기서도 그 흔해빠져 지겨운 편견으로 가득한 소리를 하려고... 결론부터 말하면, 짜잔. 기우였습니다. 괜한 걱정을 했어요. 짧지만은 않았던 고민의 시간을 단박에 끝낸, 서문의 문장을 조금 옮겨둔다.


p.10 잊는다는 것은 기억하는 힘을 잃는다는 뜻이다. (…) 'misplaced'는 어떤 대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기보다는 잠시 찾지 못했을 때 쓰는 단어다. 이 낱말은 잃어버린 대상을 곧바로, 적어도 언젠가는 다시 찾으리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p.13 방치는 희망을 모두 포기해야 할 근거가 아니라 그 반대다. 버려진 장소는 다가올 세상을, 잔해에서 구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오래 더 열심히 생각해보라고 격려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세계 곳곳의 ‘버려진 장소‘ 를 따라 인간의 어리석음과 극히 찰나를 살아가는 존재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을 거대한 자연의 반발 또는 녹슬고 부서져가는 잔해들을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불보듯 뻔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할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각 장의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기서 소개되는 장소들은 각각 예정된 운명에 의해, 시류를 따라잡지 못하고 도태되어, 시간에 무게에 잠식되거나 영광의 뒤로 밀려나서, 세상이 변했고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에도 마침표가 찍힐 때가 도래했기 때문에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장소가 되었다. 혹은 그 때 그 곳이 품고 있던 소리와 이야기를 서서히 잃어가는 중이다.


폐허, ‘버려진 장소‘란 무엇인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잠시 주목되어 쓰이다 그 목적을 다하거나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되는 바람에 발길이 끊긴 곳인가? 더이상 쓸 수 없게 된 곳인가? 그도 아니라면 잠시 믿어진 ’영원한 영광‘의 후광을 잃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중인,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잊혀진 곳인가? 어느 쪽을 택하든, 인공물이든 자연이든, 인간의 역사와 맞닿은 이상 장소에는 이야기가 부여된다. 그러므로 늘 그랬듯이, 이야기에서는 배울 것이 있다.

저항할 수 없거나 그렇다고 여겨지는 흐름은 결국 인간에 의해 촉발되고, 의미를 부여받으며, 붕괴하거나 망각된다. 그것을 역사의 뒤안길이라는 상투어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장소에 이야기가 부여된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곳에 머무르고 또 존재했으며 기억했거나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잊혀짐은 끝이 아니라 다만 버려짐, 즉 주의를 벗어나는 것이다. 아무도 그 장소를, 그곳의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지 않을 때, 잊혀졌다는 사실마저도 잊혀질 때, 비로소 끝이 도래한다.

완전한 망각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망각되고 있음은 일종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원래 상태로, 잊히기 전의 상태로, 잊혀져야했던 이유를 명확히 직시할 수 있으며 반복하지 않을 것을 다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p.10 "시는 결코 끝나지 않으며, 다만 버려질 뿐이다"라는 말처럼, '버림'은 되찾음'이나'돌이킴'의 가능성을 분명히 안고 있다. 끝난다는 것은 죽는 것, 마무리되어 더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버려진 것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쉽게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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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기억책 - 자연의 다정한 목격자 최원형의 사라지는 사계에 대한 기록
최원형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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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블랙피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몇 해 전부터 이맘때면 으레 덧붙이곤 하는 인사가 있다. 올해는 여름이 이르네요. 요사이 이른 더위가 한창입니다. 안녕하신지요. 무탈하시길 빕니다. 큰 생각 없이 쓰고나면 이내 ‘이래도 되는걸까’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아름다운 사계절이니 뚜렷한 기후변화니 마르고 닳도록 배우며 자라기는 했는데, 당최 이걸 사계절이라고 해도 될만한 일인지, 싶어지는 것이다. 우기와 한기, 그리고 약간의 그라데이션 정도가 아닌가.

나 어릴 적엔, 그러니까 나 때는 말이야. 방학, 그것도 여름방학이 주제일 땐 노상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가 농사를 도와요!”가 있었다. 이쯤 해서 고백하자면, 조부모 대부터 일가친척 중에 시골에 사셨던 분이 없다. 다들 시멘트 쫙쫙 깔린 대도시에서 곱게 자라 흙이라고는 어디 화단 텃밭이면 모를까, 만질 일도 없었기에 나 또한 시골? 자연? 다 휴가지나 가야 있는 대상이었단 말입니다. 예? 많은 도시인들에게 당신이 마주한 오늘의 자연을 말해보라 하여도 어... 비둘기요? 정도라구요.



그러니 인간이 근현대 도시문명을 이루며 자연에서 너무 멀어졌다고, 더는 흙을 밟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우려하는 이가 많은 줄도 안다. 영 틀린 말은 아니지. 그렇다고 모든 이가 일선의 투사가 될 수는 없다. 이또한 안다. 당장 나만 해도 한여름 에어컨을, 풀이며 나무를 밀어내고 들어선 아스팔트 길을, 꼼짝없이 재활용 불가로 분류될 온갖 물건들을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에 둘러싸여 있다.

매일 쓰는 물건 중 대를 이어 쓸 수 있는 것은 손에 꼽지만, 어쩌면 인간이 사라진 지구에도 남을 쓰레기는 차고 넘친다. 손바닥만한 공터를 갈아엎어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고, 해마다 삭발이라도 하듯 기둥만 남기고 잘려나가는 나무를 보는 일도 더는 낯설지 않다.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까.

해마다 어디의 얼음이 녹는다더라, 사막이 넓어진다더라, 밀림이 사라지고 그림책에서나 보던 동물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더라...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위기어린 소식들을 체감하지 못해 크게 와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영영 남의 일로만 여겨지는 구호를 외쳐야 하는 걸까.



얼마전 동물원을 탈출해 도시를 배회한 얼룩말이 화제가 되었다. 그 전에는 역시 동물원을 탈출해 헤매다 겁에 질린 채 사살된 퓨마가 있었다. 그 사이를 심심찮게 채우는 건 산을 내려온 멧돼지며 곰이며 고라니며... 그들의 죽음과 공포는 처음에는 웃음을, 나중에는 씁쓸한 연민과 왜 그럴 수밖에 없었냐는 물음을 이끌어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우리 인간이 그들의 터전을 빼앗은 게 아니냐고,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느냐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미 문명을 이룬 인간이 당장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자연의 일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작가 최원형은 한 가지 해법을 찾았노라 말한다. 우리는 자연과 너무 멀어졌다고, 다시금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은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의 이야기에 눈과 귀를 여는 것이라고. 계절이 흘러가는 자리마다 숨쉬고 머무는 이들을 살피는 것이라고.



태어난 순간부터 살 권리를 박탈당해도 될 존재는 없다. 이 희한한 별에 살아가는 것들 중 삶의 터전을 빼앗겨 마땅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좀 작으면 어떤가, 조금 시끄럽고 번거로우면 어떤가.

인간은 바이오동력 음식물쓰레기통과 다를 바가 없다고 누누히 말해왔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보도블럭 사이를 비집고 자란 꽃, 물풀에 엉긴 정체모를 알 무더기, 기둥만 앙상하게 남은 가로수, 이름도 모르는 나그네새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처마며 땅을 내어주고 이소를 돕고... 일상의 한켠을 나누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지 않을 방도가 없다. 이제 갓 솜털뭉치를 벗어난 작은 새를 보라고, 그들이 날아갈 때까지 기다려주자고. 더위에 지친 벌에게 물 한 모금 내어주고 그들에게 감사하자고. 발치에 찰싹 붙어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들풀을 눈여겨보고 같은 것 하나 없음을, 느리고 바쁘게 살아내는 그들을 응원해보자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자고. 환대하는 마음을 잊지 말자고.

멈칫하는 순간, 아-하고 경탄하는 순간, 쌓인 눈 아래 숨죽이다 움트는 생명을 떠올리는 순간. 그 순간들의 가능성을 믿는다. 우리는 함께할 수 있다고, 찰나를 공유하는 삶에 머물 수 있다고,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연대의 가능성을 믿는다. 이 책은 기후위기의 희망이 될 생명 연대에 관한 이야기라는 소개문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생명을 가진 존재와 함께할 수 있는, 바로 그 희망.


#사계절기억책 #사계절기억프로젝트
#최원형 #사계절 #기후위기 #기후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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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티 워크 -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
이얼 프레스 지음, 오윤성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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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속칭 ”3D“로 불리는 업종이 있다. Difficult, Dirty, Dangerous.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들을 그렇게 부른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업무 내용이 까다롭거나 위험한 일이 있다. 유달리 고되고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상황에 놓이는 직업군이 있다. 그것은 사람에 연계되는 것이 아니다. 일이 어렵고 위험한 것이다.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까다롭거나 위험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업무 내용과 사람이 별개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Dirty, 더러운 일은 어떤가? 그것은 단순한 생리적 불쾌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러운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 또한 오염되었다는 생각, 사회적 시선을 떨치기 어렵다. 그들은 쉽게 ”더러운 사람”으로 묶이기 마련이다. Dirty Work가 Dirty Worker로 이어지는 셈이다.

‘더러움’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생리적 혐오가 아닌, 도덕적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일을 떠올려보자.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이 대하기 꺼리는 대상과 접촉해야 하는 일, 예를 들면 교도관을, 표적살상이 일상인 드론 조종 군인을. 환경 담론이 부상하며 동물권 운동과 정면으로 대치해야 하는 도축 및 가공업자, 석유 시추선 승선원은 어떤가?


위험하고 고된 데다 사회적 멸시까지 겹치는 일에 선뜻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편과 불쾌,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터를 일상적인 행동 반경 내에 두고 싶어하는 사람 또한 드물다.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들이 여전히 사회에 필수적이라면?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한다면? 간단한 방법이 있다. 멀리, 눈에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면 된다. ‘그들’이 ‘우리’와 구분되고 격리된 존재가 될수록 ‘우리’의 불편함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일들은 누가 맡게 되는가? 누가 ‘낮은 곳에 임하‘시게 되는가? 어떤 이가 ‘배운 것 없고 가난하니 자기 발로 알아서’ 더럽고 위험한 일을 맡는 와중에 돈까지 받으니 감사해야 하는, 희한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가?

p.27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은 동시에 도덕적 불평등을 반영하고 강화한다. (…) 더티 워크가 이루어지는 고립된 장소를 피할 수 있는 능력, 그 누추한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능력 여하에 따라 결정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티 워크를 할 가능성이 크다.


저자는 ’더티 워크‘를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필수노동 가운데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겨져 더욱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 노동(p.22)“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이 “다른 인간에게 또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환경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량한 사람들’, 즉 점잖은 사회구성원이 보기에 더럽고 비윤리적이면서 종사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낮게 평가되거나 낙인 찍혔다고,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스스로 위배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상처를 주(p.29)“는 특성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더티 워크‘의 위임이 ’선량한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필수성을 알면서도 책임을 넘기고 도덕적 비난의 대상으로 두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우리‘는 아니라는 모순적이고 차별적인 구분선에 의해 가능해진다.

p.20 문제의 핵심은 어떤 일이 행해지고, 그 일을 누가 하며, 그 밖의 우리 모두는 어떤 방법으로 그들에게 그 일을 위임하는가다. 우리는 스스로 전혀 하고 싶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모르는 척하고 싶은 일을 그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위임한다.


이 책에서 ‘더티 워크’의 관리나 경영을 맡는 고위직이 아닌 현장직, 생산직 노동자들 대부분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심신의 외상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그만두거나 “용기있는 반항“을 택하지 못하는 데에는 가장 중요한 것, 생계가 달려있었다. 그 일이 아니면 당장 이만한 일을 찾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해악과 폭력성을 알면서도 집단에 순응한다는 죄책감은 결국 당사자에게 심각한 도덕적 외상의 형태로 귀결된다. 이것을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p.195 도덕적 외상은 "근본까지 닿아 있는 도덕적 신념을 위배하는 행위를 스스로 행하거나 막지 못하거나 목격하는 일"과 관계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산업재해다. 더티 워크를 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이러한 산업재해를 당한다.

p.249 역설적이게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더티 워커가 느끼는 공모 의식과 죄의식을 강화할 수 있다.


이렇듯 ‘점잖은 시민들’과 자본이 공모한, 기만적인 위장은 마치 그들이 하는 일이 우리 사회가 떠맡긴 것이 아닌 그들의 자발적 이윤추구에 의한 것처럼, 행위의 폭력성은 노동자 개인의 성품 탓으로, 잦은 부상과 질병은 그들 자신의 불결한 생활 탓이며, 산업재해는 개인의 나약함이나 부주의에 원인이 있는 양 위장한다.

p.284 고분고분한 외국인에게 대체될까 두려워하는 본토박이 저숙련 노동자들의 계급 불안과 인종차별이 뒤섞여, 이주민들은 사회적 더러움을 획득한다.

p.438 성공한 화이트칼라 전문직이 권력이 있다고 해서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력이 있는 한 이 비난은 훨씬 덜 뼈아프고 훨씬 덜 파괴적이어서 그들의 소득에, 위상에, 존엄성과 자존감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은, 저자가 개인의 악행과 폭력, 산업의 비윤리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 행동은, 그런 방식의 파괴행위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타자의 삶을, 폭력을 목도하는 이들이 그에 적응하기 까지의 시간을,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미래를, 불안을, 적어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지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지 못한다. 누가, 무엇이 우리 사회의 가장 극단적이고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더티 워크’를 내맡기고 사회의 전선으로, 가장자리로 내모는지. 손쉬운 책임회피는 ‘더티 워크’의 윤리적 전환 방향을 모색하고 현장에서 위험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마주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을 치워버림으로써 영영 알 수 없게 만든다.

p.358 윤리적 소비는 정치의 문제를 개인의 자기만족감을 최우선시하는 시장 거래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 (…) '좋은 먹거리' 운동이 시장에서 상품을 선택하는 행위로 축소되면 식품업의 생산 환경 같은 구조적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밀려날 수 있다.

p.411 더티 워크는 그 일을 하는 개인만을 더럽히지 않는다. 그 사람이 속한 가족과 지역사회 전체를 더럽히고, 그가 만나고 교류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기억에 오래도록 흔적을 남긴다.


정신질환이 있는 수감자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교도관은 그들이 특별히 잔인하거나 혹은 수감자들에게는 인권이 없기 때문인가? 그런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사회의 구석으로 격리되어 마땅한가? 도축과 석유산업 노동자는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에 ‘부역하는 자’인가? 노동현장의 그들은 환경파괴와 동물 살해의 주범으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표적 살상을 주업무로 하는 드론 조종 전투원들은 화면 뒤 안전한 곳에 있으니 그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일종의 나약함이나 살인자가 겪어야 할 응보 정도로 취급되어 마땅한가?

개인을 집단의 이름으로 호명할 수도, 집단이 그 안의 개인이 갖는 속성과 삶을 완벽히 나타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그 둘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Dirty work가 Dirty worker로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p.140 처벌의 현대화를 추동한 욕망은 처벌이라는 누추한 사업을 더는 직접 목격하고 싶지 않은 점잖은 시민들의 시야에서 범죄자의 신체를 숨기려는 욕망이었다. (…) ‘문명화 과정’은 잔인한 폭력이 실제로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더 은밀한 장소로 밀려난다는 뜻이다. (…) 닫힌 문 뒤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문명화된 감수성을 해치지 않으며 오히려 폭력을 세탁하는 것도 가능하다.

p.322 더티 워커는 “우리 모두의 대리인”으로서 사회의 다수 시민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불미스러운 일을 수행하는데도 위임자인 우리는 더티 워커에게 거리를 두고 그들을 멸시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넓다. 모든 과정과 사연을 알기에는 산업구조가 너무도 거대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가 아니라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문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뻔히 존재하는 이들을 너무 당연하게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앞서 말한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을 호명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가는지, 열악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모여들게 하는지, 왜 덜 ‘우리’같은 이들로 구성되는지 이제는 그 원인을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늦었으니 그만큼 더 절박해야 한다. 결국 이 이야기는 부제의 물음으로 돌아간다. “비윤리적이고 불결한 노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되는가”.

여기서 다시 묻는다.. 그들과 우리는 다르냐고, 왜 우리는, 누구에게 ’더러운 일’을, 어떻게 떠맡기고 있느냐고. 우리는 그들이 아닌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기에.

p.452 채찍을 휘두르는 군인과 그 모습을 태연히 지켜보는 공무원은 식민지 시대의 밀사가 아니다. 그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대리인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를 대신해 더티 워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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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끝에 사람이
전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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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띠지에 쓰인 “시대의 비극”이라는 말을 읽고 생각한다. 대체 얼마나 큰 슬픔이어야, 얼마나 깊은 원한과 증오여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숨죽여 엎드리기를 강요받아야 그들의 비극은 개인을 넘어 시대의 것으로 불릴 자격을 얻는가.

또다시 생각한다. 어떤 비극은 그 일이, 그 때 그 사람들이 그곳에 존재했음을 인정받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히지 않는가. 어떤 일은 비극으로 불릴 자격을 ‘얻기‘ 위해 투쟁해야 하지 않는가.

세상이 좋아졌다고들 한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들 한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틀렸다. 맞는 부분이 없냐고 하면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역시 틀렸다. 다른가? 아니. 사실과 다른 것을 우리는 ’틀렸다‘고 한다. 진실을 다른 말로 교묘히 왜곡하는 것을 우리는 ’틀렸다‘고 한다. 사실과 다른 줄을, 진실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틀린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p.41 대감댁 노비. 우리가 자조하듯 던지던 그 말. 하지만 주안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안 좋아졌다.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하지만 선배, 우리는 노비가 아니잖아요. (…) 노비도 아니고, 회사 소유물도 아니고, 일 시킬 때만 전원 넣고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기계도 아니잖아요. (…) 그런데 회사는 자꾸 우리를 그렇게 취급하려고 하잖아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다시 생각해보자. 세상이 좋아졌다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한다. 예전을 지나 지금으로 온 이들이 말한다. 여기에 실마리가 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나는 지금에 와서 과거를 반복하려 한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예전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면서도 누군가는 잔뜩 미화된 ‘예전’을 현재에 덮어씌우려 한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반복되는 폭력 앞에서 ‘이만하면 좋아진’을 말한다. 좋아졌다는데, 여전하다. 달라지지 않았는데, 변했단다. 대체 무엇이.

p.17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인식이 넓어지고 기술이 발달해도 바뀌지 않는 게 딱 하나 있었다. 제 손으로 땀 흘리고 일 하는 사람을 한낱 공장의 부품인 양 취급하는 것.

p.291 현실은 조선 시대 이야기만도 못했다. 사람이 괴로워하다 마침내 죽음으로 가해자들을 고발해도 군대는, 법관들은, 나라는, 그저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고 흐지부지 넘어가기 바빴다. 그렇게 원통하고 원통해서 유진의 앞에 돌아가신 분이 자꾸만 나타나도록.


사람을 해치는 것은 사람이다. 하물며 사람이 모여 이룬 국가 권력이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덤빈다면 그 결과는 개인이 감당할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지경에 이른다.

시간이 지나면 낫는 게 상처라지. 그러나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안팎으로 낫게 하는 힘이, 그럴 여력이 있어야만 상처는 비로소 아물고 치유될 수 있다. 하물며 끊임없이 더해지고 덧난다면 그 누가 배겨내겠는가.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p.303 사람의 마음은 이 겨울 날씨보다도 더 차갑고 강퍅한 것일까. 조카가 젊은 나이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거기에 대고 그만 좀 하라고 너 하나만 참으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 때문에 누님과의 인연조차 끊어졌다고 울부짖는 것은 대체 얼마나 이악한 마음일까.


인간은 연약하다. 무르고 나약하다. 쉽게 다치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버린다. 다시 한번, 사람을 해치는 것은 사람이다. 나약하고 무르고 연약한 인간에게 강인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마음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것이라 했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부러진 자가 너만은 꺾이지 않게 하겠다고 버텨내기를 각오하는 마음이 강하다. 폭력의 위계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마음이다. 홀로 싸우는 이에게 닿기를 바라며 저 먼 우주에 작고 샛노란 것을 띄워내는 마음이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이다. 피눈물을 흘리고 원한에 사무쳐 주저앉은 이를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이다.

오직 그것만이 강하다.

p.52 [무척 작아요. 하지만 우주에서도 위원님 눈에 띄었으면 좋겠어서 개나리처럼 샛노란 색으로 칠했어요.]

p.92 "난 솔직히 가끔은, 아, 저 새끼 저거 싹수가 노랗다. 그러고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런데 나도 알지. 처음부터 싹수 노란 애가 어디 있어."


폭력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 정의와 본질을 논해왔으나, 기실 이것에는 거창한 말이 필요하지 않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를 다치게 하는 것이 폭력이다. 다른 이를 위협하고 억누르는 것이 폭력이다. 비단 몸으로, 도구로 가해져야만 폭력이 아니다. 말로, 법으로, 시선으로, 삶과 사회의 경계로 밀어내고 짓누르는 것 또한 폭력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지금 이 나라에 살아가는 젊은 세대, 그러니까 당연하게 한국인 부모의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국인으로 살아온 젊은이들 중 전쟁을 목도한 이가 몇이나 될까. 세상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믿음이 뿌리채 뽑혀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맞닥뜨려본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p.210 "어느새 우리는 그저 이 모든 일에 덤덤해졌어." "전쟁에 말이죠." "아니, 전쟁을 빙자하여 도덕이 무너지는 세상에 말이야, 사람을 죽이지 마라, 남의 것을 빼앗지 마라, 그런 건 인간의 기본 도덕이지 않아. 그런 게 없어지는 거야, 전쟁이라는 건."


역사의 가해자들을 천하의 멍청이 취급하는 것은 유의미한 전략인가? 이미 숱하게 지적되었다. 혐오를 발산하고 증오를 흩뿌리는 이들은 멍청하지 않다. 지독하게 치밀하고 집요한 폭력을 고작 ‘멍청하다’는 광범위한 말로 퉁치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 말은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른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쉽사리 붙여진다. 이상한 일이다. 혐오를 위해서는 약자를 향하나, 책임회피를 위해서는 강자의 것이 된다. 그러니 모든 일에 멍청해서, 몰라서 그래, 라는 손쉬운 면죄부를 줄 수 없다.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잘못 아는 것이 전부라는 아집과는 다르다.

p.326 "…모르는 건 모를 수 있어. 그런데 잘못 아는 건 안 된다는 거야."


천지가 뒤집히고 어제까지의 세계가, 모든 상식이 무의미해지는 것. 그것이 전쟁이고, 국가의 이름을 빌어 자행되는 폭력이다. 우리의 짧디 짧은 역사는 망각을 강요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산 ’자‘를 죽은 ’것‘으로, 죽은 이를 차마 죽지도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다시 돌아가보자. 상처는 저절로 낫지 않는다.

작중 주제가 되는 사건들의 가해자 다수는 이미 세상을 떴다. 피해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 그 상처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시금 국가의 사죄이다.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기회는 이미 몇번이고 유실되고 방치된 순간들에 있었다. 누구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독자에게는 작중 신의 경고를 통해 전달된다. 여전히 “시대의 비극”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말한다.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언제까지고 영원하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산 것과 죽은 자가 뒤섞인 시간을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당신은 어디를, 무엇을, 언제를 향하고 있느냐고. 잊지 말라. 망각은 책임을 넘어설 수 없으니.

p.234 "약속을 어기면 안 돼우.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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