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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alien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외계인, 그리고 외국인(체류자). 외국인이 된 적이 있는가? 그것도 말도, 문화도 다른 곳에 덜렁, 혼자일 뿐인 외국인. 태어나 자라며 자연스럽게 접하고 능숙하게 체화한 것이 아닌, 머리가 먼저 이해하고 몸을 움직여야 하는 낯선 세계에서 이질감의 당사자는 미숙함을 떨쳐내기 어렵다. 너무나도 쉽게 조롱거리가 된다.
이야기는 티모페이 프닌의 수난으로 시작해 수난의 회자를 예고하는 문장으로 끝난다(“그럼 이제부터 ‘크레모나 여성 클럽’에 간 프닌이 연단에 서다가 원고를 잘못 가져왔음을 알게 되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의 기벽과 문법적 오류, 장황하게 빗나가는 표현과 상황에 맞지 않는 경어, 어리숙한 태도에서 독자는 시종일관 웃음을 터트릴지 모른다. 물론 작가는 쉴새없는 익살과 수난 또는 실패의 연속으로 웃음을 자아낸 탓이다. 문제는, 생각할수록 웃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웃음의 이유가 타자의 추락, 낯선 문화에서 필연적으로 겉돌 수밖에 없는, 문화와 그 개인에게 차라리 이물감에 가까운 이질감을 ‘구경’하며 잔인한 쾌감이 아닌지 퍽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화려한 수사와 첨언으로 산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서술자를 통해 독자는 프닌, 그에게 닿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우리의 말과 문화에 낯선 이를 대할 때, 부적절한 문법과 빗나가는 어휘에 우스꽝스럽거나 미숙하여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 온당한가? 그 자신에게 익숙한 말과 환경에서 그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그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프닌을 모른다. 그의 내면과 고뇌와 혼란을 알지 못하고, 그의 역사와 향수를 알지 못한다. 필연적으로 미끄러지고 엇나가는 말들로 인해 우리는 그의 섬세한 내면과 험난했던 수난의 기록, 풍부한 지적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글에는 쓴 사람의 생각이 담긴다.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에게 자기 내면의 일부를 슬몃 드러내보이는 것이 글이다. 그것은 때로는 날것 그대로, 때로는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도록 만신창이 또는 한껏 치장되어 세상에 내보내진다.
이 오물인지 선물인지 모를 것을 집어든 독자는 무엇을 하느냐. 흔들어도 보고 한껏 들여다보고 씹고 뜯고 에이 못 먹을 것이다 저만치 던져놓거나 박수갈채를 보내기도 하고... 아무튼 뭔가를 한다.
그렇다면 사건의 발단쯤 되시는 저자는 또 무엇을 하는가. 가만히 손 놓고 보기만 하는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에 그것은 뭐가 아니고 된장입니다. 잘 보세요, 점잖게 권하거나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노성을 지르기도, 더러는 어느샌가 독자 사이에 끼어 제가 던져놓은 혼돈을 부추기기도 한다.
나보코프는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마지막에 가깝다. 한 술 더 떠서 ‘거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차거나 ‘내가 언제요?’ 시침 뚝 떼고 앉은 쪽이다. 즐기는 자는 재밌고 진지한 사람은 속이 터진다.
그의 모든 소설 중 가장 코믹하고 애달프고 단순한 작품이라는 평은 틀리지 않았다. 시종일관 우습고 짠하고 줄거리는 단순하다. 동시에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을 이해할수록,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수록 조금도 우습거나 단순하지 않다. 짠하다, 정도로 끝낼 수 있는 피로와 고달픔이 아니다.
독자는 이 작품 곳곳에서 작가를 보게 된다. 아마도 망명과 이주라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일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결국 그것은 낯선 곳에 필사적으로 적응하기, ailen으로서의 경험이다. 이방인인 적이 없었던 이는 그 심정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데, 작가는 죽어서도 말이 많다. 자신의 글이 읽히고 회자되는 동안 유령처럼 나타나 끼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여기서, 작가는 묻는다. 우습지 않느냐고, 저 수난과 휘황찬란하게 엇나가는 문장에 웃지 않았느냐고, 그런데도 정말 우스우냐고.
결국 독자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뒤늦은 고민 뿐이다. 무엇이 우스운가,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닿지 못했던 그의 세계, 펼쳐지지 않은 페이지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