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
신다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에 그럴 수도 있지, 가 어디 있을까. 위험요소가 있는 현장에서 노동하는 것과 노동 현장에서 사망하거나 위해를 입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전자에 동의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후자에까지 동의한 것은 아니다. 목숨을 빼앗기는 일에는 그 누구도 동의할 수 없다.

사례, 라고 감히 부를 수 있다면, 아무리 건조하게 서술하려 애를 썼대도, 얼마 읽기도 전에 그 규모와 참혹함에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다. 먹고 살려면 못 할 일이 없다지만, 먹고 ‘살려고’ 하는 일에 목숨을 빼앗기는 일처럼 어처구니 없는 게 또 어디 있겠는가.

p.18 사고 나기 전에는 내도 솔직히 산재에 대해서 신경 많이 못 썼습니다. (...) 뉴스 나오면 남의 일이죠. 그러다가 이게 어느 날 갑자기 내 가족이 피해를 당하면 내 일이 되더라는 거죠.


수백명이 오르내리는 지하철, 그곳에서 사람이 깔려 죽었다. 먹고 자고 일어나는 집이 지어지는 곳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달콤한 빵을 만드는 반죽 기계에 사람이 갈려 들어갔다. 사람이 목전에서 머리가 으깨져 죽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뼈가 부서져 죽고, 짐덩이에 차에 철판에 온몸이 으스러지고, 맨몸으로 올려진 전신주에서 숯덩이가 되도록 타죽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동료 노동자들은 애도는 커녕 침묵하고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받았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것이 매일같이 일어난다면, 그러고도 내가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오히려 해고당하지 않은 것에 안도해야 한다면.

p.114 법이 보호하기로 한 노동자 집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죽음에 회사가 어떤 책임이 있으며 어떤 조처를 했으면 사고가 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회사가 노동자의 건의 사항을 무시한 사실과 현장을 훼손한 행위에 대한 사법적 책임도 묻지 않았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서, 애도는 커녕 수습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곳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 사실을 어디에 말할 수도 없다. 당장의 생계는 물론, 고액의 소송비용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다. 위험한 일에 밀어넣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현장의 요구는 돈이 되지 않으므로 묵살된다. 마음처럼 쉽사리 박차고 나올 수도 없다. 내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는데, 나의 생계는 내가 아니면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항의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다. 말해봤자 듣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이 모든 일이 예방 가능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최초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대책을 세우고, 개선방안이 나왔을 때 고쳐나갈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돈이 되지 않아서, 사람이 가장 싸기 때문에. 절차보다도, 기계보다도, 하다못해 소모품 조각 하나보다도 사람이 위험으로 내몰리는 것이 가장 저렴하기 때문에.

p.157 노동자의 자기 보호 의무는 수없이 강조되지만 사업주가 노동자를 보호할 의무와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365일, 한 해에 2천 223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에 여섯 명 꼴이다. 자 지금부터 매일 여섯 명씩 죽이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려니 넘기는 이가 몇이나 될까. 다치는 일은, 간신히 죽지만 않은 사람까지도, 아직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우리 사회는 왜 같은 이유 벌어지는 죽음을 막지 못하는 걸까. 왜 법정에조차 명확한 과실을 유야무야 넘기는 걸까. 우리는 이 문제의 답을 모르지 않는다. 방법부터 길까지 알고 있다. 적어도, 그것을 실현되게 할 책임이 있는 이들은 알고 있다.

p.241 수사도 판결도 결국 피해자의 아픔을 덜어주고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국가의 노력이다. (...) 정부가 소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가로부터 버려졌다’ 혹은 ‘국가가 나를 재난 속에도 돌보고 있다’는 상반된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 벌어지는 일은 사고가 아니다. 사건이다. 하물며 안전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고의로 방치하는 것은 살인시도에 준해 다뤄져야 한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안전한 노동현장을 바란다. 어쩔 수 없이 위험한 곳에 놓인 이들이 위험하지 않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노동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노동자와 관계맺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죽기 위해 일하러 가는 사람은 없다. 일터에서, 일 때문에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이야기는 몇 번이고 여기서 출발되어야 한다.

p.293 재해를 안다는 것은 (...)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마음 깊이 추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터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온몸을 쭈뼛 세워 받아들이고 아파하는 것이다. 몇 줄의 속보로만 전해지던 이름 없는 죽음들이 저마다 맥락을 가진 하나의 ‘이야기’가 될 때 우리는 그들을 추모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부 개척 시대”에 대해 주로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말, 낡아빠진 옷을 걸친, 후줄그레한 남자들이 술집에 모여 떠드는 모습, 광활한 자연에서의 낭만적인 (웩...) 사랑, 타는듯이 내리쬐는 태양,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 강가에 늘어서서 목을 축이는 짐승 때와 야생의 잔인함... 무엇이든 간에 미디어의 환상을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읽는 내내 생각했다. 고립된 사람, 몸도 마음도, 사람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자기만의 세계로 처박혀버린 사람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를, 멀리서 봐야만 아름다울 수 있는 생의 면면을. 헛되고 또 헛되니 진실되고 본질적인, 뜨겁게 맥동하고 차게 얼어붙어, 숨쉬고 죽어가는 야생의 강렬함에 매료되는 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p.304 ”자네 신세는 자네가 망쳤어. 자네와 자네 같은 인간들이. 자네가 살면서 매일 하는 일이, 자네가 하는 모든 일이. 아무도 자네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했어. 그러지 않았어, 죽인 사냥감들의 악취로 땅을 뒤덮으며 제멋대로 살아왔지. (...) 자네는, 자네들 모두는 내 말을 귀담아들었어야 했어. 자네들은 자네들이 죽인 짐슴들보다 나을 게 없어."


조금쯤 서럽기도 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겠느냐고. 크고 텅 빈, 어디에도 의지하고 숨을 수 없는 자연에 홀린 듯이 숨어들고 싶은 적이 없었겠느냐고. 나라고 몰라서 그랬겠느냐고.

조심스레 말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은 잔인하다. 동시에, 잔인한 것은 아름답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자유로워 보이나 자유로운 것의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표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읽는 순서와는 반대로 한바퀴 빙 둘러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다. 숨을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땅에 마주한 존재들. 모든 것을 주변으로 두고 단지 겨누는 곳, 단박에 숨통을 끊고 주저앉힐 수 있는 그곳만을 응시하는 사람.

p.98 무감각은 매일매일 슬금슬금 파고들어 마침내는 그 자신이 된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 개성도 형체도 없는 땅처럼 느껴졌다. 때로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를 마치 없느 존재인 양 쳐다보거나 살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인다는 걸 직접 확인하려고 고개를 급히 젓거나, 팔이나 다리를 들어 올려 쳐다보았다.

p.170 사냥의 끝 무렵에 밀러는 움직이는 들소 무리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자동 기계 장치처럼 보였다. 그리고 밀러의 들소 사냥은피에 대한 굶주림, 가죽 또는 가죽이 가져다줄 무언가에 대한 욕망, 또는 심지어 ㅁ;ㄹ러 안에서 음울하게 작동하는 맹목적인 분노가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외롭구나, 외롭고 잔인하구나. 순간순간 중얼거리게 한다. 사실 시대상으로나 상황적 맥락으로나 서부극을 좋아하지 않아 안티-서부극이라는 설명을 수차례 보아도 그러려니, 싶다.

다만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낸 작가의 이력에서 무언가를 간신히 짐작해볼 뿐이다. 대체 무엇을 보고 돌아왔기에 살아있는 존재를 이토록 무력하고 나약하게 여기는 걸까. 뜨거운 맥동에서 웅혼함과 끓어오르는 투지가 아닌 비참과 허무를 느끼는 걸까.

p.78 "그래요, 돌아오겠죠. 하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옝쇼. 젊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졌겠죠."

p.307 "서부는 오래 있을수록 감당이 안 돼. 너무 크고 너무 텅 비었어. 그리고 거짓이 자네에게 찾아오게 하지. 거짓을 다룰 수 있기 전에는 거짓을 피해야 해. 그리고 더는 꿈같은 건 꾸지 말게. 난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만 해. 그밖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


단순한 줄거리에 비해 지극히 무겁게 쓰여진 작품이다. 읽는 이마저 침묵하게 만든다. 마치, 수십 번쯤 살아본 사람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처받을 구석이 남아있는 사람처럼.

어떤 결단, 혹은 만용이라고 볼 수도 있을 시도와 고립된 시간을 거쳐 주인공은 부처스 크로싱에 갓 도착할 때의 예민하고 생생한 젊은이에서 굳은살이 배기고 죽은 피 냄새에 절여진, 부서진 인간이 되어간다.

생을 마주하는 경험, 대등하지 않다면 곧 살육이다. 주고받을 수 없었던 폭력은 곧 학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독자를 놓아준다. 아니, 놓아버린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내려놓아져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게 된 독자는 다시금 외로워진다.

처음으로 돌아갈 것인가, 차마 마주하기 어려운 것을 마주한 인간이 될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비극이나, 결국 독자의 몫이다. 어떤 순간은 영혼의 깊은 곳을 뒤흔들어 평생을 바꿔놓기에.

p.336 맥도널드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태어났던 곳, 자기의 과거 모습과 겨우 깨닫기 시작한 조건으로 자신을 키웠던 곳, 더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게 황야로 몰아 낸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최태현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민주주의에는 희망이 없다. 민주주의는 더이상의 효용을 갖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이상일 뿐이고 당장의 현실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독재자일지라도. 너무도 익숙한 말이 아닌가.

명목상이라고 할지라도, 민주주의 외의 체제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서조차 심심찮게 들려오는 반-민주주의 구호들이다.

나또한 평생을 민주주의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으나 그 효용성보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더딜지라도 부당하지 않으려 애쓴다는 장점이자 핵심보다는 폭력적일지라도 빠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미는 독재자를 원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 때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p.49 멋진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찰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 역설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우리의 마음과 작음에 초점을 두고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p.105 누군가가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언가에 의해 대표된다는 것은 그것들 간의 어떤 연결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연결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주권이 여전히 자신들은 정치로부터 멀다 느끼는 민중에게 있을 때, 권력이 한 명에게 집중되지 않을 수 있는 견제장치로서 자리하고 있을 때, 민주주의는 가장 조용하고 무력한 것처럼 보이나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 정치형태이다. 무엇에? 퇴보에, 독재에, 권력의 폭력에. 설령 그것이 와닿지도 않는 한 줄짜리 문장으로나마 존재할지라도.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요즘이다. 멀게만 느껴진다. 일개 시민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수천 명이 모여 외친들 권력의 손짓 한 번에 함구할 수밖에 없지 않은지 회의적으로만 느껴지는 시대이다. 나날이 그러하다.

정치분야 뉴스에 한숨 한 번 쉬어보지 않은 자만이 이 책을 보지도 않고 밀어둘 수 있다. 아니, 그런 이야말로 더더욱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지, 주권자로서의 민중이 영원히 일치단결될 수 없는 권력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p.198 우리가 리더에게 ‘우리만의’ 이익을 기대하는 것을 리더나 리더가 되려는 권력추구자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이러한 마음에 호소함으로써 사회적 검증 시스템을 지나 우리의 리더가 되고, 그의 무능력과 무책임은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결단코 말하건대, 민주주의는 단 한 번도 모두가 만장일치로 박수치며 환영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쉽고 빠르고 편한 길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하는가. 어째서 포기하지 말아야할까.

제목만 보면 절망하고 지쳐버린 이들에게 위로를 줄 것만 같다. 희망차고 즐거운 구호로 다시금 우리를 똘똘 뭉쳐 약진하는 세계로 이끌어줄 것만 같다. 그렇게 “철인왕”을 바라는 나약하고 은밀한 인간의 습성을 마주하게 하는 것도 효과라면 효과일 것이다.

그러나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이것만 믿고 따라오시라는, 희망의 청사진이나 등불 따위를 안겨주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다고, 그것만이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단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제목의 참된 의미이다.

p.225 민주주의에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주의가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유입니다.

p.362 우리는 우리가 놓인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국 헛된 철인왕과 독재의 꿈으로 이어집니다.


희망이 있어야 절망이 있다. 기대하고 노력하지 않은 자는 실망하고 아파하지도 않는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가능성이다. 상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시키는 대로만 살다 죽으면 그만인 삶이 전부가 아님을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 절망은 희망의 존재를 증명한다.

민주주의는 허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당연한 말이다. 모든 정치체제가 그러하고,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 대체로 그렇다. 상호간의 관습적이고 암묵적인 합의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민주주의만이 허상이 아니며, 민주주의 사회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허상이 아니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고민해보자고, 우리가 절망하는 바로 그 지점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마음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낙관이 아닌 희망을, 끝이 아닌 절망을, 내가 나이고 네가 너이기를 포기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p.370 우리는 절망과 구분되는 희망을 품는다기보다는 절망하기에 희망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절망이 틔우는 싹이자 꽃일 것입니다. 하찮은 절망이 아닌 운명적 절망은 우리가 순진한 낙관에 빠지지 않게 하는 희망의 방부제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은 생명의 방부제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전작에서 증명했듯, 최진영은 고통을 들여다보는 작가다. 그저 바라봄에 그치지 않고 상처를 헤집고 부패하고 뒤틀려 찢긴 몸을 내보인다. 읽는 이의 뒷목을 잡아채 균열 한가운데에 처박을 것처럼 밀어넣는다. 보라고, 여기에 고통이 있노라고, 부러지고 으깨지며 비명으로 가득한 이것이 고통 그 자체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느냐고.

딸의 여동생, 그들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는 꿈을 꾼다. 꾼다기보단 끌려들어간다. 수백수천의 죽음이 동시에 벌어지는 세계로. 단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다.

질문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받는다면, 영문도 모르는 채 무수한 비참을 목도하게 된 이가 온 힘을 다해 구해낸다면. 단 하나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p.15 그들은 죽은 듯이 살기로 했다. 더는 자라지 않고 그대로 멈추려고 했다. (...) 그들의 뿌리는 엉켜 있었다. 그들은 죽음에 몰두할 수 없었다.

p.60 가서 받아. 목화는 몸을 움츠렸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의심하지 말고 구해. 목화는 더욱 움츠렸다.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받으면 살아.


지옥인가? 말할 것도 없는 환상인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가? 바로 지금 도처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상기해보라.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다. 그것을 피할 길 없이 마주하게 될 때, 살아있음은 도리어 비정상이 된다.

이야기는 오래된 숲의 오래된 나무의 연대기로 시작한다. 수백년의 삶을 몇차례씩 겪고도 살아남은 나무가 있다. 그 세계도 살아있는 것이 가득하므로 죽음 또한 도처에 있으나 이별이 될 수 있었다. 작별할 수 있었다. 처음이 있었듯 끝이 있으리라 여길 수 있었다. 무수한 소문처럼 인간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작가는 묻는다. 슬픔의 끝의 끝으로 몰아붙여진대도, 시원도 종말도 없는 무력함에 두 팔을 늘어뜨리고 마음이 부서진대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느냐고, 세계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지켜보는 수많은 눈, 무엇도 인간을 돕지 않는다(48)."

p.19 그루터기만 남기고 줄기는 통쨰로 사라져 버리는 기괴한 죽음은 (...) 숲에서 보고 들은 죽음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음이 아니엇다. 이별 또한 아니었다. 훼손이었다. 파괴였다. 폭발이자 비극이었다.


또한 철학자 레비나스는 묻는다. 내가 타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세계는 내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이 있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타인의 벌거벗은 얼굴, 호소로 도래하는 바로 그 얼굴의 부름에, 신의 그것을 마주하듯이 ‘Me voici’, 내가 여기 있노라 응답해야 합니까?

대체 왜 우리는 타자의 존재 자체에, 심지어 우리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까? 왜 우리는 타인의 얼굴, 죽이지 말라, 죽음으로 방치하지 말라는 명령에 저항할 수 없습니까? 무한한 책임으로 밀어넣어지는 수동성은 어째서 우리의 주체성을 성립하게 합니까?

p.54 목수야, 다 보고 있었어. 여기 모든 존재가. 그런데 아무도 돕지 않았어.

p.103 왜 모두 다를까. 다른 삶을 살다가 결국 죽을까. 생명은 어째서 태어났을까. 탄생이 없다면 두려워할 죽음도 없을 텐데.


인간은 약하다. 삶이 있는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다. 살아있기에 죽는다. 그것은 정지하지 않음의 이치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이, 개중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그 안의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비참이고, 고통이고, 비명이다.

앞서 작가가 들이밀고 레비나스가 마주했던 세계는 바로 이런 의미의 세계이다. 우리는 그곳에 살고 있다. 존재하며, 이어지고, 알지도 못하는 곳까지 뻗어나가 닿는다.

인간은 약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알 수는 있다. 바로 그것이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이, 근원적인 외로움을 떨칠 수 없는 존재를 살아남게 한다. 비참한 세계가 절망의 동의어가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가 전했고, 이제는 독자가 말해야 한다. 죽음으로 가득한 세계에 우리는 여전히 묻지 않고, 손을 뻗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고, 사람에게는 적어도 단 한 사람을 살릴 만큼의 힘이 있다고,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고도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은 지옥이지만, 밑바닥에서도 해낼 수 있다고. 우리는 누군가의 단 한 사람이라고. 발버둥을 치고 외면하려 애써도 차마 그럴 수 없는 이유, 나약하고 연약한 인간을 살려내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p.146 영원한 건 오늘뿐이야. 세상은 언제나 지금으로 가득해

p.208 오직 사람만이 다른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신을 필요로 한다. 기적을 바란다. 먼저 떠난 존재가 너무 그리워 죽음 이후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p.221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전하는 일.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의 미래를 기원하는 일. 그것은 나무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목화가 하는 일이었다. 나무의 지시가 아니었다. 목화의 자발적인 마음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페터 슈탐 지음, 임호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무엇이 옳은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언제의, 누구의 이야기인가? 지난 삶에 겪었던 일인가? 알지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인가?

작가는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독자에게 말을 건다. 내가 보는 것을 함께 보라고. 많은 경우 자신의 세계에 독자가 자리함을 전제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영문 모르고 내던져진 독자만 남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잘못 쓰여진 작품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실패했는가? 그렇지 않다. 한순간에 내쫓기듯 현실로 돌아온 독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그럼으로서 도리어 이야기의 세계에 남아버린다.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떠나온 곳을 헤매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책을 읽을 어딘가의 독자가 아무런 기대나 예상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명쾌한 마침표를 마음에서 지워버리기를 권한다. 가진 적 없던 것을 빼앗기는 것만 같은 초조함,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뒤섞이는 혼란함, 경계-없음에서 출발하는 사색을 충분히 음미하며 읽을 때, 비로소 작가가 말하는 바를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정답을 맞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중 ‘나’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앞서나간 자는 추월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 나의 길의 나-아닌 자의 길로 덮어씌워질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p.91 당신은 언제고 항상 원래의 길로 다시 되돌아오게 돼 있소. 당신의 행위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오. 어떤 작품이 여러 연출가에 의해 연출될 경우와 마찬가지요. 무대가 달라지고 심지어 대사가 바뀌거나 축소되어도 줄거리는 변함없이 진행된다는 것이오.


선형적 세계에서 먼저 지나온 길, 알고 있다는 것은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설명은 곧 나-아님을 나의 체계로 끌어들이는, 포섭의 과정이다. 결국 안다는 것은 일종의 권력이 된다. 방향을 지시하는 자는 곧 아는 자다. 설령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p.95 처음엔 미칠 것 같았소. 내가 말했다. 난 그 친구에게 화가 났소. 어쩌면 질투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친구가 가엾게 느껴지기 시작했소. 왜냐하면 그 친구는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오. 그 친구의 일생은 미리 예정되어 있었지. 나에 의해 선취되어 있었단 말이오.

p.117 크리스에 대한 내 분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가 내 삶을 그대로 베껴 삶으로써 마치 내 인생을 도둑질 해 가고, 내 삶을, 내 자신을 말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연 나는 그의 죽음만이 나를 구원하고 다시 올바른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세계가 선형이 아니라면, 또는 우리가 인생이라는 무대에 자리만 바꿔 오를 뿐 각본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나와 타자와 타자로서의 내가, 이곳과 저곳이, 현실과 상상이 안개처럼 뒤엉킬 때, 모든 요소들이 서로에 닿지 않을 수가 없을 때, 그것은 분명 흔적을 남긴다.

답이 없는 질문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읽고 혼란스러울 독자에게 다시금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객관적인가? 모든 것은 유일하고 인생은 연극일 따름인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삶을 살아낼 수 있는가? 홀로 숨지듯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만족해야 하는가?

그 모든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우리 겁 많고 초라한 신은 묻는다. 존재란 무엇인가.

p.80 나는 오후 내내 당신을 미행했소. 최소한 몇 시간만이라도 내가 다시 젊어져서 내 인생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면, 하는 환상 속에서 살고 싶었소.

p.96 선생님이 범한 오류를 수정하고, 우리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싶은 유혹 말이에요. 아니면 단지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시험해보고 싶은 호기심이랄까요. 겁이 나오. 내가 말했다. 뭐가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