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잠든 사이에
스테이시 에이브럼스 지음, 권도희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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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암시되는 죽음과 함께. 망상에 사로잡힌 남자는, 원래도 온화하고 유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썩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사사건건 불만에 의심을 달고 사는 데다 성미는 불같고 도무지 존중이라고는 모르는, 그의 정신은 무너져가고 있다.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고, 심장처럼 단단했던 기억은 나날이 흐려지고 있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위기와 불안의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다.

문제는 그가 평생을 연방대법관으로 살아온, 사법체계의 정점에서 수많은 이들과 권력의 향방에 영향을 미쳐온 거물이라는 데에 있다. 신념과 열정만큼 적도 많아졌다. 심지어 그의 죽음과 파멸을 가장 강력하게 소망하는 이는 바로...

그의 몰락은 그 자신만의 불행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의지할 수 있는가,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그는 궁지에 몰려 있다. 거대하고 강력한 적의 위협을 피해 아주 중요한 것, 물러서서는 안 되는 것을 단단히 숨겨야 한다. 적으로부터, 그 자신으로부터.


주인공 에이버리의 삶은 순탄치 않다. 마약중독자인 어머니, 가난, 불안한 직장. 그는 뛰어난 지성과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가졌으나, 현실은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여자라서, 유색인종이라서, 나이가 아주 어리지 않고 당당한 매력이 있지 않아서...

수없이 깔보고 가장 중요한 성과는 안중에도 없는 사회에서 몇 안 되게 그를 사람으로, 정확히는 "그나마 덜 한심한 부하"로 여겨준 이가 있다. 그 자신도 엄청난 노력과 철저한 자기관리, 정의를 위해서라면 물러서지 않는 심지로 살아온 사람.

청천벽력같은 소식, 그가 죽음에 임박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가슴 아픈 일이나 여전히 일상을 살아갈 수는 있다. 문제는 별다른 접점도, 친밀감도 없었던 사이에, 냅다 법적 후견인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다. 멀쩡히 살아있는 배우자와 자녀를 두고, 대체 왜?

p.29 "그녀에게 전해... 해답을 구하려면, 동쪽(East)에서 찾아보라고. 강(river)을 봐야 해. 그 사이(in between)에 있는. 광장(the square)으로 가야 해. 라스커. 바우어. 날 용서해(forgive me)."


여기서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뭔진 몰라도 위기에 처한 남자, 하워드 윈은 에이버리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 졸지에 얼마 남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을 홀랑 빼앗기고 그의 수수께끼를 넘겨받은 에이버리에게 말 그대로 삶을 뒤흔드는 압력과 위험이 몰려드는데...!

뒤로 갈수록 상상도 못했던 치밀한 복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니, 여기까지 내다봤다고? 불세출의 천재란 대체 뭘까,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평범한 사람보다 한 수, 아니, 때때로 상상도 못 할 경우의 수까지 내다보는 이들이 간혹, 아주 드물게 있기는 하다. 비범하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사고력을 지닌 자들. 그들은 아주 쉽게 오만해진다.

물론 그 오만은 개인적인 냉소나 폭력성으로 향하지만은 않는다. 그보다는 오만의 심부가 타인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데에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와 타인의 생각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행동과 개별 사건들의 궤적과 접점을 극도로 치밀하게 추적하고 예측할 수 있기 떄문에.

p.206 하워드 윈은 무례하게도 아무 설명도 없이 에이버리를 함정에 빠뜨리고, 그녀의 인생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 에이버리의 룸메이트가 집에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모르는 사람들이 에이버리를 마치 체스판 위의 말처럼 다루게 만들었다. 쓸모없는 힘을 가지고 있고, 움직임에 제약이 있는 불운한 비숍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대의를 위해 장기말처럼 "배치하고 운용하는" 이들은 일종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비열하지 않은가. 이 오만의 핵심을 살짝 비껴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최고의 승부사가 되는 것, 자기 자신마저 하나의 말로, 희생패로 써먹는 것.

이쯤에서 묻게 된다. 제목의 "정의"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누가 악인가. 누가, 정의의 신의 눈을 가리고 그 칼날을 제 손으로 휘두르려 하는가. 이것은 신념의 이야기이다. 취약하고, 절박한 신념.

아무것도 예상하지 말고, 빈 손으로 따라가기를 권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를 돌아보기를 바란다. 정의의 신이 눈을 가린 사이 우리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가. 연약한 선은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을까.

p.524 "그 사람은 애국자가 아니에요. (...) 당신도 마찬가지고. 당신들은 괴물이야." (...) "숭고한 합동작전이었어. 인간의 목숨은 전쟁에서 피해를 입는 법이야. 실수하지 마. 우리는 전쟁 중이니까. (...) 순진하게 굴지 마. 나라를 위한 일이야. 난 내 조국을 위해 봉사해. 필요에 따라 외국과 국내에 있는 모든 적들로부터 조국을 지켜왔어." (...) "당신이 죽인 사람들은 적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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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정전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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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해온 말이지만 사람의 바깥을 상상하는 글은 사람의 이야기다. 사실 사람이 쓴 글 중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냐만은. 사람-너머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이야기는 사람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강하게 부각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픽션만큼 현실과 단단히 연결되는 장르는 없다.

세상에 좋은 작품은 수없이 많겠지만, 기분 좋은 허탈함과 함께 패배를 인정하거나, 정신없이 말려들어가 덮을 때쯤엔 훌쩍훌쩍 울게 하는 작품을 만나는 건, 일종의 행운 같은 것이다. 단순한 얄미움을 넘어 "마음을 탈탈 털어먹혔다"고 말해도 좋을만한 수작을 만난다는 것은.

거칠게 말해, 썩 옳다고 생각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이거 순 미친놈 아니야?"를 끌어내는 캐릭터, 전개, 설정, 작가를 만나는 경험은 뭐랄까, 독자의 세계 저 깊은 곳을 바꿔놓는 일이 아닐까.

p.33 "정확히 말해서 타임머신이 가짜라는 전제하에 생각했을 때 유일하게 합리적인 트릭이었다면... (...) 다케무라 리도는 천재야. 마술사상 최고의 천재. 이런 트릭을 고안해서 실행에 옮기는 건 천재 아니면 미친 사람밖에 없어. 만약 그 사람이 천재가 아니라면..." 누나가 그다음 한 말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타임머신이 진짜였다는 거지."


사실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 적어도 아 이건 일본 소설이다, 하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는 작품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는다. 분명 '좋아하지 않는다' 와는 다르다. 오히려 촘촘한 묘사와 집착적으로 느껴질 만큼 밀착된 서술을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추리력, 개중에서도 독자의 예상과 시야를 뛰어넘고 빈틈을 찌르는 내용이라면? 좋다. 아주 좋다. 그와 별개로 약은 오른다. 열받아...! 좀 더 솔직히는, 니가 언제 그랬어! 언제 어디서 몇 시 몇 분 몇 초!!! 하고 바득바득 우기고 싶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질문(보다는 억지겠지만)은 과연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언제 어디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어디가 앞이고 뒤인가? 언제를 시원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p.106 "세상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대략 이십 몇 년 뒤, 당신이 첫 승리를 거둔 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지난번 뵈었던 것은 미래 같지요. (...) 그러나 ‘미래’란 없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지난번도, 이번도, 그 지하실에서 보낸 밤에서 보면 둘 다 과거입니다."


작가는 여섯 편의 단편을 통해 묻는다. 한 존재와 "역사"를 꿰뚫는 거대한 시간의 경계를 일순에 무너뜨린 텅 빈 곳으로 독자를 초대해, 아니, 끌어 앉혀 묻는다. 당신은 단 한 번의 기적같은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습니까? 남은 일생이 아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뒤틀어 바꿔버리는, 단 한 번, 순간의 도박을 위해.

죽은 자는 말이 없으나, 남겨진 것은 말을 하지요. 존재가 맞닿아 연결됨으로서 전해지는 것은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목적이 앎에 선행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의 단서를 따라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똑같은 개성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낭만을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찰나의, 아주 작은, 단 한 번의 신호가 바꿔버리는 거대한 역사를, 배아의 잠재태로 파고 내려가는 상상조차 못 할 이 기획을, 존재의 가능성을 걸고 맞부딪히는 싸움에서 당신의 당연함은 어느 희미한 가능성과 우연의 조합임을 알고 있습니까?

"제 이야기를 들은 당신은 시간의 개념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픽션은 사람의 이야기, 현실의 틈새를 벌리고 비트는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에게 아주 반가울 책이다. 그러나 말랑말랑하다거나 설레는 내용은 절대 아니라, 뭐랄까…

충격을 넘어서는 경악과 감동을 야 빨리 집어넣어!!! 눈치채기 전에 비벼!!! 흔들어섞어!!! 짠!!! 해서 저쪽 작가분께서 보내시는 겁니다, 하고 쓱 밀어주는 느낌이랄까. 분명 신기하고 즐겁고 맛도 있는데 어째 한구석이 찜찜한... 거 가진 것 좀 다 보여봐요. 수상한 놈일세, 싶은 동시에 우리 이제 친하죠? 또 볼거죠?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랄까.

전체적인 흐름이나 메인 테마가 추리소설이냐, 하면 꼭 그것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 소설이냐, 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하겠다. 혹 SF냐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다고 답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혹시나, 표지에 눈길을 붙잡혀 "대체 이게 뭐냐?"고 묻는 이에게는... 뭐긴 뭐예요 심연이지... 와 함께 눈을 피할 수밖에.

여러모로 참 수상쩍고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단언컨대, 즐겁다. 이 작가가 열어젖힐 시공간으로 언제든 주저없이 뛰어들고 싶을 만큼. 여름이 오기 전에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이 모든 말은, 당신의 과거에서, 혹은 미래에서,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던 현재에서 기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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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된 지식 - 우리는 최초의 지식을 어떻게 획득했는가
조르조 발로르티가라 지음, 김한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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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은 분명 고도의 지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은 동물에 있다. 인간의 뇌는 결국 동물의 뇌다. 인간은 추상적인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창조하는 동물이다. 무형의 개념을 자유자재로 조작하여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고 다른 개체에 전달할 수 있도, 역으로 수정하고 학습할 능력이 있다.

인간은 반사상, 혹은 창조되거나 변형된 이미지에서 특정한 개체-원본을 인지할 수 있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기억하고, 정보를 가공하고 개념을 조작할 수 있다, 안간의 인지능력은 고도로 발달된 뇌와 학습의

그 모든 우수한 능력들과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동물이다. 이족보행을 얻은 대가로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미숙한 개체로 태어난다. 신생아가 목을 가누고 사지를 운용하며, 체계를 갖춘 언어로 소통하는 데에는 다른 종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지식은, 학습할 수 있는 능력, 인지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기? 그것은 동물로서의 인간 개체에 갖추어져 있는 생득적 능력인가? 아니면 그조차도 일련의 문화적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우리가 당연한 수준으로 간주하는 일련의 인지적 능력은 본능에 의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종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날 수 있는가? 그를 가능케 하는 요인에는 무엇이 있는가?

p.33 가속에 이어 감속하는 이 지향성 패턴은 목표물에 다가가는 손동작의 특징이다. 물체를 잡기 전에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생각해보자. 먼저 물체를 향해 속도를 높이고 그런 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속도를 늦춘다. 심지어 자궁 안에서도 손은 이러한 가속-감속의 패턴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신생아의 이 지향성 선호는 태아가 자궁 안에서도 자기 자신의 움직임을 아는 데서 파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을 왜 궁금해하는가? 단지 '언제부터'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신생아기부터 영유아기까지의 폭발적인 지적 성장을 지켜본 적이 있다면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물을 수 있겠다. 어째서 이것을 배울 수 있는가? 대체 얼만큼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을 아는가? 무의식적인 지식의 근원에는 뇌가 있는가, 혹은 유년기 학습의 영향이 있는가? 놀랍게도, 개중 많은 부분이 동물적 본능에 기인한다.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알고 있는 셈이다. 어떤 지식은 인식에 선행한다. 우리는 알기도 전부터 알고 있다. 아는 줄도 모르는 것을 아는 셈이다.

p.121 감각적 데이터로부터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제1법칙 ((...) 고체는 공간을 배타적으로 점유한다는 법칙)이 그러한 습득 과정을 유도해야 하는데, 그 법칙은 구체적인 감각 경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뇌 속에 선천적인 성향으로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p.143 신경과학자 안드레아스 니더는 뉴런이 수에 선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훈련하지 않아도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을 밝혀냈다. (…) '수치 뉴런'의 민감성이 발달하는 데는 수에 대한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 발달은 자연 발생적으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각인을 포함해 병아리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연구를 바탕으로 각인을 포함한 선천적 인지 능력의 영역과 가능성에 대해 풀어 설명한다 (약간 싸한... 어쩐지 나를 경멸하는 듯한 눈길의 일러스트로 일련의 낯선 개념에 부담을 덜어주는 상냥함은 덤).

우리는 다시금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언제부터,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인간은 왜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동물이면서 동물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이 책은 "병아리의 각인부터 아기의 첫 동작까지", 배운 적 없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해로의 다정한 첫걸음이 되어주리라. "우리는 최초의 지식을 어떻게 획득했는가?" 아니, 태어나기 전의 지식을 어떻게 갖고 태어나는가?

p.120 지식의 기원을 숙고할 때 경험주의에 유리한 결정적인 주장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 주장에 따르면 아무리 잘 통제된 조건이라 해도 동물에서 모든 종류의 경험을 박탈했다고 확신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노력해야 할 문제는, 어떤 경험도 하지 않았을 때 지식의 어떤 불씨가 존재한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불씨가 깨어나기 위해서는 특정한 구체적 경험이 필요하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다.


*위즈덤하우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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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이야기
이이지마 나미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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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 이란 뭘까. 어떤 사람은 먹기 위해 살고, 또다른 누군가는 살기 위해 먹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까. 물론 맛있는 것을 먹으면 즐겁다. 입에 맞는 음식이나 식재료는 한참씩이나 질리지도 않고 줄기차게 찾아 먹는다. 당연히, 좋아하는 음식이나 맛도 있다. 몇 개라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만큼 귀찮다. 먹는 행위에도 체력이 필요하다. 먹기 위해서는 메뉴를 고민하고, 재료와 과정을 생각해 적절한 품을 들여 차려야 하지 않는가. 만든다기보다 해치우는 느낌으로 해내고 밥상 앞에 앉았을 땐 이미 반쯤 곤죽이 된 상태다.

어디 먹는 사람만 있나. 치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혼자 차려 혼자 먹는 식사라면, 집밥이든 도시락이든, 대개는 둘이 같은 사람이다. 포만감에 속은 불편하고, 몸은 무거운 와중에 냄새는 나니 상을 닦고 설거지를 하고 행주며 난리통을 정리하고 나면 '사람은 왜 먹어야만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생각만으로도 지레 피곤해지기 십상인 이 먹고 사는 일, 혹은 살기 위해 먹는 일, '먹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매번 지난 날의 귀찮았던 기억은 싹 지워버리고 먹을까, 내지는 먹여볼까, 를 고민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사람은 의미를 갖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한번쯤은 즐거웠던 적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여행지에서 마주친 맛을 잊지 못해 낯선 식재료에 허둥거렸던 날, 별 것 아닌데도 문득 떠오르는 익숙한 맛, 경쾌한 식감이라든지 맛있다!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얼굴이라든지... 웃고 울었던 날들에.

p.30 촬영 현장에서 정신없이 요리를 완성해나가는 와중에 찡해지는 일도 있었다. 단순히 피와 살이 되는 것, 맛만 좋은 것이 요리는 아니구나, 때로 맛과 냄새를 누군가의 기억과 추억을 불러오는 것이 요리로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요리란 참 좋은 것이네요.

p.92 즐기면서 만드는 요리는 틀림없이 맛있을 터다. 그런 요리는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요리를 먹고 자랐다는 사실, 누군가에게 소중히 여겨졌다는 사실이 자신감으로 이어져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서가 풍부한 식탁을 둘러쌈으로써 요리에도 이야기가 태어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단순히 맛만 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적재적소에 알맞은 모양새의 알맞은 요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 저자 이이지마 나미는 광고와 영화 촬영 현장 등에서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푸드 스타일리스트다.

스쳐지나간 소품, 혹은 주인공이 차려내고 먹는 음식을 딱 알맞은 모양새로 그려내는 사람. 이 자리에 어떤 음식이 있어야 자연스러울지, 이런 사람이 하는 요리는 어떤 느낌일지, 어떤 곳의 요리는 그 지방의 특색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을지를 고민하는 사람.

해외 촬영의 현지 로케라든지, 세계 곳곳에 이벤트삼아 내는 테마 식당이라든지, 짧은 여행에서 만난 색다른 요리를 더 맛있게, 때로는 편안하게 만들어내는 방법을 고민하는 그는 맛있다!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조금 부러워지기도 했다.

p.156 바쁘게 일하다 보면 식사를 대충 때우기 쉽지요. 그럴 때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위안을 받거나 저거 나도 먹어보고 싶다, 하고 밥을 제대로 먹는 계기가 된다면 그런 것도 하나의 치유일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인은 바쁘다. 나도 바쁘다. 너무너무 바쁘다. 끼니는 커녕 물도 제대로 못 챙길만큼 바빴던 날은 밥이고 뭐고 까딱도 하기 싫어 늘어져있을 때도 있다. 휴식과 식사라고 하면 단연코 휴식이 먼저일 터, 앞서 말했듯이 먹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먹기보다는 때우는 일상은 어딘가 비었다는 느낌을 준다. 묘하게 허전하달까. 오늘은 뭘 먹었나, 짚어보노라면 메뉴가 아니라 상표만 줄줄이 이어질 때, '제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쩐지 아픈 기분, 든든한 식사 한 끼가 간절할 때다.

눈으로도 맛있는, 바로 그 장면, 그 곳에 있어야 할 요리를 최선을 다해 자리하게 하는 일, 먹고 먹이는 일의 기쁨을 고민하는 저자의 기억을 따라가며 내일의 메뉴를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 즐겁게, 기꺼이 만들어보자고 다짐하며. 맛있었다!로 기억할 식사를 기대하며 말이다.

"즐겁게 기꺼이 만든 요리가 맛있죠!"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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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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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국가, 인신공양제, 의례화된 식인. 이런 단어들은 뭐랄까, 어쩐지 전설 속의 이야기 같다. "문명화된"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야만과 원시"의 자취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과연 그럴까.

전설이라 못박아진 신농, 황제, 복희씨도 아니고 요순우탕 문무주공, 태평성대의 대명사와도 같은 이름들에 허구가 섞여있다고 하면 그 누가 믿을까. 사서삼경의 그 역경, 주역이 사실은 일종의 은폐를 위한 재구성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그 누가 당혹스러워하지 않을까.

상나라 정벌,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이라는 심상찮은 부제를 달고 나온 탓에 시작하기까지 고민이 깊었다. 과연 나는 이걸 읽고도 성인 혹은 난세의 대학자로서의 공자, 세상을 크게 보는 이치로서의 주역의 참뜻과 의의를 말할 수 있을까. 겁이 나서.

층층이 사람도 묻고 개도 묻고 와중에 껴묻거리도 끼워 층층이 쌓은 구덩이가 심심찮게 발견되었다는데, 아무래도 곱게 죽은 모양새는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죽이기만 했으면 다행인 것이, 토막나고 태워진 잔해까지 수두룩하다. 먹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은 역사 이전, "야만과 원시"의 이야기라고 치부되곤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적어도 상나라가 세워지고 번성한 시기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국가와 문자 체계가 존재했으며, 제례로서의 살인과 식인은 계획과 통제 하에 시행되었다.

앞서 말했듯 태평성대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 요순우탕이 있다면. 폭군은 단연 하걸은주라 할 수 있다.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 여기서 말하는 은이 곧 상이라 할 수 있다. 주왕이 누구인가? 주지육림과 포락으로 기억되는 달기를 거느린, 타락과 포악함의 상징인 자다.

그는 진실로 패악무도한 폭군이었을까? 그다지도 선명한 흔적과 가공할 규모로 역사에 기록된 국가와 왕실의 몰락이라면, 그들의 번영은 최소한 원시와 야생의 수준을 뛰어넘고도 남았을 것이 아닌가? 주의 살육은 과연 후대의 평가처럼 쾌락을 위한 일탈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 기록이 언제, 누구에 의해 쓰여지고 정설의 지위를 획득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사기』는 진실인가? 갑골문에 남은 상의 사회상과 제의체계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후대에 이르러 단순한 점복서가 아닌 인문 경전의 지위에 오른 역경은 정말 하늘과 운수의 흐름, 처세의 지혜를 담은 "온순한" 내용이었을까?


현대에 발굴된 것만으로도 생생하게 설명될 수 있는 이 장대한 살육의 역사는 어떻게 감춰진 것일까? 상의 몰락은 정말 개인의 폭정과 탐욕으로 초래된 것일까? 주나라의 문왕은 정말 무고한 성군이었을까? 역경의 구절 곳곳에 심긴, 단순한 고사 내지는 구절 풀이라고 하기엔 다소 미심쩍은 이야기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쯤해서 지금까지의 조각난 이야기들을 맞춰보기로 하자. 사라진 고대 국가, 정사 한켠의 몰락왕국으로 좌천된 상나라에서는 인신공양과 식인이 우발적 보복행위가 아닌 엄연한 국가제례의 형식으로 존재했다.

강성했던 상나라에 복종했던 주나라 일족들은 타 부족을 인간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살아남았고, 천기누설의 점술서로 여겨지는 역경, 즉 주역은 일종의 자전이자 반란모의를 위한 계획서였던 것이다.


앞서 말한 미심쩍은 구절들, 어딘가 어긋나는 서술들은 후대에 살육제의 사회의 흔적을 지워내고자 애쓴 흔적이다. 충격적인 것은, "성인" 공자가 그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오히려 '육경' 편찬으로 주역을 경전의 지위에 놓음으로서 그를 공고화하는 데 힘을 보탰으리라 추정된다.

어쩌면 공자가 역설한 괴력난신의 부정과 인애는 인본 이전의 사회로 퇴보하는 것이 곧 전쟁통과 다름 없는 살육의 일상화임을 무섭도록 깨닫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책의 주장은 완전히 새로운 입장으로의 도약이 아니다. 오히려 그간의 고고학적 발굴의 역사와 이전의 갑골문 연구를 재분석하고 통합해낸 것에 가깝다. 강한 부인은 강한 긍정의 흔적을 남긴다. 소름끼치는 역사에도 사람이 있기에. 철저한 합리성이 인간의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과연 신화 이후, 찬란한 문명 시대의 서막을 여는 그 시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고궁의 아래에는 무엇이 묻혀있는가. 다만 상상하고 그려볼 뿐이다. 사라져가는 흔적으로, 불태워진 뼈로.

#글항아리 #상나라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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