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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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을 총동원해 독자를 악몽의 세계로 에워싸는 이야기들. 깜빡, 잠들었던가. 깜빡, 오래된 등에서 타는 냄새가 나던가. 쿵,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던가. 어둠 너머로 새빨갛게 응시해오는 것, 그것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끼쳐오는 냄새는 어디에서 불어온 바람인가.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나는, 누구였더라? 땀에 젖은 이마와 메마른 입술, 텅 빈 눈으로 돌아본 곳엔 끝없는 '무'가 펼쳐져 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허무다. 공허다. 모든 것이다. 일상이다. 숨 쉴 틈도 없이 밀집되고 달라붙은 것이다.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다. 권태다. 낯섦이고 체취와 뒤섞인 숨결이다.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 살그머니 다가오는 어둠. 도시의 불빛. 뒤엉킨 지도.

p.20 토끼들은 우선 날카로운 앞니로 새의 목덜미를 공격했다. 그러고 나면 떨리는 주둥이와 가는 수염이 눈 색깔과 똑같이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살점을 다 뜯고 나면, 녀석들은 마른 나뭇가지가 분질러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한동안 뼈를 갉아 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토끼들은 심지어 부리까지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런 다음, 털이 다시 하얗게 될 때까지 부지런히 몸을 단장했다.

p.34 어떤 식으로든 설명하고 싶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과정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걸까? 이제는 연필을 쥐고 있기조차 힘들다. 마치 연필로 무언가 쓰려는 것이 손이 아니라, 귀에 매달려 있는 발인 것처럼 말이다. 모든 일이 너무나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무더운 낮과 마른 먼지가 날리는 땅, 짜고 비린 냄새를 풍기는 바닷바람 냄새가 가득한 곳의 시간이 담긴 글은 그곳의 풍취를 그대로 담아내기 마련인 걸까? 그림동화처럼 차락,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가고 이어지는 듯한 11편의 작품을 모두 읽고 나면, 길고 긴 악몽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기분이 든다.

그곳은 탈출구인가? 아니다. 막다른 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끝인가? 그 또한 아니다. 갑작스레 끊겨버린 길, 끝없이 펼쳐진 바다 앞 모래밭과도 같다. 산을 따라 굽이굽이 빽뺵하게 들어찬 지붕들의 지평선을 보는 것과도 같다. '갈 곳이 없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p.37 주인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여자도 그를 쫓아 달려간다. 여자는 그를 놀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히잡값을 치르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자는 뛰어가는 중에 왜 남자를 뒤쫓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남자가 먹잇감처럼 보인다. 그는 그레이하운드처럼 날씬하다. 하지만 여자는 그보다 더 빨리 달린다.

p.101 나는 지금 미셸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내 평생 단 한 번도 그를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는 내 기억에 조금도 남아 있 지 않을 것이다. 소와 양을 본 기억은 있다. 심지어 보도에 초록색 침을 뱉은 기억도 난다. 하지만 미셸은 전혀 기억 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갑자기 그에게 소리 지르고 웃고 싶다. 그것은 무시무시하면서도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는 냉정함이다.


작가는 말한다. “외곽, 변두리, 경계… 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 당신은 시선의 변두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거리와 색을 가지고 선명하게 인식되는, '제대로 인식되는' 영역이 아니라 시선을 옮기고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야 알 수 있는 영역의 흐릿한 상이 머무는 곳 말이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그 이미지들을 닮았다.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지 못하는 것들. 아니, 틀렸다. 실체가 인식의 경계에 흘러들어오며 늘어지거나 일그러지고 얽히는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아니,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의 진짜 모습일지 모른다.

p.236 나는 조개껍데기를 해양생물의 집이나 해변에 널린 장신구라기보다, 항상 해골로 생각해왔다. 다양한 조개껍데기와 소라고둥으로 만든 목걸이가 주렁주렁 걸린 해안 산책로 기념품 가게 또한 뼈를 파는 곳처럼 보였다. 저 낮은 납골당에 귀를 대고 있으면 소리가 들린다. 바닷소리가 아니라 연체 동물의 영혼, 그러니까 조개껍데기 안쪽 진주층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영혼의 소리가.

p.266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는 여자가 몇 달 동안 고민하던 생각과 딱 들어맞았다. 얼마 남지 않은 믿음이 사라지고, 이 게임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마저 떨쳐버렸을 때, 메시지가 기적적으로 도착했다. 믿을 만하지 못한 연인의 마지막 약속 같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기적과 점술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지 못할 뿐이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초현실이라 불리는 극도의 현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모두 시공과 주제, 화자를 달리하나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범람, 혹은 침투하거나 스며들어오는 초현실적 세계라는 뿌리를 공유한다. 그것은 존재 자체로 불안이다.

인식 바깥의 세계와 뒤섞이는 경험은 차라리 오염, 부패, 환각... 다른 이름으로 불려 다시금 깊은 금 너머로 밀어내져야 안심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일까. 어쩌면, 비정형의 세계가 고스란히 되비추는 이 세계의 이면 때문일까. 뒤집혀 다리를 바둥대는 갑충, 벌어진 틈 사이로 살덩이를 날름대는 조개를 들여다 볼 때처럼.

독자들은 이 괴이하고 섬뜩한 세계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되는가. 더럽고 끔찍한 폭력의 세계의 발밑을 침식하는 무의식과 생경함의 공포, 초월보다는 원시에 가까운 것들에게서. 절망, 무력, 전복, 소외... 그 끝에서 다다를 곳은 어디인가.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이 경계 없는 경계-바깥의 세계에서. 깜빡, 눈을 감았다 뜨면 그곳엔...

p.185 여자는 동시에 도처에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것처럼 그 꿈들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여자가 수천 개의 조각으로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자기 마음이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단지 지엽적인 내용만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모든 꿈은 여자의 마음 속 어딘가에서 지금도 여전히 영화 필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여자는 자기 꿈속으로 밀고 들어온 타인의 꿈에 의해 파멸되었다고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차분했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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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머더 클럽
로버트 소로굿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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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란 과연 무엇을 이르는가? 있지만 없는 존재. 숨처럼 공기처럼 그 존재가 희미해 말해도 들리지 않고, 있어도 없는 듯이 여겨지는 탓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존재. 이름 없는 배경이 되는 존재. 주체가 아닌 배경, 일상의 한 조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나이 든 여자. 수수한 망토를 두른 작달막한 여자, 휠체어를 탄 여성 노인과 그 보호자, 수수한 중년 여성. 언뜻 보고도 그들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는 이는 장담컨대, 아무도 없다. 지극히 '평범하고 무해해' 보이는 여자들이기 때문에. 아줌마, 할머니. 알아봤자 뭘 얼마나 알겠어요? 해봤자 뭘 하겠어요?

p.21 그녀는 얼굴 앞에 태블릿을 들어 올렸지만 이 멍청한 기계는 인식할 수 없다며 잠금 해제를 거절했다. 주디스는 나이 든 여자로서 겪곤 하는 수모를 또 한 번 당한 것 같아 못마땅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현대의 세상은 주디스를 마치 완전히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대했고 망할 컴퓨터조차 그녀가 자기 자신과 충분히 닮아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했다.

p.73 오랫동안 그녀는 가정주부, 아내, 그리고 엄마로 살았다. 모두 훌륭한 역할이었고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축복받은 것은 행운이라고 스스로 되뇌어 왔지만, 사실 그녀의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정의된 것임을 계속해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엄마, 〈신부〉의 부인, 그리고 〈가정〉의 주부였다.


대작이든 기념비적 흥행작이든 간에, 잘 알려진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 영화들의 대부분은 현실을 반영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신성한' 임무에 대체로 성실하게 임해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격 드센 기지배, 허영 많은 아가씨들이 '철'이 들어 '정상가정'의 부품이 되거나, 어디서나 흔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없는 셈 쳐지는 데 이골이 난 나머지 그들 자신조차 이상한 줄을 모르고 살도록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온갖 여자들을 이름도 없이 냅다 '아줌마', '할머니'의 틀에 가둬놓는 일에.

그러므로 까탈스럽고 해괴한 태도는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는 동시에 그들의 고유한 속성으로 낙인찍히는 그야말로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현실에서도, 창작물에서도, 그 안의 여성들에게서도.

p.229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 이름도, 방향성도 없이 떠도는 느낌이었다. (...) 자신의 인생에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상태였기에, 그녀는 현재 아는 유일한 진실에 매달렸다. 자신은 가정주부이며, 이 상황에서 자신이 정신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까지 존재했던 주부들 중 최고의 주부가 되는 것뿐이었다.


여기까지 보면 잔혹한 사회 고발 같겠지만, 이건 의외로 꽤나 영국식 정통파 탐정소설이다. 달가워하지는 않아도 일단 말을 걸면 대답은 하는 떨떠름 매너와 차와 술은 거절하는 법이 없는 '점잖은' 사람들. 갈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사건에 기꺼이 덤벼드는, 매력적이고 선하면서 괴짜인 주인공. 그의 비범한 관찰력과 추리력, 은둔을 좋아하는 성격까지.

차분한가 하면 짓궂은 구석이 있고, 정의감 30에 흥미 70 정도의 희한한 동기로 종횡무진한다. 숨기려는 자와 파헤치려는 자의 두뇌싸움, 사랑스럽고 능청맞은 동시에 때로는 거짓말처럼 대담해지는 동료들에 폭 빠져들지 않을 재간이 없다. 게다가, 마지막까지 툭, 찔러주는 섬뜩함 한 스푼. 빠진 것 없이 꼭꼭 챙겨담은 뉴클래식이라니. 마카롱김치찌개 같구나... 근데 이제 희한하게 맛있는...

p.33 주디스는 천성적인 낙천주의자였다. 이런 본성은 그녀를 정의하는 주된 특징이었지만, 그녀는 또한 최대한 모든 것에 솔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말로가 여전히 활기차긴 하지만, 영국의 다른 모든 마을처럼 지난 10년간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사람들의 선함은 그대로였다. 이것이 바로 주디스가 중심가 끝에 다다랐을 때 자전거를 벽에 기대 놓으면서 스스로에게 상기시킨 사실이었다.

p.59 벡스가 벽장을 나오자 왠지 난감하고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쪽이 벽장에 숨은 상태로 처음 만난 중산층 여성 둘이 그 만남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 정해진 에티켓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있지만 없는, 말해도 들리지 않고, 있어도 없는 존재가 빈틈을 찌르고 판세를 뒤집는 쾌감을 더한, 그야말로 이제 와서 만난 게 억울할 정도로 유쾌한 탐정소설이다. 거기에 섬뜩한 뒷맛 한 스푼까지. 시작부터 차기작을 기다리게 하는, 우아하고 유쾌한데다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평에 손색이 없다.

첫 장편으로 평화로운 마을을 단박에 대형사건의 늪에 빠트렸으니, 다음 목적지를 기대할 수밖에. 웃자니 맵고, 울자니 웃긴 구석이 있는 젠틀하고 괴팍한 영국식 유머와 함께, 다음 탐정의 등장을 기다린다. 다음엔 어느 동네의 범인과 괴짜가 온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게 될까. 즐거운 마음으로 뛰어드는 독자를 어떻게 따돌리고 도망칠지.

p.13 만일 누군가가 바로 그 순간 강가에 있었다면, 그리고 저택을 올려다봤다면, 아주 작고 풍만한 몸집에 마구 헝클어진 흰머리를 한 70대 후반의 여성이 맨몸에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망토를 두르고 거실 창 앞에 선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여러 면에서 주디스는 슈퍼히어로가 맞았다. 아직 그녀 자신만 모를 뿐이었다.

p.245 「우린 안 보여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말한 그대로예요. 우리는 〈늙은〉 여자들이잖아요.」 「마흔 넘은 여자들은 아무도 신경 안써요.」 (...) 「사실 우리가 아니라 나머지 세상이 문제인 거예요. 사회는 나를 그냥 작고 늙은 여자로만 생각하죠. 내가 말한 대로 우리는 보이지 않아요. 그걸 이용하면 돼요.」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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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인터넷 - 지구를 살릴 세계 최초 동물 네트워크 개발기
마르틴 비켈스키 지음, 박래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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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독보적인, 동시에 생물이기에 갖는 특성 중 하나는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왜, 어떻게, 어째서... 기존 지식으로 이루어진 '당연한' 세계를 재구축하고 뒤집어엎어 확장하는 것은 결국 의문사다. 궁금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아름다움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기 때문에 인간은 무언가를 이해하고 알아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자연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여기저기 씨앗을 비축함으로서 퍼뜨리는 역할을 하는 아구티. 어미나무로부터 씨앗을 이동시키기 위해 아구티를 필요로 하는 나무, 나무 그늘에 씨앗을 비축하는 아구티, 아구티를 잡아먹어 옮겨둔 씨앗을 먹지 못하게 하는 오실롯처럼.

인간 또한 이 순환에서 예외가 아니다. '인간을 입양한' 황새 한지의 사례를 보건대, 인간과 동물,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이 주도적으로 상대를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의 생태에 적응하고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은 '태초부터 정해진' 유일하고 일방향적인 힘의 부품으로 기능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다방면적으로 긴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 적어도 원시 이후의 인간은 대체로 정주동물이다. 유목민족이라고 해도 상대적으로 좁은 영역을 오가며, 무작정 떠돌지는 않는다. '문명'을 구축한 종인 탓에 우리의 거주지는 제한적이며, 특정 조건들에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동물도 그러한가? 계절과 바람, 먹이를 따라 움직이는 동물들의 이동은 어떠한가?

만일 그들의 전생애, 태어나 자라고 돌아오는 흐름을 알 수 있다면,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우리는 인간에 의해 전지구적 자연환경이 극단적으로 바뀌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세는 더이상 돌이킬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수준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자연'에서 하늘과 땅, 바다를 오가는 동물들의 생태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인류 역사에, 또다른 전쟁이 발발한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모든 것을 '군수물자'로 취급하는 총력전의 시대에 비인간동물이라고 예외일까. 차마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소동에서, 우리는 책임을 읽어내야 한다. 전쟁의 세계에서는 어제의 의심이 오늘의 전략이 되기도 하므로.

생물인터넷, 좁게는 추적의 역사에서부터 넓게는 자연과 인간의, 인간을 포함한 생물 간의 영향 관계까지 큰 그림을 그려나가다보면, 다시금 부분으로서의 인간, 전체의 일부이자 곧 거대한 영향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간 존재를 마주할 것이다. 선택은 현재에, 결과는 미래에 있으니,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도서 발췌 가제본 제공: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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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동남아 - 동남아시아의 어제와 오늘을 이끈 16인의 발자취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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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다섯 글자도 길어 세 글자로 줄여 부르는, 손발을 다 꼽아도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나라와 더 많은 섬과 강으로 이루어진 곳, 동남아시아. 그 이름에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것은 으레 과일이나 관광지나 독특한 울림을 갖는 여러 언어들일 것이다. 관광지로서의 동남아, 수입품에서 자주 본 이름들.

식민지배 및 독재정권 청산과 경제발전이라는 과제를 양 어깨에 짊어진 곳. 한때는 수많은 식민지 중 하나였다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한국에게 원조국이었음에도 수십 년 사이 업신여김의 대상이 된 나라들. 수많은 유적지를 간직한 동시에 세계적 종교지도자가 나고 자란 곳. 수많은 섬과 산, 강과 바다만큼이나 굴곡진 역사를 거쳐온 나라들.

p.22 토론 중에 말라야(말레이시아 성립 이전 명칭)는 "중국인을 길러준 땅"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영국은 제국주의의 성공을 위해 '상상된 공동체'로서 말라야를 언급했지만,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자신들을 받아주고 품어준 나라로 받아들인 것이다. 페낭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이보다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은 찾기 힘들 것이다. 이때의 논쟁과 단발론의 승리는 당시 말레이반도 중국계 이주민들의 지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p.66 도시와 농촌, 산간 지대와 해변 등을 그린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는 덥수룩한 수염에 수척한 얼굴을 한 자화상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그의 자화상은 어려운 시기를 이겨낸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이다. 슬픈 눈빛이 특히 인상적이다. 어느 평자는 "시대의 슬픔을 드러낸 얼굴"이라고 했다. 베트남의 굴곡진 근현대사는 바로 파이의 삶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들의 역사를 이끌고 눈부신 발자취를 남긴 이름들을 말할 수 있는가?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의 역사는 우리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 망국부터 전쟁, 학살과 독재, 채 세대를 거치기도 전에 격변해온 한국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 독립, 근대화와 민주주의 체제의 정착 등 격동의 20세기를 거쳐왔기 떄문이다.

대항해시대에는 미개인의 땅, 원시림과 천연자원의 보고인 동시에 '항로'의 일부였다가 팽창하는 제국주의 시기에는 그야말로 쥐어짜일 대로 착취당했던 곳. 그러나 기어코 독립국가와 민주주의 정부 정착을 이뤄낸 수많은 국가들의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들의 열악한 생활환경과 '선진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저임금 이주노동자 지위, 어려운 교육환경과 낮은 국민소득 등을 이유로 쉽게 무시하지 않는가. 그들에게도 역사가 있음을, 격동의 세기를 헤쳐온 장대한 이야기가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이유다.

p.244 결국 혁명의 열풍이 전국으로 번지던 12월 30일 호세 리잘은 스페인 정부에 의해 사형당한다. 그의 사망 소식은 (...) 필리핀 독립 및 공화국 성립 선언으로 이어진다. 필리핀인들이 지금까지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선언이었다. 여기에는 호세 리잘의 소설과 활동, 비극적 죽음이 깔려 있었다. 비록 무장 투쟁에 동의 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조국을 사랑했다. 필리핀인의 삶과 문화, 역사,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 책은 문인, 사업가, 화가, 승려, 혁명가, 의사, 왕족 등 각양각색의 분야에서 20세기, 격동의 세기에 활동해온 인물들의 업적과 그들의 생애를 통해 동남아시아 각국의 발전과 변화를 살핀다. 그들의 이름부터, 현대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개중에는 전쟁통의 한반도에 머물며 고통받는 우리 민중에게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본 이도,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을 위해 힘쓴 이도, 말 그대로 온 삶을 바쳐 독립을 일궈낸 이도 있다. 동시에 시작은 혁명가였으나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학살자와 애써 이뤄낸 평화를 독재의 발판으로 이용한 자, 지금에 와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자도 있다.

p.40 다라랏사미는 주변 시선에 굴하지 않고 란나 제국의 후계자로서 자기 소명을 이어나갔다. 근대식 병원 설립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 전통 무용극(라콘)의 대본을 직접 쓰기도 했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의 질서에 운명이 좌우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강인한 여성이 등장한다.

p.160 목타르는 한국 전쟁과 관련한 보도가 대부분 승전 소식에 치우쳐 있음을 아쉬워했다. 실제로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한국 주민들의 이야기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 목타르가 전하는 기록에는 전쟁 당사자로서 겪은 인간적인 고통이 담겨 있다. 그는 인간적인 눈으로 전쟁을 기록하고자 했다. 이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발현된 것이 아니다. 그가 남긴 인류애는 문학가이자 기자로서의 삶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위인전이 아니다. '선진국 못지않은 훌륭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 혹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간의 모범으로서 이들을 주목하자는 거창한 뜻은 없다. (…) 누구에게는 소소한 교훈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는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다. 타인의 삶이 곧 내 삶이 되지는 않겠지만 위안은 될 수 있다" 라고.

모든 국가, 모든 문화권, 모든 지역이 그렇듯 동남아시아 각국들 또한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불완전한 민주주의제와 독재정권의 탄압, 차별과 사회갈등, 세계정세에서의 약소국 지위 등. 우리의 역사를 그들에게서, 그들의 역사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를 권한다. 멀고도 가까운 곳, 낯설지 않은 이름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보기를 기대한다.

p.110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의 건국 이념인 판차실라를 요란하게 앞세웠는데, 역사학자 진 테일러는 이를 두고, 수카르노의 판차실라가 인도네시아인을 하나로 묶는 '감정을 자극하는 선언' 이었다면 수하르토의 그것은 '통제와 순응을 위한 곤봉'이었다고 평가했다. 수하르토의 독재 정권은 국민을 탄압했다. 집권 32년간 정권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약 80만 명에 이른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p.169 목타르는 훗날 한국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8년 라몬 막사이사이상(저널리즘 부문)을 수상한다. 기자로서 그가 보여주었던 용기 있는 보도와 인류애가 국제적으로 인정 받은 것이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적대 관계에 있는 세계적 강대국들의 휘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 나라가 어떻게 파멸의 길에 이르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 《호랑이! 호랑이!》의 한 대목이다. 어쩌면 목타르는 전쟁 보도를 통해 자국민들에 교훈을 남기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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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으로서의 글로벌 차이나 - 시장주의와 반공주의를 넘어, 비판적 중국 연구의 새로운 시각
이반 프란체스키니.니콜라스 루베르 지음, 하남석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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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권위주의 정부 이미지로는 북한과 더불어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나라. 경제 규모로도 인구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신흥강국을 넘어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는 나라. 동시에 불신과 혐오, 혹은 유럽 제국주의를 무찌를 공산국가의 희망으로 불리는 나라, 중국.

세계 어디든 '메이드 인 차이나'를 찾아볼 수 있는 시대다. 엄청난 저임금 인력으로 밀어붙여지는 물량공세와 당-국가가 주도하는 계획경제, 정부에서 개인으로 이어지는 촘촘한 조직체계까지.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써본 사람은 없을 생필품과 소모품, 완제품부터 부자재까지 모든 영역에, '차이나'가 붙어있다.

p.18 무엇보다 이들이 "방법으로서의 글로벌 차이나"를 통해 강조하는 측면은 중국이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의 한 구성요소라는 점이며,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과 그 역으로 중국이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를 또 어떻게 변화시켜나가고 있는지 그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p.25 지구적 사회・경제 체제에 통합된 지 40년이 지나 ‘세계의 공장’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경제체가 된 지금에도 중국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는 중국을 ‘실재’ 세계 외부에 존재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타자’로 상정하며 계속되고 있다.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중국은 일반적으로 상황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외부 세력으로 묘사된다.


수천 년의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현대 중국, 좁게는 마오쩌둥 집권 이후 중국의 이미지는 저가상품이나 노동착취, 전방위적 인해전술 등 황화론에 동원되는 모든 수사에서 부정적 영역에 위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수사만 보아도 경제파트너와 '공산당 악마'를 정신없이 오가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중국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중국의 모든 부정적 측면은 그들의 '사회주의 정부'에 기인하는가? 신제국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북미유럽권의 경제적, 문화적 폭력은 동북아와 남반구 국가의 '미개'와 얼마나 다른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파악하며, 어떻게 해법을 찾을 것인가?

p.19 중요한 것은 중국을 따로 떼어놓고 자본주의 국가인지 사회주의 국가인지 규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또 이 체제를 어떻게 변화시켜나가고 있는지 그 연결점과 연관 관계를 세심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현재 중국과 지구적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중첩된 형태의 야만에 대한 비판과 투쟁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p.112 다시 말해 수용소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체제가 중국에 의해 타락했다는 징후도 아니고 단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특징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위구르 인권정책법과 인공지능 및 안면 인식 관련 중국 기업 블랙리스트는 매우 상징적이고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하지만, 인권 침해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기보다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실체'는 정말 중국만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만의 문제일까? 자본주의 체제와 '서방 선진국'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인가? 그들의 이름으로 묶이는 문제들은 (애초에 사회주의의 반대말이 아니지만) '자유주의의 승리'로 종식될 수 있는가?

물론 두 저자 모두 위구르 강제수용소와 국내외의 노동자 착취, 개인정보의 무단 사용 등 현존하는 문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강력한 실질적 일당독재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고수하며 전방위적 영향력 침탈의 시도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반사적 혐오와 황화론적 공포를 걷어낸 자리에 드러나는 실체의 정확한 이름이, 그 뿌리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p.92 자본주의 정치경제에 내재된 불평등과 예속의 형태를 고착화하고 악화시킬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부자와 권력자가 휘두르는 감시와 사회경제적 통제의 억압적인 도구가 계속 날카로워짐에 따라 이 체제가 공유하고 있는 합리성, 관행, 잠재적 결과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방향으로 이러한 기술을 재편하고 이러한 기술에 집단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우리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156 중국의 사례들이 다양한 외부 이해관계자들이 신자유주의적 대학을 포섭하는 방식, 즉 주로 공공 자금을 투입해 수십 년에 걸쳐 구축된 연구 인프라를 운영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최소한의 자원을 들여 자신들의 의제를 추진하는 방식과 어떻게 유사하게 가고 있는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제들은 종종 이 기관들이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가치들과 명백하게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


좋든 싫든, 현시대의 각국은 중국에 대해 무시로 일관할 수도, 공산주의 연방의 향수에 젖어 무조건적으로 편을 들 수도 없다. 두 저자는 이상화와 적대시 두 관점 모두에 내재된, 중국을 '우리'와 유리된 존재로 타자화하는 시선을 걷어낼 것을 제안한다.

제목의 의미는 곧 중국을 대상이 아닌 분석 도구로 간주해 중국과 그들 체제의 문화적, 역사적 특수성과, 세계와의 연관성을 두루 살펴야만 기존의 선입견과 이분법적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중국의 실체를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이다. '진짜 중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반중 반공산주의'의 이름 아래 되풀이되고 모방되는 폭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p.44 중국을 논의할 때 담론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 모두에서 중국과 지구적 자본주의의 동역학들을 뒷받침하는 의미 있는 공통점과 상호 연관성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적어도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여전히 행동할 힘을 찾아낼 수 있는 자원이다.

p.139 '패권, 제국, 신식민주의 측면에서 포괄적이고 거대한 일반화에 손쉽게 의지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동시에 '세밀하고 근거를 갖춘 경험적, 비교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일대일로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강박을 줄이고 대신 중국 행위자들의 현장에서의 실제 행동에 초점을 맞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며, 고착화된 선입견을 넘어 숨겨진 유사점과 연결점을 발굴하고, 중국의 지구화 패턴이 기존의 배열과 공식에서 구축되고 진화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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