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의 매 열린책들 세계문학 63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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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믿을 수 없다.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 거의 모든 전개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표정, 말과 동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하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독자는 마음 편히 이입할 수 없는 동시에 마치 현장에 함께하는 것 같은 생생함을 느끼게 된다.

정의의 편도,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만을 말하는 증인도, 전적으로 탐정의 능력을 신뢰하는 의뢰인도 없다. 무엇보다, 일단 우리의 주인공, 그 '탐정'을 믿을 수 있는지부터가... 묘사부터 신사답다든지, 명석하다든지, 유쾌하고 다정한 면모와는 거리가 멀다. 정말이지 칼만 안 들었을 뿐 날강도나 다름없는 냉정한 태도는 오히려 악당과 협잡꾼에 가깝다.

한 번을 져주는 법이 없고, 돈이면 좋고 없으면 썩 꺼지라는 식이다. 쓰다보니, 이거 탐정 맞아요? 깡패두목 아니고...? 그밖에도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주저 없이 왼뺨에 뒤통수까지 갈겨줄 캐릭터로 가득한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울먹이는 의뢰인으로 시작된다.

p.10 달그락거리는 소리, 희미한 종소리, 에피 페린이 타자를 치는 소리가 닫힌 문 저쪽에서 들려왔다. 가까운 어느 사무실에서 웅웅거리는 모터 소리도 둔중하게 올렸다. 스페이드의 책상에 놓인 놋쇠 재떨이에서는 피우다 만 담배 한 대가 담배꽁초들 틈에서 가늘게 연기를 올리고 있었다. 흰 담뱃재들이 노란 책상 표면과 녹색의 압지와 몇몇 서류를 위로 점점이 내려앉아 있었다.


탐정과 독자가 편을 먹고, 그래, 아무래도 이 이야기에는 팀을 이룬다거나 협력한다는 말보다는 이쪽이 더 잘 어울리는데, 진실을 찾아 좌충우돌 행진을 벌이는 정석적 추리 소설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있는 이 작품이 1차대전 직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전까지의 세계를 송두리째 뒤엎은 '그 전쟁' 직후, 사회는 정의와 인간 본성의 신뢰, 유대감을 잃어버렸다. 선량한 사람의 순진한 믿음도, 간신히 재건된 사회의 공권력도, 겉으로나마 신뢰를 이야기하는 세속적 계약 상대도 믿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가진 패를 내보이지 않고, 모두가 진실을 숨기고 등 뒤에 칼을 감추고 있다.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세계, 지겨울만큼 여전한 이권다툼 속에서 이른바 〈하드보일드〉라 불리는, 사회성원의 도덕성과 기존의 가치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그저 무자비하게 뚫고 나가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소설이 쏟아져나온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런 유행 또한 뼈저리게 느낀 무력감과 환멸의 반영이었을지 모른다.

p.161 「그들은 보화 속을 뒹굴었소. 선생은 모를 거요. 우리도 전혀 모르오. 그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사라센인을 상대로 해적질을 해서 무수한 보석, 귀금속, 비단, 상아를 약탈했소. 동양 세계에 있는 부의 정수 중에서도 정수들을 말이오. 그것이 역사요, 선생. 그 사람들에게는 그 성스러운 전쟁이 — 성당 기사단도 마찬가지였지만 — 노략질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소.


깊은 밤, 불빛이 어른거리는 창 너머로 오가는 말은 그저 입에 발린 속임수인가. 그는 그녀를, 당신은 나를, 서로가 서로를 배반하는 지독히도 외로운 세계에서 그들은 무엇을 갈구하는가. 눈물도 미소도, 사랑도 증오도 믿을 수 없는 차가운 도시의 하루는 저물고...

마지막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조각난 진실 속에서 독자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끔찍하게 매력적인 그들의 말과 행동에, 달콤한 미소에 싸늘한 경멸이 스치는 이야기에서 시대의 초상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p.274 스페이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 운이 좋으면 20년 후에 샌퀜틴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때 나한테 돌아와요.」 그녀는 그에게서 뺨을 떼고 고개를 뒤로 멀리 젖힌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이 가녀린 목에 교수형 밧줄이 걸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어루만졌다.

p.281 그는 어깨를 살짝 들썩이고 말했다. 「아. 고액의 수임료라면 적어도 저울의 반대편에 얹을 또 하나의 추는 될 수 있었겠죠」 그녀는 그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입술을 내밀고 속삭였다.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저울의 반대편에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스페이드는 이를 다물고 그 사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얼간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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