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집사 백 년 고양이 래빗홀 YA
추정경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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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뭘까? 고양이 정말 뭘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심지어 눈 앞에 두고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생물이다. 대체 저 동그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길래 잘 자다가도 느닷없이 튀어올라 발길질을 하고, 멀쩡히 둔 물건을 밀어 떨어트리고, 가만히 쓰다듬을 받다가도 버럭 성질을 내며, 목숨이 아홉 개는 된다면서, 어째서 그렇게 짧은 생을 미련없이 떠나버리는지. 어떻게, 그다지도, 사랑스럽고 애틋할 수 있는지.

만일 고양이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고양이에게 인간이 아는 것 이상의 거대한 세계가 있다면, 우리와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 어쩌면, 그토록 간절했던 한 마디를 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위험해, 행복해야 해. 그리고, 또 만나. 이 책의 고양이들은 보나마나 흥, 하고 아닌 척 고개를 돌리겠지만 말이다.

p.63 인간은, 인간이란 동물은 탈을 뒤집어쓰지 않고도 돌변한다. 어쩌면 그 얼굴 앞에 뒤집어쓴 기괴한 가면이 그의 본모습일 수도 있다. 티그리스가 숨결을 불어 넣어 준 다음에야 하퍼가 즐겨 피우는 마리화나 냄새와 제이슨의 오래된 향수 냄새가 그들의 가면을 벗겼다. 티그리스를 죽이고 사체를 처리하기로 약속한 뒤 먼저 받은 계약금이 달러 묶음으로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채였다.

p.206 "어이 인간, 고양이 세계의 영역은 침범할 수 없는 우리의 성이야. 함부로 누굴 받아들이지 않아. 영역은 모든 고양이가 협의해서 결정할 일이야.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뭔가를 부탁하면 넌 보은의 의무를 지게 돼. 고양이에게 복수와 보은은 최고의 율법이야."


모든 생명에게는 각자의 세계가 있다. 그들 모두가 제각기 치열하고도 자유로운 삶을 이어간다. 하루하루를 채워가며 존엄하게 살아간다. 개중 고양이들에게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예언이 있다. 모든 생명의 윤회를 돕는 천 년 집사를 찾아라. 그들은 고양이의 말을 한다. 천 년 집사의 운명을 타고난, 상처받은 두 사람과 그들을 향해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협. 운명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무게가 있다. 아홉 번의 삶에 쌓여가는 능력만큼의 이해와 고통. 작가는 인간의 욕심이 어그러뜨리는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묻는다. 이다지도 고통스러운 세상에 이토록 자유로운 존재와의 인연에 기꺼이 동참하겠느냐고. 공존의 무게를 안기며 묻는다. 외롭고 괴로운 세계에 여전히 곁을 지킨다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느냐고. 천 년 집사의 길에 동참할텐가.

p.64 "천 년 집사는 자신의 과업을 받아들여라. 와서 억압받는 생명을 해방시켜 눈먼 이들을 깨어나게 하라. 진실의 냄새를 쫓아라. 그 냄새는 고약하다. 위선과 위악이 진실을 가리고 있으니 그 추악한 냄새들을 쫓아라."

p.284 "나는 새끼를 낳아 길렀던 어미로서 내 존엄이 있어. 그래서 똑같은 마음으로 새끼들을 키우는 삵의 은신처를 네게 알려 줄 수는 없어." "삵을 몰아내 달라 부탁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존엄이라니." "그때는 몸을 풀기 전이었고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잖아. 몰아내되 새끼가 젖을 뗄 때까지, 어미와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는 거지. 안전한 이별"

*도서제공: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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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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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마법같은 순간이 있다. 그에 비채 인생은 대체로 무료하거나, 밋밋하거나, 쉽게 잊혀지고, 이따금, 아주 가끔, 몹시도 찬란하고 고통스러워 평생을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대개 두어시간 남짓, 화면의 그 얄팍한 경계로 눈을 돌리면 금세 현실에 파묻힐 그 짧을 시간을 사랑하게 되는 건, 어쩌면, 세계의 일부를 아주 가까이 들여다보고, 온몸으로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환상에 잠기게 하는 힘 탓이 아닐까.

p.84 개인적으로는 목소리로 정했다. 매력적인 허스키보이스. 병실에서 늙은 딸과 창가에 나란히 서서 안마당에 핀 꽃을 바라보는 연기를 부탁. 그녀가 움직인 순간 회의실이 병실로, 벽이 창가로 바뀌는 듯했다. 캐릭터 이름도 이자벨에서 배우의 본명인 마농으로 변경.

p.102 밤. 첫눈에 반한 파비안느의 집에서 혼자 숙박. 밤의 열차 소리, 아침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기억. 혼자 시나리오를 들고 집 안을 이동하며 대사를 말해봤다. 그러면 말이 넓이와 거리감 면에서 이 공간에 얼마만큼 어울리는지 또는 안 어울리는지 알 수 있다. 누가 보면 섬뜩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건 중요한 과정이다.


그렇게 태어난 영화는 관객에게 어떻게 가닿는가. 적어도 내겐 어떤 날엔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간 영화가 있었고, 언젠가는 개봉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출석도장을 찍어가며 상영관에 불이 꺼지는 순간부터 크레딧의 끝자락까지 자리를 지켰다. 또 언젠가는 컴컴한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 눈 감고도 외는 내용을 줄줄 울어가며 봤고. 생각만 해도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만 골라가며 보던 때도 있었고.

슬슬 잊을 때도 된 언젠가엔, 감은 눈이 쓰리도록 피로에 절어 사는 게 너무 버거운 날, 끈질긴 온기가 그리워 닥치는대로 찾아 보던 날들이 있었다.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서, 꾸역꾸역 살겠다고 애쓰는 꼴이 너무 처량해서 언젠가 이 감독 영화는 거들떠 보지도 않을 날이 오기는 할까, 싶던 때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을 읽고 있으니 신기하다 해야 할지, 역시 사람 일은 모른다고 해야 할지.

p.201 카트린+쥘리에트의 안마당 장면. 자서전 《진실》을 읽은 뒤 모녀의 첫 충돌. 쥘리에트의 노여움이 강렬. 수위를 낮춰보라고 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쥘리에트는 '거짓된 내용을 썼으니 화내는 게 당연하다' 라고. 아니, 아직 아니다. 이 장면은 이틀째 아침이니 노여움은 나중을 위해 남겨놔야 한다.

p.219 안마당에서 어머니에게 자서전의 거짓말에 대해 따지는 194신 말입니다만, 여기의 노여움을 지난번 반장이 자리에 앉지 않는 말썽쟁이 학생을 나무라는 것처럼 해봐달라고 한 건, 여기서는 아직 '이성'으로 화를 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거든요, 뤼미르는. 단계를 밟아 감정적인 노여움이 심화돼 최대치에 이르는데, 여기서는 아직 버텨주세요.


이름보다 작품으로 먼저 안 감독이다. 화면만 봐도 아, 이 사람이구나, 싶은 분위기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기록한, 스케치가 영상이, 아이디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설정에 불과했던 캐릭터가 관객을 사로잡고 살아 움직이는 그 자체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담은 이 기록은 만들어진 곳을 떠나 드넓은 세계로 달려가버리는 존재에 대한 고백이다.

"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라는 제목은, 어쩌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 자체로도 온기와 생명을 갖고 피어나기까지, 지난하고 아름다운 길과 시간들. 다시 기억으로. 어째서 고레에다의 작품이었느냐고, 굳이, 를 묻는다면, 그 안에 사람이 있어서, 라고 답하겠다. 내가 되지 못한, 편입되지 못한, 어떤 순간들이 있다고.

p.168 영화와 인생이 이번만큼 거의 운명적으로 만나는 것을 처음 봤다. 작품 자체가 타이밍을 택해 누군가를 위해 태어나는 것이라면? 이 작품을 통해 나는 감독과 함께 달려왔다고 첫머리에 썼다. (...) 빠른 속도로 아웃풋을 이어온 지난 몇 년을 거쳐 이쯤 해서 일단 호흡을 가다듬고 인풋을 축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새로운 '좋은 친구'를 사귀어 한층 터프하게 좋은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서.

p.253 스태프와 캐스트가 대본에 대해 이런 의견을 내주면 정말 고맙다. 상하 관계도, 종적 관계도 아닌 평행적 관계가 작품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존재한다는 증거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그려낸 건 사람이라고, 아주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쌓아올린 이야기라고, 그 사실이 여실히 묻어나는 화면을 그려내는 감독이라서, 라고 답하겠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하나의 기록이자 그가 그려내는 세계의 일부다. 작게는 한 영화가 탄생하기까지의 조각들이고, 깊게는 "영화는 어떤-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그 나름의 답이다.

그에 더해 시나리오부터 섭외, 촬영까지 어느 것하나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 그래서 결국 가장 인간다운 작업에 대한 소고인 동시에 레퍼런스와 베테랑으로서 현장의 이야기를 담은, 일종의 가이드북으로 읽어도 좋겠다. 관객에서 창작자까지, 영화가 태어나는 곳, 당신의 세계에서 나의 마음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p.283 쇄신이 빠르다는 것은 당연히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도태된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새로운 영화 기술에 따라오지 못하는 세대의 스태프는 나이 50대에 보수파라는 딱지가 붙어 현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p.296 영화 만들기에서 사라진 필름을 교체하는 시간, 무거운 기재, 상영에서 사라진 필름을 교체하는 수고, 필름 교체를 표시하기 위해 필름에 각인되던 마크. 그것들이 영화 및 영화 만들기의 시간과 공간을 일종의 '축제'로 바꿔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이제 영화관의 어둠까지 사라져가고 있다. 내게는 종이가 아니면 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관을 잃으면 영화는 영화가 아니게 될 것 같다.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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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과잉 사회 - 성비 불균형이 불러온 폭력과 분노의 사회
마라 비슨달 지음, 박우정 옮김 / 현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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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사라지고 있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많은 이들이 이 말에 전쟁이나 전염병같은 끔찍한 "외부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 인구의 절반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고. 이 생각은 틀렸다. 동시에 절반의 진실이다. 여성이 사라지고,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음모의 결과가 아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태어날 기회를 갖지 못하거나 사회에 자리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간절히 원해진다. 이용가치가 충분하지만 충분한 가치를 갖지는 못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기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성에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의 어머니, 혹은 그 자신에게조차 현실이 아니던가? 여아라서 죽는다. 동시에 남성에게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가치있는 아들과 쓸모없지만 중요한 도구인 여성을 생산해야 한다. 남성우월사회에서 성감별낙태로 야기된 남성-과잉 인구는 낯설지 않다. 그 자신의 존재로는 충분하지 않으나 동시에 재생산에 막중한 임무를 갖는다. 낳아라, 낳지 마라, 누군가를 낳고 무언가는 "지워라".

p.41 2008년에 HIV 바이러스와 관련해 사용된 예산은 전 세계 건강 관련 지출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 하지만 성별 선택은 대부분 드러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다. 일이 벌어지고 난 뒤 수년 동안 출생신고 기록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있는 인구통계 학자들, 그리고 여성이 부족한 사회에서 살거나 살게 될 수억 명만이 알고 있는, 더욱 만연해 있지만 훨씬 조용한 전염병으로 남아 있다.

p.56 결국 성별 선택은 모든 사람이 성공하려고 애쓰는 분위기에서 일어나며 여성은 비록 같은 여성을 희생시키면서 얻는 것이라 할지라도 위신을 세우려는 갈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좀 더 비극적인 다른 요인은 여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성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이다.


여성이 부족한 사회가 곧 여성상위사회는 아니다. "희소자원"이 더 큰 가치를 갖는다는 수요-공급 논리는 성-권력 앞에 힘을 잃는다. 여성이 동등한 사회구성원이 아닌 "생식수단"이자 "인구조절도구"인 동시에 돌봄노동, 육아, 가사와 성욕 해소 등 일조의 "서비스 재화"로 취급되는 사회에서는 성감별낙태금지가 여성출생가능성을 높인다 하더라도 여성의 자율성과 존재-통제권 억압에 기여하게 된다.

남성우월사회에서의 "이득"과 선호, "인구통제"의 직간접적인 압력의 결과, 성감별낙태와 여성의 이중-가치화는 출생성비의 부자연화(unnatural selection)를 야기했고, 이는 상대적 남성과잉사회와 성병확산, 여성 대상 범죄 증가 등 그에 파생된 사회 문제, 출생률하락에서 인구 소멸로 이어지는 연쇄로 이어졌다. 여성이 "태어날 가치"를 갖지 못하는 사회는 여성에게 폭력적이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p.217 가족계획 정책이 여성의 요구에 대한 배려 없이 수립되고 낙태가 피임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속성 인구 조절 방법으로 도입된 아시아와 동유럽의 많은 지역 에서 합법적 낙태는 더 많은 낙태를 의미했다. (...) 한국에서 "여성의 몸은 도구죠. 그래서 우리는 약 대신 낙태를 이용합니다"라고 말한다.

p.318 하지만 성비 불균형이 새로운 파시즘의 물결을 불러오거나 전면전이 불가피해질 정도로 아시아의 군대를 늘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지역의 안정을 위협한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헤스케스는 (...) "미혼 남성들이 결집할 경우 더욱 조직적인 공격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라고 썼다. "남성 과잉의 결과는 향후 2, 30년 동안 아시아의 몇몇 국가에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대다수는 이미 초고령화의 위기에 처해있다. 동시에 어디선가는 여전히 폭증하는 인구를 감당치 못한다. 많은 사회의 문제는 인구 수 그 자체보다 성비에 있다. 노화와 사망은 여전하나 출생률은 줄어든다. "인구조절수단" 그 자체인 여성이 줄어든 탓이다. "낳게 만든다" 이전에 "낳지 못하게 한다"에 더해 "골라 낳게 한다"가 있던 탓이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급증하는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성별선호-감별은 어째서 묵인되고 조장되었는가? 이 걷잡을 수 없는 문제의 실마리는 어디에 묻히는가? 남성과잉현상은 기술, 자본-제국주의, 국가권력,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얽혀있고, 성감별낙태는 단지 현재 선택의 문제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성원들과 미래사회의 존속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자 결과다.

p.119 우리는 어떤 상표의 초음파 기계가 사용되는지, 성 감별 검사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혹은 낙태가 애초에 아시아에서 어떻게 그토록 만연하게 되었는지 듣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마치 생명 윤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나아가는 기술에서 분명한 안도감을 얻는다. 또한 지난 수백 년간 인구 변화가 면밀하게 연구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발전이 인구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먼저 따져보거나 신중히 검토하지 않는다.

p.359 몇십 년 전 인구 조절 운동이 출산을 관리해야 할 문제로 만들고 사람을 숫자로 바꾸어놓았다. 개발도상국의 부모들은 소가족이 성공적이라 배웠고 아이가 공장의 상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들의 '질'이 '양에 반비례한다고 단단히 교육받았다. (...) 현재 정부의 인구 조절이라는 개념이 구식처럼 들리는 반면 우리는 아직 생식을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이 문제를 가족에게로 돌렸다. 중국과 캘리포니아를 막론하고 어머니들이 가족의 우생학자가 되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이다. 기술은 현상과 유리된 것으로 간주되며 가치중립의 환상 뒤에 숨는다. 미국의 실험실에서 탄생한 기술은 아시아에서 여아를 사라지게 하고 여성 인신매매와 성산업의 확대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는 "부적합한" 인구 통제와 기술자본권력의 팽창에의 욕망, 그리고 인간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 있다는 오판이 있었다.

이미 사라진 존재를 되살릴 방법은 없다. 선택적 출산과 임신중단은 여성의 신체통제권과 결부되어 있으나 감소한 여성인구는 재화로서의 여성 쟁탈이라는 인권침해를 낳았다. 무엇을 해야하는가? 누가 먼저인가? 명쾌한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선진국"의 누구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공수정연구소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선택이 인도의 낙태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태도는 분명 오만이다(365)".

p.259 레나 에들런드는 한 논문에서 성별 선택 기술이 더 저렴하고 정교해지고 더 널리 확산되고 또 세계의 중상층에서 태어나는 남아의 수가 증가하면서 가난한 국가들이 기회를 감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태아 성 감별과 관련된 가장 큰 위험은 최하층 계급의 여성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우리는 성별이 소득과 계층에 따라 나뉘고 여성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p.365 개발도상국에서 성 감별과 낙태가 유행하는 데는 미국의 단체들에서 제공한 수백만 달러의 자금과 함께 수천 명의 현장 요원, 수많은 이동 진료소가 필요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명을 만드는 의학 기술을 위해 자유롭게 국경을 건너며, 세계은행의 독려 없이도 훨씬 빠른 속도로 기술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새로운 책임이 생긴다.


*도서제공: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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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잃어버린 심장
설레스트 잉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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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논리적인 동물이다. 이것은 부정할 데 없는 사실이다. 인간의 발달한 사고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환경에서조차 이유를 쥐어짜내 납득하려 한다. 어떤 일에든 원인이 있다. 설령 그것이 완전한 허상일지라도, 누구를 위한 배제인지 모를 선동이라 할지라도, 파멸과 자멸로 향할 끝이 볼 보듯 뻔할지라도. 논리는 합리의 동의어가 아니다.

"미국인을 위한 미국"이란 기치 아래 미국 전통문화 보존법, 이른바 PACT가 시행된 언젠가의 뉴욕, 그곳에 한 소년이 있다. 버드, 상상과 사랑이 가득한 시절을 빼앗긴, 그의 이름과 기억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파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 그의 '피'에 중국이 있기 때문에, 아니,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방인인, 이제는 '노아'여야 하는 소년.

p.19 그의 어머니가 파오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 어떤 애들은 쿵파오라고 불렀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버드의 얼굴만 봐도 누구나 알았다. 얼굴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고, 특히 광대뼈 기울기나 눈 모양에서 티가 났다. 당국에서는 파오라는 사실 자체가 범죄는 아니라고 늘 주지시켰다. PACT는 인종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애국심과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라고 대통령은 늘 말했다.

p.110 중국을 연구하거나 일본 설화를 찾는 일만 위험한 게 아니었다. 그처럼 생긴 외모는 늘 위험했다. 그의 어머니의 자식이어서 여러 방식으로 위험했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늘 알았고 늘 대비했고 자기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늘 예민한 상태로 있었다. 아버지가 두려워한 것은 어느 날 누군가 버드의 얼굴에서 적을 보는 일이었다. 혈통이든 행동이든, 누군가 그를 어머니의 아들로 보고 빼앗아가는 일.


미국은 여전히 미국이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위기"가 있었다. 길고 익숙한, 설명할 수 없이 체제 자체에 내재된 침체. 어쨰서인가. 논리적인 동물, 인간은 이유를 찾았다. 아니, 누군가 말했고, 그것은 이내 사실이 되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깔고 앉은 권력 때문이 아니다. '우리' 중에 '우리가 아닌 자'가 있다. 그들이다.

마땅히 하등할 '그들'이 감히 불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은 원흉이자 적이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불행할 리가 없다. 어제의 세계가 이렇게 무너질 리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우리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좀먹고, 훔쳤기 떄문이다. 사악한 자들. 본래적이고 선명해야 할 경계가 흐려졌기 때문이다. 오래된 혐오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애국시민을 위한 정의로운 국가'라는 믿음이 정의를 집어삼켰다.

p.81 아니야, 우린 책을 불태우지 않아. 여기는 미국이야, 그렇지? 그녀는 그를 보며 눈썹을 추켜세운다. 진심일까, 아니면 비꼬는 걸까? 버드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우린 우리 책을 태우지 않아, 그녀가 말한다. 재생지 재료로 만든단다. 훨씬 문명화된 거지, 안 그래? 갈아서 재활용해 화장실 휴지를 만들어. 여기 없는 책은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의 엉덩이를 닦는 데 쓰였을 거야.

p.229 우린 이게 다 누구 때문인지 알아,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봐. 우리가 불황을 겪으면서 제일 잘사는 게 누구지? 사람들은 단호히 동쪽을 가리켰다. 중국의 GDP가 얼마나 올랐는지,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보라고. (...) 누군가 '위기'는 중국 짓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조작과 관세와 환율 하락 때문이라고. 그들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싶어한다고. 우리 조국을 빼앗고 싶어한다고.


순수하고, 단일하며, '국가'가 모든 믿음과 가치를 독점하는 사회. 그것이 PACT의 이상이자 유일하게 허용되는 '정상'이다. 그를 위해 '무해하고 충성스러운' 이들을 '위험분자'로부터 격리한다. 의심스럽지 않기 위해 서로를 경계해야 한다. 복종하라. '우리'는 다시 위대하고 강해질 것이다. 모든 분노와 두려움을 '그들'에게 쏟으라.

이 이야기의 가장 끔찍한 점은,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대단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주위를 둘러보고, '일어난 일'을 되짚기만 해도 선명히 드러난다. 과거가 반복되고 있다. 여전히 유일한 동력이 되는 혐오, 배제, 위기의 촉발 혹은 재점화-방화.

p.227 Krei는 분리하다라는 뜻이래, 그녀가 읽는다. 판단하는 거지. 체와 비슷하네, 이선이 말했다.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떼어내는 거니까. 그래서 krisis는 더 좋든 나쁘든 결정을 내리는 순간을 뜻한대.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섬세한 흉골 라인을 따라가 목 아래 움푹 들어간 곳에서 원을 그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지 결정하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p.305 처음 있는 일인 줄 알았어요? 늙은 여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거릿은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배우기 시작했다. 태양 아래 새로운 일은 없다. (...) 오랜 의사를 가진 아동 납치는 각각 핑계는 다르지만 이유는 같았다. 가장 소중한 것의 몸값을 치르는 일이 가장 큰 처벌이 될 수 있으므로. 닻과 정반대되는 개념이었다.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을 뿌리 뽑으려는 시도, 어떤 이질성은 침범하는 잡초처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인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사라진 엄마의 흔적을 찾아 나선 노아는 균열에 도달한다. 허름하고, 형편없이 연약한 시도에. 해야할 일이 있어. 돌아오기 위해 떠나야 해. 말하기 위해, 들어야 해. 어떤 말은 심장에 가닿는다. 머리보다도 먼저, 부서짐과 빼앗김의 감각으로. 추천사처럼, 이것은 단지 소설이 아니다. 혁명이다. 동시에, 실패이자 현실이다. 좌절이다.

허구가 현실을 좀먹을 때, 현실이 허구로 검열되어야 할 때, 시대는 경고가 된다. 응답하라고, 지금이어야 한다고. 들어봐. 일이 벌어졌고, 난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들어봐. 내가, 생각해봤어. 그들이 이곳에 있었음을 기억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증언하기 위해.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을.

p.371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녀는 그래야 한다고 뼛속 깊이 느낀다. 반드시 직접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증언. 임종 지키기.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기. 어떤 것들은 목격되어야 한다.

p.374 그녀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이름보다 더 많은 걸 기억해주길 원한다. 그들의 얼굴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 일어난 일보다, 그들이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간단한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 각자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명단 속 이름이 아니라 다른 누구와도 다른 한 명의 사람으로.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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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푸른 벚나무
시메노 나기 지음, 김지연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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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딸로. 3대째 이어져온 그 곳은 언젠가는 호텔이었고, 또 언젠가는 레스토랑이었고, 지금은 카페가 되었지만 변함없이 찾아오는 이를 기다리고 맞이한다. 시대도, 사람도, 모습도 달라졌지만 여전한 환대로 기다리는 곳, 누군가가 머무르고 떠나는 그곳에 한 그루 벚나무가 있다.

사람보다도 더 오래도록 그곳에 뿌리 내리고 땅과 사람을 지켜온 늙은 나무 한 그루. 이 이야기는 묵묵하고 고요하게 존재해온 그의 말로 전해진다. 야에, 사쿠라코, 히오. 벚나무의 이름을 가진 세 여성의 나날로.

p.9 해가 드는 쪽은 따뜻하지만 실내에는 아직도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습기를 머금은 목조 건물 특유의 향긋한 나무와 흙 냄새가 코끝에 닿은 순간 히오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카페 체리 블라썸이 오랜 세월을 견디며 만들어낸 냄새다. 히오는 이 공간을 둘러싼 공기를 온몸으로 흠뻑 마시고 나서 "자!" 하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p.54 만개한 꽃이 아니라 서서히 지기 시작한 꽃잎. 겉으로 드러난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고상하게 잎사귀에 싸여 있는 흰색 떡. 그런 것들이 삶을 여유롭게 해주고 아름답게 해준다고, 어떻게 하면 전할 수 있을까.


카페 체리 블라썸의 나날은 거의 비슷하다.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다. 그날의 차와 다과를 준비하고 문을 연다. 손님이 찾아온다. 이웃 주민이기도, 낯선 사람이기도, 삶에 지쳐 도망쳐왔거나, 썩 달갑지 않은 소란이기도 한 이들이. 서른 살에 가게를 물려받아 이제 막 3년차인 풋내기 사장 히오의 하루는 여전히 서툴고 어려운 것 투성이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친절은 너무도 쉽게 버려진다. 온통 번쩍이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에서 속삭이는 고요함은, 휴식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마음 따위는 번번이 실망하고 상처받기 마련이다. 오래된 땅의 낡고 작은 공간은 그 마음을 아는 이들이 머무르고 오롯이 자기 안에 잠겼다 떠나는 곳이기도 하다.

늙은 나무는 말할 수 없다.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품에 안고 다독여줄 수도 없다. 그는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찰나를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들의 곁에, 그저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풍경처럼 존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 곁에 서서. 온몸으로 계절을 견뎌내며.

p.160 말로 위로하기는 쉽다. 행동으로 옮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생각하지 않고 한마디 쉽게 내뱉으며 타인을 위로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 머리로는 이해하고 스스로를 타일러보기도 했지만 가슴 밑바닥에는 갈 곳을 잃은 진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쓸쓸하다는 마음의 소리만 끝없이 메아리쳤다.


생의 끄트머리에 선 인간은 그를 보며 유한한 삶을 절감한다. 봄 꽃, 여름 그늘, 가을 낙엽을 지나 죽은 듯이 앙상해지는 겨울 가지. 나무의 사계절은 인간의 그것과 닮아있다. 어느 것 하나, 어느 순간 하나 버릴 것도, 쓸모 없는 것도 없다는 것조차도.

시속 0km와 시속 4km의 존재가 자라고 늙어온 곳, 낯선 이가 머물고 쉬었다 가는 카페 체리 블라썸의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서툴고, 어렵고, 아쉬울 것이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죽은 듯이 겨울을 보내고도 새로운 싹을 틔우는 오래된 나무처럼, 하루를 하루만큼 충실히 살아낸다면. 긴 여름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 다가올 가을을 본다. 살아가야지. 그렇게.

p.132 얼핏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이는 벌레조차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모른다. 커다란 나무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생물이 겨울을 나고 편히 쉬는 보금자리의 역할을 한다.

p.242 외할머니가 지켜낸 벚나무가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또다시 꽃을 피운다. 나는 끝이 없는 이 순환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졌다. 어떠한 시련이 찾아와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나는 재생의 기적. 그때 부드러운 빛이 방 안을 빙 둘러쌌다. 시선을 들자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장지문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도서제공: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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