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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잃어버린 심장
설레스트 잉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평점 :
인간은 논리적인 동물이다. 이것은 부정할 데 없는 사실이다. 인간의 발달한 사고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환경에서조차 이유를 쥐어짜내 납득하려 한다. 어떤 일에든 원인이 있다. 설령 그것이 완전한 허상일지라도, 누구를 위한 배제인지 모를 선동이라 할지라도, 파멸과 자멸로 향할 끝이 볼 보듯 뻔할지라도. 논리는 합리의 동의어가 아니다.
"미국인을 위한 미국"이란 기치 아래 미국 전통문화 보존법, 이른바 PACT가 시행된 언젠가의 뉴욕, 그곳에 한 소년이 있다. 버드, 상상과 사랑이 가득한 시절을 빼앗긴, 그의 이름과 기억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파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 그의 '피'에 중국이 있기 때문에, 아니,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방인인, 이제는 '노아'여야 하는 소년.
p.19 그의 어머니가 파오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 어떤 애들은 쿵파오라고 불렀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버드의 얼굴만 봐도 누구나 알았다. 얼굴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고, 특히 광대뼈 기울기나 눈 모양에서 티가 났다. 당국에서는 파오라는 사실 자체가 범죄는 아니라고 늘 주지시켰다. PACT는 인종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애국심과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라고 대통령은 늘 말했다.
p.110 중국을 연구하거나 일본 설화를 찾는 일만 위험한 게 아니었다. 그처럼 생긴 외모는 늘 위험했다. 그의 어머니의 자식이어서 여러 방식으로 위험했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늘 알았고 늘 대비했고 자기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늘 예민한 상태로 있었다. 아버지가 두려워한 것은 어느 날 누군가 버드의 얼굴에서 적을 보는 일이었다. 혈통이든 행동이든, 누군가 그를 어머니의 아들로 보고 빼앗아가는 일.
미국은 여전히 미국이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위기"가 있었다. 길고 익숙한, 설명할 수 없이 체제 자체에 내재된 침체. 어쨰서인가. 논리적인 동물, 인간은 이유를 찾았다. 아니, 누군가 말했고, 그것은 이내 사실이 되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가 깔고 앉은 권력 때문이 아니다. '우리' 중에 '우리가 아닌 자'가 있다. 그들이다.
마땅히 하등할 '그들'이 감히 불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은 원흉이자 적이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불행할 리가 없다. 어제의 세계가 이렇게 무너질 리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 우리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좀먹고, 훔쳤기 떄문이다. 사악한 자들. 본래적이고 선명해야 할 경계가 흐려졌기 때문이다. 오래된 혐오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애국시민을 위한 정의로운 국가'라는 믿음이 정의를 집어삼켰다.
p.81 아니야, 우린 책을 불태우지 않아. 여기는 미국이야, 그렇지? 그녀는 그를 보며 눈썹을 추켜세운다. 진심일까, 아니면 비꼬는 걸까? 버드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우린 우리 책을 태우지 않아, 그녀가 말한다. 재생지 재료로 만든단다. 훨씬 문명화된 거지, 안 그래? 갈아서 재활용해 화장실 휴지를 만들어. 여기 없는 책은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의 엉덩이를 닦는 데 쓰였을 거야.
p.229 우린 이게 다 누구 때문인지 알아,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봐. 우리가 불황을 겪으면서 제일 잘사는 게 누구지? 사람들은 단호히 동쪽을 가리켰다. 중국의 GDP가 얼마나 올랐는지,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보라고. (...) 누군가 '위기'는 중국 짓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조작과 관세와 환율 하락 때문이라고. 그들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싶어한다고. 우리 조국을 빼앗고 싶어한다고.
순수하고, 단일하며, '국가'가 모든 믿음과 가치를 독점하는 사회. 그것이 PACT의 이상이자 유일하게 허용되는 '정상'이다. 그를 위해 '무해하고 충성스러운' 이들을 '위험분자'로부터 격리한다. 의심스럽지 않기 위해 서로를 경계해야 한다. 복종하라. '우리'는 다시 위대하고 강해질 것이다. 모든 분노와 두려움을 '그들'에게 쏟으라.
이 이야기의 가장 끔찍한 점은,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대단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저 주위를 둘러보고, '일어난 일'을 되짚기만 해도 선명히 드러난다. 과거가 반복되고 있다. 여전히 유일한 동력이 되는 혐오, 배제, 위기의 촉발 혹은 재점화-방화.
p.227 Krei는 분리하다라는 뜻이래, 그녀가 읽는다. 판단하는 거지. 체와 비슷하네, 이선이 말했다.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떼어내는 거니까. 그래서 krisis는 더 좋든 나쁘든 결정을 내리는 순간을 뜻한대.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섬세한 흉골 라인을 따라가 목 아래 움푹 들어간 곳에서 원을 그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지 결정하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p.305 처음 있는 일인 줄 알았어요? 늙은 여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거릿은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배우기 시작했다. 태양 아래 새로운 일은 없다. (...) 오랜 의사를 가진 아동 납치는 각각 핑계는 다르지만 이유는 같았다. 가장 소중한 것의 몸값을 치르는 일이 가장 큰 처벌이 될 수 있으므로. 닻과 정반대되는 개념이었다.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을 뿌리 뽑으려는 시도, 어떤 이질성은 침범하는 잡초처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인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사라진 엄마의 흔적을 찾아 나선 노아는 균열에 도달한다. 허름하고, 형편없이 연약한 시도에. 해야할 일이 있어. 돌아오기 위해 떠나야 해. 말하기 위해, 들어야 해. 어떤 말은 심장에 가닿는다. 머리보다도 먼저, 부서짐과 빼앗김의 감각으로. 추천사처럼, 이것은 단지 소설이 아니다. 혁명이다. 동시에, 실패이자 현실이다. 좌절이다.
허구가 현실을 좀먹을 때, 현실이 허구로 검열되어야 할 때, 시대는 경고가 된다. 응답하라고, 지금이어야 한다고. 들어봐. 일이 벌어졌고, 난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들어봐. 내가, 생각해봤어. 그들이 이곳에 있었음을 기억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증언하기 위해. 우리의 잃어버린 심장을.
p.371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녀는 그래야 한다고 뼛속 깊이 느낀다. 반드시 직접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증언. 임종 지키기.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기. 어떤 것들은 목격되어야 한다.
p.374 그녀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이름보다 더 많은 걸 기억해주길 원한다. 그들의 얼굴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 일어난 일보다, 그들이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간단한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 각자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명단 속 이름이 아니라 다른 누구와도 다른 한 명의 사람으로.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