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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평점 :
아찔하게 솟아오른 고층 빌딩, 쉼없이 사람이 오고가는 곳, 길 하나 건너 맞닿을 듯한 온갖 군상들... 이 모든 것들은 일견 희망을 닮았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일상, 기회가 있다는 믿음, 삶은 어떻게든 계속되리라는 확신을. 과연 그러한가? 쇠락한 도시의 죽어가는 건물에도 사람이 산다.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사람의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느끼는 사람들, "진짜같은 모조품" 같은 사람들, 어느 때보다 사람이 만들어낸 곳에서, 수많은 인파 속에서 살아가지만 도리어 사람됨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에게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단지 하루의 연속이 아닌, '이어지는 여정으로서의 삶'의 가치를 그들에게 묻는다면.
p.37 여자친구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지금으로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자신과 무관하게 느껴졌다. 인생이라는 파도가 그를 기슭으로 밀어주었고 모래사장도 다 헤치고 지나왔지만, 이제 물으로 올라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자신의 두 발이 지느러미로 변해버렸음을 알았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잃고 말았다.
p.128 "이것 봐요. 똑같죠? 이것도 똑같죠? 제일 싼 게 2,980 위안이잖아요. 우리 신발은 마크만 없어요. 공장에서 뒤로 빼돌린 거니까. 이런 물건은 전문가가 더 잘 알아. 재질이고 디자인이고 아주 똑같거든." 예메이리는 자신도 카피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디자인도 재질도 똑같지만 상표가 없어서 한밤중에 창고에서 몰래 빠져나와 거리의 싸구려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
공중다리처럼 이야기 곳곳을 잇는 것은 어쩌면, 삶보다는 죽음이다. 낡고 부서진 건물 안에서, 몸 하나 간신히 돌릴, 집보다는 방에, 그보다는 차라리 공간에 가까울 곳에 살아가는 이들, 마음이 부서지고 희망이 부서진, 빛 꺼진 사람들. 몸과 마음이 죽어버린 존재들. 죽어가는 건물. 시간이 죽어버리는 곳에도 사람이 있다.경제활동의 주축, 끊임없이 소비하고 또 갈아치우는 이들, 어쩌면 그들 자신마저 소모되고 폐기되는 사람들이 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느 때보다 가까이 살지만 또 어느 때보다 고립되어, 서로를 모르고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표상과도 같은 마천대루, 한때는 희망이었고 이제는 계급사회의 총집합이 된 곳.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보루, 또다른 이에겐 그저 공간일 뿐인 그곳에 사람이 있어 맥이 뛰고 길이 흐르는 곳곳에 가득한 무형의 것을 무엇이라 말하면 좋을까. 이를테면, 정념이랄지. 체념과 증오, 불신과 위선, 휘발되고 응어리지는 것들 또한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p.284 편의점만 있어도 거의 모든 생활이 가능해요. 전자기파와 인스턴트가 모든 것을 값싸고 얄팍하게 만들었어요. 우리 같은 점원들처럼요. 난 편의점에서는 뭐든 다 할 수 있지만 다른 곳에 가면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우리가 배운 이런 기술은 전문적인 곳에 가선 전혀 쓸모가 없어요.
p.288 난 스물일곱 살이에요.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다면 여기서 점장까지 해도 평생 집 한 채 살 수 없어요. 이 빌딩에 있는 작은 원룸조차 살 수 없을 거예요. 사실 집을 사는 건 꿈도 안 꿔요. (...) 요즘 세상은 돈과 소비가 전부잖아요. 너도나도 편하고 풍족하게 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요.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면 팍팍한 삶도 전부 잊을 수 있고요.
제각기의 입장에서 보는, 단편적인 진실은 배경이 된 마천대루를 닮았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는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조각나고 가려진 이야기, 훔쳐보고 엿듯는 관음의 사회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일까. 아찔하게 솟아오른 현대화의 정점같은 그곳에서, 각각의 공간에 갇혀 서로를 알지 못하는 동시에 판에 박은 듯 비슷하고 이중적인 복제들의 삶을 그려내는 이야기가.
모두가 극히 좁은 시야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포착하는 도중, 이해와 이해와 어긋나는 순간이 드러난다. 일순 겹쳐 드러난 진실은 정답도 통쾌함도 아닌 그저 외로움과 비극의 또다른 면일 뿐이리라. 그곳에서 어떤 죽음은, 아니, 어떤 죽음도, 비극이 되지 못한다. 영원한 미완으로, 슬픔으로 남지도 못한 채 그저 흩어져버린다.
p.289 내가 원하는 게 뭘까요? 어떤 삶을 살아야 희망이 있다고 느낄까요? 더 고민해봐야죠. 전 인류의 운명이 내 인생과 단단히 연결돼 있으니까. 그래서 중메이바오의 죽음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계속 여기서 일하다 보면 사건이 해결되는 날이 있겠죠. 어쨌든 난 그녀를 기억하고, 그녀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어요. 이 냉랭하고 비정한 도시에선 시간이 모든 걸 집어삼키고 누가 죽든, 누가 사라지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지만, 난 달라요.
p.311 열심히 사회운동을 하며 시위와 집회마다 참여하고, 약자의 권익 쟁취에 내 미약한 힘을 보태려고 해요. 남을 위해 뭐라도 한다면 내 인생이 헛되이 흘러 가는 느낌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헛수고예요.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계속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요. 신념이랄까? 난 그런 게 없어요. 내겐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절박한 일이 없어요. 그래서 현장을 떠나면 또다시 공허함이 밀려와요.
독자는, 이미 마천대루의 어느 방 한 칸에서 잠들고 먹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할지 모른다. 수많은 중메이바오의 삶을 모독하지 않으면서 그를 애도할 수 있는가. 작중에서 말하듯 세상은 오래지 않아 그의 죽음을 잊을 것이다. 빈 자리는 금세 팔려나가고, 채워질 것이다. 도시가, 건물이 그를 집어삼킨 것처럼.
작가는 "죄와 벌, 사랑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 닫힌 문 너머의 고독을, 비밀을, 삶을 좀먹고 어떤 가능성을 뿌리채 닫아버리는 그것을 타살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모르는 이의 얼굴을 마주하기를 바란다. 소모품 같은 삶, 불가해한 기호처럼 스쳐지나가는 존재를. "그녀의 죽음이 우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누구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므로.
p.63 중메이바오는 양쪽 사이를 지나가며 이것이 자기 인생의 은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고급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아닌, 절대로 연결이 불가능한 두 세계를 잇는 중간 매개체 같았다. 이것이 그녀 자신을 마모시켜 영혼의 어떤 곳이 망가진 듯 고장 나버렸고, 이런 고장 난 느낌이 그녀로 하여금 오랫동안 자기 개성도 없이 부유하게 했다.
p.351 "내가 살아 있길 바라는 것과 살아 있다는 희열을 느끼는 건 별개예요. 난 살아 있는 희열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어요. 생명은 가장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거예요. 날 움직일 수 없고, 고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내 마음을 흔들 수도 없어요. 내 몸속에 그런 게 있다면, 아직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도서제공: 인플루엔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