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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역사 - 중세부터 현재까지 혼자의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들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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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여성에게 필요하다고 말해졌던, 남성에게는 무슨 생필품이나 되듯 여겨지지만 여성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자기만의 방" 이전에 그것이 대두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있었다. '자기'라는 개인, '방'이라는 분리된 공간, 무엇보다도, '자기만의'라는 사적 영역의 개념이다.
오늘날 너무도 자연스러운"사생활"의 역사는 제법 오래되었다. 중세 런던의 "방해죄 재판소"에 줄소송이 끊이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한뎃잠을 자던 집, 길거리에 면한 창문, 온동네 사정이 훤히 까발려지던 공동체 중심의 시대에도 사생활의 자유는 적극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p.16 자기만의 공간을 주장하는 데는 세 가지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둘의 대화가 보호되는 영역이 필요했다. 둘째, 개인이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성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외부 권력의 침해로부터 생각과 행동을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p.58 개인사를 절대적인 비밀로 하는 것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았고 용납되지도 않았다. 상속이라는 중요한 영역에서 유언 처리는 관습에 따라 이뤄졌으며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사적인 이유로 누군가를 유언장에서 뺄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가 없는 개인은 즉시 의심을 받았다.
근대까지도 런던에서는 타인과의 경계에 있어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방식의 규범을 요구했다. 이는 사용인과 피고용인, 주인과 하인, 창문 안팎과 마당, 심지어 시선처리의 영역까지 촘촘하게 짜여있었는데, 추측컨대 상대와 나의 '품위'를 보호하는 일종의 완충재, 문화적 울타리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때로는 사색과 은밀한 대화를, 때로는 신분과 성별의 장벽을 보호하기 위해.
신분제가 무너지고 도시생활이 보편화됨에 따라 '사생활'은 위기에 직면했다. 거대한 외부의 적에 맞서 일체화된 국민국가를 구축하고 '내부의 적'을 색출하기 위해 안보의 이름으로 단속되었던 것이다. 그에 맞서 각종 선언과 협약의 이름으로 개인과 국가-체제는 대립과 충돌을 반복해왔다.
p.109 정부는 점점 힘을 키워가는 시민의 공적 영역에 위협을 느끼고 국가 원수의 재량권에 집착했다. (...) 모든 동네와 모임의 장소에 첩자가 파견되고 반체제적인 문학 작품의 생산과 소비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인신보호가 중단되고 우편 검열이 실행되었다. 프랑스에서 새로 생겨난 공공 영역은 모두 국가 개입에 노출되었다.
p.165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 프라이버시는 비공식적인 열망에서 기본적인 기대로 바뀌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은 누구도 프라이버시를 무단으로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으며 1950년에는 유럽인권협약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생활과 가정생활, 가정과 서신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근현대의 격동,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과 세계대전 이후 냉전 사회에서의 국가감시체제 등에서 알 수 있듯 개인에게 있어 프라이버시, 사생활이 당연하게 보장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웃과 국가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자기만의 영역'을 쟁취하려는 분투는 언제나 자본과 계급, 사회환경에 밀접하게 결부된 것이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소셜미디어 속 자아와 공간-여유-자본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을 중시하고 자발적 고립을 추구하며, 소셜미디어가 이전의 사회활동을 대체해가는 추세이다. 침해받지 않는 절대 영역으로서의 개인이 너무도 당연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앞선 사례에서 드러나듯 '어디든 제집처럼 드나들던' 추억도 어느정도는 환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 사생활 만연의 사회는 정말 '사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p.114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자기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중심에는 폐쇄된 가정이 있었다. 이제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이라는 단위를 통해 신과 일체가 되도 록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었다.
p.225 프라이버시의 종말 선언은 과거와 급격한 단절을 암시했다. 과거에는 자신의 사생활 정보에 대한 통제가 절대적 특권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었는지 아닌지의 결과는 물리적 환경, 통신 시스템, 법적 구조, 친밀한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그 공통분모는 프라이버시에 수반된 엄청난 노동이었다.
저자는 추억과 추측 사이에서 역동하는 '사생활'의 개념이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소통, 뉴미디어의 등장과 국가 대 개인의 영역을 넘나들며 새로운 갈등의 중심에서 체제적 통제 대상 또는 가상 자아의 영역으로 변화하고 확장되어온 역사를 추적한다.
낯설고 먼 타자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며 '알지도 알려지지도 않을 자유'를 외치는 현대 독자들에게, 이 '프라이버시'의 변천사를 톺아보고 미래를 가늠해보는 경험은 틀림없이 낯설고 즐거우리라 믿는다. 바라건대, "자기만의 방" 또는 낯선 타인에 둘러싸여 꽁꽁 가려 읽기를, 또, 적당히 먼 서로에게 이 즐거움을 나누기를!
p.174 프라이버시의 핵심은 사람들 간의 실질적인 상호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정보를 통제하는 힘에 있다. 현재 전통적 노동계급 공동체가 지닌 매력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친숙함이다.
p.240 사생활의 보호가 전 세계적으로 인식이 퍼진 동인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프라이버시가 일종의 인권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프라이버시가 언론의 자유와 같은 다른 소중한 가치와 충돌할 때 프라이버시의 힘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두 번째 동인은 디지털 혁명이었다. 디지털 혁명의 영향은 처음부터 막연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인식되었다.
*도서제공: 더퀘스트